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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23, Dec 2016

예술과 철학-프랑스

Art & Philosophy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며 고뇌했던 햄릿은 생과 죽음이라는 근원적 문제를 던지며 문학으로 철학을 읽게 만들었다. 예술과 철학 역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특히 현대미술은 철학이라는 매개이자 해석의 벗이 없다면 그 의미를 전하기 힘들 때도 많다. 동시에 이 두 가지 용어는 듣는 사람을 지레 겁먹게 하기 딱 좋은 대상이기도 하다. 추운 겨울날 몸과 머리를 후끈 덥혀줄 주제로 ‘예술과 철학’을 엮었다. 예술을 말할 때 알아두면 좋을 이름과 핵심만을 모았고, 그중에서도 ‘포스트-이즘’ 이론으로는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철학자와 이론을 낳은 프랑스에 집중했다. 최소한 당신은 메를로 퐁티, 라깡, 들뢰즈, 랑시에르, 디디 위베르만이라는 이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올해의 남은 학구열을 불태울 시간이다.
● 기획 정일주 편집장 ● 진행 이가진 기자

그레고어 힐데브란트(Gregor Hildebrandt) 'o.T. (Hermia)' 2016 화강암에 레이저 판화 79×111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e Perro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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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홍익대 예술학과 초빙교수,백상현 철학자·작가,이찬웅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이나라 이미지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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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

Maurice Merleau-Ponty

세계와 만나는 신체, 세계를 호흡하는 _정지은

 

SPECIAL FEATURE 

Jacques Lacan

라깡주의 미술비평 입문_백상현

 

SPECIAL FEATURE 

Gilles Deleuze

들뢰즈의 예술론: 이미지의 우주, 감성의 변신_이찬웅

 

SPECIAL FEATURE 

Jacques Rancière & Georges Didi-Huberman

감각하기, 기록하기, 개입하기 : 자끄 랑시에르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_이나라

 

 




페드로 코스타(Pedro Costa) 

<MININO MACHO MININO FEMEA> 

2005 비디오와 음향 60

 




Special feature Ⅰ

Maurice Merleau-Ponty

세계와 만나는 신체, 세계를 호흡하는 살

● 정지은 홍익대 예술학과 초빙교수



“물은 수영장에 거주한다. 물은 거기서 물질화된다. 그것은 수영장 안에 있지 않으며, 내가 반사들의 그물망이 유희하는 측백나무들의 화면 쪽으로 두 눈을 올려 본다면, 나는 물이 그곳을 방문한다거나 적어도 거기에 자신의 활동적이고 생생한 본질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화가가 깊이와 공간과 색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것은 가시적인 것의 이러한 내적 활성화, 이러한 빛남이다.”(메를로-퐁티, 『눈과 정신』 중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콩디약(Condillac)은 한 조각상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순차적으로 시각, 후각, 미각, 청각을 부여받은 이 조각상은 아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채색된 사물을 본 조각상은 자신이 그 색으로 채색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꽃의 향기를 맡은 조각상은 자신이 향기 나는 존재라고 믿으며, 유사한 방식으로 미각과 청각을 경험한다. 요컨대 이 조각상은 자기가 감각하는 외부 대상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러한 외부 세계와의 혼동은 촉각을 부여받으면서, 특히 조각상이 자신의 신체를 쓰다듬으면서 완전히 사라지는데, 이제 조각상은 자기 자신을 외부 세계와 분리된, 하나의 통합된 대상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조각상은 이제 자기를 ‘나’와 ‘대상’으로서 구분할 줄 알며, 그렇게 통합된 하나의 신체로부터, 세계와 자신을 혼동하지 않으면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샤지아 시칸데르(Shahzia Sikander) 

<Portrait of the Artist Series>

 2016 Disegno Courtesy the artist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세계를 최초로 경험하는 현상적 신체, 다시 말해 감각하고 지각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고유한 신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세계를 최초로 경험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는데, 우선 현상적 신체가 경험하는 그 세계란 습관적이고 친숙한 세계의 바탕에 있는 원초적 세계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이러한 세계 경험은, 사후적으로 언어에 의해 구성되는 세계인 의미 세계 이전에 일어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가 예술, 사상, 정치에 관한 논문들을 모아 놓은 자신의 초기 저작에 『의미와 무의미』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의미의 세계가 언제나 무의미의 세계, 애매성의 상태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에 의하면 독단적인 억견들에 앞서 신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공통적으로 갖는 어떤 근원적 믿음(Urdoxa)이 있는바, ‘세계는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인간이 언어와 개념이라는 투명한 감옥 안으로 자신의 정신을 밀어 넣기 전에, 생생한 세계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으면서 갖게 되는 믿음이다.


『의미와 무의미』의 가장 아름다운 글 가운데 하나인 「세잔의 회의」에서 메를로-퐁티는 세잔(Paul Cézanne)의 어려움과 고민이 사물들의 핵심으로 관통해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세잔은 친숙한 인간적 세계와 단절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가 자기 주위에 사람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던 것, 한때 교류했던 인상파 화가들과 결별했던 것은 모두 사물들의 핵심으로 들어가려는 목표를 위한 절차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태도는 마치 현상학적인 환원을 회화의 작업 안으로 옮겨 놓은 듯하다. 현상학은 나타남들[현상들]의 흐름 속에서 본질을 직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철학으로서,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의식 속에 있는 선입관과 편견들을 판단중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타남들의 변양 속에서도 불변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것을 붙잡아야 한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나타남들의 변양에도 ‘불구하고’ 불변적인 것을 붙잡는 게 아니라, 나타남들의 변양을 ‘통과하면서’ 불변적인 것을 붙잡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이배(Lee Bae) <무제(Sans titre)> 

2014 194×145cm ⓒ Galerie RX





세잔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신부나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예술론을 늘어놓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멀리한다. 그에게 그들은 일종의 ‘갈고리’처럼 그의 생각과 시선을 구속한다.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은 나타남을 그 자체로 보여주려고 했으나, 세잔은 그들 빛의 색들의 대비와 조화 속에서 정작 사물들은 익사당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다. 그리하여 인상파들이 활동하는 파리를 떠나 자신의 탄생지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온 그는 마치 그림이라고는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는 태초의 인간이 바라보듯이 생 빅투아르 산을 바라본다. 그의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몇 시간이고 그 산을 관조했다고 한다. 오랜 관조의 시간이 지났을 때 생 빅투아르 산은 마치 ‘무’로부터 출현하는 것처럼 그의 시선 아래 나타나기 시작한다. 생 빅투아르 산뿐만 아니라 그의 초상화의 인물들이 비인간적인 모습, 낯선 외양을 띠고 그림 속에 나타나는 것은 그가 그런 환원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잔의 그러한 자연적 혹은 인간적 풍경들이 감각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시선에 나타나는 그것을 그리고자 했을 뿐이며, 그의 말에 따르면, 풍경의 향기, 인물의 슬픔까지 표현하고자 했다. 세잔은 이렇게 말한다. “뉘앙스를 띄는 녹색을 붉은색과 결합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입을 슬픔에 물들게 하는지를, 혹은 뺨을 미소 짓게 하는지를 사람들은 의심하는구나, 맙소사!” 초상 인물들의 내면은 그들의 시선 안에서 보이고 읽히며, 오로지 색이 칠해진 표면을 통해서만 표현될 뿐이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고유한 신체는, 앞서 제 감각과 아울러 촉각까지 갖춰진 콩디약의 조각상처럼, 감각들을 파편화된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역능, 즉 감각들을 종합하는 역능을 가진다. 가늘게 진동하는 나뭇가지는 방금 그곳을 떠난 새의 움직임을 내포하며, 잔털이 나 있는 복숭아 표면은 둔탁한 소리를 우리 귀에 울리게 한다. 갓 구운 빵의 갈색 껍질은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내고 고소한 향기를 발산한다. 이렇듯 사물들이 모든 감각에 의해 둘러싸여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은 우리의 신체에게 이 모든 감각을 종합하는 역능이 있기 때문이다.





