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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36, Jan 2018

허빈 앤더슨
Hurvin Anderson

기억과 풍경의 회화적 재구성

힘 있는 그림 앞에 서면 행위의 폭이 넓어진다. 단순히 그림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2차원의 화면이 신기하게도 오감을 자극하고, 그림을 보는 각자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작품을 받아들이는 여러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거기엔 작가와 나누는 가상의 대화, 숨은 의미를 찾는 자문자답도 포함될 것이다. 압도적인 크기, 화려한 색상 내지는 현란한 구도 같은 것들만이 그림에 힘을 주는 요소는 아니다. 보기엔 아주 정적이고 차분한 작품도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을 내뿜는 경우가 있다.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혹은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그런 그림말이다.
'Maracu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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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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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빈 앤더슨(Hurvin Anderson)은 가족과 공동체의 역사가 담긴 추억과 경험의 풍경을 그린다. 그리고 그 풍경의 원형이 되는 곳이 바로 캐리비안이다.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발견’한 이 신대륙은 대항해시대 유럽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의 중심에 놓였던 땅이다. 우리에게도 해적이 나오는 영화나 워터파크 덕분에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많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여느 이주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인의 후예이면서 카리브 해 태생 사람들의 일부 무리가 영국으로 이주해 새로운 터전을 일궜다. 앤더슨이 태어난 버밍엄도 이런 아프리칸-캐리비언(African-Caribbean)이 여럿 모여 거주하는 지역 중 하나다. 작가는 자메이카 출신 부모를 뒀지만, 자신은 영국인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에게도 캐리비안은 ‘저 다른 곳(that other place)’인 셈이다. 그런 그가 사진과 기억에 기대어 ‘다른 곳’의 풍경을 집요하게 캔버스에 옮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사물을 적절한 관점에서 보기 위해 거리를 두고, 머나먼 심연들과 관대하게 연결하는 것은 이해의 한 부분이라고 설명한 적 있다. 특히 “이해라는 종류의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 속에서 우리의 태도를 취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상상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부의 나침반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가 미치는 한에서만 현대인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Interior IV> 2005

 



비록 날 때부터 부대끼며 자라지 않았어도 내력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게 되고, 쉽게 외면할 수 없는 장소들이 있다. 마르셀이 마들렌 한입에 잃어버린 시절을 되살렸듯, 기억을 만들고 환기하는 ‘내부의 나침반’은 언제 어디로 방향을 가리킬지 알 수 없다. 아주 막연한 연결감조차도 정체성에 관해 깊이 고민하거나, 남다른 예민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라면 유달리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대학 졸업 후 2002년 트리니다드의 레지던시에 머물렀던 2개월은 앤더슨이 그려내는 열대 이미지의 실체를 추측하게 하는 디테일들을 획득하는 시간이었다. 캔버스 속 이발소, 인적 없는 길가, 텅 빈 테니스장, 바닷가의 장면들은 분명 구체적인 어떤 곳을 가리키면서도 동시에 매우 추상적이다


그곳에서 작가는 이방인이었지만, 태생적으로 친숙함을 느꼈을 테고 섣불리 발들일 수 없는 망설임은 선연한 거리감으로 화면에 그대로 드러난다. Country Club’ 시리즈나 ‘Welcome’ 시리즈에서처럼 그는 종종 풍경 위에 장식적이거나 추상적인 패턴으로 덮어 경치가 온전하게 보이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을 취한다. 런던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붙잡은 채, 진정으로 그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영국적인 색채나 배경을 더했다. 서로 다른 시간대와 공간은 한 화면 안에 자연스레 녹아 들어갔다. 그래서인지 마치 현실과 환상의 경계 어딘가에 있는 중간 지역 같은 인상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앤더슨은 개인적이면서 민족적이고, 문화적이고 인류학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실상 그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은 오히려 회화 그 자체다




<Flat Top> 2008

 



이민, 이주, 인종의 문제에 천착하는 많은 작가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발언에 가까운 직설적인 작업을 한다면, 앤더슨은 그보다는 회화적 정공법을 견지해왔다. 구상적인 풍경과 모더니즘적인 추상이 결합된 듯한 표현법부터 독특한 색의 활용까지 그의 고민은 어쩌면 그림 그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로 점철되어 있는 듯하다그는 종종 몽환적인 풍경 회화로 이름을 떨치는 피터 도이그(Peter Doig)와 비교되기도 한다. 작품 하나하나를 두고 비슷한 점을 뜯어보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실제로 도이그는 1990년대 중반에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Royal College of Art)에서 앤더슨을 가르치기도 했으니 분명 스승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2002년 이후로 도이그는 트리니다드에 둥지를 틀고 작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바로, 그 트리니다드 말이다피터 도이그 외에도 18-19세기 풍경 화가였던 컨스터블(Constable), 임파스토 기법으로 도톰한 질감의 화면을 완성한 프랑크 아우어바흐(Frank Auerbach) 등 영국 선배 작가부터 1960년대 하드 에지(hard-edge) 추상 화가들까지 앤더슨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그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한 참조 자료로 여겨지는 내용들은 미술사 전반에 걸쳐있다. 영리한 작가는 색채, 표면, 구도 등 회화의 기본 요소들에 집중하고, 앞선 이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들을 취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Beaded Curtain - Red Apples> 2010 

