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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20, Sep 2016

논문, 다시 담론으로

Back to the discourse

미술을 주제로 한 논문은 많다. 그 중엔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된 이론도 있고 간혹 적당한 환경과 학력상승욕구로 만들어진 책도 존재할지 모른다. 매해 수없이 쏟아지는 석·박사 학위 논문, 그 중 「퍼블릭아트」는 최근 완성된 논문 중 아홉 점을 소개한다. 우선 현대미술계에 두각을 나타내는 미술이론 교수들께 “직접 지도하거나 심사한 2015-2016 학위논문 중 특출한 논문 추천”을 부탁드렸다. 서울과 지방, 학교와 전공을 안배해 추천할 교수를 리스트 업하고 한분 한분께 기획의도를 설명했는데, 뜻밖에 “추천할 논문이 없다”는 대답도 여럿 돌아왔다. 허나 대부분은 매우 적극적으로 복수 논문을 제시하며 이번 특집에 합당한 내용을 함께 협의하며 선택했다. 그렇게 추천받은 논문 작성자와 다시 의논을 거쳐 가장 효율적으로 논문 전체를 요약하는 방법을 모색해 이 책에 싣는다. 각 논문의 목차와 전체 내용이 궁금한 독자를 위해 논문 주인의 허락을 얻어 개인메일도 함께 게재하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국회전자도서관사이트(dl.nanet.go.kr)에서 제목으로도 검색할 수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애써 만들어진 논문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읽지 않는다. 한국 미술계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고 어지러운 이때, 미래의 현대미술 학자들이 과연 어떤 이론에 집중하고 있는지 특집을 통해 기초학문을 돌아보자.
● 기획·진행 정일주 편집장, 이효정·이가진·조연미 기자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Model room' 2003 나무 테이블과 철제 다리, 혼합 매체, 축소 모형, 프로토타입마틴-그로피우스-바우(Martin-Gropius-Bau, Berline) 2010 사진: 옌스 지헤(Jens Ziehe) Courtesy of Moderna Musset Purchase 2015 funded by The Anna-Stina Malmborg and Gunnar Hoglund Foundation ⓒ 올라퍼 엘리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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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주 편집장, 이효정·이가진·조연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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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

동시대미술과 미술이론 연구_정연심


SPECIAL FEATURE Ⅱ

9개의 논문 2015-2016

 

망막을 통한 시각경험의 회화 연구_김민채

디지털 퍼포먼스에서의 상호작용성_박연숙

인도 주요 작가들의 힌두이즘 요소_송명진

‘현실과 발언’ 그룹의 작업에 나타난 사회비판의식_이설희

이중섭 회화의 예술심리학적 연구_이은주

오토마타(Automata)를 활용한 미술과 중심의 STEAM교육 프로그램 개발 연구_이재원

렘 콜하스의 도시론과 정크스페이스 개념에 대하여_정지영

동시대 소리미술의 공간과의 상호적 관계성 연구_최지혜

朝鮮 後期 茶畵 硏究_최혜인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Big Bang Fountain> 

루이비통재단(Fondation Louis Vuitton, Paris) 설치전경 2014 

물, 펌프, 노즐, 스테인레스스틸, 나무, 발포고무, 플라스틱, 

스트로브 라이트, 컨트롤 유닛, 염료 165×160×160cm 사진: 

이완 반(Iwan Baan) Courtesy of the artist; neugerriemschneider, Berlin; 

Tanya Bonakdar Gallery, New York ⓒ 올라퍼 엘리아슨

 




Special feature Ⅰ

동시대미술과 미술이론 연구

● 정연심 홍익대학교 교수

 


현대미술과 이론


20년 전에 비하면 현대미술을 접할 수 있는 교육 채널이 다양해지고 있다. 평생교육의 일환으로 교양 수준의 미술사나 미술이론을 접할 수 있는 ‘아카데미’기회 또한 많아지고 있다. 미술관 뿐 아니라 갤러리, 옥션 하우스 등에서도 미술을 둘러싼 인문학적인 관점, 렉쳐 시리즈 등이 다양하게 제공된다. 크리스티(Christie’s)와 소더비(Sotheby’s)와 같은 경매 회사들은 대학기관과 협약서를 만들어 미술사와 감정 중심의 교육과정을 거친 이후, 석사 학위를제공하기도 한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과 같은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은 미술관에 직접 올 수 없는 사람들을대상으로 온라인 교육 채널까지 제공하고 있을 정도로 현대미술은 과거와 달리,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에서 현대미술 이론을 가르친다는 것은 현장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기에 학문적 깊이감을 동시에 염두에 두게 된다. 상기한 사례들처럼쉽게 교육서비스를 접할 수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미술이론을 가르친다는 것은 때때로 ‘도전’이 될 때도 있다. 현대미술의 동향은 사실 쉽게구두로 설명이 되지만, 이론이나 방법론 수업으로 이어지게 되면 쉬웠던 현상들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쉽게 온라인과오프라인에서 체득할 수 있고 이해하기 쉬운 ‘콘서트식 강연’이나 인터뷰나 대화식 토크가 인기를 얻을수록, 학교에서는 현대미술을 어떻게 가르쳐야할것인지 교육적인 관점에서 고민이 생기게 된다. 


예술학과에서 현대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비평능력과 기획능력, 예술정책이나 행정에도 관심을 두는 수가 과거에 비해 더욱 늘어나고 있다. 뉴미디어아트에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2000년대의 관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주류 미술사 안에서 뉴미디어아트의 역사를 찾거나 매체이론 자체에서 비평적 관점을 찾는논문도 늘어나고 있다. 뉴미디어아트를 공부하고 석사논문을 쓴 학생들 중 해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는 졸업생들도 있다. 이들의 경우, 국내로 다시돌아오기 보다는 해외에서 큐레이터나 교수로서 활동하는 수가 과거에 비해 늘어나고 있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에서 한국현대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오는 학생들도 다양하게 등장했다. 서구미술 전반에 대한 관심은 늘 있어왔지만 최근 단색화의 열기를 반영하듯이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연구물이 많아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아카이브와 원전을 찾아서 동시대 문화 현상 내에서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과 전략을 연구하는 동향을 반영한다. 과거 홍익대학교의 경우 건축도 미술대학내에 있었기 때문에, 최근에는 다시 이러한 경향을 모색하고자 건축학부와 미술대학의 예술학과가 건축·예술 융합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생들이 새로운관점에서 미술과 건축을 바라볼 수 있도록 교과과정을 짜보기도 했다. 지난 6월에 석사논문을 발표한 정지영의 경우, 건축가 램 콜하스(Rem Koolhaas)와이론가 할 포스터(Hal Foster)의 이론을 접목시켜 흥미로운 연구를 제출하였다. 페미니즘에 대한 최근의 관심사를 다시 반영하듯이, 미국의 초창기 여성비디오 아티스트에 대한 연구나 1990년대 이후의 동시대 작가론 또한 최근 많이 부각되고 있다. 또한 예술제도, 대안공간 등에 대한 연구물들도 등장했다. 






바티 커(Bharti Kher) <Untitled> 2013 석고 붕대, 나무, 메탈 각 

123×61×95.5cm 사진: 피터 바이즈(Peter Beyes)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London, New York and Zurich  

  



한국현대미술, 새로운 관심사로 부각


1950년대 이후의 한국미술은 최근 젊은 연구자들에게 미지의 연구영역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서구학계에서 빠르게 진행된 제휴 학문적 연구나 다양한방법론 연구를 기반으로, 신진연구자들은 현대미술 자체를 ‘열린 자세’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영미권이나 유럽에서 한국현대미술에 대한관심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한국 아방가르드 예술과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는 연구자들이 나오고 있다. 서구미술은 원전아카이브를 잘 정리하는 반면, 국내에서는 아직도 미진한 편이어서 제1세대 비평가 등에 대한 앤솔로지 작업이나 미술사적 연구 등도 탄탄하게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연구를 지향하는 소수의 연구자들은 수년이 걸리는 작업을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현장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열정 페이’등이 편재한 한국미술계의 상황에서, 끝까지 살아남기란 사실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우리 분야에 남고자 하는 학생들이자 후배들에게 처음에는 잘 하는것이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살아남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살아남아서 수년간 하다보면 어느새 전문가가 되어 있고, 또 경험을 쌓다보면 결국 잘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모든 분야가 그러하겠지만 미술이론 또한 학문적 열정과 지식 뿐 아니라 길게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과 끈기, 인내심이 필요하지 않을까한다. 

 




멜라티 수료다모(Melati Suryodarmo)

 <I'm a Ghost in My Own House> 

2012 퍼포먼스, 비디오 설치, 돌, 철 연마 테이블, 

흰 옷, 참숯 가변 크기30분 ⓒ 작가  





현대미술이론, 그리고 리얼리티


동시대 미술의 실천가로서, 혹은 비평가로서, 기획자로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는 현장과 학계를 오가는 쌍방향 연구를 좋아하는 편이다. 이는나의 능력이 모자라는 점도 있지만, 현장에서 오는 표면적인 경향을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아탑에 갇혀 학문적 감옥에갇혀있는 동시대미술을 현실과 숨 쉬게 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서 나 스스로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동시대 미술을 보고 연구한다는 것은 매일 새로운 것을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예술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행위에서, 예술학이나 미술이론을 점수로 평가하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2012년홍익대학교 내에 있던 초등학교가 성미산으로 이전해 갔을 때 일시적으로 폐교로 남았던 교실 등을 작가들의 다양한 설치 작품으로 전시한 적이 있다. 당시, 오혁이 작곡을 맡아 배경 음악을 맡아주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 학생의 실력에 참으로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당시 수업 시간을 통해 한정적으로 학생을평가한다는 것이 참으로 부분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현대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관심 있는 이들은 항상 미술사 책에서 배제되었던 부분을 상상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어떤 기준에서 특정 미술이 포함되었고또 사라졌는지, 한 시대에 풍미했던 주제와 기술들이 다른 시대에 왜 사라졌는지, 물질문화와 정신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지적 상상력을 놓지 말아야할 것이다. 도널드 프레지오시(Donald Preziosi)가 편집한 책을 2013년 국내 연구자들과 함께 번역한 적이 있는데 프레지오시 교수가 말한 미술에 대한‘이야기 공간’을 파악하는 힘과 상상력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이다. 비록 교양도서이긴 하지만, ‘세상을 바꾼 미술’에 실린 나의 시각들은 고전과 동시대미술을 균형 있게 바라볼 것을 요청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대미술 연구자들은 현대미술만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인식하는데, 문화는 하나의 흐름처럼 과거와현재가 지속적으로 만나는 지점일 것이다. 노만 브라이슨(Norman Bryson)이나 W.J.T. 미첼(W.J.T. Mitchell)교수, T.J. 클락(T.J. Clark), 린다노클린(Linda Nochlin),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교수 등의 글을 보면 과거의 미술이 동시대 미술과 함께 등장하는 역사적 상상력이 존재한다. 의외로 우리는 한국 현대미술을 보면서 한국의 전통과 고전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부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중섭 <바닷가의 아이들> 1952-53 종이에 유채  

 




미술을 둘러싼 기호학 연구, 젠더 연구, 매체 연구, 전시학, 작가론 등 다양한 시각과 방법론이 존재하겠지만 학문적 연구가 계속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분야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연구를 포용할 수 있는 직업의 기회는 많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오타쿠’ 정신처럼 파고드는 연구도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나는 후배 연구자들에게 항상 다양한 언어 구사력을 강조하는 편이다. 예술학, 미술이론을 공부하는 이들은 영어는 기본이고자신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는 유럽 언어나 동아시아 언어도 함께 구사하면 좋을 것이다. 요즘엔 대학마다 훌륭한 외국인 교수진들이 영어 강의를 진행하고 있어아카데믹 글쓰기 등 다양한 글쓰기 기법을 익히기에도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국내외 환경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을 것이다. 미술가들도국경을 초월한 레지던시가 많이 있듯이, 연구자들도 영어를 기초로 한 다양한 학문적 네트워킹이 존재한다. 결국 우리 분야에서는 완벽한 하나의 길이란 있을수 없으며 왕도도 있지 않다. 자신의 철학과 열정을 가지고 비전을 향해 계속 가는 힘, 그것이 현대미술을 풍요롭게 하고 또 이를 연구하는 길일 것이다. 비평가, 교수, 기획자들은 리서치를 통해 생각을 다듬어 나가는 사유와 피드백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술은 우리가 생각해보지 못한 시각을 제시할것이다.  