보이드(VOID) <Bruit blanc> 2016 레진 디스크들, 나무, 

PVC, DC 모터들 가변설치 Courtesy of VOID  





이 글의 제사로 사용한 『눈과 정신』의 수영장 묘사는 감각적인 것들이 얽힘과 교차[키아즘]에 의해 어떻게 우리에게 현상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 메를로-퐁티가 정의하는 세계의 살(flesh)이다.1) 세계의 살은, 보고 만지고 느끼는 신체 그 자신이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지면서 펼쳐내는 세계의 감각성 자체이다. 살아있는 신체가 감각의 주체라는 것, 다시 말해 보고 만지고 느끼는 주체라는 것은 누구나 다 경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신체가 살이 되는 것, 그럼으로써 세계의 살의 대변인이 되고 세계의 살의 일부가 되는 것은 우선 신체 그 자신이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차원으로, 세계의 사물들의 차원으로 떨어졌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 다음 신체는 이제 보고 만지고 느끼기 위해, 감각된 세계를 표현[외현]하기 위해 세계의 사물들 가운데에서 오롯이 일어난다. 


“인간의 신체는 거기에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만지는 것과 만져지는 것, 눈과 타자, 손과 손 사이에 일종의 재교차가 일어날 때, 감각될 수 있는 감각하는 자(sentant sensible)의 작은 불꽃이 일어날 때. 이 불꽃은 어떤 불의의 사고(accident)도 파괴하기에는 충분치 않을 것이며 오로지 신체에게 일어난 불의의 사고만이 그것을 파괴할 것이다.”(메를로-퐁티, 『눈과 정신』)


환원의 작업은 우선 화가의 내면을 비운다. 이는 극도의 불안을 낳는데, 화가가 아닌 보통 사람이라도 자신의 내면이 텅 비게 된다면 마치 무에 의해 존재 전체가 잡아먹힐 것 같은 불안의 상태를 경험할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가 있다는 것, 그가 세계 안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 그가 세계의 사물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에게 어떤 안정감을 준다: 세계에 의해 둘러싸인 무. 동시에 그는 그러한 내면의 무를 조금씩 채우는 세계의 내용을 표현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감정을 가진다. 이것은 일종의 존재의 감정이다. 메를로-퐁티가 『눈과 정신』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집필한 그의 유고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완성된 원고들과 날짜가 기입된 수많은 노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메를로-퐁티는 감각적인 것의 존재론이 회화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정신과 삶과 심지어 언어나 철학을 떠받치고 있음을 강조한다. 예술과 철학 모두는 정확히, ‘영적’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제작이 아니라, 창조인 한에서의 존재와의 접촉이다. “존재는 우리가 이것의 경험을 갖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창조를 요구하는 무엇이다.”(메를로-퐁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959년 6월 노트) 그리하여 그는 예술가에게 있어서의 영감(inspiration)을 감각적 존재의 들숨과 날숨으로 설명한다.






폴 세잔(Paul Cézanne) <Still life with a Curtain> circa 

1898 캔버스에 유채 55×74.5cm ⓒ Hermitage Museum 





“존재 안에서의 호흡이, 누가 보고 누가 보이는지, 누가 그리고 누가 그려지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분간될 수 없는 행위와 열정이 있다”(메를로-퐁티, 『눈과 정신』) 따라서 우리가 여러 화가에게서 발견하는 스타일들은 그들 각자의 존재의 호흡이며 같은 세계를 살고 있는 관객이라면 언젠가는 알아볼 수 있는 세계의 호흡이다. 우리가 왜 지금 다시 메를로-퐁티를 읽어야 하는가? 그는 『눈과 정신』의 1장에서 인공두뇌학에 의한 세계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른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는 인간의 감각을 조종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신체로부터 얻을 수 있는 무한한 다양성과 가능성만이 아니라 감각적 세계 자체의 다양성과 감각성―감각 세계의 두께―을 소멸시킨다. 계획되고 계산된 방식으로만 우리의 신체가 감각하고 반응한다면 그보다 빈약한 신체는 없을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비판과 세잔에 대한 무한한 관심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점차 확장되어 가던 과학주의가 가져오는 세계 및 세계 경험의 축소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미 50년도 더 지난 그의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인터페이스 작품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우리의 신체를 소환하는 것 같은 그 많은 작품 가운데에서, 단지 반응만이 아닌 신체의 진정한 능동성을 불러올 수 있는 작품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감각적 세계와 접촉하면서 나의 신체를 감각적 대상이면서 감각 주체로서 경험하는 것, 그런데 이러한 살적 경험의 공식은 동일한 감각 세계를 경험하는 타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내가 나의 신체를 가지고 감각 세계를 호흡하는 동안, 나는 동일한 감각 세계에서 호흡하는 타자와 보고 보이는 얽힘의 관계를 또한 유지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매우 드물게도, 최근 한국에서 열리고 있는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전시에서, 비록 이 전시가 무척 정교한 기계장치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메를로-퐁티적인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살의 경험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주]

1) 살은 불어 chair의 번역어이다. 동일한 단어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 육체로 번역되기에 더욱 적절한 방식으로 서술하는바, 그에게 육체(혹은 살)는 나와 타자의 혼융된 육체에서와 같이, 나의 의식을 완전한 수동성의 상태에 놓는다. 사르트르의 육체(혹은 살)가 의식의 전적인 수동성에 의해 정의된다면, 메를로-퐁티에게 살은, 감각적 존재와의 접촉에서 신체의 능동성, 신체의 표현성을 가져온다.


