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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23, Dec 2016

라이언 갠더
Ryan Gander

웃긴 놈, 똑똑한 놈, 이상한 놈

솔직히, 지난 2012년 ‘도쿠멘타(Documenta(13))’의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여전히 강렬한 경험이 하나 있다. 메인 전시장 프리데리치아눔(Fridericianum)에서의 일이다. 18세기 귀족과 영주의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공간은 온통 하얀 벽만 있을 뿐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상태였다. 그때 어디선가 기분 좋은 미풍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날려 얼굴을 간질였다. 이것이 유일한 작품, 'I Need Some Meaning I Can Memorise(The Invisible Pull)'이었다.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어떤 의미가 필요하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제목처럼, 이 작품은 라이언 갠더(Ryan Gander)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지는 어떤 경험이자 의미로 남았다.
● 이가진 기자 ● 사진 리슨 갤러리 & 라이언 갠더 스튜디오 제공

'Dominae Illud Opus Populare' 2016 Animatronic eyes, sensors 35×35×17.5cm(13 3/4×13 3/4×6 7/8 in.) Photo: Jack Hems ⓒ Ryan Gander; Courtesy Lisson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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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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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더는 카셀에서 또 다른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 편집 중이던 『artists cocktail(2013)이라는 아티스트 북(artists book)의 아이디어를 활용, 동료작가 마리오 가르시아 토레스(Mario García Torres) 그리고 주류회사와 협업해 실제로 칵테일 시현에 나선 것. 말 그대로 작가 여러 명의 칵테일 제조법을 모아 책으로 만드는 프로젝트가 완성되기에 앞서 13가지의 레시피를 골라 ‘카셀 도쿠멘타(13)’를 찾은 이들이 직접 맛볼 수 있게 했다. 이 ‘이벤트’는 이브 클랭(Yves Klein) 1958년 아이리스 클레르 갤러리(Iris Clert Gallery)에서 열린 <Le Vide>전의 오프닝에서 메틸렌블루가 들어간 칵테일을 대접했다는 일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갠더의 프로젝트에선 로렌스 와이너(Lawrence Weiner), 리암 길릭(Liam Gillick), 데이비드 슈리글리(David Shrigley), 산토 톨로네(Santo Tolone) 100명의 작가가 자신만의 칵테일 제조법을 공개했다. 


말린 꿀벌, 작가의 눈물 등 기상천외한 재료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실 수는 없고,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칵테일도 등장한다. 관람객들은 작품 한 잔을 맛본 셈이다. 그는 예술 작업의 개념을 새로운 칵테일 메뉴 개발에 비유하기도 한다. 배경이 되는 이야기와 문화적 레퍼런스, 미적인 세부사항 등을 고려해 재료를 고르고, 유대관계와 충돌을 만들어내는 계획과 장치들을 칵테일 만드는 것처럼 섞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작가들에게서 칵테일 레시피를 요구하고 모으는 일은 꼭 컬렉터와 같고, 결과물인 책은 그 자체로 예술품 관리 위원 역할을 한다. 이처럼 작품에 일상적인 요소를 끌어들이거나, 역으로 일상 속으로 작품이 개입하게 하는 것은 갠더가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다.




<More really shiny things that dont mean anything> 2012

 Stainless steel 275cm diameter(108.3 in diameter)

 Photo:Ken Adlard  Ryan Gander; Courtesy Lisson Gallery




그에게는 ‘개념의(conceptual)’란 부연이 꼭 붙는다. 개념미술이 이미 끝나버린 특정 사조에 불과하다고 여기든, 현대미술은 넓은 의미에서 전부 개념미술이라고 말하든, ‘개념미술가’라고 지칭되는 이들은 예전보다 확실히 줄어들었다. 어쩌면 ‘개념’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주는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라이언 갠더는 설치, 조각, 사진, 텍스트, 복제품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예술과 문화 그리고 개인의 경험에 관해 딱히 결론이 나지 않는 내러티브를 재치 있게 표현한다. 아니 ‘표현한다’와 ‘이야기한다’의 사이를 오간다. 마치 재담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시각화하는데 능하다. 


