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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3, Jun 2014

정현
Chung hyun

그 무엇이라 부를 수 없는

“엄지발가락은 인체 중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다...발의 기능은 인간이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직립을 위한 견고한 기반을 구성한다…그러나 그의 발로 서서 어떤 역할을 하건, 인간은 가벼운 머리를 가지고 있다…상승하는 것은 가치가 있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인간생활을 상승에 맞추려 한다…인간의 생활에는 불결한 것에서 이상적인 것으로, 이상적인 것에서 불결한 것으로 넘나드는 사실에 대한 분노, 발과 같은 저열한 기관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엄지발가락(The Big Toe)」 중에
● 안대웅 기자 ● 사진 서지연

'무제(Untitled)' 2013 철 12톤(Steel 12ton) 140×140×140cm 작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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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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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말라 비틀어진 조각이 있다. 스스로 지탱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이 조각은 언뜻 인간을 닮아 불길하다. 더럽고 거칠어 보이는 표면은 위험해 보인다. 만지는 순간 부정한 무언가가 마술적으로 전염될 것만 같다. 이 조각이 환기시키는 것은 이처럼 ‘아름답지 않은’ 감각이다. 만약 고전 조각의 이상을 밤하늘의 별에 비유할 수 있다면 바타유를 따라 이 조각을 “엄지발가락”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정현의 조각은 조각의 비천함을 드러내는 조각이다. 조각을 해체함으로써 조각으로 나아가는, 그런 조각이다. 고양시 덕은동 한 촌락. 조선시대부터 살기 좋고 아름답기로 유명했다는 이 마을은 과거 쓰레기 매립지 용도로 쓰였던 난지도의 여파로 오래도록 방치돼 있었다. 아직까지 저개발 상태지만 조용하고 공기까지 상쾌해 작업하기는 딱 좋은 곳이다. 최근엔 그린벨트가 풀린 탓에 투기 열기가 한창인 모양이다. 새로 지어진 조립식 주택이 드문드문 보이며 새파랗고 쨍한 녹색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곳에 조각가 정현의 작업실이 있다. 자연의 숭고함을 뒤로 하고 인간의 욕망을 앞에 둔 채, 정현은 오늘도 작업 구상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이곳에선 아무리 둔한 사람이더라도 정현 작업의 요체를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작업실 뒤에 우두커니 서있는 대덕산이 근작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말라비틀어진, 왜소한 나무 이미지의 기원을 잘 대변한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뒷산 숲길을 산책한다는 작가는 숲 속에서 자연의 치열함이 주는 경이를 발견했단다. “나무들끼리 햇빛을 더 많이 받으려는 경쟁이 인간사보다 훨씬 치열하죠.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워 보이지만 안속으로 들어가 보면 말라비틀어지고 비바람이 불면 고꾸라져서 죽을 수밖에 없어요. 생존과 관련된 긴장감이 항상 감돕니다. 낭만적 풍광이 아니라 사람 사회보다 더 치열하게 투쟁하는 풍경, 그 거친 원시성이 마음을 끌어당기더군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무를 그리게 됐어요.” 그가 조형해내는 앙상하고 메마른 나뭇가지와 풀, 뿌리를 연상시키는 폐철근으로 만들어진 조각의 뭉치는, 그런 점에서 아름답다기보다 추하다. 풍요롭기보다 척박하다. 부유하기보다 가난하다. 




(좌)<무제(Untitled)> 2012 종이에 콘테

(Conte on paper) 53×38.3cm 작가소장

(우)<무제(Untitled)> 2011 종이에 콜타르

(Coaltar on paper) 53×38.3cm 작가소장




드로잉은 어떤가. 감각을 그때그때 쏟아내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다는 드로잉은 대부분 콩테나 콜타르로 후려갈기듯이 그렸다. 뾰족뾰족하고 거칠고 메마른 터치가 특징적으로 드러나는데 딱히 무엇이라 부르기 애매한 형상이다─말하자면 풍요로운 자연이라기보다 오히려 척박하고 황폐한 재앙으로서의 자연, 말라비틀어진, 더럽고 거친, 불규칙적인 표면,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 같은 강도, 둔탁하게 다듬어진 (그런 면에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덩어리감, 아찔할 정도로 여과 없이 드러나는 물질 그 자체, 기원, 꿈과 환상, 원시성에 대한 매혹과 동경. 최근 수년간 키워온 이런 생태에 대한 관심사는 사실, 정현이 청년 시절부터 천착해온 대주제인 ‘인간’에 대한 관심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예술가라면 누구나 숙명처럼 안고 있는 기원에 대한 궁금증과 의구심을 평생에 걸쳐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 “그림도 못 그리는데 사고능력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유독 누구보다 자기반성에 치열했던 사람이었다. 80년대 사회적 혼란기 속에서 대학을 다닌 정현은 천성이 유약한 탓에 그 어느 편에도 서지 못했다. 


