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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67, Aug 2020

혁명과 미술

REVOLUTION AND ART

예술은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배경을 담는 그릇이며, 때로 미술은 특정한 상황을 새기는 도구로 기능한다.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등 온몸으로 변화에 맞서고 이를 흡수해야만 하는 지금, 우리는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혁명’과 이를 조망하는 ‘미술’에 관한 기획을 마련했다. 먼저 혁명과 미술, 그 둘의 역사와 관계를 톺아보며 감각과 희망을 일깨워보고 이어 미술의 혁명을 통해 사회적 혁명을 이루고자 했던 한국 근대미술 작가들을 만나본다. 이들 작품에 내재된 주제의 해석은 당시 의식과 정신, 이념, 열망 등을 가늠케 한다. 끝으로 디지털 미술 혁명을 짚어본다. 디지털 기술을 통해 예술의 변혁을 탐구하고 기념하는 새로운 형태의 혁명. 미술과 이미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작가와 작품 등의 달라진 관계를 살펴본다. 시대와 호흡하는 혁명과 미술의 여정을 따라가며, 다가올 혁명의 순간을 정면 돌파할 근육을 만들어 보자.
● 기획·진행 정일주 편집장, 김미혜 기자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1799 152×206in (385×522cm) © 2010 Musée du Louvre / Angèle Dequ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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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석『문화/과학』공동편집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최은주 대구미술관장, 장진택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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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

예술 혁명의 귀환을 위하여_이광석

 

SPECIAL FEATURE Ⅱ

한국미술 100년과혁명의 좌표_최은주

 

SPECIAL FEATURE Ⅲ

자르기, 복사하기 그리고 붙이기 

새로운 인터페이스로서의 미술_장진택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e 28 Juillet :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1830 260×325cm

 © 2009 Musée du Louvre / Erich Lessing

 

 



Special feature Ⅰ

예술 혁명의 귀환을 위하여

 이광석 『문화/과학』 공동편집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정치 혁명과 예술


()은 익힌 가죽이라는 글자인데, 짐승의 날가죽 곧 피()를 익혀서 털을 뽑으면 모양이 전연 달라져서 새것이 됩니다. 그래서 혁()에는 달라진다, 새로워진다는 뜻이 붙게 됐습니다. ()은 무엇인가? 천명(天命)입니다. 하늘 말씀입니다. ‘혁명은 정치가 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달라지되 어느 한 부분만 아니라 전체를 온통 뜯어고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새 출발을 하는 일입니다. 혁명은()’을 새롭게 한다는 말입니다.”1) 1968년 『사상계』에 실었던 고 함석헌 선생의혁명해제이다. 그에게혁명은 비정상적인 것의 정상화가 아니라정상성자체의 변화라 할 수 있다.2) 그의 혁명은 그저 사태의 부분적 봉합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관성화된 권력 모두를 뒤집는 전환의 상상력을 요청한다


그가 민중 스스로 일구는 일상 정치혁명을 주창했던 당시는 여전히 군사 파쇼(fascio)의 그늘 아래 있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아주 우발적이게도 그의 혁명론은 그해 5월 프랑스 68혁명과 맞닿아 연결된다. 즉 권위적 관료주의, 기존 이념 질서에 대한 거부, 강요된 자본주의 표준을 거부했던 서구 68혁명의 주장들과 동북아 반도 끝자락의 왜소하지만 다부진 한 사상가의 언설이 관통해 있다. 당시 한 재야 사상가의 끊임없이을 새롭게 바꾸려는 일상 혁명론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우린 서구에서처럼 전환의 시대를 맞이하기보단 암울한 군부의 어두운 터널을 꽤 오랫동안 더 지나쳐야 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1799 152×206in (385×522cm)

 © 2010 Musée du Louvre / Angèle Dequier




관념이 현실이 되고, 상상이 구체가 되고, 구태가 일순 혁명을 맞이하는 변곡에 놓인 간극은 과연 무엇일까? 이젠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하거나 혁명의 감각마저 잃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궁금한 물음이 아닐 수 없다. 1990년대 초 구소련 체제의 몰락과 함께 체제 혁명을 꿈꾸는 일은 진즉에 옛이야기가 된 듯 보인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마크 피셔(Mark Fisher)의 논평처럼,3) 지난 몇 년 사이 지구 사회는자본주의 리얼리즘의 강렬도만 깊어졌다. 그저 자본주의 성장 숭배와 화폐 욕망에 허우적거리면서 자본주의 종말이란 시나리오는 아예 머릿속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우울한 현실이 됐으니 말이다금지를 금지한다”, “불가능을 요구해라”, “상상력에 권력을!” 한때 바리케이드 사이를 두고 저 너머 자본주의 권위를 향해 외치던 68혁명의 슬로건들의 의미는 갈수록 점점 바래져 간다. 유럽 신좌파와 상황주의자들의 급진적 정치 슬로건과 반자본주의적 강령들은 급속히 자본주의 소비 욕망과 스펙터클 목록으로 블랙홀처럼 빨려들었다. 마치 <토요일밤 라이브(Saturday Night Live)>힙한상업 코미디 세계에서 혁명의 수사란 것이 그저 액세서리나 미장센으로 전락하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혁명과 저항은 문화 취향과 소비자 선택의 문제로 축소됐다.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해 볼 수 없는,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개념과 기호들이 무장해제당한 혁명 부재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한때 혁명을 위해 예술의 힘이 추앙받던 시절도 있었다. 혁명의 슬로건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혁명이 예술에 영혼을 줄 수 있다면, 예술은 혁명의 대변인이 될 수 있다.”4) 1920년대 러시아혁명 시절에 예술은 그렇게 대중 선동의 기능과 사회주의 혁명의 목표를 정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미학 형식이자 혁명의 수단으로 쉽게 정의됐다. 이렇듯 이념의 시대에는 아주 오랫동안 정치의 미학화 혹은 선전미학이 예술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 가령, 우리의 1980년대민중미술은 군부와 벌이는 진지전을 버티며 민중의 정치의식을 강화하는 강력한 스테로이드 약물과 같지 않았던가물론 정치 미학의 도구적 기능을 넘어, 소비사회에 대한 저항과 일상 혁명을 도모하기 위한미학의 정치화란 역사적 흐름도 함께 관찰된다. 20세기 초 다다이즘 등역사적아방가르드 예술에서 68운동의 상황주의 예술운동에 이르는 궤적은, 예술이 역사를 주도하며 정치와 사회 혁명의 질적 전환을 이끌었던 충분히 역사적 사건들이라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소비자본부의 스펙터클 사회에 대한 예술혁명가들의 내전은 자본주의 기업가들의 승리로 끝났다. 상황주의자들 스스로 그들의 이미지 쟁투에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여긴 탓이다. 기업가들에 백기 투항하던 그 지점에서 당대 예술 혁명은 후쿠야마식역사적 종말을 고했다.

