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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미술계 복서의 너무 짧았던 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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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K.

BASQUIAT:boom for real
2017.9.21-2018.1.28, 런던, 바비칸 아트 갤러리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노숙 생활을 하다가 스타 작가로 화려한 드라마 같은 삶을 살고 요절한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의 회고전이 런던의 바비칸 아트 갤러리(Barbican Art Gallery)에서 열리고 있다.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바스키아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17살에 학교를 떠났지만 시티 애즈 스쿨(City-as-School) 친구였던 알 디아즈(Al Diaz)와 함께 SAMOⓒ1)를 조직하여 그라피티 아트(graffiti art)를 시작했다. 엽서나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다 1980년 첫 그룹 전시회 '타임 스퀘어 쇼(Time Square Show)'(1980)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후 1982년에 뉴욕 소호의 아니나 노즈 갤러리(Annina Nosei Gallery)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열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고 1983년에는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하였다. 1970-80년대 앤디 워홀(Andy Warhol)을 선두로 팝아트의 시대가 열렸던 뉴욕에서 바스키아는 흑인이라는 정체성, 팝아트라는 트렌드에 부합하는 작품 스타일로 각종 매체의 집중을 받으며 미술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전 세계의 대중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때마다 각종 경매나 아트페어에서 높은 가격에 판매되어 화제에 오르내리곤 하는데 지난 5월 뉴욕 소더비(Sotheby’s) 경매에서 '무제(Untitled)'(1982)가 1억 1,050만 달러(한화 약 1,250억 원)에 낙찰되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파장을 일으켰다.
● 양화선 영국통신원 ● 사진 Barbican Art Gallery 제공

'Basquiat: Boom For Real' Installation view at Barbican Art Gallery(21 September 2017 - 28 January 2018) ⓒ Tristan Fewings / Getty Images Artworks (left to right):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1983 W&K ⓒ Wienerroither & Kohlbacher, Vienna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Courtesy W&K ⓒ Wienerroither & Kohlbacher, Vienna. Jean-Michel Basquiat, Self Portrait, 1984 Private collection.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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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현대미술관 소장품 전시나 옥션 그룹전에서 바스키아의 작품을 드문드문 보았지만 이렇게 많은 양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전시를 볼 기회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27년 평생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 그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탓인지, 미국에서 너무 인기가 많아 유럽까지 찾아오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개인전이 열린다는 소식에 런던 미술인들은 모두 기대에 들떴다. 전시 타이틀인 ‘Boom for Real’은 바스키아가 자주 사용하던 캐치프레이즈다. 한글로 직역을 하기도 애매하고 영어로 해석하기에도 수수께끼 같은 이 제목에 대해 큐레이터 엘리노어(Eleanor Nairne)는 “그가 뭔가 영감을 받았을 때나 감탄했을 때 사용하던 문구라고 해석하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전시장의 지도를 받아들고 기획자가 의도한 대로 2층을 먼저 올라가면 그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뉴욕/뉴웨이브(New York/New Wave)>(1981)전을 소규모로 재현한 공간이 시작된다. 롱아일랜드시티의 모마(MoMA) PS1 에서 열린 이 전시는 바스키아를 비롯한 100여 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하였고 디에고 코르테즈(Diego Cortez)가 기획하였다. 당시 스타작가였던 앤디 워홀, 사진작가 낸 골딘(Nan Goldin)과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 뮤지션 데이비드 번(David Byrne), 소설가 윌리엄 버로우(William Burroughs) 등 뉴욕 다운타운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분야 아티스트들의 반(反)문화적 시대상을 보여주는 전시를 기획한 것이라고 한다. 





<Untitled> 1980 

Courtesy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 ADAGP,

 Paris.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코르테즈는 그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바스키아에게 특별대우를 해주는데, 가장 눈에 띄는 중요한 자리를 내주고 15점의 캔버스, 나무, 종이, 금속 등 다양한 표면 위에 그려진 낙서, 얼룩들, 순진한 이미지부터 도시의 피폐함이 연상되는 이미지들의 작품을 마음껏 전시하게 한다. 그의 페인팅에서 보이는 스카이라인은 맨해튼의 마천루를 연상시키고, 만화처럼 그려진 자동차와 비행기들은 뉴요커들의 맨해튼 삶에서 얻는 소음을 표현한 것이란다. 이 전시를 통해 길거리에서 발견된 ‘덜 익은’ 천재였던 바스키아는 동시대 작가들뿐만 아니라 컬렉터, 아트 딜러, 갤러리스트 등 예술계의 모든 이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기 시작한다. 바스키아가 집을 떠난 1978년의 뉴욕은 말 그대로 폐허의 끝을 달리고 있는 현장이었다. 