 

글쓴이 정연심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뉴욕 FIT의 미술사학과에서 조교수를 역임했다.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2013, 미진사), 『현대공간과 설치미술』(건축문화, 2014), 『한국동시대미술을 말하다』(건축문화, 2015) 등을 출판했으며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협력 큐레이터, 뉴욕베이스 독립큐레이터 등으로 활동하며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 교수이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광주비엔날레’재단이사이다.

 




하룬 미르자(Haroon Mirza) <폴링 레이브>(부분)

사진제공: 백남준아트센터


 



Special feature Ⅱ

9개의 논문 2015-2016

 


No.1

망막을 통한 시각경험의 회화 연구

본인의 ‘망막의 순간을 드러내다’ 연작을 중심으로

김민채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회화학과 서양화전공

이메일  minchae422@naver.com

추천인  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 강수미 교수

 

우리가 대상을 보는 행위의 방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적, 역사적, 기술적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 과거에는 육안을 통한 시각경험이 주를 이루었다면, 오늘날은 다양한 기계장치가 육안과 대상 사이의 시각경험에 개입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인간은 어떤 것이 육안을 통한순수한 시각경험인지 어떤 것이 기계로 변형, 합성된 것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이미지 환경에 익숙하다. 이와 같이 기계장치를 통한 시각경험이 주를 이루는현대사회의 경향 속에서 나는 역으로 테크놀로지를 통과하지 않은, 인간의 신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보는 것에 주목했다. 육안을 통한 시각경험은 주체의 기억, 경험, 주변 환경 등 다양한 요소가 주체의 주관성과 결합한 집합체이며 때로는 이론과 다르거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육안의 특수성을 회화를 통해 연구하고 있으며 논문을 통해 이를 분석하고, 회화의 새로운 실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논문에서는 육안의 시각경험에 대한 이론, 시각경험 및 표현과 관련된 선행 예술가, 그리고 나의 회화 연작 ‘망막의 순간을 드러내다’를 분석한다. 먼저 육안을 통한 시각경험이 기계장치를 통과한 이미지인 사진과 영화와 어떤 차이를 지니는지 살펴본다. 다음으로 유동적인 육안의 시각경험을 에드문트후설(Edmund Husserl)과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을 통해 철학적으로 해명한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사진기의 대표적기능은 대상의 외관을 그대로 고정시켜 놓는 것이다. 동물이나 인간을 연속적으로 촬영하여 움직임을 분절시켜 가시화 한 머이브릿지(Eadweard Muybridge)의 사진처럼, 사진기는 인간의 눈과 대상 사이에 개입함으로써 대상의 외관을 정지된 상태의 이미지로 나타낸다. 반대로 육안을 통한 시각경험은신체 그 자체에서, 또는 대상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 계속 변해가며 가변적, 유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관련해 괴테(J. W. Goethe)는 『색채론』에서인간의 육안이 운동하면서 유동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영화는 고정되어 있는 사진이미지와 다르게 대상의 움직임까지 담아낸다. 그러나 편집 기법, 촬영 기법, 그리고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육안으로 보는 것과다른 방식의 시각경험을 가능케 한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영화에서 촬영 기법, 편집 기법의 개입으로 볼 수 있는 감각과 인지의 세계를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에 빗대어 카메라를 통한 ‘시각적 무의식(das Optisch-Unbewuβte)의 세계’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언급하는 감각과 인지의 세계는 일상에서 육안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에저튼(H. E. Edgerton)이 찍은 우유 방울 사진처럼 우리는영화나 광고에서 액체가 떨어질 때, 그 주변이 왕관 모양으로 튀어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육안으로는 포착할 수 없던 것이다. 이처럼 기계장치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시각 능력을 넘어선 이미지를 의식하게 됐다는 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시각적 무의식의 개념이다. 이렇게 육안의시각경험과 기계장치를 통해 보는 것은 서로 다른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앞서 살펴본 육안의 유동적 시각경험은 현상학과 결부된다. 현상학에서는 과학을 근본으로 보거나 편견 또는 선입견을 지니고 지각하는 것을 지양하고, 대상을있는 그대로 바라봐 그것의 본질에 접근한다. 따라서 현상학적 지각은 매 순간 나타나는 대상의 현존을 중시하며 가변적, 유동적으로 일어난다. 이러한현상학적 지각은 후설의 노에시스(noesis), 노에마(noema), 휠레(hyle)의 관계와 메를로 퐁티의 지각 이론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메를로 퐁티는 몸이지각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으며 이로써 세계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학습된 방식이나 편견에 의한 판단을 중지시키고 자연의본질을 보려 한 폴 세잔(Paul Cézanne)의 회화가 현상학적 사상을 잘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시각경험 및 표현과 관련해서 세잔, 제프 쿤스(Jeff Koons),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작품세계를 분석한다. 이 세 명의 예술가가 어떤공통점을 지니거나 미술사적으로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어서 논하는 것이 아니다. 논문 전체와 관련해서 각각 주목한 부분이 있는데, 나의 관점에서 세잔의작품은 유동적 시지각을 캔버스 위에 구현하는 회화의 대표적 사례로, 육안이 포착한 감각의 이미지가 어떻게 회화로 구현되는지에 주목했다. 그리고 쿤스는디지털 테크놀로지 시대의 경향에 따라 눈이 직접 본 대상의 이미지가 아닌 디지털이미지를 그리는 회화의 사례로, 기술적 이미지가 회화에 영향을 끼치는부분에 주목해 참고사례로 연구했다. 이 지점에서 쿤스의 회화는 논문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망막의 경험을 구현하는 회화와 반대에 위치한다. 엘리아슨은관람자가 물리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해, 관람자와 작품이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 부분에서 시각경험을 다룬 예술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세잔은 회화로 ‘리얼리티(reality)’를 구현해내고자 한 화가다. 미술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리얼리티로는 극사실주의, 사실주의, 세잔의 회화가 있다. 여기서세잔의 리얼리티는 대상이 실제 존재하는 상태다. 그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원근법, 윤곽선, 기하학적 수직, 수평 등 과거의 눈속임 기법을 제외시키며 자신이지각한 그대로를 회화로 나타냈다. 특히 다시점을 통해 하나의 화면에 종합적 시점을 담은 것과, 윤곽선 대신 색을 칠함으로써 생기는 면(덩어리)으로 대상의형태를 드러낸 것이 그의 회화가 지닌 대표적 특징이다. 앞서 현상학을 고찰한 맥락과 세잔을 다룬 맥락은 ‘신체성’으로 결부될 수 있다. 신체를 통해 세계와상호작용하며, 세계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잔의 회화가 회화사에서 단지 과거의 작은 모델이 아니라 여전히 동시대적임을 보여주는근거다.


쿤스의 회화 ‘탈속적인 단순한 향유(easyfun-ethereal)’ 연작은 기계장치 이미지인 광고와 잡지이미지를 컴퓨터로 다시 재구성해 만든 디지털이미지를그린다는 점에서 ‘21세기 디지털 회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동일한 회화지만 육안으로 직접 본 이미지를 그리는 나의 작품과 전혀 다른 방식이며, 이런 맥락에서 쿤스의 ‘21세기 디지털 회화’는 세잔의 회화와도 다른 지점에 위치한다. 연작의 특징으로는 첫째, 차용한 이미지에 디지털 테크놀로지를결합시킴으로써 디지털이미지로 둘러싸인 동시대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 둘째, 디지털 기술을 통한 이미지의 ‘과감한 절단’, ‘비현실적 크기’, ‘불규칙적배치’로 일상에서 육안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쿤스는 동시대성을 아이러니하게 이용해 회화에 집약시켰다. 그리고 이것이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실험과 미술사적으로 이어져온 반미학적 시도를 표상하는 사례라고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내 작업의 대척점에서분석했다. 


엘리아슨은 빛을 통해 특정한 색이 도출시키는 눈의 반응에 주목했고, 관람자는 그의 작품에 참여함으로써 이를 직접 경험한다. 또한 작품을 통해 평소자연스럽게 원근법에 입각해 세계를 바라보던 관람자에게 이를 해체시킴으로써 고정된 시각에 혼란과 자극을 준다. 그는 이렇게 관람자가 작품에 참여해 특정상황을 직접 경험하도록 함으로써, 평소에 인식하지 못했던 ‘시각경험’과 ‘보는 방식’을 일깨운다. 위와 같은 논의를 거쳐 마지막으로 ‘망막의 순간을 드러내다’ 회화 연작을 분석한다. 나에게 ‘회화’란 단순한 기법이나 매체가 아니라, 육안을 통한시각경험을 드러내는 개념, 사고, 표현, 형식 등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있는 전체(全體)로서 하나의 ‘몸’이자 ‘세계’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나의시각경험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회화란 ‘표현체(表現體, the body of expression)’와 같다. 퍼스(C.S.Peirce)와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기호이론을 토대로 표현체로서 나의 회화와 구르스키(Andreas Gursky)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구르스키의 사진은 지표로서 대상과의 물리적연관성을 기반으로, 다초점으로 대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디지털 기술로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함으로써 육안을 넘어선 초월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반면도상으로서 나의 회화는 형태적 유사성을 기반으로 육안과 대상 사이에 어떠한 것도 개입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시각경험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망막의 순간을 드러내다’ 연작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시각경험은 ‘빛에 따른 시각경험’과 ‘색과 형태의 유동성’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특별히 아름다운사물이나 풍경을 찾으려 하지 않고, 즉물적 시지각을 추적하고자 한 점에서 나의 회화를 ‘망막 중심적’, ‘반(反)유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연작은 표현방식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지각의 기억: 상호작용에 의한 중첩’은 하나의 캔버스 위에 매 순간 다르게 지각되는 대상의 형태와 색을계속해서 겹치고, 지우고, 지우고 다시 그리며 시각작용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특징인 ‘중첩’과 ‘지우기’는 내 회화의 미학적특징인 가변성, 유동성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 기법이다. 두 번째, ‘일시성의 빛: 찰나의 시각화’는 동일한 사진이미지를 통해 경험한 각각의 시각경험을 각기다른 캔버스에 그리는 것이다. 육안의 가변성과 유동성으로 인해 한 장의 사진으로도 다양한 시각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육안의 시각경험이 각각의그림에 차이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일시성의 빛’은 빛이 시지각을 일으키는 측면에 입각해, 육안이 각각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육안의 시각경험이 지닌 특수성과 회화의 새로운 실험 가능성을 고찰하고, 나의 작품이 지닌 미학적 논점과 조형적 특징을 확인한다. 이를바탕으로 나는 육안이 경험한 세계를 어떻게 예술로 구현해 나갈지 더욱 깊이 있게 모색할 것이다. 그리고 관람자는 관습적인 지각 방식으로는 의식하지 못할, 인간 육안이 경험한 특정 순간의 지각 상태를 작품을 통해 공유하길 기대한다.  