 



미니마폼즈(Minimaforms)

(Theodore and Stephen Spyropoulos) 

<메모리 클라우드 디트로이트(Memory Cloud Detroit)> 

2011 Detroit Institute of Art, Detroit, Michigan, United States




4차 산업혁명과 예술


다행히도 우린 좀처럼 귀환할 것 같지 않던 강렬한 혁명의 경험을 최근 오롯이 체득한 바 있다. 2016년 그해 겨울, 광장을 달구던 시민 촛불혁명의 기운은, 광화문 앞 공적 공간을 일시적이지만 매우 빠르게 매일매일을 거대한 시민 정동과 파토스(격정)를 수용하는일시적 자율지대(TAZ: Temporary Autonomous Zone)’로 이끌었다. 장소 특정적 예술 행동과 문화정치의 실천이 광화문 광장이란 플랫폼을 매개해 시민들 각자의 억눌린 욕망의 거대한 파고와 어우러지면서 공통의 정치 감각을 고양했다. 예술이 시민 정치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정치적 감수성을 끌어올리며 광장의 문화정치를 주도했던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 68혁명과 같은 민주 시위와 축제가 평화롭게 일렁이면서 공공의 공간은 빠르게 시민의 정치적 욕망의 장소가 되었고, 동시에 예술 행동의 에너지가 들끓었다. 우리식 예술 혁명의 발현이었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 광장을 메웠던 파토스(pathos) 혁명의 강렬했던 기운은 이제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살아 숨 쉬던 시민 광장 촛불혁명의 사라진 자리에 인공의 4차 산업혁명이란 테크놀로지 물신숭배만 남았다. 외려 동시대 예술은 정치와 사회 혁명의 목표가 사라지자, 첨단 자본주의 기업들의 기술혁명을 위해 액세서리처럼 매달린 모양새다. 광장 예술 혁명의 자리를 대신해, 이제 보란 듯이빅테크기업과 스타트업의 전속 아티스트들이인터랙티브’, ‘혁신’, ‘융합’, ‘창의성등의 명패를 다듬고 있다. 인공지능, 플랫폼, 데이터 알고리즘 기술 등은 우리의 새로운 사회 개조의 무기로 표상되고, 예술 창작자들은 기업 테크놀로지로 이뤄진 미래 혁명을 축조하기 위해 분주하다.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 또한 이제 창작 작업과 IT 기업들의 가전업체 전시장의 차이를 구분하는 법을 잊은 지 오래다적어도 인터넷의 등장으로 형성된 1990년대 중반경 이른바포스트-(대중)미디어로 표상되는 기술혁명의 시대에는, 현실 개입의 예술 표현과 저항 정신이란 새로운 사회미학적 혁명의 활력이 곳곳에 존재했다


디지털 문화는 전통의 표준화된 질서에 반해, 패러디, 혼성모방, 리믹스, 재전유 등 창의적 예술 표현과 자유에 숨통을 트였다. 전술 미디어, 온라인행동주의, 해커 행동주의(hacktivism), 사이버 문화정치 기획은 새로운 예술 행동의 계열체로 각광받았다. 이들 기획은 권력의 스펙터클 장치였던 대중매체의 쇠락을 이끌고 마이크로 전자 저항 정치이자 온라인 예술실천으로써 크게 주목받았다미디어 현상학자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 1990년대 초 자본주의적 기술 예속에 대항하는 신생 디지털 기술의 출현을 보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컴퓨터 예술가들과 프로그래머들이 근미래에 진정한 혁명가들이 될 것이라 언급한 적이 있다.5)





Gregg Bordowitz addressing a crowd in 

front of the Food and Drug Administration, Silver Spring,

 Maryland, 1988 Color snapshot © the artist

 