부정부패가 정치·경제·사회에 난무했고 각종 범죄가 들끓었으며 브롱크스의 아파트 지구에 연쇄 방화사건이 급격히 늘어나 겁에 질린 집주인들이 문을 굳게 닫고 더 사람을 들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가난한 작가들은 도시 곳곳을 배회하거나 노숙을 해야 했다. 그때 바스키아는 노숙하고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학창시절 친구였던 디아즈와 함께 SAMOⓒ를 구성한 것이다. 단순 낙서가 아닌 그들의 위트 있는 말솜씨, 기존 그라피티 작업들과는 다른 비현실적인 톤은 소호와 로어이스트사이드 일대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뉴욕의 아트 신을 비판하는 문장부터 대중매체에 대한 문장까지 젊은 두 아티스트들의 넘치는 아이디어가 도시 곳곳에 뿌려졌다. 





<Basquiat: Boom For Real> Installation view at Barbican Art Gallery 

(21 September 2017 - 28 January 2018)  Tristan Fewings / 

Getty Images Artworks: Jean-Michel Basquiat Glenn, 1984, Private collection.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그들이 도시 곳곳에 남긴 흔적을 아방가르드 작가 헨리 플린트(Henry Flynt)가 기록해둔 사진들이 전시되어있고 그들이 남긴 문장들을 재현한 보드도 전시되어있지만 동시에 이 두 사람의 우정이 끝나는 1980년 초에 ‘SAMOⓒ는 죽었다 (SAMO IS DEAD)’라는 문구가 적힌 뉴욕 일대의 사진을 보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싸우고 삐쳐서 하는 장난 같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문장을 곳곳에 적고 다니던 바스키아는 몇 년 후 다시 SAMOⓒ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져다 쓰기도 했고 비슷한 느낌의 콜라보레이션 작업도 했기 때문이다. 전시장 곳곳에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사진과 함께한 작업들도 보이는데 당시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VA: School of Visual Art)에 다니고 있던 해링과 재밌는 일화를 계기로 바스키아와 친구가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SVA 재학생이었던 해링이 학교에 들어가는데 입구에서 어떤 남자가 보안요원의 눈에 띄지 않게 같이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길래 그러라고 해서 같이 학교 안으로 들어왔고, 바로 그 날 SAMOⓒ 의 그라피티들이 학교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이 생겼다. 자기가 학교에 들인 사람이 바스키아인 것을 알아낸 해링이 바스키아를 찾아가 먼저 인사를 하고 친구가 되었다는 스토리다. 


그 후 그들은 함께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하고 머드클럽(The Mudd Club)에서 어울리며 뉴욕의 아트 신을 만들어 냈다. 바스키아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음악인데 이 머드클럽에서 종종 그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당시 뉴욕 최고의 클럽으로 각종 펑크, 일렉트릭 음악이 디제잉 되고, 영화를 틀어주고, 패션쇼까지 진행하는 등 뉴욕의 모든 예술가가 모이는 아지트였다. 음악과 술, 담배, 마약이 오가는 이곳에서 바스키아가 속해있던 밴드 그레이(Gray)는 공연을 하곤 했고, 잘생긴 얼굴과 훤칠한 키 덕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그는 이곳에서 마돈나(Madonna)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작가 마리폴(Maripol)이 찍은 핑크색 긴 생머리를 한 젊은 시절의 마돈나 폴라로이드 사진을 봤을 땐 사실 너무 많은 텍스트로 지쳐있을 때쯤이어서였는지 이 사진이 반갑기까지 했다. 머드클럽에서 만난 다른 아티스트들의 영향일까. 낙서 같은 그의 회화 작품들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그 밖의 미디어, 퍼포먼스, 영화, 음악, 1970년대 당시 혁신적 발명품이었던 복사기의 인쇄기능을 이용한 실험적 예술이었던 제록스 아트(Xerox art)까지 다양한 종류의 예술을 시도했던 그의 모습들이 그대로 전시장에 드러난다. 





<Hollywood Africans> 1983 Courtesy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ADAGP, Paris.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바스키아 하면 자연스럽게 같이 떠오르는 작가가 앤디 워홀이다. 워홀은 바스키아가 어렸을 적부터 가장 동경하고 따르던 작가였다. 워홀의 책 『앤디 워홀의 철학(A부터 B까지 그리고 다시 돌아가기)』를 십 대 때부터 보물로 간직하고 다녔고 워홀을 몰래 염탐하다가 그가 큐레이터 헨리 게르트잘러(Henry Geldzahler)와 함께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따라 들어가 그들에게 엽서를 판매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게르트잘러는 그가 너무 어리다고 거절했지만 워홀은 뭔가 손이 덜 간 그림 같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에 당신의 그림도 그렇지 않냐고 말했다는 바스키아, 워홀은 1달러에 엽서를 한 장 샀다고 한다. 줄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이 만든 영화 <바스키아(Basquiat)>(1996)에 이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그 둘이 처음 대면하는 장면으로 무심한 듯 관심을 보이던 워홀과 잔뜩 긴장했지만 당차보이는 바스키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1982년 아트 딜러이자 컬렉터인 브루노 비쇼프버거(Bruno Bischofberger)가 바스키아에게 앤디 워홀의 공장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바스키아는 서둘러 작업실에 들러 <두 개의 머리(Dos Cabezas)> (1982)를 탄생시킨다. 