 

No.2

디지털 퍼포먼스에서의 상호작용성

텍스트의 열린 구조와 미적 경험의 분화

박연숙  영남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미학미술사학전공

이메일  coollikehot@naver.com

추천인  영남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민주식 교수

 

예술의 진화를 살펴보자면 과학은 동반자적 위치에서 양자의 발전에 자양분이 되어왔다. 과학기술이 생산하는 새로운 매체는 예술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에도입되어 왔으며, 현재에는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각색의 예술영역에 흡수된 상태이다. 소위 뉴미디어라 불리는 컴퓨터기반의 매체들은 작품 감상의 영역에도많은 변화를 일으키면서, 현재의 예술 실행을 뛰어넘는 발판이 되어 감상자에게 초감성의 경험세계를 열었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응용을 통해 실험예술의최전방에서 종래의 것과 구분되는 이미지와 그에 반응하는 우리의 인지력, 그리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는 것이다. 필자는 디지털 기술력을 바탕으로 감상자의 참여를 장려하는 ‘디지털 퍼포먼스(Digital Performance)’를 통해 현재의 기술과학과 예술의 융합이 야기하는다양한 사태와 그것이 함의(含意)하는 미학적 문제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미 용어 ‘디지털 퍼포먼스’에서 우리는 기술미학 시대의 예술 실행과관련된 암시를 엿보게 된다. 이와 유사한 의미를 내포하는 ‘사이버 퍼포먼스(Cyber-performance)’, ‘디지털 실행(Digital Practice)’, ‘가상연극(Virtual Theatres)’, 그리고 ‘네트워크화 된 퍼포먼스(Networked Performance)’ 등 과학기술과 인간의 수행이 융합된 작업들을 지칭하는 다양한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현재의 과학기술과 예술의 협업을 ‘디지털 퍼포먼스’로 지칭하는 이유는 딕슨(Steve Dixon)의 주장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는 디지털은 소리, 음악, 동작, 장소 등과 같은 감각 데이터를 암호화하는 구체적인 테크닉으로 실세계를 설명하는 특정한 하나의 방식이며, 이 구체적 테크닉은 정보가 변형되고, 조작되어 소통되고,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복잡하고 지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디지털기술은 다양한 용어들을 모두 포섭할 수 있는 광의의의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본 연구의 예로 등장하는 퍼포먼스에서 주로 사용하는 기술이므로 디지털 퍼포먼스를 핵심어로 본 논의의 맥락을 잡아가는 것이타당하다. 무엇보다 본 논문에서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디지털 퍼포먼스의 열린 구조와 그 미적 경험이 끊임없이 분화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구조와 미적 경험의중요한 도구로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을 제안한다. 상호작용성은 디지털 매체의 속성을 사용하고, 예술 작품에 자신 만의 표식을 남기고 떠나는 사용자들의창의적 참여를 장려한다. 서로 호소하는 대화가 쌍방으로 일어나듯이 상호작용성은 의사소통하고자 하는 우리본능의 확장이며, 의사소통을 통해 우리의 환경을만들어 가고자 하는 욕망인 것이다. 소통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예술 작품의 제작과 그 기능에도 잠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소통의 기제가 상호작용성인것이다. 그리고 상호작용성은 디지털 매체의 능력으로 그 기능이 증폭된다.


그렇다면 상호작용성이 증폭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본 연구에서 다루고 있는 디지털 퍼포먼스의 궁극적 목적과 관련이 있다. 예술 작품의 최종 목적은물질적 대상을 감상하는 것에서 하나의 담론을 형성하는 것으로 확대되어 왔다. 결국 예술의 존재 이유는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실천이자 경험인것이다. 이제 예술계에 걸작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예술은 미학이 승리를 거두는 새로운 구조 속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예술의 정수(精髓)는 바로미적경험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쇼(Yves Michaud)는 ‘예술의 증발’과 미학의 승리가 일치하는 것으로, 더 나아가 예술은 명백하게 이미 삶의에테르(äther)가 되고 기체 상태로 넘어서 버렸음을 지적한다. 기체 상태의 미학을 안으로 흡수하는 일은 감상자의 경험을 통해 실천되는 것이기에 수행성은중요한 작품 구성의 과제가 되었다.


수행성을 작품에서 중요한 문제로 삼았던 것은 종래의 퍼포먼스와 디지털 퍼포먼스의 공통점이 된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디지털 퍼포먼스가감상자의 경험에 더욱 비중을 두고, 이들의 경험이 작품의 텍스트가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감상자가 작품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데 동참하기 위해 상호작용성은다양한 범주와 방식으로 계획되어야 한다. 이것이 퍼포먼스의 독창성은 물론 감상자에게 독특한 미적 경험을 도출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본 연구에서 상호작용성의 다양한 설계를 예로 들면서, 디지털 퍼포먼스의 열린 텍스트 구조를 논의한다. 열린 텍스트 구조를 성립하는 가장중요한 요인은 과학기술과 새로운 매체 사용이 된다. 새로운 매체와 그 기술은 인간의 물리적 신체가 가지는 한계점을 줄이고, 신체의 기관으로부터 감각되고인지되는 정보의 폭을 확장시켜, 고정관념을 근원에서부터 흔드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지텍스트 중심의 작품에서 행동하는 경험의 텍스트 중심으로옮겨가면서, 감상자이자 퍼포머(performer)는 설계자인 작가의 아이디어를 직관하는 내적 침투(Osmosis)를 수행하게 된다. 이 내적 침투는 하나의장소에서 유일한 시간대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장벽을 넘어 디지털 퍼포먼스의 초월적인 참여구조에 힘입어 물리적 한계에서 더욱 자유롭게된다.


디지털 퍼포먼스에서 열린 구조를 형성하는 중요한 첨단기술 중 하나는 텔레프레즌스(Telepresence) 기술이다. 텔레프레즌스는 작가들로 하여금초국가적이고 초공간적 작품실행을 실험하도록 영감을 불어 넣어, 비물질적 공간에서 실제 신체를 움직이도록 상호작용성을 가능하게 했다. 이 때문에상호작용성은 감각적 현존감을 불러오는 주된 동인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텔레프레즌스 기술은 미술관이나 화랑과 같은 전시공간을 벗어나, 쇼핑몰과 광장, 개인용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감상자 참여의 기회를 대폭 확장시키는 동시에 다양한 디지털 퍼포먼스 기획의 바탕이 되었다. 즉 새로운 기술의 응용이 동시대를 넘어서는 작품생산의 초석이 된다는 것이다.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기술공간은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이다. 


작가들은 이를 디지털 퍼포먼스를 위한 장소로 확대하면서, 몇몇 디지털 퍼포먼스들은 다양한 민족과 국민이 작품을 통해 만나고, 대화하고, 이미지 텍스트를함께 구성하는 기회를 열기도 했다. 이 공간은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상의 공간으로, 필자는 이를 겹침의 시공간으로 보았다. 그 원인은사이버스페이스가 우리의 일상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독자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실생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사이버스페이스가 우리의상상력으로 형성된 공간이라 하더라도 직접적인 몸의 경험을 통해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 진 것들이라면 결국 인간을 매개로 출발한 상상력의 발현이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공간을 실존과 가상의 관계가 겹쳐지는 곳으로 판단한다.


이와 같이 디지털 매체로 설계된 상호작용성이 텍스트를 열린 구조로 만든다면, 그 미적 경험은 우리를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의 세계로 불러들일 것이다. 다양한범주의 상호작용성을 통해 생산되는 예술작품은 재현과 표현의 문제를 넘어, 작품의 저작권과 텍스트와 관련된 여러 쟁점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작품의주체이자 중심으로서 작가에게 부여되었던 힘과 그가 생산한 이미지는 분화되고, 탈중심화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는데, 필자는 이것을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elix Guattari)가 말하는 리좀(Rhizome)의 속성과 연결했다. 리좀의 끊임없이 생장하는 미적 경험은 또한 감상자로 하여금 다양한대상으로 ‘되기(Becoming)’를 경험하도록 돕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되기’는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이 되어보는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경험인데, 필자는 이러한 ‘되기’가디지털 퍼포먼스의 몰입(Immersion)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되기와 몰입과 상호작용성의 연관성이다. 몰입은 되기의 실행에중요한 도구이지만 그 몰입을 높이는 것은 바로 상호작용성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상호작용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이를의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제시된 환경 속으로 몰입하게 된다. 감상자는 텍스트 생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호작용하면서 이미지 텍스트에 몰입되고, 이로써 내가아닌 다른 것이 되어보는 되기 경험이 가능하게 된다. 이 모든 미적 경험은 분화하고 있으며 살아있는 유기체, 즉 리좀과 같이 확장되고 변화한다. 이들 경험은 하나의 감각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다감각적 경험을이끌어내어, 놀이와 유사한 미적 경험을 유발하는데, 이 놀이와 유사한 경험은 디지털 퍼포먼스가 지향하는 몸의 움직임, 즉 감상자의 동작을 유도하는상호작용성의 설계로부터 시작된다. 실천하는 예술의 한 방식을 위해 퍼포머와 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성이 강화되면서, 감상자들은 이미지 텍스트를 생산하기위해 반복된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은 동일하게 비춰지는 행동양식이지만, 엄밀히 조금씩 차이 나는 다른 행동을 반복하는 일이다. 


차이는 그 다양성에서분화되어 나오거나 하나의 정체성에 침전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로 명료화하기 위해서 반복되어야 한다. 이것은 항상 유사함이나 동일함을 가진 것이 아닌독특하고, 특이한 어떤 것과의 관계 안에서 행동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반복은 행동이자 관점으로서의 반복이 되는 것이다. 관점의 차이는 고정된 시점에서벗어나, 유목적 사유를 가능하도록 돕는데, 이는 장소이든, 사람이든, 생각이든 어떤 것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목적 사유는 내가 속해 있는 물리적 환경의 경계와 한계, 이 모두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닫힌 상태가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 열려진 정신을일컫고 있다. 연구자는 기체 상태의 예술에 담긴 미학적 의미를 참여와 소통을 통해 경험하고, 다시 삶으로 연결되는 예술로서 역할 하는 것에서 디지털 퍼포먼스의 의의를찾고자 한다.  



No.3

인도 주요 작가들의 힌두이즘 요소

200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송명진 경희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미술평론·경영전공

이메일   bettertmr44@gmail.com

추천인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미술학과 최병식 교수

 

인도 당대미술에는 대부분 문화적 특성이 매우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특히 힌두이즘은 인도 미술의 주요 내용으로 다루어지며 인도 문화의 전반에 걸쳐나타난다. 인도 당대 미술에서도 힌두이즘 요소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인도 주요 작가들은 그들의 문화적 특수성을 고스란히 자신들의 언어로 전달한다. 이들은힌두이즘의 요소를 활용하여 인도인들의 역사적ㆍ사회적ㆍ정치적 이슈와 담론들을 다양한 양상으로 표현한다. 본 연구는 인도 당대 작가인 날리니 말라니(Nalini Malani), 라빈더 레디(Ravinder Reddy), 리나 베너지(Rina Banerjee), 바르티 케르(Bharti Kher), 아니타 두베(Anita Dube)에게 나타나는 힌두이즘 요소의 특징을 분석하고 미술사적 의미를 도출하였다. 날리니 말라니, 라빈더 레디, 리나 베너지, 바르티케르, 아니타 두베는 작업 전반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힌두이즘의 요소를 통해 사회적 평등, 환경, 종교, 인종, 젠더와 계급 등의 이슈를 담는다는 점에서가치가 있다. 이들의 작업을 인도인의 삶 전반에 내재되어 있는 힌두이즘의 요소를 통해 살펴보는 것은 한국 미술의 당대성과 정체성이 논의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의상황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지점들이다. 힌두라는 특수한 문화적 영역 안에서 보편적 언어를 통해 공감대를 얻고 있는 인도 당대 작가들은 많은 시사점을가진다.


인도 당대미술은 서구권의 미술 기법과 화풍을 수용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독자적인 인도 전통의 소재를 택한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왔다. 2장에서는힌두이즘이 인도 당대 미술에 나타나게 된 배경을 힌두 민족주의의 의미와 배경, 인도 현대미술에 있어서 힌두이즘의 재해석과 형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인도의 현대미술은 문화적 민족주의와 함께 시작된 배경을 지닌다. 바르마(Varmar)와 타고르(Tagore), ‘벵갈 화파’, ‘진보예술가그룹’ 등 서구의 새로운화풍을 수용하면서도 인도 문학이나 신화, 종교 등에서 소재를 차용했다. 3장에서는 날리니 말라니, 라빈더 레디, 리나 베너지, 바르티 케르 아니타 두베의  작업에 나타난 힌두이즘 요소를 분석하고 그 특징을 4가지로 도출하였다. 첫째, 힌두이즘의 도상학적 상징을 활용하였다. 사원이나 사당, 길거리, 힌두 세밀화 등 인도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상학적 상징이 있다. 이들 작업은힌두교 사원뿐 아니라 길거리에서 흔히 발견되는 전통적 상과 의례적 형태를 연상시킨다. 라빈더 레디는 힌두의 조각적 전통을 당대 팝적인 감각과 결합했다. 문화, 자연, 지리적인 경계를 초월하여 힌두의 아이콘이 갖는 힘과 에너지를 여성 조각을이용하여 표현한다. 특히 레디의 여성 전신 조각은 힌두 숭배 이미지와 닮아 있는데 여성의 자연적 정신을 상징하는 고대 약시(Yakshi)의 특성을 살린형태이다.