플루서는 디지털 전체주의에 대적할 혁명적 예술가의 전형으로 백남준을 꼽았고, 자본주의 통치 프로그래밍을 거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혁명가가 컴퓨터 예술가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플루서의 예언과 달리 제2, 3의 백남준은 출현하지 않았고, 오히려 오늘날 그를 훈고학적으로 기념하는 의례들만 늘었다. 이에 더해, 닷컴 기술혁명의 홍보 전시관에는 컴퓨터 혁명 예술가들 대신 임시직 프리랜서로 고용된 청년 창작자들의기술 숭고(technological sublime)’만 넘쳐난다한때 공학과 예술, 과학과 예술, 생명공학과 예술 등 상호 이질적 경계를 넘나드는 동시대 첨단 예술의 유연성을통섭이라 다들 칭송했지만, 주류 예술은 과학 기술에 대한 자본주의적 욕망을 대리 선전하며 이곳저곳에서 장신구 효과만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이념과 정치의 시대처럼, 21세기는 테크놀로지 물신숭배의 예술 장르들이 도구화된 미학의 기치 아래 이합집산하는 형세다. 이를테면, 민중미술의 투박하고 정치 과잉의 미학적 장치들에 거부감을 느꼈던 많은 창·제작자들은, 외려 부지불식간에 자본주의 테크놀로지로 세련된 기업 성전을 꾸미는 일에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생계를 위해 혹은 대중 창작의 일환으로) 가담하고 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예술 혁명


동시대 예술가들의 빈곤하고 위태로운 삶의 물적 조건은 더욱더 현대 자본주의에 공모할 것을, 그리고 주체의 의지 없는 형식주의와 추상 표현의 그늘 아래 다른 선택지 없이 고독한 창작에 머물 것을 강요받는다. 오늘날 창작자들은 예술 제도와 일상의 경계에서 그들을 뒤흔드는 크고 작은 권력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위계적 관계에 놓여 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라는재난 자본주의상황에서 통치 엘리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새로운 지구 재난 이후의 일상에서 더 확대하길 원하고 있다. 감염 공포로 인해 이른바비대면(비접촉)’ 사회에 대한 약속과 첨단 알고리즘 기술에 더욱 의존하면서, 창작자들의 물질세계 속 생활고는 더욱 가중되는 동시에 기술 예속까지 심화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미디어 이론가 프랑코 베라르디(Franco Berardi)의 경고처럼, 우린자본주의가 부과하는 착취, 감수성을 가진 신체 정신과 (첨단 기술로 매개된) 기능적 실존 사이의 분리로 고통받으면서, 그 어떤 의식적인 (사유나) 집단적 주체화 과정도 시작할 수 없어 보인다.”6)


1968년 한 선지자가 동북아 끝자락에서 외치던 일상 혁명론은 이제 일장춘몽처럼 그리고 신기루처럼 저 멀리서 아른거리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테크놀로지로 더 강고해진자본주의 리얼리즘아래 지금과 다른 삶을 구성하기 위한 새로운 혁명의 감각과 희망을 버리지 말자 외쳤던 앞서 피셔의 언설을 곰곰이 되씹어봐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자본주의의 예속 상태가 지속되는 한 다른 삶을 그릴 유토피아의 미학적 상상력은 너무도 절실하다. 혁명의 귀환을 위한 예술이 필요한 까닭이다보리스 그로이(Boris Groys) 식으로 보자면, 우리의 예술은 우선 정서적으로억압하는 힘으로서 경험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미학적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7) 달리 보자면, 예술의 힘은 체제의 물질·심리 스트레스로부터 오는 우리 자신의 무기력을 털어내고 저마다 존재론적 문제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시대 감수성을 배양하는 데 있다. 결국, 지금의 강고한 현실에 틈을 벌리는 일은, 완전히 다른 삶을 위한 혁명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외연화하는 미학적 실천, 즉 예술 혁명에 달려있다.  

 

[각주]

1) 함석헌『사상계』, 180, 1968.4 / 『함석헌전집』2한길사, 1988

2) 김규항『혁명노트』알마, 2020, p. 102

3) 마크 피셔(Mark Fisher),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박진철 옮김리시올, 2018

4) Anatoli Lunacharsky, “Revolution and Art”, in: John E. Bowlt (Ed.), Russian Art of the Avant-Garde: Theory and Criticism 1902-1934, London: Thames & Hudson, 1988, p. 191

5) 빌렘 플루서「예술과 컴퓨터」『피상성 예찬』김성재 옮김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참고

6)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미래 이후』강서진 옮김난장, 2013, p. 69

7) Boris Groys, “Towards the New Realism”, e-flux Journal, #77, 2016 https://www.e-flux.com/journal/77/77109/towards-the-new-realism/



글쓴이 이광석은 테크놀로지, 사회, 문화가 상호 교차하는 접점에 비판적 관심을 갖고 연구와 비평, 저술과 현장 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 비판적 문화연구 저널 『문화/과학』 공동 편집주간이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로 일한다주요 연구는 기술문화연구, 예술 행동주의, 플랫폼과 커먼즈, 인류세, 포스트휴먼 등에 걸쳐 있다. 지은 책으로는 『디지털의 배신』, 『데이터 사회미학』, 『데이터 사회 비판』, 『옥상의 미학노트』, 『뉴아트행동주의』, 『디지털 야만』『사이방가르드』 등이 있고기획하고 엮은 책으로는 『사물에 수작부리기』, 『현대 기술·미디어 철학의 갈래들』, 『불순한 테크놀로지』 등이 있다.