겉으로 쓱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부지런히 생각하고 파고들어야 참뜻을 알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개념미술가다. 이런 그를 ‘다원적(multidisciplinary) 예술가’라고 꾸며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카테고리 혹은 분명한 정의를 찾으려고 하는 순간, 닿을 것 같았던 그의 작품은 저 멀리 도망가 버린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갠더가 ‘예술’ 혹은 ‘개념미술’을 떠올렸을 때 괜히 긴장하며 침을 꼴깍 삼키게 하는 그런 작품이 아니라, 흥미로운 놀이나 대화의 소재로 삼을 수 있도록 작업에 접근한다는 점이다. 





<I be...(xi)> 2016 Antique mirror, marble resin

 215×125×25cm(84 5/8×49 1/4×9 7/8 in.)

 Photo: Jack Hems  Ryan Gander; Courtesy Lisson Gallery   



 

실력 좋은 이야기꾼들이 그러하듯, 갠더가 다루는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We never had a lot of around here>(2010)는 지름 3센티가 채 안 되는 동전 하나를 떡하니 바닥에 붙여놓은 작품이다. 2유로짜리 실물 사이즈와 동일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액면가는 25유로, 발행일자는 2036년이다. 참고로 현재25유로는 동전도, 지폐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54회 베니스비엔날레(54th Venice Biennale)’의 본 전시 <ILLUMInations>에 출품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드넓은 아르세날레(Arsenale)에서 자칫 스쳐 지나가기 십상이었다. 시간여행을 하다 불시착해 현재에 갇혀버린 여행자처럼 길 잃은 동전은 꼼짝 않고 자신이 발견되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2011년 당시는 그리스를 필두로 유로존의 재정위기가 극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그 작은 가상 동전은 근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인플레이션을 경고하는 작가만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찾기도 힘든 이 작품과 달리 <Magnus Opus>(2013)를 바라볼 땐 의뭉스러운 눈길을 감내해야 한다. 센서가 부착된 애니메이션 형태의 커다란 눈은 슬쩍슬쩍 관람객을 향해 움직인다. 게다가 사람의 움직임에 반응해 진한 눈썹으로 나름의 감정을 표현한다. 예컨대, 지루함, 화남, 행복함, 궁금함 등을 표정으로 만들어내는 식이다. 이러한 경험은 백색 공간 안에서 관람객이 일방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던 전통적인 공식을 깨버린다. 1980년대 이후 많은 작가가 다뤄온 ‘응시’ 혹은 ‘시선’을 전복시키는 문제로 예술적 도그마에 도전하는 것이다. 2016년에는 <Dominae Illud Opus Populare>라는 <Magnus Opus>에 대응하는 여성 버전을 공개했다. 


같은 형태의 눈에 긴 속눈썹을 더했고, 눈썹은 조금 얇아졌지만, 그 원리나 표현하는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세 유럽 연금술사들이 꿈꿨던 궁극의 물질,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을 만드는 행위를 일컫던 말이었던 <Magnus Opus>는 문자 그대로는 ‘위대한 걸작’을 의미한다. 하지만 갠더의 ‘걸작’은 오히려 거창한 의미를 조롱하듯 장난스러운 모습이다. 어쩌면 작가의 눈을 작품 뒤에 숨기고 자신의 작업을 판단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을 관찰하는 것일 수도 있다.