라빈더 레디가 인도 여성의 모습이나 신화를 이용하여 레디만의 조각의 특징을 살렸다면 아니타 두베는 신상에서 볼 수 있는 눈을 그의 트레이드마크로사용한다. 그가 사용하는 에나멜 세라믹 눈은 힌두의 종교적 상(像)에서 차용한 것이다. 인도에서 눈이 가지는 상징으로 인해 에나멜 세라믹 눈은 힌두신자들의 의례와 예배의 매개물로 사용된다. 바르티 케르는 조각과 설치 작업 그리고 평면 작업을 선보인다. 그의 빈디 페인팅은 인도 여성이 이마에 붙이는빈디는 사용하여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어 낸다. 둘째, 신화적 제재와 색채의 상징을 활용하였다. 힌두교는 신화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또한 의례에 사용되는 물건의 색채들은 상징성을띤다. 이러한 요소는 당대 작가들에게 크게 색채의 상징과 힌두 남신과 여신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날리니 말라니와 라빈더 레디의 작업에서는 여신의 상징을 활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날리니 말라니는 힌두교 사회에서 가지는 여성의 낮은 계급과위태로운 위치를 비판하였고, 라빈더 레디는 신의 도상학적 형태와 색채의 상징을 통해 에너지를 표현하였다는 특징을 지닌다. 아니타 두베 또한 색채의 활용과발견된 오브제의 본래의 기능을 제거시켜 인도 전통적 미학의 언어 안에서 정화의 관념을 표현하고 종교에 대한 투쟁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르티케르의 신상과 같은 오브제와 돌연변이적 형상, 날리니 말라니의 연극적이며 환영적 공간은 사회적 계급을 비판한다.


셋째, 인도 당대 작가들의 작품은 혼성성을 띈다. 인도 문화는 다른 문화ㆍ종교와의 수용과 상생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왔다. 인도는 다양한 신앙체계가힌두라는 종교 안으로 흡수되어 현재의 문화를 형성하였다. 혼합주의, 혼성성은 힌두이즘이 지닌 특징이다. 인도의 종교, 철학, 예술의 전반에서 두드러지게나타나는 혼성적 특징은 인도 당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인도 당대 작가들에게 나타나는 혼성성의 표현은 크게 문화의 혼성적 특징과 젠더의 혼성성으로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리나 베너지의 작업에는 문화적 배경과 경험으로 동양과 서양 문화의 혼성적 양상이 짙게 나타난다. 그의 조각과 설치 작업은 백열전구, 분말, 스티로폼과 같은산업 용품과 전통옷인 사리와 같이 문화를 상징하는 사물들을 유기체적으로 조합한다. 서로 이질적인 오브제를 통하여 베너지는 문화와 지리학적 경계를제거하고 글로벌화로 인해 발생된 문화적 접촉을 표현한다. 힌두교 신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닌 양성체로 등장하며 이로 인해 인도 사원에서는 반은 남성 반은 여성인 조각상을 볼 수 있으며 시바(Shiva)를상징하는 링감(Lingam)과 여성을 상징하는 요니(Yoni)가 합쳐진 의례적 형상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양성적 모습은 바르티 케르와 날리니 말라니의 작업에서살펴볼 수 있다. 


넷째, 대중문화와 키치적인 요소는 인도 거리에서 쉽게 발견되며 작가들은 대중적 소재와 재료를 차용한다. 힌두교는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유입되었고, 종교와대중문화의 혼합은 당대미술의 한 단면으로 나타난다. 리나 베너지는 기념품 가게에서 쉽게 발견되는 상품들과 발견된 오브제로 소비적 문화의 이미지를만들어 냈다면 바르티 케르는 장신구의 역할이 가미된 현대화된 빈디를 이용하여 작업한다. 날리니 말라니, 라빈더 레디, 리나 베너지, 바르티 케르, 아니타 두베 모두 인도의 역사적ㆍ정치적ㆍ문화적 특수성을 통해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공통적 주제를 살펴보면 사회적 타부에 대한 도전의 메시지를 담아내거나 종교 분쟁과 이로 인한 이주의 문제, 당대 인도 여성의 이상적 아름다움과 사회적부조리함, 인도 사회가 지닌 혼성성, 대량 생산과 키치적 소비주의의 비판 등을 표현한다.  4장에서는 작가를 분석한 내용을 토대로 날리니 말라니, 라빈더 레디, 리나 베너지, 바르티 케르, 아니타 두베가 가지는 특징과 미술사적 의미를 연구하였다. 인도 당대 주요 작가들의 작업에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으로는 문화적 소산으로 인한 영향과 종교적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날리니 말라니는 문화의 혼성성을 통해 글로벌화, 정치 이슈 등 집합적 역사와 문화적 논평을 담고 있으며, 바르티 케르는 자신의 상상 속에 있는 환상적인형태를 통해 젠더와 역사·문화를 해설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바르티 케르와 리나 베너지가 사용하는 발견된 오브제는 아니타 두베에게서도 나타나며 두베는일상적 오브제의 이질적 결합과 텍스트성을 통해 이주와 같은 역사적 이슈를 다룬다. 라빈더 레디는 자신의 대규모 조각 작업에 팝아트적 요소를 차용하여키치적이며 에로틱한 형상을 통해 인도의 대중적 여성을 담아낸다. 인도의 철학과 관념을 개념 미술로 선보이는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와 같은 작가들과는 달리 이들은 힌두이즘의 소재와 형태를 적극 작업에 반영하는특징을 지닌다. 


리나 베너지와 바르티 케르, 아니타 두베, 라빈더 레디, 날리니 말라니는 힌두 사원에서 발견되는 에로틱한 형상, 신상에 사용되는 의례적 사물, 우주론적 상징을 담은 기하학적 원형, 신화에 등장하는 돌연변이적 형상과 같은 힌두이즘의 요소를 적극 활용한다. 인도 당대 작가의 작품에 깊게 스며들어있는 힌두 문화는 중국, 일본, 한국이 지닌 정체성과는 다른 인도적 가치를 지닌다. 인도는 전통과 다양한 종교적커뮤니티, 현대화된 문화가 공존해있다. 인도 당대미술은 그들의 전통성을 잃지 않으며 글로벌 언어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으며 이로 인해 인도 당대작가들이 국제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이유이다. 특히 인도의 문화적 전통의 가치가 재평가되어지며 문화적 조화로움은 인도 당대미술에서 공통적으로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니쉬 카푸어, 수보드 굽타(Subodh Gupta)와 같이 이미 세계적인 작가뿐 아니라 날리니 말라니, 라빈더 레디, 리나 베너지, 바르티 케르, 아니타 두베와같은 인도 당대 작가에게 나타나는 인도적 특성은 또 다른 당대 작가들의 동기로 존재한다. 또한 인도의 문화는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볼프강 라이프(Wolfgang Laib), 빌 비올라(Bill Viola) 등 서구권의 당대 작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인도 당대 작가들의 작업 내용과 형식은 모두 다르지만 특유의 민족성과 힌두이즘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미술을주도하는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인도는 그들만의 정체성을 통해 다원적 힌두 사상을 부각시킨다. 인도 당대 작가들에게 나타나는 문화적 특수성은 서구에 의해서술되어지는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한 결과물이 아닌 ‘인도스러움(Indianness)’이라고 대변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에 주목하며 미학적 추구를 이루어낸소산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No.4

‘현실과 발언’ 그룹의 작업에 나타난  사회비판의식

이설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이메일  seolhui.shirley@gmail.com

추천인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전혜숙 교수

 

본 논문은 1980년대 한국의 미술운동 그룹 ‘현실과 발언’의 작업에 나타난 사회비판의식을 살펴 본 연구이다. 모든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며, 동시대의 역사적 맥락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의 한국은 유신 체제의 종말과 함께 신군부 세력이 득세하는 혼란스러운 정국을거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미술 또한 이러한 격동의 분위기에서 무관할 수 없었다. 사회의 현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채 미술 내부의 문제에만 머물러있었던 기존의 미술로부터, 미술을 둘러싼 사회적 현상에 주목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한국의 미술운동 그룹 ‘현실과발언’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탄생하였다. 1979년에 미술가들과 평론가들이 모여 발족한 ‘현실과 발언’은 당대 사회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예술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기본적인 목표로 설정하였다. 당대 한국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이들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미술의 사회적 맥락을 밝히고 그 역할을모색하였다. 


‘현실과 발언’은 1979년 9월에 4·19 혁명(1960) 20주년 기념전시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평론가 원동석의 발의로 결성되었다. 역사적 사건에 부합하는미술의 기능과 존재 방식, 미술가들의 역할에 대해 거론한 원동석의 발언은 동일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집결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6일에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4명의 평론가(성완경, 윤범모, 원동석, 최민)와 8명의 미술가(김경인, 김용태, 김정헌, 손장섭, 심정수, 오수환, 오윤, 주재환)가 모여창립을 결의하고, 모임의 성격과 명칭 등을 토의하였다. ‘인간과 자유’ ‘현실과 표현’ 등의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성완경이 제안한 ‘현실과 발언’이 투표를통해 결정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회합을 거쳐 제4차 모임(1980. 1. 5)에서는 구성원의 가입 원칙, ‘현실과 발언의 날’(매달 셋째 토요일) 결정, 창립전에 대한 논의와 함께취지문을 확정하였다. 매월 정기모임은 발제와 토론의 방식을 취하였고 이 외에 구성원들의 작업에 대한 발표도 진행되었다. 또한 초대 집행부 구성(1981), 벽화·판화·출판 소그룹 결성(1982), 회우 제도 도입(1983) 등과 같이 내, 외부적으로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개막 당일 출품작에 대한검열로 무산된 <현실과 발언 창립전>(1980.10.17.-1980.10.23,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은 이들의 발언이 당국으로부터 통제된 첫 번째 사건이자 주목을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90년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지속되었던 ‘현실과 발언’은 11회의 동인전과 기획전, 동인지와 무크지 그리고 단행본의 출판, 강연회 및 토론회개최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이 그룹의 미술가들은 우리 사회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비판적 메시지를 드러내어 대중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작업하였다. 따라서 작품은 다양한 주제와 양식을 아우른다. 주제는 시각이미지의 범람, 도시화에 대한 위기의식, 역사적 사건, 미제국주의 등을 포괄한다. 그리고 이들은 경제 성장이 우선시되는 사회 속에서 권력이 만드는 수많은 장치들로 인한 사회적 모순과 문제점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작품을 표현하는 방식에있어서 현실주의(realism)의 방식을 취했다. 특히 회화, 조각뿐만 아니라 사진, 판화, 만화, 복제화, 콜라주 등의 양식을 수용하면서 대중 문화적 이미지 및대량 생산 오브제를 도입하여 작업 방식을 구축하였다.  