 



 

vue de l’exposition

 <Rouge. Art et utopie au pays des Soviets> 

Grand Palais 2019 scénographie Valentina Dodi et

 Nicolas Groult © Thibaut Chapotot pour la Rmn-Grand Palais





Special feature Ⅱ

한국미술 100년과혁명의 좌표

 최은주 대구미술관장

 


정치이론, 영화이론, 정신분석학 등을 넘나들며 사회현상을 분석해 온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에게도 한국은 매우 특별한 나라로 비춰지는 모양이다. 2013 9 27일부터 30일까지코뮌주의의 이념이라는 제하의 서울 컨퍼런스에 참여한 슬라보예 지젝을 이택광이 인터뷰했는데, 여러 논의의 전개에 앞서 그는 무엇에도 여과되지 않은 한국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한국(지젝은 남한이라 표현한다.)을 북한만큼 기이한 나라라고 이야기한다.1) 한반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체제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물론 북한은 더 이상 공산주의 국가라고 보기도 어려운 순수한 군사국가이다. 심지어 스탈린주의조차도 북한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북한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이야기했다간 위험에 빠질 것이다. 남한은 어떤가. 남한이야말로 충격요법(shock therapy, Naomi Klein)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국가일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고, 파괴적인 한국전쟁을 지나왔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경제개발은 초거대자본주의를 완성했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문화적 야만주의 또는 허무주의를 낳았다. 그 사례가 싸이의 <강남스타일>일 것이다. (후략)”





강용택 <공생> 2006 종이에 채색 91×72.7cm 

이미지 제공: 제주도립미술관  

2. 맥스 데스포(Max Desfor) 

한국전쟁 기록사진 이미지 제공: 국가기록원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외국인 학자의 이와 같은 한국에 대한 개괄적 이해는 오히려 통찰력 있는 객관성을 보여준다. ‘충격요법이라는 용어는 한국이 20세기와 21세기를 거치면서 겪어낸혁명혹은혁명적 사건들의 또 다른 표현이다아마도 한국은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도 가장 빈번하면서도 다층적으로혁명’, ‘전쟁’, ‘분단’, ‘통일의 주제를 다루는 예술가들이 등장하는 나라일 것이다. 서화가 미술로 변신한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수많은 사람의 의식 속엔 이전의 봉건적 질서를 근대적 변혁으로 바꾸고자 하는 혁명적 의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들이 어떤 좌표를 그리는가에 따라 한국 근대 미술의 상황과 지평이 펼쳐졌다. 일본의 식민통치, 광복, 한국전쟁은 혁명적 좌표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더욱더 역동적인 것으로 전개시키는 동인이 되었다. 큰 얼개에서만 살펴보더라도 이러한데, 이 역사의 흐름을 몸소 살아낸 사람들 개개인의 미시사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것이었음을 몇몇 사건과 인물들이 사례로서 보여준다.

 


근대미술의 혁명가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20년대를 회상해 보자. 1919 3.1운동 이후 민중의 개념을 접한 조선의 문학가와 화가들을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 이론이 문화계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들로 결성된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일체의 전제세력과 항쟁하고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 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채택하고 대규모 문학, 예술운동을 벌여 나갔다.2) 피식민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소련의 레닌주의 노선 속에서 민족적 희망을 걸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반제국, 반일본 운동을 진행시켰고 그것이 미술의 영역에서는 만화, 포스터. 판화 등의 형식을 통해 사회개혁을 고무시키는 미술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미술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김복진이었다


김복진은 조각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혁명적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글도 다수 발표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자로서의 면모는 그의 글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1923년 발표된 「상공업과 예술의 융화점」이란 글에서 김복진은민중이야말로 참으로 문명의 창조자란 전제 아래, ‘예술은 부르주아의 도락이나 완구가 아니며, 인간이 노동하는 그 환희를 표현하는 것이고 나아가예술은 결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고 민중을 위하는 예술, 우리 민족을 위하는 예술이라는 주장을 펼쳤다.3) 1920년대 조선의 예술계가 단지 사회주의의 구호만으로 가득 찼던 것은 아니다. 화가이자 문필가이기도 했던 나혜석은 <인형의 집>과 같은 시를 통해 봉건적 관습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페미니즘적 주장을 지속적으로 내세웠다.4) 김복진과 나혜석은 결국은 실패한 혁명가로서의 자취만을 남겼다. 그들은 혁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근대의 사회적 환경과 구조 속에 희생된 개인들이다.





홍선웅 <제주 4.3 진혼가

2018 목판화 62×182cm 작가소장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1927-1931년 조선의 화단은 프롤레타리아미술과 심미주의 미술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에 휩싸인다.5) 이들 논쟁을 통해 사실주의와 심미주의의 차이점이 부각되고 동양주의 미술론이 제창되기도 하였으며 동양정신주의에 바탕을 둔 향토예술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근대미술 비평 연구에 천착한 최열은 이런 논쟁들이 1930년대 미술의 이념과 미학·양식의 수준을 자기화 단계로 이끌어 올린 지적 체험이었다고 서술했다. 특히 심미주의 대 사실주의 대립 구도는 시대에 따라 한쪽으로 기울기도, 균형을 이루기도 했지만, 한국 20세기 미술을 긴장시킨 근본 동력이자 사유의 거점이었다고 평가했다우리 화단에서 1930년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시기부터 1945년 광복의 시기까지를 근대 유화의 정착기로 보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작가의 개별적 독창성이 발현되고 독자적인 조형 세계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유화가의 수적 증가는 수묵채색 화가들을 앞질러 우리 화단의 중심세력으로 급부상하였다. 많은 단체가 결성되었고 다양한 양식이 실험되었다


이 작가들은 고전주의와 인상주의의 절충 형태인선전의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표현주의, 상징주의, 입체파 등의 신사조 유입을 시도하였다. , 1930년대 초반에 이르러 모더니즘의 발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환기 등을 필두로 당시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조선시대의 문인정신과 문인화, 민예품, 전통의상, 풍속 등을 연구하며 이를 작품의 소재와 주제로 개발하려 노력함으로써 일본과 서구와 미술과는 차별되는 정체성을 탐구하는데 진력했다. 전위적, 혁명적 의식을 예술적 실험성과 연결시키려 했던 노력들이었던 것이다.