[읽을 만한 책]

이남인 『후설과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한길사 2013

조광제 『몸의 세계, 세계의 몸』 이학사 2004

모리스 메를로-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책세상 2005 

철학아카데미 엮음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동녘 2013


[참고할 만한 블로그나 사이트]

메를로-퐁티 관련 번역과 글들: http://blog.naver.com/lackir

메를로-퐁티의 연구자인 킴 맥클라렌의 논문 모음들: http://ryerson.academia.edu /KymMaclaren



글쓴이 정지은은 홍익대 미학과 석사를 수료하고 프랑스 부르고뉴 대학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론」으로 석사학위를, 「메를로-퐁티의 표현과 살존재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홍익대 예술학과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홍익대, 추계예술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라깡과현대정신분석학회의 임원으로 있으며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도서출판b의 기획위원이다. 현상학과 예술, 정신분석을 아우르는 연구를 하고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Murnau The Garden II> 1910 판지에 

유채 67×51cm Merzbacher Kunststiftung

 Photo ⓒ Merzbacher Kunststiftung





Special feature Ⅱ

Jacques Lacan

라깡주의 미술비평 입문

● 백상현 철학자·작가



라깡 정신분석을 미학에 적용하기 위한 조건


예술, 특히 시각예술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라깡의 정신분석 이론을 도입하는 경향은 주로 미국의 미술비평이론을 중심으로 발달해 왔다. 그러나 미국의 이론가들이 라깡의 불어 원전에 접근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고, 이로 인해 영미학계의 라깡주의 미술비평은 단편적 이론 적용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그 한계 안에 머물렀던 대표적 이론가가 바로 할 포스터(Hall Foster)다). 한편 미국 미술비평 이론의 절대적 영향력에 노출된 국내 학계에서는 이미 단편적으로 구성된 영미 이론을 또다시 부분적으로만 수용함으로써 미학도, 정신분석도 아닌 단지 파편적이며 주변적인 담화를 구성하는데 그치게 된다. 이에 필자는 라깡주의 미술비평의 정론을 구성하기 위해 우선 라깡의 원전에 대한 완전한 독해가 필수적이라는 원론적 주장을 반복한다. 라깡의 이론을 예술과 문화 비평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지젝(Slavoj Zizek)도, 브루스 핑크(Bruce Fink)도, 할 포스터도 부차적일 뿐이다. 라깡의 텍스트와 직접 대결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이론들은 라깡에 대한 소문과 추측만을 무성하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요구에 답하기 위해 필자는 라깡의 미술에 대한 견해가 가장 적극적으로 제시된 라깡 ‘세미나 7’에 대한 본격적인 ‘강해서’를 우선적으로 참조할 것을 제안한다(백상현 『라깡 세미나7의 강해』 위고, 2017년 1월 출간 예정). 이에 덧붙여 보다 미학적 접근이 강조된 라깡 이론의 적용서로는 역시 필자의 『라깡의 루브르』(위고, 2016)와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책세상, 2014)이 있다. 이와 같은 텍스트들을 통해 필자는 일반 독자는 물론 동료 학자들이 라깡의 정신분석적 토대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예술에서의 이론적용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에 접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편,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라깡의 ‘세미나 11’, 특히 응시에 관련된 강의들을 직접 읽어보는 것 역시 도움이 된다. 어쨌든 라깡의 텍스트 자체로부터 직접 추출되지 않은 담론들로부터 라깡주의 미술이론으로 담화를 전개시켜 나가는 모든 종류의 사이비 라까니언 독사(doxa)를 거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라깡의 텍스트와 당장 마주할 수 없는 입문자들에게 일종의 개론서적 제시가 아주 의미 없지 않기에, 다음과 같은 간단한 논의를 소개한다. 아래의 논의들은 라깡이 1959-1960년에 강의한 ‘세미나 7’과 4년 뒤의 ‘세미나 11’에 전개된 미학적 언급들에 대한 아주 간략한 소개이며, 이후 독자들의 보다 엄밀한 탐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L'homme qui chavire> 

1950 청동 60×14×22cm ⓒ Kunsthaus Zurich, 

Vereinigung Zurcher Kunstfreunde Photo ⓒ Kunsthaus Zurich 

ⓒ Succession Alberto Giacometti, Paris / ProLitteris, Zurich  





세미나 11과 7에 등장하는 라깡의 예술론 


라깡의 관점에서 시각예술이란 일차적으로 이미지를 길들이는 실천이다. 문명이 예술의 절차를 통해 이미지를 길들이는 이유는 이미지의 시각적 특성 중에 공격적인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혼돈의 이미지 또는 의미를 상실한 이미지, 즉 상징계의 틀에 고정되지 않은 이미지들의 출몰과 압박은 시각적 영역에서 주체의 심리를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인간 문명이 시각예술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적은 바로 이러한 불안의 이미지들을 길들임을 통해 시각적 욕망을 통제 가능한 한계 내부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것을 잠정적으로 예술의 강박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예술은 이미지의 모호함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오직 알아볼 수 있는 영역에 머물게 하는 강박증적 장치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라깡의 가장 자세한 설명이 등장하는 것은 그의 ‘세미나 11’에서이다. 그에 따르면, 회화는 응시에 대한 방어의 수단으로 문명이 발명해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응시’는 라깡 정신분석 이론에서 욕망의 원인으로서의 ‘대상a’라고 간주되는 개념이다. 쉽게 풀어 말하면, 응시란 욕망의 난포착적 대상인 동시에 초과적 쾌락을, 따라서 고통이나 불안 또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회화 예술은 시각적 장에서 벌어지는 시선의 게임에 적극 참여하는 동시에, 응시의 공격을 완화하고 은폐하며, 화가와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볼거리를 제공하는 시각적 방어의 장치로 구성된다. 만일 이것이 라깡이 말하는 회화 이론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그에게 시각예술이란 이미지들에 대한 방어적 욕망이 만족되는 강박증적 실천의 영역이 된다. 사실상 라깡이 이해하는 예술과 문명이란 그렇게 초과적 욕망에 대한 무의식적 방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깡은 이보다 4년 전인 ‘세미나 7’에서 예술을 히스테리적인 것으로, 오히려 불안을 출현시키고, 이미지의 균열을 초래하는 실천으로 규정한 바 있다.1) 이에 따르면 예술은 이미지의 안정된 질서를 교란하며, 그것의 유한성을 외부로, 무한성으로 개방한다. 예술은 이해 가능한 이미지의 질서를 정지시킴으로써 이미지 너머의 초월성을, 상상적 무한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예술작품을 만든 천재성을 신학적 관점에서 상상하려는 경향이 이것을 설명해 준다. 마치 히스테리증자가 현실적 질서를 붕괴시킴으로써 상상적 대타자를 불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예술의 이미지는 자신을 선명하게 드러낼 것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뮤즈를 불러내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라깡의 논점을 종합하지 않는다면 그의 예술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할 것이다. 한 편으로, 시각예술은 일종의 방어수단으로 이미지들에 질서를 부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질서를 정지시킴으로써 이미지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 이에 대한 보다 상식적 차원의 설명을 위해 잠시 라깡이 제시한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라깡은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의 논문에 등장하는 카린 미카일리스(Karin Michaelis)라고 하는 정신분석가의 사례를 소개한다.2) 이 정신분석가에게는 한 여성 우울증 환자가 있었는데, 이 여성이 보여주었던 일련의 행동들은 예술의 강박증적 본질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er