‘현실과 발언’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예술을 통해 사회 변혁을 이루고자 했던 1980년대 민중미술의 기폭제 역할을 밝히는 것에 집중되어 왔다. 연구의대상은 현실과 발언 동인 중 일부 작가에 국한되거나, 1980년대 민중미술의 여러 그룹들과의 연관성에 기반을 둔 것이 대부분이며, 이 단체의 작품의 주제와양식을 중점적으로 다룬 학위 논문은 전무한 상황이다. 다시 말해, 민중미술에서 ‘현실과 발언’을 떼어놓고 민중미술이 뿌리 내리기 이전의 상황을 배경으로이들의 활동을 다각도로 읽어보고자 하는 시도는 드물다. 기존의 연구는 이 동인들의 여러 활동과 개별 작품이 지닌 주제와 형식에 대한 해석이 미흡한 것이사실이며, 그들의 다양한 비판의식을 포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소위 민중미술이라는 어휘는 ‘현실과 발언’이 결성되고 5년 후에 열렸던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1985.7.13-1985.7.22,아랍미술관)전으로 인해 보편화된 것으로, 이후에 이 그룹을 표현하는 명칭으로 사용된 하나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김정헌은 1985년에 『계간미술』을통해 민중미술이란 한가지 용어로 1980년대의 미술을 뭉뚱그려 설명하기에는 복잡한 국면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임옥상 또한 민중미술과 자신의예술관과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1988년에 같은 잡지에서 그는 민중미술이 제시하고 있는 이념체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민중미술의개념이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와 같은 미술을 하고 싶지 않다고 논의한 바 있다.


본 논문에서는 ‘현실과 발언’의 작업을 민중미술의 준비단계로 보기보다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시도한 독자적인 미술운동으로 파악하고, 작품을통해 사회비판의식이 발현되는 다양한 국면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 단체의 활동에 참여하였던 모든 미술가들을 연구대상으로 하되, 총11회(1979-1990)의 동인전과 기획전에 출품된 작품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그 이유는 ‘현실과 발언’에 참여했던 미술가들의 작품이 매우 다양하고방대하므로 그룹 외적으로 제작한 작품을 아우르는 시도는 이 그룹의 기본적인 목표 의식과 별개로 읽힐 가능성이 내재해 있으며 본 논문의 취지에 부합하지않기 때문이다.  


본론의 전개에 있어서, 우선 Ⅱ장에서는 ‘현실과 발언’ 그룹의 형성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A절에서는 1970년대의 한국 미술의 동향을 당대 주류 미술의전반적인 흐름과 작품을 통해 짚어 보았고, 이에 근거하여 B절에서는 이 그룹에서 사회비판적 시각이 형성된 경위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하였다. 위와같은 배경을 기반으로 Ⅲ장에서는 ‘현실과 발언’의 사회비판의식이 작품을 통해 구체화되는 양상을 네 가지의 항목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A절에서는1970년대의 주류 미술이었던 단색조 회화를 비판적으로 접근한 시도들을 살펴보았고, 다음의 B절에서는 이 단체의 미술가들이 자본주의로 진입한 당대적상황에서 시각문화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재현했는지를 분석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자본주의 현실을 바탕으로 C절에서는 산업화 이전과 이후의 특성들이혼성된 현실을 도시화의 위기로 진단한 이들의 태도에 대해 논하였다. 마지막으로 D절에서는 산업사회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주적(主敵)으로서의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현실과 발언’이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킨 점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예술과 삶의 장벽을 허문구체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1985년 이후 연이어 등장하는 민중미술 성향의 그룹과의 비교 속에서 소위 부르주아적인 지식인들의활동으로 치부되어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엘리트 미술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사실 이들이 의도한 대중성은 기존의 미술에 내재된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특성의대안으로서 개방적인 소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맹목적인 대중과의 영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실과 발언은 한국의 독특한 현실주의 사조로서미술의 서술성을 회복하고 장르를 확장하여 한국적 현대미술의 맹아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현실과 발언’의 활동은 현실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미술계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시기인 1989년에 등장한 미술비평연구회에 하나의자양분을 공급한 점에서, 이들 작업이 이론계에 미친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작업과 이론을 통해 ‘현실주의’를 실천한 ‘현실과 발언’의 활동을조명한 본 연구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그 그룹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의를 넘어 ‘현실주의’가 차지하는 영역을 재고하였다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No.5

이중섭 회화의 예술심리학적 연구

이은주 명지대학교 대학원 미술치료학과

이메일  ieunju1202@naver.com  

추천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이태호 교수

 

그림은 마음의 표현이다.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은 근대 미술사에서 동·서양의 화풍을 자기화한 작가로서 삶의 마지막까지 심혼(心魂)을 화폭에 담았다. 이 연구는 대향 이중섭의 예술세계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것으로서 예술심리학의 방법론을 적용하였다. 예술심리학은 일반심리학과 달리 예술작품, 예술과정, 예술가 성향(personality)의 본질적 특성을 심리학 관점에서 연구한 방법론이다. 미술사에서 이와 같은 연구방법은 작품에 담긴 무의식적 의미를 예술가의정신성장과 예술에 관련지어 조사하는 심리분석 전기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중섭은 근대미술사에서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상징주의 등 다양한 장르에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사조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무의식에 중점을 두고 있기때문에 심리학과 예술의 연관성은 필연적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담아 작품을 완성시키므로 작품은 인간에게 내재된 모호한 감정들을 집중하게함으로써 자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심리학 접근이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예술가의 본성과 기질, 경험은 표현양식과 연관성을 갖는다. 


광의적 의미로 예술은 기예와 학술을 아우르는 말로써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활동을 색깔, 모양, 소리, 글 등에 의해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이다. 여러 창조적 활동 중 그림은 선이나 색채를 사용하여사물의 형상이나 이미지로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에서 출발한다. 경험은 내적이든 외적이든 화가의 기억 속에서 이미지화되어 있다. 이미지에 관하여 정신과의사이며 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은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늘상 잊고 있는 것 같으나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이미지이며, 이미지는정신이다.”라고 하였다. 정신은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의 심리적 기능과 연관하여 분류하였다. 


융은 경험론자이며, 현상학적인 입장에서 심리학을 본다. 분석심리학은 사람들의 마음을 관찰하고 스스로 마음의 움직임을 진지하게 살펴본 사람의 경험을 토대로 엮은 가설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의식과 무의식이있다. 무의식은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 두 개의 층으로 구분된다. 자아의 지능은 ‘내’가 어떤 것을 인식될 때 그것은 의식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험은이미지로 기억되고 이미지는 정신이며 정신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예술의 표현은 개인의 기질과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동일한현상과 상태에 서로 다른 표현의 양식을 나타내므로 융 분석심리학을 근거로 이중섭 작품을 살펴보았다.


시대적으로 일제강점기와 6.25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하였다. 그의 소 그림들은 시대상황과 개인의 외부적 충격으로 인한 심리변화를 그대로표현하고 있다. <싸우는 소1〉, 〈싸우는 소 2〉는 자신의 정신적 갈등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한 예술가의 삶과 인간적인 삶은 분리할 수 없다. 삶의 경험과예술의 본능은 예술가에 있어 하나의 소통 수단이며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연관성을 시대상황과 개인의 외부적 충격으로인한 심리변화에 중점을 두었다. 아들의 죽음, 가족과의 이별, 개인전 실패 정신적 외상(trauma)이었을 것이다. 이중섭은 자신의 삶에서 예술의 소재를찾는다. 인생의 시기마다 표현된 소재는 자신의 정서이고 감정이었다. 이중섭 개인의 갈등과 인간의 근원적인 갈등을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삶과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중섭의 소 그림은 유학 시절(1941~1943)의 그림과 유학을 마친 후 고국에 돌아와서 그린 그림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다. 이 시기는 근대적 문명사와 세계정세에 대한 위기감과 불안감에서 야기된 ‘시대적 위기감’은 사회적 삶의 공간과 현실적 형상에서 벗어나려는 초월의식과결부되었고, 결국에는 예술적·미적 자기 목적성과 시각적 순수성 등에 의해 ‘불멸’하고 ‘불변’하는 본질적인 ‘순수 조형적’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20세기프랑스의 미술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은 초현실주의는 “순수한 심리적 자동기술(automatisme)을 통해 말로든 글로든 그 외 어떤방식으로든 사유의 실제를 표현하는 것이며 이성의 모든 통제가 부재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 바탕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무의식 세계와 꿈의세계를 표현하는 문학·예술사조이다. 이 시기 이중섭의 작품은 초현실주의 경향을 띄고 있다. 유학 시절 소 그림은 여인과 소 그림은 자신 사랑 이야기를초현실주의 화풍의 신화적이며 환상적인 소와 인간의 사랑을 담아냈다.


그러나 전쟁(1953-1954) 후 한국에서의 소 그림은 표현주의 화풍의 민속학적인 도상으로 가슴속의 깊은 불안과 갈등, 현실에 대한 좌절 등 여러 감정이녹아 있다. 들소, 황소, 흰 소의 홀로 있는 소 그림은 심리적으로 고독, 우수, 그리움, 분노 등의 요소들이 내면에 깔려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그릇된이데올로기와 외세, 전쟁에 분노한 표현되었다. 그의 작품은 표현주의와 상징주의의 결합이라 할 수 있는 사조를 띤다. 이중섭은 표현주의 화가 조르조루오(Georges-Henrii Rouault)와 같이 격렬한 색채와 굵은 붓 터치로 표현하고, 고갱 (Paul Gauguin) 의 <설교 후 장면>처럼 대상에 대해 느낀 감정을효과적으로 작품에 실현한다. 이와 유사한 작품이 <싸우는 소>이다. 1954년 <싸우는 소> 그림은 강렬히 대비되는 색채로 개인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좌절을드러냈다. 이는 개인의 경험이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과 의식의 대립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그의 소 그림은 시대적·심리적 변화를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사랑 이야기와 현실에 대한 고통과 쾌락으로써 경험된 대상의 감각의종류와 정도를 강조하여 재현하고, 예술가인 아버지가 가족을 그리워하고 열심히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들을 작품에 담았다.


또 다른 주제인 아이들을 소재로 한 그림은 제주시절(1951)부터 등장한다. 아이들은 결혼 후 자신의 자식에 대한 애정과 개인의 내적인 감정을 표현한것으로 볼 수 있다. 이중섭은 천사와 같은 고운 마음씨를 가졌고 타고난 인품의 천진함, 순진한 소년 같았다. 아이들의 이미지는 그의 성품이고 원형이었을것이다. 융은 의식적 경험의 근본에 무의식의 자기 원형으로 자기는 개인의 내적 핵심으로 조화와 합일의 궁극적 원리로 작동한다고 하였다. 자기의 원형은수많은 원형적 이미지들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다.예술치료는 내면의 세계를 창작과정과 창작품을 통하여 외부의 세계로 외면화하는 것이다. 즉 예술을 통해서만 내면 표현이 가능하다. 이중섭은 망상의 혼돈속에서 정신세계는 분열하였고 이미지화하여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중섭에게 자아 붕괴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는 자아의 모색과정이었다. 유석진 의사는 치료로써 따뜻한 공감과 보호로 그를 대했다. 이중섭이급성정신분열을 완화되기까지 예술치료와 치료사의 역할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중섭은 삶의 마지막까지 작품을 남겼다. 그동안 많은 기록에서 마지막 작품으로 <돌아오지 않는 강>을 언급하고 있다. 조영삼은 이 작품이 이중섭의 마지막작품이라고 주간희망에 실었다. 같은 제목의 그림은 정릉시절 같은 제목으로 한묵이 3점, 조영삼이 1점을 가지고 있다.  조영삼은 한묵의 옆집에 살았다. 이중섭은 정릉시절 1956년 1-5까지는 한묵과 살았으나 6월에 청량리병원에 입원하였고 7월 적십자병원에 입원하고 퇴원 후에는 8월부터는 고모집에서머물렀으므로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이 그림은 오른쪽으로 반쯤 그려진 집은 나머지 반쪽이 있음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오른쪽으로 반쯤 그려진집에 검은색 배경의 창문 너머로 남자아이가 창틀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에서 가장자리를 따라 형태나 대상을 한 부분만 보여주는 것은 또 다른내면세계의 연계성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나무와 달과 하얀 새>를 마지막 작품으로 삼았다. 나무는 겨울나무처럼 잎이 없고, 마치 죽은 나무 같다. 계절을 반영하고 있는 인간의심리적인 투사와 마음의 걱정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겨울 색상 흰색·검은색·회색을 보여준다. 이러한 겨울 색상은 내면적 성장을 위한 휴식이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내며 눈이 없는 흰 새들은 아래로 하강하고 있다.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처럼 이중섭 회화의 예술심리학적 연구는 마음의 작용과 의식 상태를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을 예술가의 기질과 내면을심리학으로 분석한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작품에 대한 미술사의 양식적인 접근과 심리학적 탐구, 예술의 치유성을 강조하였다.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은심리학을 배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이해하는 심리학이 미술사의 방법론으로서 좀 더 확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No.06

오토마타(Automata)를 활용한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 프로그램 개발 연구

이재원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미술교육전공

이메일  wonny28@naver.com

추천인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박명선 교수


오늘날과 같은 창조 경제 사회에는 각 분야의 지식만으로는 복잡하고 다양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다. 이런 사회에는 단순한 정보나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닌,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선별하여 이를 재결합하고, 새로운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는 융합과 통섭의 능력을 갖춘 창의적인 융합 인재이다. 이러한 창의적 융합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STEAM 교육은 바로 우리 사회에서 원하는 창의적 융합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 유형이다. STEAM 교육이란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예술(Arts), 수학(Mathematics)을 통합하여 다양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융합 인재 교육이다. 2011년 우리 정부는 창의적 융합 인재 양성을 교육의 핵심 과제로 정하고 STEAM 교육을 발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교육 상황에 맞춰 교육 목표와 실천 방안 등을 모색하며 STEAM 교육을 발전시켰으며 2016년 현재, STEAM 교육은 교육 현장 전반에 걸쳐 그 자리를 견고히 하고 있다.


