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진리를 향한 무욕의 희망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나는 사회라는 집단 공동체의 틀 안에서 인류가 이룩해 온 기술발전의 흐름은 산업화라는 반환점을 돌아 쌓아 올린 바벨탑을 견고히 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현재의 우리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삶’, 그 찰나의 순간 속에서 과거의 역사에 살았던 이들보다 훨씬 많은 변화를 빠르게 겪어내어야 했다. 이러한 사회의 내적 구조 속에서 감각되는 수많은 시각적 정보는 더 이상 우리를 안정적인 상태에 머물게 허락하지 않고, 최대한 그 성장의 속도를 직접 체감하도록 사람들을 내버려 둔다. 아마도 우리네 도시의 ‘풍경’은 이 같은 급속도의 변화를 현실 속에서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익숙한 수단 중 하나일 것이다. 

플레이스막에서 열린 이해민선의 개인전에서 마주한 작가의 작업 가운데서 <덩어리입니다>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모서리는 있으나 꼭짓점과는 다르고 서 있으나 하늘에 포함되지 않는다. 위태롭게 있으나 사라지지 않고 절정은 없으나 포즈는 있다.”(작가 작업 노트에서 발췌, 2017) 나는 이 문장을 대하면서(거의)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대 구조의 속도를 내가 어떻게 자가-통제할 수 있을지를 상상해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그 변화의 속도에 나를 맞추어 나가거나 혹은 그 속도를 억지스럽게 거슬러 ‘나의 시간’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투쟁할 수도 있다. 작가의 이번 전시 제목 ‘덩 어 리’는 이러한 복잡한 환경의 부산물이 뒤섞여 만들어낸 하나의 심상적 물질로서 다가온다. 그러나 이 덩어리는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선택 중 하나를 택함으로써 얻어지는 물질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이에서 작가가 양측을 바라보는 관조적인 시선, 그것에 더 가까이 있는듯하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작품들은 회화와 드로잉 그리고 작가의 단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몇몇의 짧은 필기들이다. 이들이 담고 있는 이미지는 도시 외곽에서 주로 발견되는 토지 개발의 현장을 묘하게 암시하는 흙색의 봉우리들이며, 잠시 그 안에 공존하고 있는 사람의 존재를 연상시키는 인공 물질로 뒤덮인 자연물이다.

<절정 없는 곳_ 포즈>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116.6×90.7cm

작가는 이번 <덩 어 리>전에서 조금은 미묘하게 달라진 자신의 시선을 투사한다. 발견된 풍경을 재연하는 <절정없는 곳>은 인공물을 덮어주는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함께 조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심상을 그려내는데, 이제 작가는 대상의 물성, 그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이러한 풍경을 끌어안고 있는 상황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자연과 인공이 혼재하는 이미지는 자연도, 인간도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의 상황을 포용해야 하는 현상, 일종의 ‘화해 지점’을 상기시킨다. 이는 물질과 물질 간의 상호 충돌에서 발현하는 상상의 내러티브를 다루었던 작가의 시선을 자기 인정, 다시 말해 스스로 자연과도, 인공과도 타협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에게로 돌려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잘려진 봉우리와 이를 재현하는 흙덩어리들을 담아내는 <봉우리>에서는 이와 같은 작가의 사유가 더 구체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각각의 평면에 등장하는 끝이 잘려진 봉우리들은 마치 서로 다른 개별의 자아들이 설정하는 그들만의 개인적 성취를 상징하는 듯 솟아있다. 이는 모두가 공유하는 일반적 척도의 수준에서 타자 혹은 다수가 통상적으로 인지하는 만족의 정도를 피동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바라보기에 진정으로 만족하는 상태를 존중하며 각자가 자신만의 봉우리를 만들어 나갈 것을 역설한다.

전시를 관통하는 이해민선의 개념은 서로 다른 물질과 물질이 맞닿는 특정한 지점의 조율을 시도함과 동시에 개별의 물질 자체를 인정하는 태도를 아우른다. 그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불특정 다수를 위한 천편일률적 이치를 떠나 각각의 물질 그 자체가 곧 진리가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자세,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작가로서 큰 방향성이나 교훈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비록 그것이 조악할지라도- 있는 보이는 그대로의 특성을 받아들이고, 현상에 순응하며, 대상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작가의 방법론은 여전히 꿈틀대고 물컹거리는 급박한 변화의 조각들을 뭉쳐내기에 유효하게 작용한다. 지속적으로 주입 당하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기를 소망하는 그의 바람처럼, 이해민선의 이야기는 우리를 향해 외치는 강한 어조의 성명과는 차이가 있다. 단지 물질이 물질로서 받아들여지고, 그 안에 진리가 있으며, 개인의 선택에 있어서 어떠한 제약도 강요당하지 않는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이것이 작가와 우리 사이를 부유하는 담박한 명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