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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6, Jul 2015

아드리안 파이퍼
Adrian Piper

정지된, 일시적이고 변화 가능한 가치체계

그토록 초연한 눈빛은, 본적이 없다. 미술계 최고의 상을 거머쥐었는데, 그의 감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없는 것 같았다. 상을 건네받은 작가는 나지막이 읊조리듯 말했다. “이 장엄한 전시의 강렬하며 호소력 있는 작품들 사이에서 내가 선택되었다는 것에 대해 한없이 겸손해집니다. 21세기 현대 미술에 대한 오쿠이 엔위저 감독의 심오한 비전을 함께 실현해내는 것에 지대한 공을 세운 모든 예술가들을 대신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큰 영광입니다. 감독의 깊은 통찰과 비전은 마치 ‘문화 자본, 생산 그리고 가치의 구조적인 전환을 해부하는 칼’처럼 현대미술에 침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한 것이 감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 이 상을 받는 어마어마한 특권을 준 심사단에 감사하며 그들이 나의 작품을 알아봐 준 것이 진심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의 영예는 개념미술가 아드리안 파이퍼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선정된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정일주 편집장 ● 사진 APRA Foundation Berlin 제공

'I Am Some Body, The Body of My Friends' 1992-1995 Suite of 18 “selfie” photographs, 15 color and 3 black and white, each 23.3cm×30.5cm. #95003. Photo credit: Galeria Emi Fontana. Collection of the Adrian Piper Research Archive Foundation Berlin. ⓒ APRA Foundation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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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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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안 파이퍼의 수상작은 <The Probable Trust Registry: The Rules of the Game #1-#3>. 파이퍼는 3개의 둥그런 데스크를 설치하고 참여자들로 하여금 작위적인 3개의 명제 중 한 가지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도록 룰을 정했다. 그가 제시한 세 가지 문장은 “I will always be too expensive to buy., I will always mean what I say., I will always say what I am going to do.”로 다분히 포괄적이며 추상적인 것들이다. 작가 자신과 관람객, 그리고 대중 등 각 주체의 개념적 행위를 재창조하는 것은 파이퍼 작업의 근간이다. 그리고 파이퍼가 완성한 이 작업은 관람객이며 동시에 작품에 참여(관여)한 이들로 하여금 지극히 사적인 책임으로 평생에 걸쳐 퍼포먼스를 펼치도록 유도하는 특성까지 더해졌다. 각자의 관심사를 일컬어 ‘가치 체계의 일시적이고 변화 가능한 것’이라고 피력하는 작가는 커다란 범위의 가치 체계를 마련한 셈이다.





<Everything #21> 2010-13 Installation: 

Four vintage wall blackboards in lacquered wood frames, 

each mounted on wall at eye-level in landscape orientation 

and covered with single handwritten sentence repeated 

25 times in white chalk handwritten cursive text 

Each framed blackboard 120cm×250cm. 

#10001.1-4. Detail: #2 of 4. Venice Biennale installation, 

Central Pavilion in the Giardini della Biennale, 

Gallery 20. Collection Adrian Piper Research 

Archive Foundation Berlin.  APRA Foundation Berlin.




작가가 설정한 개념에 관람객의 다양한 감상과 이해가 뒤섞이며 다소 어렵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작품은 그러나, 구체적 매뉴얼을 갖춤으로써 소통의 명확성을 높인다. 관람객이자 작품에 참여하는 이들은 다음의 절차를 차근차근 거친다. 


1. 모든 서명인은 접수 데스크의 아이패드에 저장된 개인 선언문(Personal Declaration)에 사인하고 날짜를 적는다. 접수자는 서명인을 위해 이것을 하드카피 한다

2. 그 다음 서명인은 접수 데스크에서 자신의 우편주소를 디지털 등록 서류에 올린다

3. 디지털 등록 서류의 내용은 갤러리에는 절대기밀(CONFIDENTIAL)이다. 접수자는 이 정보를 그 누구에게도, 서명인의 분명한 허락 없이는 보여주지 않는다

4. 서명인은 (개인 선언문에) 서명한 종이를 보관한다

5. 접수자는 작성된 디지털 서류를 APRA(Adrian Piper Research Archive) Foundation Berlin을 대신하여 보관한다

6. 접수자는 The Rules of the Game #1 폴더에 참가자의 성에 따라 알파벳 순서대로 정리한다

7. 전시가 종료되면, 갤러리는 폴더에 정리되어 있는 The Probable Trust Registry #1을 서명인들에게만 모두 보낸다

8. 서명인이 다른 이들과 연락을 취하고 싶을 때에는, 반드시 갤러리를 통해서 그 정보를 요청해야 한다

9. 갤러리는 그 사람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분명한 허가서를 반드시 받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가는 자동적으로 무효화된다

10. 갤러리는 신뢰할 수 있는 우편을 이용해서, 전시가 끝난 뒤 한 달 안에 알파벳 순서로 정리된 원본 선언문들을 APRA Foundation Berlin에 전달한다

11. 이 서류들은 APRA Foundation Berlin의 기밀 품목이 될 것이며, 향후 100년 동안 봉인될 것이다

12. 접수자, 갤러리 그리고 APRA Foundation Berlin은 구금의 계약서에 모두 (이 지시를 엄수할 것을 동의하는) 사인을 한다.  