홍익대 재학 당시 탈춤반에 들어가서 좌파 성향의 학우들과 어울려도 보고, 몇 번 데모에 가담도 해봤지만, ‘예술가로서의 나’의 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계속되는 유보와 관찰. 그렇게 대학원까지 보내고 늦은 나이에 다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떠난 파리 유학길. 타지의 대학에서 정현은 혹독한 시험대를 거쳤다. 한국에서 배운 인체를 조형하는 숙련된 기술이 파리에선 통하지 않았다. “너의 작업에는 시적 상상력과 철학이 안 느껴져”라는 질책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하니까. 정현은 인체를 만들고 부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고 한다. 계속되는 거절의 거절. ‘나란, 내 작업이란, 조각이란 무엇일까’라는 기원에 대한 갈증. 나중에 가서는 급기야 손에 익은 헤라(조소 전문가용 칼)를 버리고 둔탁한 망치와 도끼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쇳덩이를 후려친다. 바로 그때, 정현은 번개를 맞은 듯한 인식론적 전환을 경험했다. 쪼개짐과 둔탁한 파임 속에서 이전까진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상성을 발견한 것이다─지금까지 고전주의적 이상적 인간 형상에 틀지워져 보지 못했던 다른 종류의 시각성, 아니 파괴적인 촉각성, 기원을 파괴하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형상에 반하는 (조르주 바타유가 “비정형”이라고 불렀을) 가장 낮은 단계의 (비)형상성.




<무제(Untitled)> 2004 아스콘(Ascon) 

449×275×47cm 고려대박물관




비로소 정현은 낡아서 버려진 비천하고 저급한 것들에 매혹되기 시작한다. 대리석 안에 이미 실재하는 천사를 단지 꺼내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 미켈란젤로식의 이상주의보다, 재료가 겪은 시련과 세월, 변화와 이동의 작동 방식 그 자체─바타유식으로 말하자면 “한 마리의 거미나 침 뱉는 행위”─가 작업의 요체가 되었다. 정현은 이런 물질의 상태를 그대로 미술에 가져다 놓는다. 그렇게 해서 2000년대 초반부터 작업에 사용하기 시작한 철로용 침목은 오랜 세월 비, 바람과 육중한 하중을 견뎌낸 후 남은 폐자재이며, 2000년대 중반 작가가 불현듯 사용한 아스팔트 콘크리트 또한 석유의 가장 낮은 단계, 찌꺼기로 만들어진, 그마저도 닳고 부서져서 용도 폐기된 쓰레기다. 말라 죽어가는 썩은 나무를 끈질기게 드로잉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소마미술관 야외 공간에 전시한 쇠구슬 ‘파쇄봉’도 순수한 철을 정제하고 남은 폐철근과 불순물이 오랫동안 서로 엉겨붙은 결과란 점에서 맥락과 다르지 않다. 요컨대, 정현의 작업에서 표명되어온 인간에 대한 관심은 뒤집어진 인간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말라비틀어지거나 덕지덕지 엉겨 붙은 조각의 표면은 대개 게슈탈트적 차원에서 인간의 얼굴 같은 형상을 투사하게 만든다. 우리가 그 때 보는 것은 사실 두상이라기보다 비정형적인 조각의 표정이며, 오히려 신음이나 비명소리일텐데, 대부분 붙어있는 <무제(Untitled)>라는 작업의 제목이 시사하듯 그러한 규정조차 한갓된 것이다. 




<무제(Untitled)>  

2000-2001 침목(Railroad-tie) 

187×35×20cm 고려대박물관




이 모든 형상은 사실 인간이 아니다─저급한, 물질에 불과하다. 그 강력한 척박함이 이내 고개를 내미는 순간, (형상의) 죽음이 선언된다. 환기된 구문론적인 혼동─시각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인간적 형상과 실제 사물 사이의 기호학적 긴장 관계─과 함께 작업-물질의 저급함은 인간의 실존적 이상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바타유는 어느 책에선가, 구석기 동굴벽화에서 인간 형상이 사실적인 동물 묘사와 달리 일관되게 훼손되거나 왜곡돼 있는 것을 두고, 인간의 예술 행위가 자기 훼손의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한 바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정현의 조각에서 나타나는 인간주의적 관심은 외려 인간 안의 반인간주의적, 원시주의적, 생태학적 관심으로 역전된다. 근작을 통해 그의 관심이 자연에 도달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반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자연이며, 가장 저급한 수준으로서의 자연이다. 따라서 정현의 조각을 무엇이라 부를 수 없다. 아니, 불러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그 자신의 이상적 층위를 혐오하고 끌어내리는 과정 가운데서,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서 해체적으로 작동하는 수행으로, 바타유적인 의미에서 비정형 그 자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의미를 빨아들이고 무효화하고 저급화시키는 블랙홀이자 인간에 저항하고 생태로 나아가는 조각이다. 정현의 조각은 이런 점에서 한국 조각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제(Untitled)> 1988 청동(Bronze) 

21.5×19.5×13.5cm 개인소장  




작가 정현은 1956년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홍익대 및 동대학원 조소과를 거쳐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 조소과를 졸업하였다. 원화랑을 비롯한 4번의 개인전과 <오늘의 한국조각 2000─새로운 차원을 찾아서>(모란미술관), <한국현대 미술 초대전─New Trandition>(Hillwood Art Museum, N.Y), <드로잉횡단전>(금호미술관), <드로잉의 재발견>(환기미술관) 등의 기획전에 초대된바 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경인미술대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현재 홍익대학교대학원 조소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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