  



이렇듯 비단 자신의 인종이나 핏줄, 정체성뿐 아니라 회화가 남긴 유산과 전통에 관한 내용까지도 이 작가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족의 일원이자 개인으로서 시작된 뿌리를 향한 관심을 확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결합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실 세계에서 점유하고 있는 공간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오로지 그림 속에서만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In real life, the space I occupy is not the space where you can do everything that you want, its only in painting that you can do everything you want)”는 작가의 말에서도 그의 삶에 회화가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수차례 전시를 열어온 앤더슨은 한국에선 놀라우리만큼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2013년 하이트 컬렉션에서 열렸던 <세계의 네 모서리(Four Corners of the World)>전에 초대된 7명 작가에 포함됐던 흔적을 겨우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이마저도 당시 전시가 영국 아이콘 갤러리(Ikon Gallery)의 디렉터, 조너선 왓킨스(Jonathan Watkins)의 기획으로 이뤄진 것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국적인’ 그의 작품만큼이나 우리는 그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흔히들 낯선 작가와 맞닥뜨렸을 때는 프로필에 기대곤 한다. 국적이나 성별은 무엇인지, 어느 학교에서 학위를 받았고, 무슨 상을 받았고, 어떤 갤러리 소속인지, 어디 미술관에서 전시했는지 등을 따져 묻는다. 2017년 허빈 앤더슨은 ‘터너상(Turner Prize)’의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Maracus> 2003




설치나 미디어 작품이 득세하는 시대에 요크셔의 페렌스 미술관(Ferens Art Gallery)의 벽에 촘촘하게 걸린 그의 그림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상을 거머쥔 이는 루바이나 히미드(Lubaina Himid)였지만, ‘그림’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은 앤더슨을 향한 지지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터너상’이 나이 제한 (2016년까지 50세 이하)을 폐지하지 않았다면, 히미드는 물론이고 앤더슨 역시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방향으로’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세상은 계속 변한다. 앤더슨도 최근 들어 <Is It OK To Be Black?>(2016)처럼 전작에 비해 다소 적극적으로 흑인 정체성의 문제를 드러내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제목에서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물음표’다. 미래의 그가 이런 정치적인 문제를 어디까지 끌고 나아갈 것인지를 가늠할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던지는 듯 보이는 이 질문은 아마 작가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갑작스레 그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답을 풀어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가 개인의 입장과 예술가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나갈 것인지 궁금해진다.





<Country Club Series - Chicken Wire> 2008




회화는 허빈 앤더슨이 유창하게 구사하는 언어다. 글 쓰는 작가가 섬세하게 단어를 고르고, 문맥을 고민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빚듯 화가도 그림에 담을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말문이 열린다고 해도, 말은 하는 중에 다듬어지고, 제 방향을 찾기 나름이니 그 끝은 열려있다. 대담한 컬러의 병치, 투박한 듯 섬세한 붓질은 어쩌면 앤더슨의 말버릇이다. 보는 이에게 말을 거는 그의 그림은 그래서 힘을 갖는다. 작품을 한창 들여다보던 중에 황동규 시인의 <추억은 깨진 색유리 조각이니>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허전하다/ 다시 감았다가 풀어주며/ 몸 전부를 내어놓을까?/ 깨어지는 색유리의 반짝임과 찌름을 한 느낌으로 지닌/ 저 엉겼다 튕겨 나오는 추억 쪼가리들! 

 

 


허빈 앤더슨

Photo Alex Dimopoulos

 



작가 허빈 앤더슨은 1965년 영국 버밍엄에서 태어나 윔블던 칼리지 오브 아트와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에서 수학했다뉴욕 마이클 버너 갤러리버밍엄 아이콘 갤러리런던 토마스 데인 갤러리 등에서 꾸준히 개인전을 열었고런던 캠던 아트센터 <Making & Unmaking>마이애미 페레즈 아트 뮤지엄에서의 <Poetics of Relation>전 등 여러 그룹전에 참여한바 있다찰스 사치의 컬렉션 리스트에 포함됐으며테이트 브리튼과 영국 정부 예술 컬렉션(Government Art Collection, GAC)에서도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2017년에는 터너상 최종 후보 4인에 오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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