) <Five Branches with 1000 Leaves>

 1946 철사, 엷은 강판 210×450×300cm ⓒ Emanuel Hoffmann-Stiftung,

 Depositum in der Offentlichen Kunstsammlung Basel Photo

ⓒ Emanuel Hoffmann-Stiftung 사진: Bisig & Beyer ⓒ 

Calder Foundation New York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상당 기간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이 여성은 결혼 후 한동안 증세가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성의 우울증이 재발했는데 그 원인이 특이했다. 여인의 집에는 그림이 잔뜩 걸려 있는 방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 이 방안의 그림들은 어찌나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지 빈틈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그림 중 하나를 팔아야 하는 일이 생겼고, 방의 벽면에는 텅 빈 곳 하나가 생기고 말았다. 여인의 우울증이 다시 발작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여인은 빈 벽의 공간이 그녀에게 불안과 우울의 감정을 가져온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동안 우울 증세에 시달리던 여인은 기이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빈 벽으로 남겨졌던 그 텅 빈 벽면에 그림을 그려 채워 넣기로 결심했다.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여인이었지만, 벽면에 원래 걸려 있던 화가의 그림과 거의 똑같은 수준의 이미지를 그려내려고 고군분투했고, 놀랍게도 여인은 마침내 훌륭한 그림을 그려 벽면에 걸게 된다. 우울증이 사라진 것도 그림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라깡에 의해 자세히 소개되는 이 일화는 우리에게 회화 예술의 출현이 빈 공간을, 즉 공백을 가리고 메우기 위해 출현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가능하게 해 준다. 시각적 영역에서 공백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이미지의 부재라기보다는 이미지를 통제하는 질서의 부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강박증적 경향인 이유는, 질서의 부재를 견딜 수 없어 하는 신경증의 구조인 강박증의 경향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회화는 이미지를 길들이기 위한 절차였으며, 그 중에서도 공백은 가장 길들이기 힘든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텅 빈 공간은 그것을 응시하는 주체로 하여금 통제되지 않은 유령적 환영의 출몰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명의 강박증적 경향은 우울증 여인의 사례에서처럼 이가 빠진 공간을, 질서 부재의 빈 공간의 공백을 틀어막기 위한 예술을 발명했다. 그러나 ‘세미나 7’에서의 이같은 라깡의 논점은 같은 해의 다른 세미나에서 보다 확장되는 방식으로 규정을 변화시킨다. 예술이 히스테리적 구조를 갖는다는 언급과 함께 알타미라(Altamira) 동굴벽화의 사례를 언급하는 강의가 그것이다.3) 여기서 라깡은 우울증 여인의 사례와는 다른, 예술의 또 다른 기능을 본다. 






<The Promise of Total Automation> 

쿤스트할레 빈(Kunsthalle Wien) 설치전경 2016 

사진: 스테판 윅오프(Stephan Wyckoff): Athanasios Argianas, 

Silence Breakers, Silence Shapers (Aberrations on Percussion)

 <No. 9>(Detail) 2015 Courtesy the artist and Aanant & Zoo, Berlin; 

Barbara Kapusta, Die Klammer und das O, 2016, Courtesy the artist  





동굴벽화를 그렸던 선사시대 인류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동굴의 벽면에 이미지를 둘러싸는 과정을 통해 동굴의 공백 자체를 드러내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서 라깡은 또한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San Marco)의 내부 궁륭천장을 예로 들면서 건축 예술이 동굴벽화의 기능을 이어 받고 있다고 말한다.4) 성당 내부의 궁륭 천장은 그 내부로 공백을 포획하기 위한 장치, 즉 공백 포획의 장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우울증 여인의 사례와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여인은 공백을 은폐하려고 했고, 동굴벽화의 사례나 산 마르코 성당 궁륭 천장의 사례는 공백을 오히려 드러내어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대립되는 논점에 대해서 우리는 신경증의 구조가 가진 본질을 언급하면서 보다 확장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증은 질서와 법을 추구하는 강박증과 혼돈을 추구하는 히스테리 구조가 혼합된 뫼비우스적 절차이다. 강박증과 신경증의 두 특성은 독립적으로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의 후면을 형성하면서 공존한다. 예술을 히스테리적 속성으로 간주하는 라깡 ‘세미나 7’의 관점에서도 예술이 가진 강박증적 특성이 배제되지 않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먼저, 공백이 있다. 그것은 라깡이 상징계라고 말하는 언어적 틀에 의해 포획되지 않는 대상이며, 질서의 균열이며, 라깡이 실재라고 명명하는 사태이다. 따라서 공백은 욕망이 팔루스(Phallus)의 유도에 따라서 환유의 안정적 흐름을 이루지 못하고 정지하는 사태와 같다. 그와 같은 공백은 자아의 입장에서는 은폐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안정적 흐름이 보장되기 위해서 억압되어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시각의 장에서 미술은 바로 이러한 공백으로 향하는 주체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아름다움을 구성한다. 미카일리스의 우울증 환자 사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미술은 또한 일상적 이미지들의 구성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공백을 출현시키기도 한다. 성당 건축에서 궁륭 형식을 통해 내부에 도입되는 거대한 공백, 또는 회화에서 내부로 도입되는 원근법적 공간의 공백은 시각예술이 공백을 단지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려 한다는 사실 또한 알게 해 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정리가 가능해진다. 미술은 공백을, 즉 텅 빈 스크린을 이미지로 채우면서 시각적 안정감의 쾌락을 보장하는 동시에, 다시금 공백을 출현시킴으로써 시각적 긴장을 유발한다. 