STEAM 교육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STEAM 교육에서 ‘A(예술)’의 역할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기존의 STEAM 교육은 과학과 기술에 초점이 맞춰져 예술적인 부분의 논의가 미비하였다. 이에 문제의식을 갖고 예술을 중심으로 한 STEAM 교육이 점점 연구, 개발되고 있다. 특히, 창조적 사고 및 예술적 소양을 향상시키는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은 자칫 과학 중심의 딱딱한 통합교육으로 흐를 수 있는 교육에 예술적 부분을 가미시켜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한 교육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적용하고자 하며 이를 위하여 오토마타(Automata)를 활용하고자 한다. 오토마타란 자동기계인형으로 전기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기계 장치만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인형, 혹은 기계를 말한다. 오토마타를 활용한 STEAM 교육 프로그램은 각 교과의 내용을 유기적으로 연계할 수 있으며,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과 통합적 사고를 향상시켜 학습의 효율을 극대화 하리라 기대한다. 


본 연구자는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지 10년차가 되는 현재까지 많은 종류의 수업 방법과 수업 자료 및 교구들을 접하여 왔다. 그 중에 교육 자료로서의 오토마타를 접한 것은 4, 5년 전이었다. 한창 STEAM 교육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과학과 미술이 잘 융합된 수업 자료가 필요했고, 오토마타는 이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학생들은 오토마타를 만들기 위하여 즐겁게 조작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많은 지식과 원리들을 복합적으로 이해하고, 또한 창의적인 생각으로 새롭고 다양한 오토마타를 창작할 수 있다. 이러한 오토마타 수업은 과학, 기술, 공학, 예술, 수학을 통합하여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STEAM 교육에 아주 적합한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교육적 효과를 인정받아 학교 현장 및 여러 영재 교육 기관에서 오토마타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면서도 오토마타에 관한 문헌적 자료가 적음은 물론, 이론적 확립도 미비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오토마타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연구한 후, ‘나만의 오토마타 만들기’ 활동을 통하여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학습자에게 적용하여 교육적 효과를 알아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오토마타를 활용한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학습자가 흥미를 가지고 스스로 수업에 참여하고, 활동을 통하여 과학적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예술적 소양을 넓히고, 창의적 사고를 통하여 융합 인재를 양성하여 STEAM 교육을 통한 미술 교육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한 연구의 내용과 방법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Ⅰ장에서는 오토마타를 활용한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내용 및 방법을 개괄하였다. Ⅱ장은 오토마타와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에 대한 이론적 배경 부분으로 오토마타의 정의를 파악하고 오토마타의 역사를 서양과 동양으로 나누어 살펴 본 후, 오토마타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였다. 또한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위하여 STEAM 교육의 정의와 그 필요성에 대하여 논하고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을 잘 적용할 수 있는 주제인 오토마타를 활용하여 이를 통한 STEAM 교육의 필요성을 탐구하였다. 아울러 오토마타에 대한 선행 연구와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의 선행 연구를 살펴보았다. Ⅲ장에서는 실제적인 프로그램 개발 및 적용의 단계로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방향 설정 및 내용 구성과 함께 프로그램을 설계, 개발하였다. 


프로그램은 총 2회 차, 8차시로 이루어졌으며 1회 차는 창의설계 기본 활동으로 오토마타의 개념과 원리를 알고, 키트를 이용하여 오토마타를 만들고, 만든 오토마타를 감상하는 활동으로 구성하였다. 2회 차는 창의설계 프로젝트 활동으로 나만의 오토마타 계획하고, 그 계획에 따라 나만의 오토마타를 제작하고, 이를 함께 감상하는 활동으로 구성하였다. 1회 차에서는 기존에 있던 오토마타 키트를 사용하여 그 원리를 이해했다면 2회 차에서는 이해한 원리를 활용하여 나만의 오토마타를 제작하는 활동으로 설계하였다. 프로그램 활동을 위한 교수·학습 지도안, PPT 자료, 활동지 등도 함께 개발하였다. 개발한 프로그램은 2016년 4월-5월, 경기도 소재의 ○○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총 8차시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창의적 체험 학습 시간 및 미술 시간을 재구성하여 실제 수업에 적용하였다. Ⅳ장은 개발한 프로그램을 학습자에게 직접 적용한 결과를 분석하여 프로그램의 기대효과 및 활성화 방안을 알아보았으며 Ⅴ장에서는 프로그램 전반에 걸친 결론을 도출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오토마타를 활용한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현장에 직접 적용해 보았다. 그 결과, 첫째, 오토마타는 미술 교과뿐만 아니라 과학 및 기술 교과와도 융합이 잘 이루어져 STEAM 교육의 적합한 소재였다. 프로젝트 활동을 통하여 학습자가 학습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여러 학문을 융합하여 자신만의 창의적인 해결방안을 찾아냈으며 자연스럽게 창의적 문제 해결력이 향상되었다. 둘째, 학습자가 프로젝트 활동을 진행하면서 서로 의사소통 하고,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감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길러졌다. 오토마타 프로젝트 활동은 모둠 활동으로 자신의 오토마타 원리를 설명하고, 다른 학습자들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면서 의사소통 능력이 높아졌으며 협동심도 증가하였다. 셋째, 오토마타 프로젝트 수업을 통하여 감성적 체험을 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미술 교과를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졌다. 미술이란 단지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으며 미술을 통하여 다른 교과를 배울 수도, 융합할 수도 있음을 알고, 심미적 안목도 향상되었다.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오토마타를 활용한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살펴보았다. 첫째, 현재 STEAM 통합 교육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 가고 있으며 그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을 우리나라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교수·학습 지도안과 자료 및 교구에 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학교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활용 프로그램과 함께 적용할 수 있는 교재, 교구 및 교수용 자료 등이 함께 개발되어보다 쉽게 현장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 이 연구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였으나 시중에 나와 있는 오토마타 키트의 수준이 다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다양한 수준의 메커니즘을 이용한 교구가 개발 되었으면 한다. 학습자의 수준에 따라 단계적으로 학습한다면 기술적 원리를 포함한 과학적 소양, 예술적 표현 능력이 함께 향상 될 수 있으므로 좀 더 체계화된 연구가 필요하다. 셋째, 초등학생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성인학습자 등 다양한 대상에 본 프로그램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각 학습자의 수준과 환경을 고려하여 학습자의 인지적 영역, 정의적 영역과 심리 운동적 영역 등에 미치는 효과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수준에 맞도록 활용한다면 다양한 분야를 통합하여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융합적 사고 능력이 향상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예술적 영역이 주목 받고 있는 현재, 이공계 영역에서도 과학이 딱딱한 것이 아닌 예술과 접목하여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한다면 미래 사회를 이끌어나갈 창의적 인재 육성에 큰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친근감을 가질 수 있는 소재를 이용하여 과학과 예술을 접목시킨 STEAM 교육 프로그램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된다면 STEAM 교육을 통하여 미술교육은 물론, 과학교육의 활성화에 기여 할 수 있을 것이다. 


STEAM 교육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요즘, 학교 현장이나 교육 연구자들에 의하여 STEAM 교육 프로그램이 많이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에 대한 연구는 충분치 않다. 또한 STEAM의 요소를 잘 갖춘 오토마타에 대한 연구는 아주 미비하다. 오토마타를 활용한 본 프로젝트 활동은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 프로그램의 한 유형이다. 본 연구를 포함하여 좀 더 많은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 프로그램이 연구·개발되길 바라며 미술과 중심의 STEAM 교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미술 교육이 좀 더 활성화되길 기대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교육 활동을 통하여 미래 사회에서 요구하는 창의적 융합 인재가 융성될 수 있는 교육 환경이 조성되길 기대해 본다.   



No.07

렘 콜하스의 도시론과 

정크스페이스 개념에 대하여

정지영 홍익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

이메일  overthemoonjy@gmail.com

추천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정연심 교수


오늘날 우리의 삶과 도시를 작동시키는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공간은 어디일까? 아마도 그것은 쇼핑몰(Shopping Mall) 일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자본주의 사회가 생산과 소비의 순환주기를 끊임없이 순환시킴으로써, 소비를 생활의 핵심요소로 만들었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으로 놓여있다. 오늘날 도시가 소비를 중심으로 개편되고 변화하며, 삶을 구성하고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원리 또한 소비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시의 핵심 원리로 급부상하게 된 자본주의 소비 공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네덜란드 출신의 건축가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그의 시각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전반적인 작업에 있어서 ‘글쓰기’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며, 동시에 도시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과 가치관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핵심이기도 하다. 



렘 콜하스(Rem Koolhaas)의 건축·도시관


본 논문에서는 먼저 그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콜하스의 건축, 도시관에 대해서 살펴본다. 콜하스는 저서들을 통해 기존의 전통적인 도시관과는 매우 비교되는 독특한 입장들을 내놓았는데, <정신착란증의 뉴욕(Delirious New York)>이나 <S, M, L, XL>와 같은 그의 대표작들은, 기존의 도시론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현대 도시를 매우 독창적인 시각으로 독해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는 그의 초기작 <정신착란증의 뉴욕>에서 현대도시의 특징이 엘리베이터의 발명에 의해 생겨난 마천루의 문화임을 발견하고, 이로 인해 생겨난 이질성과 밀집의 문화가 오늘날 현대 도시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었음을 역설한 바 있다. 콜하스는 이러한 논의를 발전시켜 <S, M, L, XL>에서 현대 도시를 크기의 문제로 가져온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거대함의 논리로, ‘거대함’ 안에서 건축이 하나의 도시가 되는, 건축과 도시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다. 특히 그는 이 책에 수록된 글 중 하나인 「보편적인 도시(The Generic City)」를 통해, 도시개념의 발전을 마비시키는 3가지 ‘강력하고 끈질긴’ 신화로서 맥락성, 정체성, 이데올로기를 예로 들며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한다. 이는 그가 도시의 보통 긍정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정체성을 오히려 거부하고 이와 반대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총칭적인’ 도시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도시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쇼핑몰(Shopping Mall)


콜하스는 거대함과 보편적인 도시에 대해 선언한 이후, 그는 과도하게 커져버린 고밀도의 도시들을 좀 더 다층적으로 살펴보고자 선과 악의 가치판단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엄하게 바라보는 판단유보의 입장으로 도시를 관찰하고 있다. 특히 그는 ‘전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실상 변화의 핵심이 되는 것’에 주목하고, 오늘날 도시를 작동시키고 있는 ‘소비’라는 주제를 그의 연구의 핵심으로 가져오게 된다. 그가 하버드 대학원에서 수행했던 프로젝트 ‘하버드 디자인 스쿨 쇼핑 가이드(The Harvard Design School Guide to Shopping)’는 그가 그간 도시의 문제에 있어 중요하게 생각했던 ‘크기’의 문제를 ‘쇼핑’으로 돌리는 전환점이 되는 연구이다. 모든 것이 자본의 질서 속에 녹아내리며, 모든 것을 사고 파는 관계로 바꾸어 버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시의 모든 시설들은 사실상 쇼핑의 형식으로 바뀌어 가고, 도시는 점점 쇼핑몰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 콜하스가 간파한 도시의 진실이다.



