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1. Features
  2. Public & Tech
현재 위치
  1. Features
  2. Public & Tech
현재 위치
  1. Features
  2. Public & Tech
현재 위치
  1. Features
  2. Public & Tech
Issue 122, Nov 2016

예술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①

Berlin Monument Story

전쟁과 분단 그리고 통일이라는 격동의 현대사를 간직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는 많은 기념비가 산재해 있다. 베를린에 있는 공공미술로서 기념비들은 대부분 역사적 배경을 가진 특정 장소에 설치되어 있고 또한 상당한 수준의 예술성을 성취하고 있다. 여전히 남북 분단의 현실 속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가 눈여겨볼 만한 베를린의 기념비들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이번 호에는 먼저 베를린 중심부인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 주변의 3곳을 소개한다.
● 백종옥 미술생태연구소 소장

‘노이에 바헤(Neue Wache)’ 전경

Share this

Save this

Written by

백종옥 미술생태연구소 소장

Tags

1. 피에타를 품은 노이에 바헤

베를린을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에서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운터 덴 린덴을 따라 걷다 보면 훔볼트 대학교(Humboldt University of Berlin) 옆에 ‘노이에 바헤(Neue Wache)’라는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 전면만 봐서는 이 장소의 의미가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온다. 이곳엔 시간이 정지된듯한 텅 빈 공간과 중앙에 놓인 ‘피에타(Pietà)’를 연상하게 하는 조각상 그리고 공간을 관통하는 둥근 빛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깊은 침묵 속에서 공간을 응시하게 된다. 


그들은 은연중에 추모의 묵상과 기도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이곳은 1993년 이래로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장소가 된 ‘노이에 바헤’다. ‘노이에 바헤’는 ‘새로운 초소’라는 의미인데, 원래 이 건물이 1816-18년 사이에 건축가 칼 프리드리히 쉰켈(Karl Friedrich Schinkel)의 계획에 따라 로마 시대의 군사용 방어시설을 모방한 왕의 경비소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거의 100년간 왕의 경비소였던 ‘노이에 바헤’는 20세기에 들어서 정치적인 변혁의 시기마다 새로운 용도를 찾아 여러 번 변형되는 과정을 거쳤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인 1930년에는 ‘노이에 바헤’를 세계전쟁의 전사자를 위한 추모장소로 개조하려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저명한 건축가인 하인리히 테센노(Heinrich Tessenow)가 개조를 맡았는데, 그는 기존의 안마당을 제거하고 창문들을 벽으로 막아 큰 공간을 조성했다. 그리고 지붕에는 새로 둥근 창을 내어 빛이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특히 커다란 공간 중앙에 제단 같은 검은 화강암 덩어리를 세웠다.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망하고 나치가 정권을 잡자 ‘노이에 바헤’는 나치가 병사들의 죽음을 찬미하는 장소로 둔갑했고, 1945년2월 연합군의 폭격 속에 심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비

(Denkmals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 2005




2차 대전 후에는 1956년 당시 동독의 독일통일사회당(SED) 정권이 ‘노이에 바헤’를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희생자를 위한 경고비로 사용할 것을 결정했다. 1969년엔 건축가 로타 크바즈니챠(Lothar Kwasnitza)가 다시 한 번 ‘노이에 바헤’를 개축했다. 이곳의 중심에 영원한 불이 타고 있는 유리 입방체가 설치되었고, 그 앞으로는 무명용사와 무명 레지스탕스의 묘가 놓였다. 이런 변화를 거친 뒤에 ‘노이에 바헤’는 독일 통일 후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장소가 되면서 현재처럼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의 피에타를 품게 되었다. 


다시 단순하게 정리된 내부 중심에는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형상화한 콜비츠의 청동조각을 4배로 확대한 복제품이 설치되었다. 1867년생인 콜비츠는 화가이자 조각가로 전쟁이 만들어낸 인간들의 참상과 그에 대한 깊은 연민을 담아낸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가 이런 작품들을 하게 된 이유는 1914년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1937-1939년 사이에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Mutter mit totem Sohn)>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콜비츠의 피에타는 무고하게 희생된 지상의 모든 어머니와 자식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숱한 역사의 변곡점에서 살아남은 ‘노이에 바헤’에는 베를린의 근현대사가 진하게 배어 있다. 



