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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19, Aug 2016

박인경
Park In Kyung

추상이 된 자연, 자연이 된 심상
박인경 화백은 현대로 들어서면서 퇴진일로에 있는 동양화의 전통을 계승하여 살리면서 새로운 방향의 경지를 이루어보겠다는 평소 소신대로 지필묵의 평면작품을 평생에 걸쳐 하고 있다. 그에게 전통은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한 존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는 젊은이로 이어지지 않는 예술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소신을 밝힌 적이 있다. 크고 복잡한 작업방식보다 지필묵의 간단함과 단순함을 선호하는 그의 예술 세계는 화선지가 차고 넘치게 하는 혁신의 공간이다. 그의 이러한 실험정신은 추상과 구상을 넘나든다. 이러한 시도는 붓의 일획을 따라 인체의 형태를 단순하고 간결하게 표현한 반구상 계열의 1950년대 작품 등에서 드러난다.
● 글 이지호 이응노미술관장 ● 사진 작가 제공

'산(Montagne)' 2015 한지에 수묵 68×6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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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호 이응노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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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프랑스 남쪽 셍떼니미(Saint-Enimie)에서의 화선지 위에 수묵채색 작품 <셍떼니미의 빛>에서 보듯이 박인경 화백은 의도적으로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동양화의 오래된 전통에서 벗어나 유럽의 앵포르멜(Informel)의 조형성을 과감하게 차용하여 한국화의 새로운 세계를 펼쳐나간다. 작품에서는 형태가 사라지고 흑백의 대담하고 무작위적인 자국과 번짐만이 남는데 이는 앵포르멜,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 등 서양현대미술에서 볼 수 있는 드리핑 (dripping)과 푸어링(pouring) 기법이다. 물감의 얼룩과 자국이 그림의 주요 모티브로, 대상의 형태가 색채 속으로 사라진다. 


여기서 동양화의 골법용필(骨法用筆) 운필(運筆)의 중요성은 무시된다. 오직 물감을 들이붓는 행위로부터 신체와 재료가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에너지(, )가 존재할 뿐이다. 그녀는 동양화의 근본이 되는 살아 있는 선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림을 그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옛 것을 모범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지만, 절대로 옛 것에 얽매이지 말라는 계림왕부 석도(石濤, 1642-1707?)의 가르침을 따르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 것이다. 종합적인 것에서 예술이 탄생하며, 이는 독일 전시에서 목격한 그녀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파열(Composition)> 1960 한지에 수묵담채 130×67cm  




박인경 화백은 1980-90년대에 다시 풍경화로 돌아오게 된다. 이 무렵 한글을 중첩해서 생긴 이미지와 마티에르의 효과와 여백의 공간이 어우러진 풍경화도 그린다. 글씨를 소재로 한 풍경화는 그만의 독특한 개성과 한국화가 갖는 보편성을 조화롭게 아우른 작품이다. 화폭의 단순함 안에 내재된 그의 자전적 이야기는 항상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그의 환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화백의 풍경화는 점점 화면의 여백을 검은 먹의 농담으로 채워 일체의 수식 없는 절대 공간을 만들어 낸다. 


여백이 검은 바탕이 되고, 검은 바탕이 여백을 만들 듯 여백과 이미지의 경계가 모호하다. 주관은 객관을 위해 존재하고, 객관이 주가 되어 주관이 되게 한다는 그의 말처럼 결국 작품에서 작가와 대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인간과 자연, 추상과 구상이라는 이분법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오직 사라진 사이의 행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필획은 “하나에 만법(萬法)이 깃들이고, 만법은 하나로 귀결 된다”라는 석도의 일획론(一劃論)에 근거하듯 거침없이 대상을 생략하고, 공간을 담담하게 강조하는 것이 그의 특기이자 특징이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반드시 그리는 것만은 아니다. 여백과 기운생동 이론이 동양화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여백은 일상에 존재하고,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들 그 자체가 여백이다. 그것이 곧 추상이 되는 것이다.  