윤중식 <피난길> 1951 종이에 수채 

개인 소장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1945년 이후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은 작가들로 하여금 치열한 이념논쟁을 다시금 일으킨다. 휴전까지 많은 작가들이 숨지거나 납북, 월북되어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한국 근대미술의 중요한,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 이 시기 이쾌대라는 인물의 등장과 월북은 화가의 삶과 예술이 이념적 간극에 의해 어떤 선택을 가능하게 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좌익 문필가이자 사상가였던 이여성을 친형으로 두었던 이쾌대는 좌, 우익의 이념적 분쟁 속에서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배척당하는 비운의 화가이다. 1940년대 후반에 그려 놓은 자화상은 그가 어떤 화가였는지를 보여준다. 세상에 맞서는 듯 정면상으로 그려진 이쾌대의 강인한 얼굴에서 혁명가 이쾌대의 당당한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그림 속에서 그는 서양식 팔레트와 동양식 붓을 들고 있다. 서양화법을 받아들였으나 조선인 화가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새롭게 세우고 말겠다는 결의를 담고 있다. 화가의 내면에 자리한 혁명의식이 예술적, 사회적 소명의식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이 그림을 통해 잘 알 수 있다한국전쟁 이후 남한의 정권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쾌대를 비롯해 월북한 많은 예술가들에 관한 어떤 자료와 기록도 철저히 지워져 버렸다. 반면에 남한의 화가들은 반공의 이념을 표상화한 그림을 생산했고 비평가들은 그들의 작품에 옹호적인 비평을 얹어 놓았다. 시간이 흐르며 남한에서는 사실주의 미술이 쇠락해 가는 한편, 1950년대 후반 즈음에는 앵포르멜(Informel)이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전후 국제 미술계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추상미술이 주류를 형성했다.

 


1980년대 이후 예술의 혁명을 꿈꾼민중미술가


1980년 등장한 한국 민중미술의 특성, 대표적 작가들에 대해선 많은 논설들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이 글에서 이런 내용을 반복하지는 않으려 한다. 대신 두 작가의 작품을 통해 민중미술의 지향성이 어떻게 분화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임옥상의 <하나됨을 위하여>(1989)는 직설적으로민중미술의 지향성을 제시하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이 제작된 해인 1989년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도 매우 큰 파장을 일으켰던 정치적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던 해이다. 대표적인 재야 종교인의 한 사람이었던 문익환 목사가 3월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을 면담하였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추천으로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방문하였으며, 대학생이었던 임수경 역시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등에 참가한다는 명목으로 북한 땅을 밟았다


이 작품은 그런 일련의 사건 중에서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민중미술의 대표적 작가인 임옥상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전환시킬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될 것으로 인식했다. 휴전선 철조망을 훌쩍 뛰어넘고 있는 발걸음을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작가는 작품의 주제가통일과 평화를 향한 발걸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의미 있는 발걸음이 한 개인에 의해 시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는 철조망을 뛰어넘는 문익환 목사를 의지력 강하면서도 활기찬 거인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문익환 목사는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어 마치 근대기 조국의 해방과 통일을 위한 헌신했던 의사(義士)의 모습처럼 재현되고 있다.





이쾌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72×62cm 개인소장 


 


모두 다 알다시피 오윤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중미술 작가이고 그가 다루었던 대상도 노동자, 농부 등 현실적 삶을 상징하는 사람들이었다. 1970년대에 제작된 그의 초기 목판화대지시리즈나 <모자>, <짊어진 사람> 등은 청년기 오윤의 시대와 사회에 대한 날선 의식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보여준 변화는 좀 더 전통적인 것, 보다 민속적인 것, 보다 원형적인 무엇이었다는 것을’, ‘도깨비’, ‘원귀도같은 연작이 보여준다. 불과 40세에 요절한 오윤은 작고하기 직전 3-4년 동안에 목판화 명작들을 쏟아내듯이 제작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의 각법은 더욱 변화무쌍하고 단호해졌으며 형상을 그려내는 화가로서의 상상력은 더욱더 풍요로워지고 주제의식은 더욱 선명해졌다. <팔엽일화>(1985)는 여덟 장의 잎이 모여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 연화도이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꽃잎 속에 새겨 그려진 인물들은 모두 원귀, 굶어 죽었거나, 목이 잘려 죽었거나, 창에 찔려 죽은 억울한 영혼들이다


그렇지만 그림의 한가운데에는 그들의 원한을 모두 씻어내어 풀어주는 춤추는 어미가 있다. 불쌍한 영혼들을 힘찬 춤사위로 구원해 주는 어미의 불끈 쥔 두 주먹과 굳건한 버선발은 시공간을 진동시켜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듯이 보인다만약 두 작가에게민중미술은 혁명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아마도 직답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중미술은, 한국 미술사에 있어 매우 소중한 자생적 모태의 하나를 형성하였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임옥상류의 직설법이든 오윤류의 상징법이든 간에, 민중미술은예술의 혁명을 통해사회적 혁명을 이루고자 투쟁했던 근대기 선구자들의 진보적 의식과 연결되는 새로운 좌표를 설정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미술 40년이 경과한 지금, ‘예술에 있어서 진정한 혁명은 무엇인가?’ 혹은진정한 혁명을 꿈꾼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계속되고 있다.  