게오르그 브룩만(Georg Bruckmann)

<The imaging and his ideational object - study in color II> 

2014 사진 30×40cm ⓒ Rutger Brandt Gallery





팔루스적 만족과 잉여-주이상스의 만족이 각각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라깡이 ‘세미나 7’에서 파악하는 예술의 기능은 그렇게 공백을 은폐하거나 드러내는 이중의 실천 속에서 죽음충동을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만족으로 전환시키는 행위, 즉 승화에 다름 아니다. 응시의 공격성을 시선의 만족으로 뒤집는 승화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특히, 다시 조합되어 출현하는 공백의 존재는 그 테두리가 정교하게 조율되고 세공되는 과정을 통해서 죽음 충동의 파괴력을 상실한 채 향유 가능한 길들여진 공백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승화된 공백이며, 길들여진 응시라고 할 수 있다. 공백의 억압 또는 조율을 통한 드러냄. 이와 같은 양극적 포지션 사이에서 흔들리는 실천이 바로 시각예술이다. 만일, 억압의 강도가 과도해지면, 공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예술은 언어에 완전히 장악된 밋밋한 것이 되기 십상이다. 반면 공백이 과도하게 강조되어 출현하는 경우, 그리하여 공백에 대한 통제가 불안정해 보이는 경우 작품은 불안을 야기하며 해체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전자는 원근법이 도입되던 시기의 르네상스 고전주의 미술에 해당할 수 있으며, 후자는 매너리즘 회화에 적용될 수 있다. 물론, 공백을 중심으로 파악되는 이러한 구도는 현대미술에서도 그대로 유효하다. 미술이 시각적 욕망의 대상인 한에서 강박증과 히스테리는 보편적 구조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는 사실상 예술을 보수적 욕망 장치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라깡은 예술에 관하여 그것의 혁명적 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라깡은 매우 시니컬하게 예술가들, 특히 화가들을 소작농협회에 종속된 쾌락-현실원칙의 부역자들로 간주한다(세미나 11 참조). 그러나 필자는 이 글을 다음과 같은 논점의 제시로 마치고 싶다. ‘세미나 7’에서 라깡은 사드(Marquis de Sade)의 ‘실험 문학’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예술의 승화가 존재의 유한한 영토로부터 일탈하여 무한성에 개방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5) 예술의 승화 기능이 단지 그에 관련된 주체들을 이미 고정된 자아의 영토로 되돌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험문학의 승화 기능에 따르면, 예술은 때로 그와 관련된 주체의 자아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주체성이 창안될 수 있는 폐허로, 존재의 0도로 육박해 들어갈 수도 있다. 지면의 한계 상, 이 기능에 대한 보다 구체적 설명은 불가능하겠지만, 라깡이 예술의 혁명적 기능에 대한 암시를 자신의 텍스트 곳곳에 숨겨 놓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밝히고 싶다. 필자 역시 라깡에게 예술이 정신분석 임상실천과 유사한 속성을 가진 전복적 실천이었음을 다수의 저서를 통해 논증한 바 있다.  


[각주]

1) 1960년 2월 3일의 세미나 참조

2) 1960년 1월 27일의 세미나 참조. 라깡이 강의의 도입부에서 소개하는 우울증 환자의 사례는 카린 미카일리스(Karin Mikailis)라고 하는 정신분석가의 「빈공간l’Espace vide」이라는 글에 등장하는 우울증 환자 Ruth Kjar라는 여성에 관한 것이다. 라깡은 이 사례를 멜라니 클라인의 논문 「Infantile Anxiety-Situations Reflected in a Work or Art and in the Creative Impulse」에서 참조하고 있음을 밝힌다. 이에 대한 논평은 백상현의 『고독의 매뉴얼』(위고, 2015) 참조

3) 1960년 2월 10일의 세미나 참조. 관련 논평은 백상현의 『라깡의 루브르』(위고, 2016)의 1부 「강박증의 박물관」을 참조

4) 1960년 2월 3일의 세미나 참조

5) 1960년 4월 27일의 세미나 참조


[읽을 만한 책]

Jacques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Vol. Book VII)』 W.W. Norton & Company, Inc. 1997

자크 라캉 『자크 라캉 세미나 11-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개념』 새물결 2016

백상현 『라깡 세미나7의 강해』 위고 2017

백상현 『라깡의 루브르』 위고 2016

백상현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책세상 2014

할 포스터 『시각과 시각성』 경성대학교출판부 2004

할 포스터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출판부 2010 

할 포스터 『미술 스펙타클 문화정치』 경성대학교출판부 2012


글쓴이 백상현은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에꼴 데 보자르 드 발랑스를 학사 졸업하고, 다시 파리 8대학에서 예술학 전공으로 학사 졸업 후, 동 대학 예술학과에서 「외재 언어적 사유, 빌 비올라」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파리 8대학 철학과에서 논문 「증상적 문장, 리오타르와 라깡」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 이화여대, 숭실대 등에서 정신분석과 철학을 강의했으며 ‘한국프로이트라깡칼리지’ 상임교수를 역임했다. 라깡의 정신분석 이론을 통해 미학, 사회학, 철학을 재구성하는 연구와 저술활동에 집중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라깡 세미나 7의 강해』, 『라깡의 루브르』, 『고독의 매뉴얼』,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이 있다.






클로드 모네 <Nympheas(Waterlilies)> 1914-1915

캔버스에 유채 160.7×180.3cm Portland Art Museum, 

Oregon Museum Purchase: Helen Thurston Ayer Fund 59.16

 Photo ⓒ Portland Art Museum, Portland, Oregon






Special feature Ⅲ

Gilles Deleuze

들뢰즈의 예술론: 이미지의 우주, 감성의 변신

● 이찬웅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감각: 들뢰즈(Gilles Deleuze)는 예술의 과제가 ‘힘들의 포착’에 있다고 간략히 규정한다. 달리 말하자면, 회화가 그리는 것은 감각(sensation)이다. 왜냐하면 ‘힘은 감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감각이야말로 그려지는 바로 그것이다.” 이것으로부터 회화의 모든 문제가 등장하며 화가가 돌파해야 할 어려움들이 나타난다. 감각과 대립하는 것, 감각 자체를 그릴 수 없도록 하는 것은 형태(forme)와 클리셰(cliché)이다. 우선 가장 먼저 피해야할 것은 가시적인 형태를 재현하는 것이다. 파울 클레(Paul Klee)가 말한 것처럼, 회화의 과제는 “보이는 것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데에 있다. 현대 미학자들을 사로잡았던 이 유명한 정식은, 들뢰즈에게서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즉, 형태(forme)가 아니라 힘(force)을 그려야 한다. 감각된 것이 아니라 감각 자체를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 들뢰즈에게 감성론의 문제는 감각적인 것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는 조건을 포착하는 데에 있다. 그 조건이란 신체를 관통하는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힘들이다. 


