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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67, Aug 2020

윤석원: 차경(Enfolding Landscape)

2020.7.3 - 2020.8.7 갤러리바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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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정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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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구상과 추상, 지시적인 것과 모호한 것, 도상적 전통과 그것의 전복. 벤자민 부클로(Benjamin Buchloh)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회화가 둘 중 어느 쪽이냐 묻는 질문들을 던졌다. 리히터는 우문에 현답으로 응수하며, 질문자가 도입하려는 이분법적인 대조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같은 인터뷰에서 미술사가이자 비평가는 화가에게 그가 소위 ‘정치적’이라 할 수 있는 대상들을 그렸던 이유와 계속 ‘회화’라는 전통적 매체에 천착하는 이유도 물었다. 화가는, 자신은 회화를 그리는 일을 할 뿐,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릴 정도로 부르주아라는 답변을 내놓았고, 회화가 여러 중요한 것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도 언급했다. 리히터의 답변은 많은 이들이 질문자와 비슷한 수준에서 품고 있던 회화에 관한 의문들을 재빨리 소거한다. 달리 말하면, 회화가 회화인 이유를 자율적으로(autonomous) 주장할 때, ‘회화’는 그것을 보고 읽는 사람들이 지식에 의존해 얻으려는 ‘의미’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윤석원의 회화를 이해하고 말을 붙이기 위해서도 위와 비슷한 질문과 응답이 가능하다. 궁극에 우리가 도달하는 지점은 역시 유사하게도, 단지 그릴 따름인 그 행위에 당위를 부여하는 화가의 의지를 확인하는 대목이다. 우선, 회화의 외적 조건으로써 사진 매체가 있다. 특정 시대의 시지각적 인지 구조를 결정짓는 매체 조건이 있다면, 19세기에도 현재에도 ‘사진’이 있었다. 대상을 포착하고 화면에 담는 이미지 생산의 원초적 메커니즘은 사진이라는 조건 위에서 회화의 당위를 애매하게 했다. 회화는 사진이 전적으로 담당하는 묘사적이고 즉물적이며, 지시적인 상태를 거부해야 했다. 그러나 차라리 더욱 묘사적이고 지시적이게 되는 회화가 있을 수 있다. 이때의 회화는 외적 조건으로서 매체의 정황을 숨기지 않고 내세운다. 가령, 윤석원의 회화에서 모티프를 자연스럽게 화면 밖으로 확장하도록 배치된 구조는 사진적 프레임을 그대로 노출한다. 또, 세세하고 구체적인 묘사는 ‘사진적이다’ 할 장면을 연출한다. 문제는 이렇게 드러난 모티프/실제/대상에서 ‘그렸다는 사실’이 강조되는 지점이다.

이러한 정황은 관상용 식물을 그린 (2020)와 (2020)에서 두드러진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사진의 프레임을 부정하지 않으며 활용한다. 더하여, 관상용 식물이라는 대상의 특성상 본래 가지고 있는 잎과 빛의 시각적 유희를 구조적으로 확보하면서, 그것을 회화적 테크닉으로 담아낸다. 여기서 윤석원은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하기를 추구하는 한편, 묘사된 것을 긁고 흩트리는 터치를 한 쪽 혹은 여러 방향으로 가한다. 이러한 터치는 물리적인 붕괴와 취소의 행위라 할 수 있는데, 행위 자체와는 상반되게 그의 “세밀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자랑하는 효과를 낳는다. 사진에 필적하는 세밀한 묘사 후에, 그것을 취소하려는 물리적 터치/빗금들을 도입하여 그 뒤에 놓인 묘사의 구체성과 결과적인 평면의 물질성을 역설적으로 공존하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윤석원 회화의 뭉개고 얼룩진 화면을 짚어볼 수 있다. 이번 전시의 (2020), (2020), (2020), (2020) 등은 일단 장식적이고 패턴화된 평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벽지, 커튼, 차창과 같은 일상의 장면을 연상시키면서, 무엇보다도 주름, 벗겨지고 뜯긴 흔적, 때, 얼룩 등을 전면에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주름’과 ‘종이의 질감’ 등을 그린 일루전은 작가의 숙련된 테크닉을 보여주지만, 묘사의 능력을 웃도는 붓의 흔적은 ‘그린다’는 행위의 증거를 표명하며 일루전을 넘어선다. 여기서 붓은 뭉개고 얼룩진 물질적 사태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태는 그 자체로 물감이라는 질료와 (얼룩, 때 등의 평면적) 구상성이 합치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윤석원의 회화는 캔버스 각각을 한 단어로 정리하는 작품 제목들처럼 회화의 모티프, 대상의 실제성을 분명히 남겨둔다. 그리고 그것을 회화의 평면, 그 물리적인 상태 안에서 이해하도록 설득한다. 즉, 충분히 보는 맛을 살릴 수 있는 장식적 화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동시에 빗금 친 터치와 얼룩을 물리적인 동시에 형태적으로 연출하는 것이다. 결국, 윤석원은 이미 보도록 마련된 대상을 한 번 더 볼 만한 회화로 담아야 하는 당위를 주장한다. 


*<Turquoise> 2020 캔버스에 유채 70×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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