 

[각주]

1) NOON 5: 사회 & 사회적인 것』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2013, p. 118

2) 1925 8월에 결성

3) 김복진「상공업과 예술의 융화점」『상공세계』, 1923.2.: 최열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중엽까지의 미술비평의 전개」『한국미술100년』국립현대미술관 기획/김윤수 외 57인 지음한길사, 2006, pp. 613-615에서 인용

4) 나혜석「인형의 집」『매일신보』, 1921.4.

5) 최열위의 글, pp. 616-617



글쓴이 최은주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술이론으로 석사학위를, R. 타고르의 교육철학과 산티니케탄 미술학교 칼라-바반 연구」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9년부터 2015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학예연구관, 덕수궁미술관장, 학예연구실장, 서울관운영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경기도미술관장을 지냈고 현재 대구미술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기획전으로 <한일현대미술교류전>, <아시아 큐비즘>, <아시아 리얼리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전 <연결_전개>(2013), 시애틀 아시안 아트 뮤지엄(Asian Art Museum) <한국 현대미술전: Paradox of Place>(2015), 경기도미술관 <세월호참사2주기 추념전: 사월의 동행>(2016) 등이 있다.


 



오윤 <대지V> 1983 천에 잉크 

41.5×35.5cm 이미지 제공: 광주시립미술관





Special feature Ⅲ

자르기, 복사하기 그리고 붙이기 - 새로운 인터페이스로서의 미술

 장진택 큐레이터

 


기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능하며 우리 인간을 보조하는 동시에, 때로는 적극적으로 구조를 선도하면서 사회와 이를 구동하는 삶의 혁명적 움직임에 언제나 관여해 왔다. 이러한 발전적 양태에 의해 인간과 사회는 자신을 고립시키거나 혹은 해방하기도, 또는 한 걸음 전진하거나 후퇴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미술은 자료를 표현하거나 처리하는 방식으로의디지털기술이 만연한 작금의 환경에서 자기 확장과 축소를 영원히 반복하며 인간과 사회를 자신의 계열을 다방면으로 분화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디지털 세계의 저장 매체와 인지 구조가 야기한 이미지의 과잉 현상 그리고 시청(視聽) 감각을 중심으로 담론과 작업을 생산하는 미술 사이의 상관관계다


미술의 근간을 이루는이미지에 관한 인식 자체가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변함으로써 미술과 이미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작가와 작품 등의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찾는, 달라져 버린 상황이 미술계에 도래한 것이다. 범람하는 이미지는 시각 예술의 범주를 전통적으로 지배해 온 조각, 설치와 같은 입체나 사진, 회화와 같은 평면 매체를 다양하게 확장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 그리고 이를 감각하거나 지각하는 의식 행위가 변하면서 미술은 미적 체제를 새로이 구축하기를 안팎으로 요구받는다. 최초의 웹 브라우저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개방과 공유의 시대를 출현한 2.0(Web 2.0)’은 가상공간과 관계망 제도를 사회 구조의 일부로 편입하는 사건으로, 이후의세계에서 미술은 인간과 사회를 이어낼 수 있는 다른 형상의 가교를 상상해야 했다. 물리적 세계관에서 가상적 세계관으로의 환경적, 의식적인 전환은 정보에 대한 접근성의 측면에서도 분명 괄목할 확장 양상을 보였으며, 그리고 이는 예술이 지향하는 주요 가치 중 하나인다양성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폴 바누스(Paul Vanouse)

 <Labor> 2019 Photo: Tullis Johnson




이 다양성은 모든 기반 조건들을 데이터화하는 가운데 일어난 매체와 개념, 두 측면에서의 예술적 활용과 미적 구성에서의 다층화를 통해 제 가치의 폭을 한층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규정한 경계는 필연적으로 무너졌고 미적 체제의 정치적 해방을 도모하려는 징후가 잇따라 감지되었다. 그러한 시도는 곧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 질서의 재배치와 의미 맥락의 재편과 같은, 모든 것이 달라진 신세계를 열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엄습을 예민하게 받아들인 당대의 예술가들은 이제 틀 혹은 범주라는 이름으로 한정된 그 바깥을 향해 능동적으로 이탈하거나 주체적으로 그 내부에 안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듯하다. 어떠한 촉구에도 구애받지 않은 채 이들은 자유로이 자신의 중심과 주변을 원경화하거나 혹은 근경화함으로써, 이를 작업을 위한 예술적 장치나 미적 방법론으로서 무한정 이용한다


따라서 미술은 이제 신화에서 탈주하여 인간과 세계를 실용적으로 교류하는인터페이스(interface)’, 즉 서로 다른 다중적 구조와 그 구성 요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보 교환의 지점이 생성하는 공유 경계로서 일종의 접속기적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가상계와 실재계 그리고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가로지르는 인터페이스를 자처하기 시작한 동시대의 미술은 그것이 처한 시대 상황적 특징을 오롯이 끌어안으며 인간과 세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세계와 세계를 구분하거나 조화롭게 만든다. 이 새로운 미적 체제 축조에 있어유사혼종그리고차용전유의 개념이 이전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제를 작동시키기 위해 능동적으로 개입한다.