2. 분서의 자리, 지하 도서관 


1933년 5월 10일 밤 11시 어둠을 찢으며 붉은 화염이 높이 치솟았다. 횃불을 든 학생들의 구호와 격정적인 발언들로 가득 찬 베벨 광장(Bebel Platz)(당시 오페라극장 광장) 중앙에는 2만 권이 넘는 책들이 장작처럼 불타고 있었다. 7만여 명이 참여한 광기에 사로잡힌 집회를 지켜보던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자정 직전에 등장했다. 그는 특유의 자극적인 연설로 군중들을 휘어잡으며 집회를 마무리했다. 책들의 화형식, 분서(焚書)의 밤이었다. 마르크스(Karl Marx), 프로이트(Sigmund Freud),브레히트(Bertolt Brecht), 하이네(Heinrich Heine) 등 유대인 작가들과 학자들 그리고 나치를 비판한 비유대인 저자들의 책까지 모조리 불태워진 것이다. 


분서는 독일 총학생회가 치밀하게 준비한 일이었다. 여러 단체와 도서관에서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졌고 다양한 책들이 모였다. 이런 분서행위는 동시에 여러 대학도시에서 공공연히 일어났다. 책들의 화형식 직후 250명 이상의 저명한 문필가들은 독일을 떠나야만 했다. 훔볼트 대학교 건너편에 있는 베벨 광장은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왕(Frederick the Great) 시절에 조성된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광장 한가운데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바닥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베벨 광장 중심부에 사각형 투명유리창이 있고 그 지하에 텅 빈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출신 미하 울만(Micha Ullman)의 <도서관(Bibliothek)>(1995)이라는 작품이다. 책들의 화형식이 벌어졌던 바로 그 장소의 지하에 설치된 경고의 기념비인 것이다. 사각형 투명유리창 아래로 보이는 폐쇄된 공간의 모든 벽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하얀 책장들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규칙적인 칸막이로 나뉜 책장들은 모두 비어 있다. 기하학적인 공허가 지배하는 이 공간은 2만 여권의 책들이 불에 타 사라졌음을 암시한다.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Mutter mit toterm Sohn)>

1937-1939




마치 책들의 시신조차 남아있지 않은 텅 빈 묘지 내부를 보는 것 같다. 좀 더 살펴보면 사방의 벽 중에 훔볼트 대학교 방향으로 문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은 문이 아니고 벽이다. 이 공간 자체가 출입구도 없이 사방이 막혀 있음을 더욱 강조하는 장치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침묵과 정적뿐이다. 책들이 소실되고 저자들이 추방된 곳에서 침묵과 정적만이 남는 것은 당연하다. 유일하게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지점은 지상으로 나 있는 투명유리창이다. 그 위에서 사람들이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서서 지하 도서관을 굽어보고, 그들의 그림자가 도서관의 하얀 책장에 어른거릴 때 이 기념비는 완성된다. 


1993년 베를린 주 정부가 나치의 분서 사건 60년에 즈음하여 이를 상기시키기 위한 기념물을 공모했는데, 심사위원회는 울만을 선정했다. 그의 응모작이 기존의 기념비들과 특히 다른 점은 지상에 돌출된 수직적이고 장엄한 기념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서관을 덮고 있는 사각형 유리창에서 몇 미터 떨어진 주변 바닥에는 지하 도서관을 설명하는 2개의 동판이 박혀 있다. 그 동판엔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사람도 불태우게 된다 - 하인리히 하이네1820년’이라고 씌어 있다. 이것은 하이네의 비극 『알만소르(Almansor)』에 나오는 문구다. 하이네가 이미 분서 113년 전에 예술작품 속에서 비극의 역사를 경고했다면, 울만은 예술작품으로 다시 그 역사를 상기시키고 있다. 