<Everything #2.14> 2003 Photocopied photograph on 

translucent vellum, superimposed on inkjet print photograph 

and overprinted with inkjet text; combined in vinyl 

paper protector. 8½”×11, (21.6 cm×27.9 cm). #03001.16. 

Venice Biennale installation, Central Pavilion

 in the Giardini della Biennale, Gallery 

12. Collection Adrian Piper Research Archive 

Foundation Berlin.  APRA Foundation Berlin.

 



뉴욕 할렘에서 태어난 아드리안 파이퍼는 뉴욕 시립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는 등 탄탄한 이론과 철학을 갖췄다. 1970년대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의 철학서들 특히 마음, 정신 그리고 육체의 분리에 관한 숙고에 몰두했던 파이퍼는 초기 사진작업의 소재로 자신의 육체를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신념에 근거한 방법으로 거울을 통한 나체를 다양하게 촬영했는데, Food for the Spirit’ 연작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문구를 되풀이 하는 그녀의 녹음된 목소리와 거울 속의 자신을 찍은 이미지가 더해진 작품으로 매우 어두운 조명은 그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하고, 그를 에워싼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파이퍼는 총 14장의 연작을 제작하는 동안 칸트의 유명한 금욕주의를 재현하고자 단식과 요가를 수행하며 사회로부터 자신을 고립시켰다.


1970년대 파이퍼는 ‘촉매과정(Catalysis)’이란 이름의 거리 퍼포먼스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는 뉴욕의 한가운데 맨해튼에서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다양한 행위를 선보이는 것으로, 하얀색 페인트를 자신의 옷에 칠하거나 “WET PAINT”라고 적힌 의상을 입고 대형백화점에 가서 장갑과 선글라스를 사고, 입에 거대한 흰 수건을 말아 넣고 버스, 지하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식초, 계란, 우유, 생선 기름으로 자신의 몸을 흠뻑 적신 후 뉴욕의 지하철과 서점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것 등이 포함됐다. 그는 퍼포먼스를 통해 사회의 규범과 질서에 저항하는 각종의 행위를 선보였는데, 퍼포먼스 중이라고 절대 밝히지 않음으로써 부적응자, 반항아, 역겨운 상태로 치부되는 것을 감수했다. 이렇듯 반응을 이끌어내는 촉매제 역할을 한 파이퍼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얻었다.





<Everything> 2007 

Creative Time Gavin Krobe

   



파이퍼는 이내 가발과 수염으로 무장하고 “제3세계, 노동자계급, 심하게 적대적인 남성”으로 분한 ‘Mythic Being(신화적 존재)’ 시리즈에 착수한다. 1973년의 일이다. 자신을 중성적이고, 인종을 가늠할 수 없게 분장한 후 검은 티셔츠, 나팔바지를 입고, 커다란 선글라스와 가발, 콧수염으로 변장한 작가는 이 공공적이고도 개인적인 퍼포먼스 시리즈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그 사진에 드로잉과, 말풍선 등을 더했다. 그러던 그는 2003년에 이르러 ‘Everything’ 시리즈를 내놓았다. 이 작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지’ 자문하게 만들었는데, 파이퍼는 가루염색제인 헤나로 참가자의 이마에 문장을 써 넣었다. 


거울을 통해 봤을 때 쉽게 읽히도록 쓰인 글은 약 2주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작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계속해서 기록하게 요구했고, 그렇게 축적된 글들을 이 사회적인 퍼포먼스가 끝난 1년 뒤 다시 읽어보도록 했다. 2007년 봄 한 기관의 후원으로 ‘Everything’ 시리즈는 다시 시도됐다. 참가자들은 그들의 이마에 (거꾸로 된) 문장, Everything will be taken away”를 헤나로 물들였다. 그래서 거울을 볼 때만 문장이 읽혔으며, 역시 다른 이들의 반응을 기록하도록 했다. 당시 『Time Out New York』의 기사에 따르면 ‘Everything’ 시리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뭘 잃어버려야 하는 것인가”라는 고무적인 뉘앙스부터 “네 얼굴에 그 얼룩은 뭐니?” 따위의 시시한 내용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The Probable Trust Registry: The Rules of the Game #1-3> 2013-15 Installation + Participatory Group Performance: 

three embossed gold vinyl wall texts, each 7,0cm H, each affixed to 70% slate grey floor-to-ceiling wall at 2,0m H; 

three circular gold reception desks, each 1.83m D×1.6m H, each with chair, each centered in front of wall and below text; 

A4 format contracts; signatories contact data registry; administrator; self-selected members of the public. 