이 지점에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중요하다. 그는 구상과 추상의 대립 속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들뢰즈는 이 길을 ‘형상(Figure)’이라는 개념을 통해 명명한다. 형태가 지성과 두뇌에 연관된다면, 형상은 감각과 신체에 직접 관계한다. “형상은 신경 체계에 무매개적으로 작용한다. 여기에서 그 신경 체계는 살에 속한다. 반면 추상적인 형태는 뇌에 호소하고, 뇌의 매개를 통해 작동한다. 여기에서 뼈는 뇌보다 멀리 놓여 있다.” 이 개념은 라틴어 figura로 어원이 거슬러 올라가고, 운동 속에서 나타나는 연속적인 신체의 동작을 가리킨다. 형태는 정지해 있는 그리스 조각상에서 이상적으로 구현된다면, 형상은 김연아의 연속적인 ‘피겨’ 스케이팅 같은 것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힘, 리듬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위대한 화가들을 가로지른다. 그들이 어떤 구상적 형태들을 선택한 것은 사실 어떤 힘들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밀레(Jean-François Millet)는 중력의 힘을, 세잔(Paul Céanne)은 산들을 주름지게 하는 지질학적 힘을, 고흐(Vincent van Gogh)는 해바라기의 낯선 힘을 그렸다. 이 일반적인 문제 안에서, 들뢰즈가 보기에 베이컨이 특별히 세잔과 이어지는 이유는, 이들이 그 답을 다른 지점에서 구했다는 데에 있다. 즉, 형태 변형(transforma tion)이 아니라, 형태 와해(déformation)를 통해 그 힘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에 있다.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Mont Sainte-Victoire)’ 연작은 후기로 갈수록, 나무, 집, 계곡 등, 산의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은 형태를 잃어가고 대신 색들의 배치만이 전면에 등장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기이한 동작들과 일그러진 얼굴을 통해 신체를 관통하고 있는 힘을 포착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뛰어가는 육상선수보다 의자에 묶인 우주비행사가 중력의 힘을 훨씬 더 잘 드러내는 것이다. 참고로 감각은 지각과 구분된다. 오감(五感)에 주어진 데이터가 하나의 사물에 귀속될 때, 그것은 지각(perception)이라 불린다. 반면 들뢰즈에게 감각(sensation)은 어떤 조직화에도 종속되지 않는 발산하는 무엇이다. 다양한 감각들은 서로 공존하거나 심지어 서로 발산하는 것이다.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피가 아니다. 붉은 색이다.” 이는 지각과 감각의 차이를 잘 드러내주는 가장 짧은 말이다. 예술은 지각이 아니라 감각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감각들은 지성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서로 힘을 전달한다. 시각이 청각을 소환하고, 청각이 후각을 동원하는 이상한 공감각이 감각의 논리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들 역시 이렇듯 폭력적인 감각들의 상호 영향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민정연 <어딘가에> 캔버스에 아크릴릭 

ⓒ 민정연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이미지


다음으로 예술가가 집중해야 하는 문제는 클리셰에 맞서 이미지를 발명하는 것이다. 클리셰와 이미지의 문제는, 들뢰즈가 보기에 회화뿐 아니라 영화를 포함해 조형 예술 전체를 관통한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을 참조해 말하자면, 클리셰는 우리의 일상적인 관심에 따라 잘라진 지각이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즉각적이고 습관적인 기제를 끊고 그로부터 벗어날 때, 새로운 이미지는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물론 하나의 클리셰나 하나의 이미지는 영원히 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이미지 역시 클리셰의 상태로 떨어지고, 다시 이미지는 클리셰를 뚫고 나아가려 한다. 이러한 들뢰즈의 이미지 위상학은 그의 신체론과 겹쳐진다. 이제는 유명해진 그의 개념, ‘기관 없는 신체’를 통해서 그가 드러내려는 바는 다음과 같다. 신체는 내포적 강렬함(intensité)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은 기관들의 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관이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생물학적, 심리적, 언어적, 정치적 요구에 부응하며 형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뢰즈의 신체론과 이미지론 사이에서 간략하게 이런 대응 관계를 말할 수 있다. 이미지는 기관 없는 신체이고, 클리셰는 유기체적 기관이다. 신체는 어떻게 기관 밖으로 뚫고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마찬가지로, 이미지는 어떻게 클리셰를 뚫고 나올 수 있을 것인가? 


회화 이미지에서 영화 이미지로 옮겨가 보자. 『시네마』에서 들뢰즈는 영화 이미지의 본성을 해명하고 그 유형을 분류한다. 그런데 그의 영화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미지 개념에 대한 혁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구분한다. 사물은 저 바깥에 있고, 그것에 대한 표상은 머리 속에 있다고. 이것은 이미지가 실재에 부합하는가라는 항구적인 의심을 유발한다. 이것은 서양의 근대 철학 안에 내내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던 불안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들뢰즈와 베르그송이 말하는 이미지는 머리 속에 있는 표상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나누어지기 이전에, 신체가 세계를 지각하는 사건이다. 아이가 눈을 떠 발견하는 세계나, 당신이 술 취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몽롱하게 보게 되는 것, 그것이 이미지이자 곧 세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이미지가 물질 또는 운동과 같은 것이라고 간주한다. 서양 철학은 오랫동안 본질과 현상,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플라톤(Platon)의 유명한 시인추방론은 이것으로부터 기인한다(그는 아마도 시인보다도 미술가가 더 문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 들뢰즈는 존재자들 사이의 외재적 등급을 비판하면서 이미지를 실재로서 긍정한다. 이러한 내재성의 철학 안에서 우리는 예술과 미학의 특별한 위상을 확인한다. 우리가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서 이미지를 사유하려고 할 때, 우리는 배후 없는 이미지들 앞에 위치하고, 대신 깊이 없는 이미지 또는 이미지 자체의 깊이를 발견한다. 





메리 카사트(Marry Cassatt) <In the Loge> 

1878 Museum of Fine Arts, Boston 

The Hayden Collection—Charles Henry Hayden Fund, 10.35. 

사진 ⓒ 2015 Museum of Fine Arts, Boston  




들뢰즈의 철학적 영화보기 안에서 영화 이미지는 크게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로 구성된다. 다시 운동-이미지는 지각-이미지(베르토프, <카메라를 든 사나이>), 변용-이미지(드레이어, <잔다르크의 수난>), 행동-이미지(프리츠 랑, <도박사 마부제 박사>) 등으로 나뉜다.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는 어떻게 넘어가게 되는가? 영화사의 흐름 안에서 볼 때, 이 이행은 2차 대전을 기점으로 고전 영화에서 현대 영화로 넘어가는 역사적 진행과 대체로 겹쳐진다. 하지만 들뢰즈가 강조하는 것은 그 핵심에 있는 미학적 전환이다. 감각-운동 도식이 이완되거나 붕괴될 때, 순수하게 시각적인 상황이 도래하는 것이다(비토리아 데 시카, <움베르토 디>). 