<Post-life romantic, or Trying to make it on hard work and risk alone> 

2016 Bronze, wood, acrylic on canvas Dimensions variable 

 Ryan Gander; Courtesy Lisson Gallery

 




사실 이러한 작업들이 형태면에서 정교하고 섬세하지 않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효과적인 그릇을 찾기 위해 그는 항상 새로운 오브제, 장치, 방식, 재료 등을 고민한다. 때로 다른 이의 손을 빌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어린 딸, 올리비아 메이 갠더(Olivia May Gander). 건네준 노트 한 권을 찢고, 구멍 내고, 접고, 잘라서 돌려준 다섯 살 난 딸의 ‘작업’에서 자유롭고 순수한 예술 창작의 과정을 포착한 그는 페이지를 일일이 스캔하고 꼼꼼하게 배치한 것을 액자에 끼워 한눈에 전체적인 형상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원작과 그것을 다시 배치하는 과정을 거치며 이 아티스트 부녀는 신개념의 협업 관계로 거듭났다. 모더니즘 선배들의 레디메이드(readymade)가 기존의 오브제를 활용한 것이었다면 갠더는 딸의1차 창작물을 오브제 삼아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 작업을 필두로 소녀 작가는 회화, 조각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인 에바 샤러(Eva Scharrer)는 “갠더는 땅속으로 줄기를 뻗는 리좀적인 방식으로 개념을 뻗어가기에 다양한 접근 방식을 허락하지만, 단정적인 해석에는 저항한다. 그는 용어와 정의를 언어적으로, 공식적인 의미에서도 해체한다. 이는 동시에 완전한 접근, 이해, 수행성을 원하는 우리의 욕망을 저버리며 당혹스럽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해석은 만약 어떤 예술작품이 단 하나의 의미만 갖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는 작가의 말과도 궤를 함께한다. 





Installation view of <I see straight through you> at Lisson Gallery New York 

2016 Photo: Jack Hems Ryan Gander; Courtesy Lisson Gallery




저자의 죽음을 주장했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의 ‘열린 텍스트’ 개념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대목이다. 각양각색의 해석을 요구하는 갠더는 특히 설치 작업을 통해 사실과 허구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여백의 지점에서 발생 가능한 사건을 다루는데에 전문이다. I is…’와 ‘I be…’ 시리즈는 은폐되고, 가려진 모습을 통해 사물의 보이지 않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의자, 거울 등을 하얀 천 형태로 부조한 대리석 수지로 가려 마치 이사를 앞두고 있거나, 창고에 쌓여있는 혹은 버림받은 공간에 덩그러니 남겨진 사물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갠더의 작품 대부분은 이렇게 모종의 단서만을 남긴다. 시간성, 연극성같은 미학적 속성들, 내러티브 장치로서의 유머, 예술시장, 닥쳐올 미래의 상황 등 대개 배경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몸통을 이해하기 위해선 눈치 빠른 탐정처럼 작가가 현장(전시장)에 남겨둔 흔적에 집중,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에 더해 얼마간의 상상력은 이해의 요철을 메울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작년 11월부터 올해 초까지 열렸던 갠더의 미국 첫 번째 개인전 제목은 <Make Every Show Like Its Your Last>였다. 비장하기까지 한 제목에 웃음이 나왔다. 이런 능청스러운 진지함 속에 숨겨두었을 수많은 장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슬며시 고쳐 썼다. ‘보라. 이것이 마지막 전시인 것처럼’이라고.  





프로필

Ryan Gander Photo: Freeman Abayasekera 

 Ryan Gander; Courtesy of Lisson Gallery



 


1976년 영국 체스터에서 태어난 라이언 갠더는 동시대 개념미술의 총아다. 장르를 넘나드는 특유의 방식으로 관람객을 미궁에 빠트리는데, 특히 조각과 설치를 주특기로 한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파리 팔레 드 도쿄, ‘베니스 비엔날레’와 ‘요코하마 트리에날레’ 등 굵직한 미술관과 프로젝트를 통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골드스미스 대학교, 로열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2012년에는 미국 월간지 『Art+Auction』이 선정한 ‘미래에 가장 소장가치가 있는 50인의 작가’ 목록에도 이름을 올린 바 있다. 현재 서퍽과 런던을 오가며 활발하게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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