워홀의 트레드마크인 은발의 가발, 바스키아의 드레드록 헤어스타일이 돋보이는 두 개의 초상화를 한 화면에 그려낸 바스키아는 둘의 너무나 다르면서도 닮은 점을 빠르게 캐치해냈다. 22살의 어린 작가가 자기의 우상을 만나기 전 얼마나 설레고 신이 났으면 그림이 완성되고 두 시간 만에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채로 워홀의 작업실에 들고 갔다고 한다. 이후 워홀은 바스키아에게 아파트를 빌려주고 둘은 콜라보레이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1985년에는 이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작품들을 토니 샤프라치 갤러리(Tony Shafrazi Gallery)에서 보여주게 되는데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서 “바스키아는 워홀의 마스코트”라는 혹평을 받고 대중에게도 냉대를 받아 둘의 관계가 소원해진다는 소문이 나돈다. 이후 함께 작업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들의 우정은 변함없었다고 한다. 1987년 앤디 워홀이 수술 후 합병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바스키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그 후 작업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약물에 거의 의존하다시피 살다가 1년 뒤 그 자신도 약물 중독으로 쓸쓸히 작업실에서 숨을 거둔다.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이미 유명해져 공장까지 운영하던 워홀에게 다시 직접 그림을 그리라고 설득시키던 바스키아, 누구보다 워홀을 동경했고 따르던 그의 애정이 작은 전시 공간에 가득 차 있다. 





<Untitled (Pablo Picasso)> 1984 Private collection, Italy.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바스키아다운 작품들, 권투, 워홀, 마티스, 해부학, 이집트 역사, , 재즈, 블루스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전시장 곳곳 캔버스 위에 표현되었다. 그는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흑인 영웅들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비밥(Bebop Jazz) 재즈의 창시자로 바스키아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찰스 파커(Charles Parker)는 그의 신이자 슈퍼맨이었다. 백인 주류 사회 속 인종차별이 언제나 이슈가 되던시절, 특히 스포츠계에서 차별의 벽을 딛고 챔피언을 차지했던 권투선수 슈가 레이 로빈슨(Sugar Ray Robinson)이나 조 루이스(Joe Louis), 백인들의 스포츠였던 야구 메이저리그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실력만으로 흑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MVP 자리에 올라섰던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 또한 그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행크 에런(Hank Aaron)또한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그는 때로는 영웅으로 분장하여 자기 그림에 등장하는데<자화상(Self-Portrait)>(1984)에서나 권투 글러브를 끼고 싸울 태세를 한 사진들, 자신을 복싱선수로 그려낸 그림들에서 사회에 대한 반항을, 하지만 절대 굽히지 않는 선수 같은 강인함을 보여줬다. 빠르게 변하는 미술시장에서 받았던 환대와 냉대, 마치 복서가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듯 그는 그렇게 자화상을 그려냈던 것 같다. 


미술대학에 다니지 않고, 너무 어리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많이 받았던 바스키아는 자화상을 그리며 미술계에서 작가를 선정하는 기준을 그들의 나이, 학력, 집안에 국한한다며 조롱했다.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흑인이라는 것에 늘 남을 의식하며 살았다고 한다. 미술계에선 천재로 각광 받았음에도 문화계의 위선과 미술시장의 권위에 상처받고 방황하던 바스키아, 화르르 타오르다 꺼져버린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늘 외로움을 많이 탔다던 그의 짧지만 힘넘치는 흔적과 작품들을 보면서 만약 그가 죽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작품을 또 여기저기서 뿜어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바스키아는80년대가 아닌 지금 당장 필요한 작가라는 글을 보았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던 그는 오바마(Barack Obama)에게 왕관을 씌워줬을까, 트럼프(Donald Trump)에게는 어떤 일침을 날려줬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온 말이 아닐까 싶다.  

 

[각주]

1) SAMO는 ‘Same Old Shit’의 약자로 그들이 늘 피우던 마리화나를 뜻한다고 한다.

 


글쓴이 양화선은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Central Saint Martins)에서 컨템포러리 아트를 통한 회상, 향수, 흔적의 키덜트후드 연구 논문과 회화 작품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이스트런던 유니버시티(University of East London)에서 공간의 패러독스에 관한 논문과 회화작품으로 박사 과정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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