미하 울만(Micha Ullman) <도서관(Bibliothek)> 1995  



 

3.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비


운터 덴 린덴 거리의 시작점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에버트 거리를 따라 포츠담 광장 방향으로 내려가면 수많은 콘크리트 블록이 운집한 거대한 공동묘지 같은 장소가 나타난다. 이곳은 홀로코스트(Holocaust)로 희생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추모하는 장소다. 정확히 말하면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비(Denkmals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2005)다. 뉴욕 출신의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 man)이 설계한 이 기념물은 1만 9,000㎡의 불규칙한 경사 지대에 세워진 2,711개의 추모비와 홀로코스트 관련 자료가 전시된 지하의 정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괴벨스의 집무실이 있었던 이곳은 이제 사람들이 모든 방향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방적인 공간이 되었고, 매년 50만 명이 방문하고 세계의 정치인들이 거쳐 가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 홀로코스트 추모비가 만들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88년 8월 기자 레아 로쉬(Lea Rosh)가 토론회를 제안한 것이 발단이었다. 대량 학살 범죄에 대한 경고비를 베를린에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1989년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예켈(Eberhard Jackel)이 참여하는 시민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베를린 주 정부는 1995년에 추모비 공모를 내걸었다. 그리고 528개의 응모작 가운데 2개의 일등상이 추천되었는데, 연방 수상 헬무트 콜(Helmut Kohl)은 추천된 작품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이에 다시 새로운 공모절차가 도입되었고 25명의 국제적인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이 초대되었다. 여기서 피터 아이젠만과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가 합작한 설계안이 1998년에 최종 후보로 선택되었다. 





지하 도서관 설명 동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 리처드 세라가 이 프로젝트 초기에  아이젠만과 협업을 했다는 사실이다. 추모비를 보면 세라의 작품 분위기가 강하게 풍기는데, 결국 세라는 프로젝트에서 중도 하차했고 아이젠만은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했다. 몇 번의 설계 수정을 거치면서 지하에 정보관이 추가되었고 1999년에 이르러 연방의회가 추모비 설치를 결정했다. 그래서 2000년 초가 되어서야 현재의 부지에서 착공식을 가질 수 있었다. 콘크리트 재질의 추모비들은 폭 0.95m에 길이 2.38m로 제작되었고0.2-4.7m까지 다양한 높이로 설치되었는데 0.95m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추모비들은 특수 표면처리를 하여 비바람과 낙서에도 보호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2005년 드디어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완성되었다. 추모비 설치는 독일 재통일 후 정부와 국회의 베를린 이전과 맞물려 과거를 반성하는 독일의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주었다. 추모비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중심부와 주변부의 구분도 없이 지상에 펼쳐진 기하학적인 추모비들과 그 추모비 형태들이 지하로 연결된 정보관의 조합은 새로운 기념비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할 만하다. 이곳은 수많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추상적인 형태 속에서 추모하는 장소이자, 구체적인 자료들을 통해 역사를 반성하게 하는 계몽의 공간이다. 또한, 베를린 시민과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만남의 장소다. 그래서 이곳은 과거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계속해서 현재 속에 살아있게 한다.   

 

[참고문헌]

1) Johannes Heesch, Ulrike Braun Orte erinnern nicolai 2003

2) Herausgeber Hans Dickel, Uwe Fleckner Kunst in der Stadt nicolai 2003

3) Von Friedrich Meschede (hrsg.) Micha Ullman-Bibliothek Verlag der Kunst 1999

4) http://www.stiftung-denkmal.de / Stiftung 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

5) 하겐 슐체(Hagen Schulze) 『새로 쓴 독일 역사』 반성완() 지와 사랑 2000

 


글쓴이 백종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교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했으며, ‘2006 아트인시티 부산 물만골 프로젝트’ 예술감독과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알렙 대표, 익산문화재단 문화정책팀 팀장, ‘2015 광주미디어아트페스티벌’ 예술감독을 거쳐 현재 미술생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온라인 구독 신청 후 전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Subscribe 로그인 Log in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