에드 앳킨스(Ed Atkins) Installation view, 

Serpentine Sackler Gallery, London 

(11 June - 25 August 2014) © 2014 READS




이른바유사-회화(pseudo-painting)”의 주창을 통해 이미지와 회화성을 탐구하는 윤향로는, 디지털 네트워크 환경에서 이미지의 홍수가 떠올린 재맥락화의 방법론을 통해 회화의 좌표 설정을 다시 설정함으로써 그 위상을 새로고침(Refresh)한다. 이를 위해 그가 구현하는 가상 합성 이미지는 오로지 스크린 혹은 모니터 안에서 데이터 값으로만 존재하며, 그 이미지 대상은 디지털 시대를 가로지르는 담론 형성에서 예술적 매체의 지위를 도맡는다. 작가가 그린 기술기반 이미지는 그에 관한 미학적 논쟁을 물리적 재현에 기초한 전통적인지시성으로부터유사성으로 이전한다. 그리고 그 화두의 이동 중에, 원본과 재현 대상의 관계를 가교할 수 있는무엇이 쟁점으로 부상한다. 윤향로의 ‘Blasted (Land) Scape’(2014) 연작은 이러한 요청에 대하여차용의 논리를 그 호응의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작가는 만화 영화로부터 발췌한 효과의 표현법, 말하자면 대중문화의 영역에 속하는 만화 영화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잘라내고 그것을 붙여 넣으며 다시 하나의 풍경을 그린다. 작업에서 차용하는 이미지들은 그가 수집한 원본 이미지들에서 우리가풍경이라고 인지할 수 있을 법한 부분으로, 이 이미지는 그것이 역할하던 원래의 서사를 상실하고 새로운 맥락에서의 상영을 위해 조작된으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한다. 이와 같은 방법론을 통해 윤향로는 그가 작품 안으로 끌어오는 차용 이미지들의 구성 과정에서 도출한 이차적 결과물, 그 자체를 새로운 작품으로 일어서게 하면서 작업을유사-회화의 단계로 진입시킨다. 이처럼 윤향로의유사-회화개념은원본 이미지혹은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계속해서 주관적으로 재가공하면서 현재의 미술에 대한 지위를 다시 세운다. 다른 한편 작가는 평면 회화라는 특정한 매체의 예술적 지위에 대한 문제 인식을 배경으로 유사 개념 자체의 미적 의미와 방법론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면모를 작업에서 드러내기도 한다


한 시간가량의 러닝 타임을 갖는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 <First Impressions>(2014)는 영화, 드라마 그리고 만화의 일부를 잘라내어 만들어진짤방(짤림 방지용 이미지)’ 혹은움짤(움직이는 짤방)’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이어 붙여 제작한 작업이다. 짤방이라는 용어는 인터넷 개발 이후에 등장한 신조어로 영어로는(meme)’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움짤이나 짤방은 보통 이것이 분절되기 이전의 서사 맥락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말해 사용자가 재구축하는 무맥락적 의미에서 의미를 양산하는 표현 양식으로 사용한다. 이때 작가는 수집한 이미지를 일정한 서사로 배열하기 위한 먹줄로서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이 저작한 소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의 서술을 인용하는데, 개개의 무의한 움짤들의 연속은 무관한 자막과 함께 다시 한 번 조응하며 작업을 완결한다. 이로써 그는 원본의 제 맥락을 잃어버리고 유영하는 이미지들을 필두로 작가 자신, 관람자 그리고 작품을 각기 다른 구조로 치환하면서 작업에게 이들 사용자 간에 벌어지는 공유의 경계면을 형성토록 한다. 그러한 미적 체제 안에서 윤향로의 작업은 서로의 고유한 제언을 파열하는 관계 속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해방을 위한 장으로서 현현한다.





미니마폼즈(Minimaforms)

(Theodore and Stephen Spyropoulos)

<Emotive City> 2015 Nesta Innovation 

Department Commission, London, England




반면 최하늘은 조각의 영역에서 추출과 인용의 기법을 구사한다. 그는 수집한 여러 이미지를 그 나름의 편집 층위를 거치며 재조합하는데, 그 절차와 과정에서 작가는 소위혼종-조각(hybrid-sculpture)”의 개념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사회를 꿰뚫고, 아우르며, 반영하는 이미지와 그 개념을 작업에 끌어들이며 원본과 복제본, 미술과 디자인 그리고 생산과 소비와 같이 상호 대립하거나 충돌하는 구조 사이에서 전유의 미적 체제 건축법을 고안한다. 그리고 최하늘이 소환하는 당대적 이미지, 이를 짜깁기하는 작가의 방법론 그리고 그 방법론을 구체화하기 위해 요구되는 시대 초월적인 이미지 해제 시도는 각기 다른 이미지 계층의 의미를 분할하는 것으로부터 디지털 세계의 정신과 공명을 시작한다. 이는 이미지 인식의 체제를 새롭게 인정할 것을 종용하는 그의 전시 <NO SHADOW SABER>(합정지구, 2017)에서부터 출발한다