분산되고 생략적이고 유랑하고 방랑하는 상황들이 주어지고, 블럭들로 진행되고 의도적으로 약화된 연결들, 그리고 유동하는 사건들이 도래한다. 이제 행동의 영화가 아니라 보는 자의 영화가 된다. 시간-이미지는 회상-이미지(맨키위즈, <이브의 모든 것>), 꿈-이미지(브뉘엘, <안달루시아의 개>), 세계-이미지(쟝 엡슈탱, <어셔 가의 몰락>), 결정-이미지(오손 웰즈, <상하이에서 온 여인>)으로 다시 분류된다. 들뢰즈의 영화-이미지 분류에서 왕좌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 결정-이미지이다. 그것은 현실성과 잠재성이 완전히 합착되어 분열증적으로 진동하는 ‘식별 불가능성의 지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들뢰즈에게 이것은 예술의 심장 그 자체이다. 『시네마』는 이미지를 이해하고 창작하는 데 매우 유용한 거대한 범주표이다. 우리는 이 이론 덕분에 운동과 시간을 이미지 속에 담는 시대에, 보다 다양하게 제작하고 보다 깊이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저서가 완결된 체계라는 뜻은 아니다. 이 저서는 1980년대 중반에 쓰여졌고, 들뢰즈 역시 당대에 비디오의 등장으로 인해 새로운 이미지의 체제가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쓰여지지 않은 『시네마』 3권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떤 이미지를 부제(副題)로 붙여야할까?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Monet Painting in His Garden at Argenteuil> 

1873 캔버스에 유채 46.7×59.7cm Wadsworth Atheneum

 Museum of Art, Hartford, CT. Bequest of Anne Parrish Titzell, 

1957.614 사진 ⓒ Wadsworth Atheneum Museum of Art, Hartford, CT




예술


들뢰즈는 예술을 둘러싼 몇 가지 통념을 비판하고 새로운 규정을 내놓았다. 첫째, 철학, 과학, 예술은 본성상 서로 다르지 않다. 이것들은 모두 창조하는 활동이다. 다만 창조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철학은 개념을, 과학은 함수를, 예술은 감각-집합체를 창조한다. 이런 이유에서, 각자의 고유한 영역이 있는 만큼, 상호간의 영향과 간섭이 언제나 존재한다. 둘째, 예술은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 아니다. 예술은 영토를 표시하기 위해 질료를 사용할 때 시작된다. 새가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나뭇잎을 뒤집는 행동이나 익명의 누군가가 담벼락에 그래피티(Graffiti)를 그리는 활동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재료들 사이의 관계에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고 향유할 때 고유한 의미에서 예술이 된다. 


들뢰즈는 칸트(Immanuel Kant)와는 다른 관점에서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해 해명한다. 칸트는 인간 인식의 주관 안에서 아름다움과 예술의 정초 가능성을 해명했다. 반면 들뢰즈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예술 작품의 성립 조건을 발견한다. 그는 예술작품을 ‘지각소들과 변용소들의 구성물(composé de percepts et d’affects)’이라고 정의한다. 지각소와 변용소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저런 지각작용(perception)과 정서적 변용작용(affection)을 경험하게 된다. 지각작용과 변용작용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반면, 지각소와 변용소는 잠재적이고 이념적이고 비인격적이다. 지각소와 변용소는 어떤 사물, 장소, 풍경에 이미 떠돌고 있는 것이다. 미술과 음악은 그런 것들을 포착해 캔버스와 악보에 담는 것이다. 지각소와 변용소들만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잠재적인 장이 예술이 탐색하는 공간이다. 누군가 그것의 한 구역을 감지하고 작품으로 창작했을 때, 우리는 그의 고유명사를 따 그 구역을 명명한다.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비장함이라던가, 파울 클레의 리듬감 같은 식으로. 우리의 삶이 그러한 공간을 방랑하고 유영하는 일정이라면, 예술은 우리의 감각이 그 높이에 적합하도록 변형하는 기술이다.   



[읽을 만한 책]

1차 문헌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2장과 4장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5장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08 6장과 8장(1995년 구판은 도판을 담고 있어 유용하다) 

질 들뢰즈 『시네마』 시각과언어 1권 2002 2-4장; 2권 2005 1, 4장

질 들뢰즈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문학과지성사 2004 3장과 9장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11번째 고원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5 7장과 결론


관련 논문

이찬웅 「들뢰즈의 감성론과 예술론: 내포적 강도와 이미지」 『미학』 66집 2011 

이찬웅 「들뢰즈의 회화론: 감각의 논리란 무엇인가」 『미학』 71집 2012 

이찬웅 「들뢰즈에서 창조의 세 전선(戰線)-철학, 과학, 예술」 『철학』 127집 2016 



글쓴이 이찬웅은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 철학과 석사를 졸업하고, 프랑스 뤼미에르-리옹 2대학에서 영화학 석사를, 리옹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현대철학, 이미지와 사유의 관계가 주요 관심 분야이며,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원에 재직 중이다.






빌 비올라(Bill Viola) <Night Vigil> 2005/2009 비디오/사운드 

설치 Color rear-projection video diptych, two large screens 

mounted on wall in dark room 18분 6초 Overall projected image size: 

2.01×5.28m; room dimensions variable 배우: 제프 밀스(Jeff Mills), 

리사 로든(Lisa Rhoden) 사진제공: 국제갤러리






Special feature Ⅳ

Jacques Rancière & Georges Didi-Huberman

감각하기, 기록하기, 개입하기 : 자끄 랑시에르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 이나라 이미지연구자



0. 미학적 비평의 전통


자끄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이론과 비평 양 영역에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동시대 프랑스 철학자다. 랑시에르와 디디 위베르만의 이론적 입장과 비평적 개입을 살피기에 앞서 잠시 18세기 프랑스의 계몽 철학자인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를 떠올려보기로 하자. 『백과전서(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é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ètiers)』의 저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디드로는 젊어 무신론적 경향의 글을 다수 발표하며 지속적인 검열의 압박과 투옥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볼테르(Voltaire), 루소(Jean-Jacques Rousseau) 등의 동료 계몽철학자들을 모아 『백과전서』를 편찬했던 디드로는 『백과전서』 속에 자신이 보고 듣는 세계 속 경험과 획득한 지식을 담고자 했다. 그런데 음악회, 연극 공연, 미술 전시 등도 디드로의 생활세계의 주요한 활동이었다. 그는 작곡가를 소재로 한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고 배우에 대한 시론을 구상하기도 하였으며 전시 비평문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특히 18세기의 제한된 교양 계층을 대상으로 발간했던 『문학, 철학, 비평 서신』을 위해 적지 않은 글을 썼다. 프랑스 혁명 이전 교회의 검열이 아직 기세등등하던 시절, 귀족 계급을 수신자로 했던 디드로의 저술활동은 프랑스 철학자의 비평적 글쓰기의 전통을 엿보게 해준다. 랑시에르와 디디 위베르만은 비평가이자 철학자라는 디드로적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도전자이다. 이들은 어떻게 디드로적 지식인을 계승하며 재구성하고 있을까?




1. 자끄 랑시에르: 몫 없는 자의 몫과 예술


자끄 랑시에르는 역사가로 출발, 정치철학 저술을 펴내다 2000년 이후 이미지, 영화, 미술, 예술과 정치, 역사와 형상 등에 대한 다양한 이론 및 비평적 저술을 펴내고 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미술사학자로 출발, 르네상스 시기 회화, 미니멀리즘, 인류학적 이미지 등에 대한 다양한 저술을 펴낸데 이어 역사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비평적 개입을 시도한다. 랑시에르는 시종일관 정치와 예술의 불가분성을 강조한다. 이는 예술이 정치적 슬로건을 재구성하고 재생산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랑시에르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선전 수단으로 전락했던 예술의 경우 또는 해방의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정치에 배반당했던 예술의 경우를 분명히 인지한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정치적 목적에 소비되어 자기 자신을 배반했던 역사적 경험 말이다. 랑시에르의 미학적 사유 내에서 정치와 예술이 맺고 있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우선 ‘예술체제론’과 ‘감각적인 것의 분할(le partge du sensible)(국내에 <감성의 분할>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이라는 두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개념의 내용을 간략히 살피기 전에 랑시에르의 지적 궤적과 관심을 잠시 살펴보자. 