정크스페이스(Junkspace)


정크스페이스는 칼로리만 높고 영양가는 하나도 없는 정크 푸드와 같이 표면만 부풀려진 공간으로, ‘근대화가 지구상에 남긴 쓰레기이자 부산물이며 거대함이 남긴 돌연변이’다. 콜하스는 이 찌꺼기를 현대 도시를 독해하는 중심으로 격상시키고 파악하고자 한다. 그는 정크스페이스에서 에스컬레이터와 에어컨이 공간을 무한히 확장시키고 매끄럽게 연결지음으로써 끊임없는 소비를 발생시킨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하부구조가 지배하는 공간은 자본이 유입된 공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소비에 의해 통제되는 ‘조건적인 공간(conditional space)’이 된다. 따라서 콜하스는 우리의 삶을 조직화하는 궁극적 원리가 쇼핑이 되었음을 알리고, 모든 공간이 쇼핑몰이 되어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정크스페이스는 쇼핑논리에 지배당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소비주기에 따라 가변적이며, 잠정적이며, 표피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또한 잠정적이고 대체 가능하며 수정 가능한 하부시스템이 전체 구조를 지배하기 때문에, 형태와 의미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질된다. 정크스페이스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공간 자체가 유동자본의 일부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속적인 변화 속에서 ‘설계’는 철저히 무시당하며, 설계라는 것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구식으로 전락한다. 


이제 ‘설계’라는 단어는 구시대의 단어이자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애물단지가 되었으며, ‘리모델링(remodeling)’이라는 용어가 각광받기에 이른다. 이제 공간은 새로 첨가되기 보다는, 그저 기존의 것을 재배치하는 정도에 머무르며, 벽은 사라지고 칸막이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은 손쉽게 얻고 버릴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과도 같다. 더 이상 육중한 벽이 아닌, 설치와 철거가 용이한 석고판 칸막이가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들을 분류한다. 정크스페이스는 건축가가 아니라, 공간 설계자, 수리·보수 업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따라서 공간은 이제 리모델링 중이거나 혹은 리모델링을 하게 될 운명이라는 두 가지의 선택만이 가능하다. 영속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진 공간은 지나치게 가벼우며, 해석적 깊이 또한 포기해 버린다. 깊이를 상실한 정크스페이스는 원근법이 사라진 표피적인 공간이며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잠정적인 것으로 머문다. 따라서 공간의 정체성이란 더 이상 불가능하며, 존재한다고 해도 의미를 상실한 표면에 불과한 것이다. 



러닝-룸(Running-Room): 정크스페이스에 대한 비판적 해석


할 포스터(Hal Foster)는 「러닝룸(Running Room)」이라는 글을 통해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상실한 정크스페이스로부터 비평적 지점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탐구한다. 이는 해석적 깊이를 초월한 후기자본주의의 공간 속에서 미래로 향한 대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 글에서 소비논리에 지배당하는 공간을 ‘통제공간(control space)’으로 명시하고, 구별을 없애고 비정상적으로 동질화되어가는 오늘날의 문화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 시키고 결정적인 공조를 한 것으로 디자인을 지목하고 있다. 디자인은 모든 것을 소비의 상품으로 뒤바꾸고 있으며, 삶마저도 디자인으로 통합시키려는 토털디자인으로 그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콜하스 또한 「정크스페이스」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위대한 변절자”라고 언급하며 디자인의 영역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포스터는 소비논리에 잠식당한 통제공간으로부터 비평적 주체가 회복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며, 구제불능에 빠진 ‘디자인된 주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율성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켜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제안한 것은 ‘준-자율성(semi-autonomy)’이다. 이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이음매도 없이 매끈하고 출구 없는 정크스페이스로부터 균열을 내어 ‘활동공간’을 확보해야 하는데, 포스터가 언급하는 활동공간이란 문화로부터 구별지음이 가능한 비평적 주체의 공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동일성의 논리 안에 갇힌 자율성과 역사 감각을 회복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소비논리가 통제하는 솔기 없이 매끈한 정크스페이스로부터 활동공간의 틈을 만들고, 항구적 현재로부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콜하스는 오늘날의 도시를 독해하기 위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도시의 특징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설들에 주목하고 있다. 교회, 학교, 병원, 주택 등 지속성이 있는 시설들과는 달리 이런 시설들은 쉽게 사용되고 대체될 수 있다. 하지만 양적인 측면에서는 도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도시를 작동하게 만든다. 이런 공간들은 소비되고 버려지는 정크 푸드처럼, 손쉽게 사용되고 의미 없이 잊혀진다. 콜하스는 현대 도시를 기억이나 컨텍스트, 자연과의 관계, 인간성 등과 같은 범주에 의해서 파악하지 않고, 자본과 기술이라는 차갑고 냉혹한 범주에 의해서 판단하고 있다. 이렇게 파악한 도시의 모습은 정크 푸드처럼 자본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는 도시의 모습이다. 


콜하스는 이러한 도시의 공간에 관심을 갖고 정크스페이스라는 개념을 통해 현대 도시에 나타나는 한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 살펴본 렘 콜하스와 할 포스터의 정크스페이스에 대한 입장은 많은 부분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를 대하는 태도는 다소 상이하다고 여겨진다. 콜하스가 그간 현대 도시들의 특징들로 긍정해왔던 거대함이나 정체성 상실과 같은 요소들을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정크스페이스에 대해 명확한 표현보다는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그가 여전히 현상에 대한 가치판단과 도덕적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그의 무의식적 태도일 것이며, 백지상태를 만들고 영도(zero-degree)를 지향하는 그의 글쓰기 방식일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을 넘어서 있는 그의 악마적인 성향들은, 오히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이 변해가는 오늘날의 현대도시의 현상들을 누구보다도 더 예민하고 예리하게 포착할 수 있는 근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No.08

동시대 소리미술의 공간과의 

상호적 관계성 연구

최지혜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전문사과정 

이메일  sophie4977@hanmail.net   

추천인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진휘연 교수


최근 들어 소리는 시각예술에서 주목받는 매체로서 미디어아트의 일환을 넘어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200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대규모 미술관과 각종 비엔날레에서 소리와 관련한 작업들이 빈번하게 출현하기 시작했고, 각종 전시, 심포지엄, 연구서적 등을 통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소리와 관련한 이슈는 미술계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소리매체가 시각예술 안에서 흥미로운 이슈로 주목받고 있는 것에 비해 아직까지 이를 아우를 수 있는 용어와 개념에 대해서는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채 논의가 분분하며, 비평적 연구 역시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소리미술이 음악과 미술의 경계선상에서 영역의 확장을 이루며 발전해온 복합적인 태생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느슨한 정의와 범주는 작곡가와 미술가들의 다양한 작업을 포함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한편, 용어와 개념에 대한 논쟁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했다. 본 연구는 소리가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가운데 이에 대해 새로운 매체의 등장이라는 이슈만 강조하는 것에 머무르며 비평적 연구로 확장되지 않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소리가 미술사에서 등장하게 된 이론적, 기술적 배경을 추적하며 미술사 안에서 소리를 논의시킬 수 있는 근거와 위치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소리와 공간이 다양한 방식을 통해 관계 맺는 양상을 심도 있게 논의하면서 소리미술을 ‘공간성’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했다. 먼저 동시대 미술관에서 마주하는 많은 소리와 관련한 전시와 논의를 크게 두 영역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데 소리를 제작하고 음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집중하는 쪽과 공간과 장소를 통해 소리를 청취하는 경험을 구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작곡가들을 주축으로 소리의 시간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반면 후자는 공간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추며 조형적으로 소리를 다루는 경향에 속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 연구는 후자에 해당하는 공간과 장소에서의 청취경험에 초점을 맞추며 소리매체가 미술사의 영역 안에서 등장하게 된 이론적 배경과 계보를 추적해보면서 동시대 미술에서 소리매체가 공간과의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는 양상들을 고찰해보고자 했다.


2장에서는 먼저 미술에 침투한 소리에 대한 현재까지의 개념정의와 용어에 대한 논쟁점에 대해 살펴보며 소리를 통한 다양한 실험이 예술을 통해 가능해질 수 있었던 이론적인 배경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제도권에서 통용되는 용어인 ‘사운드아트’ 대신 ‘소리미술(sound art)’이라는 번역을 사용하였다. ‘아트(Art)'가 예술과 미술로도 번역될 수 있지만, ‘사운드아트’가 실험음악과 신 음악까지 포함하는 넓은 범주를 갖기 때문에 논의의 범위를 축소하고 공간에 초점을 맞추며 구분지어 규정함으로써 미술의 영역에서 소리를 역사화, 이론화하는 측면을 다루고자 했다. 이미 존재하는 소리를 새롭게 인식하고, 규정짓는 과정은 소리미술에서 매우 중요한데 20세기 이전까지 소리와 청각은 음악의 범주를 벗어나 예술적, 사회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도시근대화로 인해 새로운 소리인 소음이 등장하고, 이를 기록하고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은 많은 예술가들이 소리를 매체로 활용할 수 있는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이러한 기술적 발전을 근간으로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소리는 자연스럽게 실험적 매체가 될 수 있었다.


3장에서는 이러한 도시의 소음의 등장을 예술 안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를 비롯한 20세기 초의 미래주의자들부터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에 의해 소음예술의 개념과 실천이 견고해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들의 다양한 시도는 음악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소음, 즉 소리가 예술적 가치를 부여받게 되면서 소리미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케이지는 작곡가였지만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소리가 공간과의 상호적 관계에 의해 조형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개념을 세웠다.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백남준 역시 당시의 발전된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소리콜라주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미니멀리스트로 잘 알려진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역시 작업의 중요한 지점을 과정에 두면서 소리조각을 통해 과정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은 지속적이기보다는 간헐적인 시도로 나타났기 때문에 소리미술로 규정짓기는 어렵지만 미술사 안에서 소리의 역할을 다양하게 실험하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소리미술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1960년대의 퍼포먼스, 설치 등과 같이 다양한 비물질적 예술의 등장은 본격적으로 소리를 하나의 중심매체로 활용하면서 공간을 탐구하고 장소를 경험하게 만드는 작업이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소리미술은 청각적인 요소를 공간과 조합하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을 이끌어 내는 특징을 갖는다. 시각을 중심으로 하는 예술과 달리 소리미술은 메타포지션(meta-position)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청자의 경험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기존의 시각예술이 대상을 응시하는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면, 소리는 청자의 신체 내부로 소리를 흡수하는 과정을 요구하게 된다. 소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는 ‘일시성’을 갖기 때문에 청자의 주관적인 경험에 많은 부분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특성은 소리미술이 보다 적극적으로 관람자와의 상호작용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4장에서는 공간과의 상호적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소리미술을 고찰하기 위해 1960년대 후반부터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소리를 조형적으로 탐구하는 작가의 대표적인 작업들을 각각의 특성을 통해 5개의 절로 분류하여 논의하였다. 먼저 보이지 않는 공간의 면면을 구축해나가는 역할로 소리를 활용한 엘빈 루시에(Alvin Lucier)의 작업을 통해 공간의 내부적인 특성을 밝히고 규정하는 과정을 논의하였다. 두 번째로는 소리미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막스 뉴하우스(Max Neuhaus)의 대표적인 작업들을 통해 특정 장소와 결합된 소리를 통해 공간의 외부적인 요인들을 경험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뉴하우스는 공공장소의 다양한 소리에 집중하며 시각에 가려져 간과하고 있던 청각풍경을 경험하게 만드는 퍼포먼스와 설치작업을 통해 소리미술이 갖는 ‘장소특정성’을 보여주었다. 