디지털 시대 이전의 이미지 체제가 재현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내고자 캔버스 위에 새기는 어떤 기억을 소환하고자 했다면, 그와는 달리 현재의 경향은 얇고 평평한 가상의 캔버스라는 매체 그 자체에 상징적인 영속성을 부여한다는 점에 최하늘은 집중한다. 또한 작가는 평면성에 대한 변화한 인식으로부터물성이라는 미적 개념도 이미지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달리 인식되어야 함을 전한다. 최하늘이 18세기 서양의세이버 검술(saber exercise)”을 인용하면서 두께감이 사라진 매스의 영역, 즉 대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의 역사적 맥락을 상기시키고자 한 것도 바로 그의 인식에 기인한다. 본 전시에서 최하늘은 베어내고 잘라낸 이미지를 수합하고 그것에 다시 물질감(mass)을 덧입히는 방식을 구사함으로써 미적 형상을 조각하는데, 이러한 조형은 이미지 자체뿐만 아니라 새로운 체제 인식의 태도를 위한 균열을 일으키면서 파편화된 이미지들에 허락되지 않았던 합일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태도를 작업화함으로써 작가는 새롭게 도래하는 세계에 걸맞은 미적 체제의 인식법을 고민하는 한편, 이러한 체제 역시도 불가피한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이렇듯적층접붙이기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미적 체제와 그것이 요하는 인식 체제를 매만지는 최하늘은 <카페 콘탁트호프(Cafe Kontakthof)>(산수문화, 2018)전에서 그 의지의 양상을 좀 더 명료하게 밝힌다. 본 전시에서 작가는 전시 공간 전체를 가상의 카페로 인식하도록 연출하고 일종의 무대로서 전시와 공간을 규정하면서, 이를 통해 카페라는 공간에서의 특수 경험을 디지털 이미지 소비 방식과 직결시키고자 한다. 그는 이로써 원본과 복제품의, 주체와 객체의 그리고 부분과 전체의 경계를 자연스레 허물고 연관 없는 시차로 상호 이질하다고 여겨졌던 무엇들을 섬세하게 이합하거나 상충시킨다. 이로부터 그는 이미지가 촉발한 인식 체계의 전환을혼종의 매체 개념으로 치환하고, 현재로부터 과거를 단절하며, 현재의 체제를 향한 동시대적 인식 재편을 근본적으로 청원한다


그러나 이 진정 어린 청원 또한 언젠가는 지나간 역사로 반추할 수밖에는 없는 것일까. 한국 모더니즘 조각의 거장 김종영을 소환하는 전시 <(Siamese)>(P21, 2020)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탐구한다. 전시에서 최하늘은 극복과 의심의 대상으로서 바라보는 김종영을 정체성이라는 개념의 틀 안으로 밀어 넣으며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그것을 뒤섞는다. 이러한 실천은 그 자체로 기존의 예술 체제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하나의 징후이자 사회와 예술 사이의 위상학적 평행 관계를 폐지하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다가온다. 어쩌면 최하늘은 신체를 통해 감각하는 물리적 차원의 수준, 그것을 바탕하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지금이 통용하는 새로운 가치는 이전의 많은 선례처럼 금세 잊혀져 버릴 것임을 호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권위를 통념적으로 더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 이 지점에서 최하늘과 동시대는 서로를 응시한다.




<카페 콘탁트호프(Cafe Kontakthof)>

 전시 전경 2018 산수문화 




변화하는 미적 체제의 현현과 그 기저에 관한 이제까지의 기술은 그 고유한 체제가 이제껏 펼쳐온 특정한 혁명의 기체 그리고 그 형상의 또 다른 의미를 파악하려는 현상적인 논의다. 물론 이 활동지대를 넓게는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변주로서, 좁게는포스트-인터넷 아트(Post-Internet Art)’ 혹은매체(medium)’ 담론 일부를 구성하는 미술사적 면면으로 누군가는 포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후자의 경우에서 이를 제창한 마리사 올슨(Marisa Olsen)의 예술 운동 이래, 아티 비어칸트(Artie Vierkant)이미지 오브제(Image Object)”,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푸어 이미지(Poor Image)”, 멘디 &키스 오버다이크(Mendi & Keith Obadike)나 코리 아칸젤(Cory Arcangel)사회 참여적 뉴미디어 아트등의 개념에 빚을 진 초기 움직임으로부터, 가깝게는가상 현실(Virtual Reality)’과 같은 최신의 매체를 예술적으로 재활용하는 룸톤(ROOMTONE)과 로렌스 렉(Lawrence Lek)이나, 그러한 흐름과 상응하는 개념 차원에서의 작품을 선보이는 에드 앳킨스(Ed Atkins), 조던 울프슨(Jordan Wolfson) 그리고 김희천 등의 동시대 활동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이들을 거대한 계승의 방향성 아래미디어 아트(media art)’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라는 범주에 편입해 왔다


물론 윤향로와 최하늘의 작업 역시 여전히 그와 같은 역사적 범주화의 연장선에 있음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새로운 시대라는 상위 구조에의 동기화를 위한 하위 구조를 실험한다는 점에서, 나아가 그들이 제안하는 구성의 척도 그리고 그것을 향한 인식 전도의 시도는 현재의 미적 체제를 동시대적인 관점에서 재편하고 그 체제에 접속할 각기 다른 층위의 주체에게도 이에 부합하는 위상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덧붙여 이러한 체제가 실현하는 예술적 파급은 이상의 범례, 이에 더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엮는 미적 체제와 그 주체의 존재에 관한 상시적이고 실시간적인 논의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상기한다. 그로부터 혁명은 더 이상 다가올 모호한 추상이 아닌 언제나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명징한 구상임을, 나는 다시금 돌이킨다.  

 


글쓴이 장진택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큐레이터로, 영국왕립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 동시대 미술 큐레이팅(Curating Contemporary Art) 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일민미술관, PLATFORM-L Contemporary Art Center 등의 기관에서 전시를 기획하였고, 최근에는 현대자동차 오픈이노베이션 플랫폼 ZER01NE 크리에이터 스튜디오의 팀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동시대성과 한국 현대미술에서의 큐레이팅 실천을 연구하며 전시와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최하늘 <대체시선용 조각(부분)>

 2018 40×40×1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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