    

<(Montagne)> 2015 한지에 수묵 68×68cm




지난달부터 대전 이응노미술관에 선보이는 박 화백의 전시는 총 4개 파트로 구성된다. 1전시실은 박인경의 주요 연보와 1950년대 반구상 및 1960년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드리핑 기법의 번짐과 자국의 수묵추상작품을 전시한다. 2전시실에서는 대담하게 생략된 구도와 표현 방법이 돋보이는 수묵추상을 선보이는데, 박인경의 본격적인 추상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대상의 본질을 추적해가는 과정 자체가 추상으로, 결과보다는 과정의 흔적이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3전시실은 화면의 상단에서 하단으로 흐르며 빠르고 두툼하게 뻗은 검은 먹선과 언뜻 나무와 사람의 모습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과감한 형태의 수묵화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담아내기 위해 지독하게 몰입하는 작가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4전시실은 시집을 2권 발표한 문학가이자 화가인 박인경의 예술사상이 드러나는 글과 소품들을 소개한다. 박인경 화백은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해온 원로작가인데도 그동안 우리 화단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개인전과 그룹전 등을 열기도 했으나 1958년 도불 이후 프랑스를 기반으로 유럽 등지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작업세계를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세브르의 달> 한지에 수묵담채 1964 127×65cm  




그러나 한국 미술사적으로 볼 때 한국에서 사라져가는 수묵화의 전통을 이어가며 현대적인 구도와 파격적인 공간감을 살린 이번 전시는 화가로서의 박인경을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이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선택한 그에게 해외생활은 한국화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게 해 주었고, 유럽미술과의 조우는 작업의 밀도를 높일 수 있는 자극이 되었다. 동양의 지필묵으로 서구현대미술의 한계를 넘어선 그의 작품세계는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미술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 보인 것이다. 


박인경은 동시대 미술의 역동적인 흐름을 따라 한국화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모색한 한국 모더니즘(Modernism) 미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한국 모더니즘미술은 서양미술의 도입과 수용에서 시작되었고 그 과정도 단편적이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졌으나, 해방이후 서구 모더니즘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한국현대미술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특히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며 한국현대미술의 기초를 닦은 이응노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화를 전공한 박인경은 서양화를 공부한 다른 작가들에 비해 서양미술에 대한 정보에는 다소 어두웠으나 박인경의 역사의식은 시대정신으로 이어졌고 그녀는 미술을 전통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문학을 통해 심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사회개혁 의식과 자유 의지는 미술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비의 흔적 Ⅰ> 2014 한지에 수묵 135×69cm




한국화단은 해방 이후 좌익과 우익의 분열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고, 6·25 전쟁이 터지면서 혼란이 거듭되다가 1950년대 후반에 와서야 어느 정도 정상을 찾게 된다. 이후 다양한 모색과정을 거쳐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한국적 모더니즘이 정착하게 된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모더니즘미술이 시작된 것은 1950년대 말인데 이 시기는 특히 전후의 시대적 위기감을 반영해 서정추상 앵포르멜 미술이 전개되었다. 일부에서는 앵포르멜이 시작되는 1957년을 한국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는데, 박인경 화백이 이응노 화백과 함께 파리로 떠난 해가 바로 1958년이다. 




<(La pluie)> 2009 한지에 수묵 105×105cm




앵포르멜 운동은 한국화단의 주류였던 사실주의적 아카데미즘 양식을 배격하고 추상 중심의 실험 정신을 표방하였으며, 권위적인 국전의 형식에 반발하였다. 앵포르멜 미술은 이처럼 권위에 대한 도전, 개인의 표현과 창조적 자유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사회 개혁 의식과 미술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특히 앵포르멜은 한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집단적 현대미술운동이며, 일본을 거치지 않고 들어온 서양미술 양식이다.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이응노와 박인경이 존재하는 것이다.  



 

 

박인경

ⓒ 이응노미술관 2016



박인경 화백은 1926년 서울에서 출생해 우리나라 최초로 미술학부가 설립된 이화여자대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다. 대학을 졸업하던 1949년에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생활현장을 그린 작품<채석장>으로 입상하면서 화단활동을 시작한 그는 보수적이고 아카데믹한 학교보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사생을 통해 한국화가 새롭게 나아가야 한다는 이응노 화백의 자유로운 화법을 따랐다. 이 화백을 만나 진정한 예술을 깨달았다고 술회하는 작가는 각박한 현실에서 가족을 위해 씩씩하게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묘사한 1950년대 작품 <광주리 장수>, <옹기장수> 등을 통해 시대정신을 강조했던 이응노 화백의 영향을 드러냈다. 지난달 12일부터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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