Detail: The Rules of the Game #3, 2013. #13001.3. Venice Biennale installation, Arsenale Gallery 5. 

Collection Adrian Piper Research Archive Foundation.  APRA Foundation Berlin.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다면, 그는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는 자유다.” 이는 아드리안 파이퍼의 ‘Everything’ 시리즈에 영감 받은 러시아 작가 솔제니친(Alexander Solzhenitsyn)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파이퍼는 이 메시지에서 ‘사람’을 보편적인 모든 사람으로 정하고 자신의 개념을 더해 하나의 문장으로 바꿨다. Everything will be taken away.” ‘모든 것은 빼앗길 것’ 혹은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란 의미로 불길한 미래를 예측하는 파이퍼의 문구는 이렇게 완성됐다. 자연적 힘에 의해서든 인공적인 사건에 의해서든 사라지거나 빼앗기는 ‘모든 것’은 비단 물질만 뜻하는 것이 아닌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까지 확대될 수 있다. 


현시대에 존재하는 탐욕, 부패, 그리고 점점 줄어드는 사람과 사람의 감정 대한 배려들을, 작가는 작업을 통해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의 의도대로 누군가 작품을 보고 ‘내 삶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영혼을 찾는 일이 될 것이며 진정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제시한다. 다양한 해석을 낳는 작품은 문장과 그 맥락의 형상화를 통해 ‘미국 인종주의에 대한 아주 통렬하고 다층적인 비판’이란 평도 얻었다. 때로 자연 재해와 인재 사건들을 냉정하게 회고하면서, 마치 그것들과 우리의 거리감을 모방하거나, 미디어의 퉁명스러운 태도를 ‘연기하는’ 파이퍼는 개인과 대중이 서로를 얼마나 깊이 난도질 할 수 있는지 섬세하게 조명한다.    


파이퍼의 분명한 철학을 알기위해서는 그의 방대한 레퍼런스들을 파악해야 한다. 누구나 작가로부터 직접 작품의 줄거리와 그것에 담긴 개념을 전해 듣고 싶어 하지만, 지금껏 그 누구도 아드리안 파이퍼로부터 그런 행운은 얻지 못했다. 인종, , 계층, 도덕 등 지극히 일반적인 주제를 다룬다고 여기는 작가는 그 누구든 자신의 작업을 인지할 수 있으며 나름의 철학으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작품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하는 인터뷰 대신 자신이 쓴 철학과 예술서적을 권유하는 파이퍼의 사고를 꿰뚫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개방성과 무관심을 적절히 섞어, 작품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파이퍼. 섹시한 뇌를 지닌 작가는 지금 어떤 개념에 몰두해 있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   

 



아드리안 파이퍼




작가 아드리안 파이퍼는 1948년 미국 뉴욕 태생으로 1세대 개념미술가이자 철학자로 유명하다. 1969년 스쿨오브비쥬얼아트(School of Visual Arts)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한 그는 뉴욕시립대학교, 하버드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그는 흑인보다는 밝고 백인보다는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본인의 인종을 생김새나, 생물학적인 근거로 쉽게 범주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부터 출발한 파이퍼는 여성 정체성까지 포함하여, ‘주체’ 개념을 바탕으로 작품을 전개해 왔다. 오랜 시간동안 연구한 칸트, 베다 철학의 개념과 이미지 또한 작품에 포함시키며 범위를 확장시키는 그는 퍼포먼스, 사진, 영상, 드로잉, 설치까지 다양한 범주의 작업을 펼친다. <Catalysis>, <Mythic Being>, <Everything> 등 인종, , 사회, 정치의 문제들을 담고 있는 대표작 중 ‘Everything Will Be Taken Away’ 시리즈는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의 ‘모든 세계의 미래’ 본 전시에 초청받아, 관람객에게 그들 고유의 문맥을 기반으로 시간에 대한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관객 참여 작품 <The Probable Trust Registry: The Rules of the Game #1-#3>로 인간의 주체성과 행위를 재조명한다는 찬사를 얻은 그는 비엔날레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유수의 대학에서 철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수많은 예술, 철학 서적을 출간한 그는 지금도 예술가이자 철학가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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