다음으로는 녹음재생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소리를 통해 장소를 상기시킬 수 있는 경우를 스테판 바이티엘로(Stephen Vitiello)와 크리스티나 쿠비쉬(Christina Kubisch)의 대표적인 작업을 통해 논의하였다. 네 번째 절에서는 소리를 기존의 장소에서 분리시켜 새로운 장소에 옮겨놓음으로써 공간을 재편성하는 형태의 경험이 가능한 지점을 살펴보았다. 대표적으로 빌 폰타나(Bill Fontana)는 사람들에게 일상 속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혹은 들리지 않는 장소의 소리를 채집하여 또 다른 공간에서 이를 들려줌으로써 소리를 통해 장소를 연상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경험을 만드는 것을 고찰하였다. 마지막 절에서는 기술의 발전을 활용하여 다양한 가능성을 더해가면서 소리를 통한 공간의 재편성과 연출된 소리를 통한 공간의 변형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소리를 주된 매체로 활용하며 동시대 미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자넷 카디프(Janet Cardiff), 수잔 필립스(Susan Philipsz)의 작업을 중심으로 연출된 장소의 소리를 통해서 실제장소 너머의 가상공간을 구축하는 과정을 살펴보며, 소리의 물리적인 특성을 통해 공간과의 상호적 관계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 고찰하였다.  


소리미술은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변적인 청각공간을 형성하고 이것은 관람자의 청취경험을 다양하게 구성한다. 소리미술이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한다는 특성은 곧 소리미술이 재생되는 장소를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소리가 갖는 공간성은 디지털 음원을 집안의 공간에서 듣는 것과 헤드폰으로 듣는 것, 그리고 특정 장소에서 체험하는 것을 다른 경험으로 만든다. 따라서 소리미술은 시각예술의 영역 안에서 논의될 수 있으면서도, 시각적 경험에 초점을 둔 기준과 언어와는 구별되어 논의될 필요성을 갖는 것이다. 소리미술은 공간과의 상호적 관계를 구축해나가며 공간과 장소의 경험적 층위를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미술 속 소리는 경계에 놓인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으며, 작가들에 대한 평가 역시 미술사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 연구는 소리가 미술의 매체로서 위치를 확립할 수 있도록 이론적, 역사적인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소리가 공간 안에서 단순히 존재하는 것 이상의 상호적 관계를 만드는 과정들을 통해 공간과 장소를 표현하고 경험하는 매체로써 소리의 가능성을 제고해보았다.  


참고: 『소리미술의 공간과 장소성에 대한 고찰: 막스 뉴하우스와 자넷 카디프 작업을 중심으로』, 서양미술사학회, 제44집, 2016.2 



No.09

朝鮮 後期 茶畵 硏究

최혜인 고려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전공

이메일  gpdlsgpdls88@naver.com

추천인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변영섭 교수


8세기 이후 차의 정신적 가치와 역할은 하나의 문화를 이루게 되었고,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면서 발전하게 되는데, 이를 차 문화라 부른다. 차 문화에는 인류역사상 차와 관련된 물질적·정신적 면이 총 집합되어있다. 차 그림(茶畵)은 차 문화를 이루고 있는 배경과 요소들이 회화의 제재로써 선택되어 그려진 그림이다. 조선 후기 다화를 본격적으로 고찰하기에 앞서 중국 당대(唐代)-명대(明代)의 다화와 조선 초-중기에 제작된 다화 및 당시 조선으로 유입된 중국화보(中國畵譜)를 살펴보았다. 이는 조선 후기 다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파악하기 위한 선행 작업이다. 당대-명대 다화를 검토한 결과, 다화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차를 준비하는 정황이 상세하게 묘사된 다화이다. 특히 탕법(湯法)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문헌에 기록된 내용들과 비교가 가능하고, 실제 차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둘째, 차 마시는 장면과 차를 통해 얻어지는 정취를 강조하고자 한 다화이다. 주로 유명한 고사(故事)를 주제로 하거나 은일하는 고사(高士)와 함께 차를 준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차를 준비하는 정황은 주로 풍로와 탕관, 그앞에 앉아 있는 다동(茶童)이 함께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탕법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된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문헌 기록들과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 또는 다구 없이 차와 관련된 시(詩)만 적혀있기도 하다. 이러한 다화는 탕법에 대한 묘사보다 차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소요유(逍遙遊)에 중점을 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다화들은 두 번째 성격인 경우가 다수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다화는 고려 시대 다화가 가장 이른 시기의 다화이며, 조선 시대에서는 16세기에 활동한 이상좌의 작품이 가장 먼저 확인된다. 16세기-17세기에 제작된 다화들은 3인 이상의 아회(雅會) 장면보다는 1-2명의 고사(高士)가 그려진 비율이 더 높고, 주유(舟遊), 탄금(彈琴), 위기(圍棋), 한담(閑談) 등 은둔·은일과 관련된 주제로 많이 그려졌다. 이와 같은 현상은 15세기말 경부터 이어진 각종 사화(士禍)와 당쟁(黨爭) 그리고 전란(戰亂) 등으로 인하여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지럽고 혼란한 시기와 관련이 깊다. 그들에게 차가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을 담박하게 해주며, 신선의 경지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도구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다화 속 풍로는 세 발 풍로보다는 발 없는 풍로가 그려졌는데 18세기 후반 이후의 다화에서는 대부분 세 발 풍로인 점과 비교해 보았을 때 주목되는 부분이다. 조선 초-중기에는 작품 수가 적지만 그 시기의 차 문화에 대한 특징을 특정할 수 있다.


17세기 이후 중국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고씨화보(顧氏畵譜)』,『시여화보(詩餘畵譜)』,『당시화보(唐詩畵譜)』,『개자원화전』에서 다화를 확인해 볼 수 있다.『고씨화보』는 염립본 작(作) 〈투다도(鬪茶圖)〉와 조맹부 작(作) 〈소익잠난정도〉, 『시여화보』에는 황정견의 두 작품을 도해한 장면이 있다.『당시화보』는 피일휴의 「한야주성(閑夜酒醒)」과 백거이의 「우인야방」, 이백의「취흥(醉興)」과 이옹의 「제화(題畵)」가 있고,『개자원화전』에서는 ‘필석대전다(拂石待煎茶)’, ‘전다식(煎茶式)’, ‘봉다식(捧茶式)’이 차와 관련된 도상들이다. 그러나 화보 내 다화와 관련 도상들은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도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은 차에 대한 인식이 시각적 결과물로 이어질 만큼 강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차 문화가 사회적으로 성행되지 않았던 점도 주요 요인이었다고 본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는 다화는 이전시기에 비해 훨씬 다양한 주제와 도상으로 그려지게 되며 작품 수도 많아지는데, 특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두드러지게 제작되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남송대 나대경(羅大經)의『학림옥로(鶴林玉露)』 「산거편(山居篇)」을 도해한 그림은 18세기 전반부터 그려졌으나 내용에 따라(혹은 그와 상관없이) 본격적으로 차를 준비하는 장면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다. 또한 차 달이는 장면만 단독으로 그려진 작품도 등장한다. 이는 차가 지닌 보편적 가치가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회화 작품의 주요 제재로서 선택되어지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동안 다화의 제작이 활발히 일어나는 현상에 주목하였다. 그동안 실제 음차생활(飮茶生活)을 살펴볼 수 있는 증거로서만 이해된 다화를, 작품의 예술성에 집중하여 다화가 두드러지게 등장한 제작배경과 이 시기 다화의 특징을 면밀히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에 작품의 제작배경, 주제, 도상 간의 관계를 보다 유기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 다화는 그림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과 문예사조가 민감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차는 정신을 맑고 시원하게 해주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탈속(脫俗)과 은일(隱逸)을 위한 매개체로서 즐겨지고 있었지만, 차의 보편적인 가치가 회화 작품에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작품의 제재로서 선택되는 현상은 차와 관련해서 직간접적으로 많이 노출되고 그만큼 그것에 대해 인식이 강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 살펴보면, 차 문화가 사회적으로 성행되지 않았던 시기에 다화 제작이 증가된 것은 차와 관련한 정보에 쉽게 노출되고, 그것에 대한 강한 인식을 갖고 있던 일부 계층에 의해 주문되고, 감상되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다화는 거시적인 견지에서 볼 때, 서울·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북학(北學) 경향을 지닌 지식인들의 학문적 경향과 문예활동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덕무, 유득공, 성해응, 남공철 등의 인물들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은 서울·경기 지역에 거주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국내외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명분보다는 현실에 직시하여 실리(實利)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유연한 사고와 개방적인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다. 정조대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대부분 규장각에서 근무한 공통점이 있다. 18세기 전반부터 이루어졌던 청조 문물과 학예의 수용은 북학(北學) 경향을 지닌 지식인들에 의해서 광범위해지고, 다채롭게 이루어졌다. 이들에게서 확인되는 개방적인 학문 경향, 유연한 사고방식과 다양한 문예활동은 17세기 서울·경기 지역 서인(西人)들의 영향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화 향유층으로 생각되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북학 경향의 지식인들은 19세기 차 문화 중흥의 주역들인 김정희, 신위, 권돈인, 허련 등의 인물들과 학문적 경향, 문예적 활동, 교유관계 등 여러 측면으로 연결되고 있어 흥미롭다. 그들의 다양한 문예활동 중 다화 제작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활동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명말 문인들의 한거문화(閑居文化)를 담은『고반여사(考槃餘事)』,『준생팔전』등과 같은 소품문(小品文)에서 차와 관련된 내용을 많이 접하게 된 것, 그들의 박학적(博學的) 학문 경향으로 차를 음료의 대상에서 학문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만학지(晩學志)」권5‘잡식(雜植)’,「이운지(怡雲志)」권2 ‘산재청공(山齋淸供)’이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도다변증설」과 같은 차에 대한 방대한 자료집을 집성하며 궁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차에 대한 실용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차에 대한 애호와 학문적 관심은 이후 초의선사가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게 되는 결과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연행(燕行)으로 인해 공식적인 연회부터 북경 내 시장, 백성들의 일상생활, 지식인들과의 교유까지 강희제와 건륭제를 기점으로 융성해진 차 문화 상황을 다방면으로 직접 경험하게 된 것이다. 즉, 북학 경향의 지식인들은 서적을 통해 은일지사(隱逸之士)가 차를 마시는 장면을 끊임없이 접하고, 차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궁구하면서 그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하기도 하며, 청 황실에서부터 저잣 거리의 백성들까지 모두가 차를 즐기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들과 함께 차를 마셨다. 차와 관련한 다방면의 문예 활동을 통해서, 차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의식세계가 차를 준비하고, 마시는 일을 회화 작품에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시키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는 다화가 이전 시기에 비해 증가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다화를 18세기 전반과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로 나누어 살펴본 결과, 18세기 후반 이후 다양한 주제와 도상으로 그려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제적 측면에서 시(詩)와 중국 고사(故事)를 주제로 한 작품의 비율이 높고, 도상적 측면에서는 차를 준비하는 장면이 ‘풍로와 탕관, 다동’이라는 구성과 ‘풍로 위에 탕관, 그 앞에 다동’이라는 포치법이 정형화 된 모습이 발견된다. 흥미로운 점은 풍로와 탕관, 다동의 행동 묘사에서 각 작가의 특정 양식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다화의 대부분은 차를 준비하는 정황이 상세하게 묘사 된 작품보다 차 마시는 장면과 차를 통해 얻어지는 정취(情趣)를 강조한 작품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차를 준비하는 장면은 3명 이상의 아회 장면보다 1-2명의 은일지사(隱逸之士)와 함께 등장하는 비율이 높았고, 차 달이는 다동이 단독으로 그려진 작품은 현재 중국 다화에서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양상이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해서 조선 후기 다화는 ‘차가 지닌 보편적 가치’와 ‘차에 대한 인식의 확대라는 시대적 특수성이 드러난 회화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 후기 다화의 예술성에 중점을 두어 고찰한 것으로 의의를 두고, 이를 토대로 한·중·일 다화에서 작품의 주제와 그 유형, 도상 양식에 있어서 나라별 특징과 나아가 삼국 다화의 보편적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차후 연구 과제로 남기도록 하겠다. 더불어 이번에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다화와 차 문화와의 관계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연구해나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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