랑시에르는 애초에 전후 프랑스 현대사상의 주요한 경향이었던 구조주의 사유의 자장 내에서 맑시즘을 이론화하였던 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의 철학적 입장을 사사했다. 그는 학생, 노동자 등이 강단을 점령하고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세웠던 ‘68 혁명’을 경험하며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근본적으로 재고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과학을 구별하며 지식은 과학적 사유여야 하며, 과학이 됨으로써 이데올로기에 맞설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68 혁명’ 시기 시스템이 강요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자신의 존재방식을 새로이 규정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목격한 랑시에르는 해방의 계기는 지식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을 새로이 나누고 배분하는 과정에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즉 노동자나 몫 없는 자들이 자신의 위치와 신체, 표현을 새로이 궁리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적인 실천이다. ‘감각적인 것의 분할’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제안된다. 동시에 ‘몫 없는 자의 몫(part des sans-part)’을 상상하고, 고안하고, 제작하는 행위는 제도에 결박된 ‘치안’의 개념과 구별되는 ‘정치’로 명명된다.





빌 비올라 <Inverted Birth> 2014 비디오/사운드 설치

 Color High-Definition video projection on screen mounted

 verticallyand anchored to floor in dark room 8분 22초

 Projected image size: 5×2.81m; room dimensions variable 

배우: 노만 스콧(Norman Scott) 사진제공: 국제갤러리 





랑시에르는 이처럼 마르크스(Karl Marx)가 노동의 ‘소외’라는 개념으로 다루었던 현상을 ‘감각적인 것의 분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공동의 시스템은 성원의 시공간, 임무, 몫을 분할하고 이 방식을 자명한 것으로 규정한다. 규정에 따라 성원이 공동체 내에서 모습을 드러내거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이 결정된다. 랑시에르는 시민과 장인의 사례를 들어 공동체에 속한 자들이 어떠한 임무와 자리를 배분받아왔는지 언급한다. 스포트라이트는 자리를 배분받은 이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무능하다고 손가락질 받은 자들은 보이지 않는 장소로 내 몰릴 것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지워질 것이다. 다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투쟁을 언급한다면 랑시에르는 감각의 분할을 새로이 하는 실천으로서 예술을 제안한다. 정치란 체계가 부여한 자리의 자명성을 의심하는 일이고, 자신의 이름과 몫을 새로이 발명하는 일이다. 이를 실천하는 이를 랑시에르는 ‘해방된 관객’이라 지칭한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감각할 수 있는 바를 분할하는 방식에서 예술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도출한다. 


그렇다면 랑시에르가 언급하는 예술의 체제가 무엇인가? 이는 예술을 식별하며 근거 짓는 세 가지의 체제다. 윤리적 예술의 체제, 재현적 예술의 체제, 미학적 예술의 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윤리적 예술체제는 예술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질문을 중심에 상정한다. 예술은 과연 진짜의 무엇을 보여주는가? 예술이 보여주고 있는 바는 올바른 것인가? 예술은 현실에 어떤 효과를 줄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제기에 따르면 예술은 독자적 세계를 갖추지 못한다. 윤리적 예술체제가 예술에 대한 플라톤적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면 재현적 예술의 체제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시학』을 따르며 주제와 재현 양식 사이의 상관관계에 주목하여 예술을 식별한다. 재현적 예술체제는 예술로 감각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지정한다. 


미학적 예술체제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미적 혁명의 결과를 도래한다. 미학적 예술체제는 재현적 예술체제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예술의 영역이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체제에 속하는 예술은 삶의 지척에서 자신의 경계를 끊임없이 재고해야한다. 미학적 예술체제는 이제까지 예술로 감각되었던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용어를 빌리자면 예술은 감각을 분할하는 불평등한 기존 체계에 질문을 제기하는 역할을 맡는다. 달리 말하자면 불평등한 감각의 분할 체계에 불화를 가시화하고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우리는 미학적 예술체제에 속한 예술로 칭할 수 있다.





타데우스 칸토르(Tadeusz Kantor) 

<Panoramic Sea Happening-Sea Concerto, Osieki>

(시리즈 일부) 1967 잉크젯 인쇄 Eustachy KOSSAKOWSKI 

 Propietaire des negatifs et diaositifs : 

Musée d’Art Moderne de Varsovie ⓒ Collection Anka Ptaszkowska  



 


2.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 불완전한 이미지들  


오늘날 우리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을 미학자라 지칭한다. 이미지의 철학자이자 미술작품, 영화, 비디오, 역사의 형상들, 인류학적 산물들을 대상으로 50여 편의 크고 작은 저작을 펴낸 디디 위베르만은 미술사학의 학제 내에서 처음 연구를 시작했다. 디디 위베르만은 이내 미술사학의 연대기적 서술이나 도상해석학의 전통을 거부하며 미술사학의 울타리 너머로 자신의 방법론과 연구 영역을 확장했다. 예를 들어 그의 박사연구 논문은 그의 야심과 독창성을 예고한다. 그는 파리 정신병원의 히스테리 환자들의 사진을 연구한 박사논문을 집필하며 정신분석학과 인류학, 미술사 사이의 가교를 놓으려 시도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등의 사유가 디디 위베르만의 미술 및 인류학적 연구를 직조하는 씨줄과 날줄이다. 


그는 초기 저작 『이미지 앞에서. 미술사의 목적에 대한 질문』(1990)이나 『프라 안젤리코. 비유사성과 형상화』(1990)에서 우리의 눈앞에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솟아오르는 이미지, 닮음의 논리를 능가하는 ‘비유사성의 형상’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아비 바르부르크에 대한 기념비적 저작 『잔존하는 이미지. 아비 바르부르크에 따른 미술사와 유령의 시대』(2002), 아우슈비츠(Auschwitz)의 기록 사진을 펼쳐두고 불완전한 이미지와 이미지-몽타주에 대한 사유를 전개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2003), 고다르(Jean-Luc Godard), 브레히트(Bertolt Brecht), 에이젠슈테인(Sergie Mikhailovich Eizenshtein) 등의 작업을 가로질러 이미지를 통해 역사의 형상을 축조하려는 시도라 할 『역사의 눈』 시리즈를 펴낸다. 


디디 위베르만은 ‘시대착오’, ‘잔존’, ‘변증법적 이미지’, ‘이미지-징후’ 등의 개념을 창안하는데 이 개념들은 제 각각 철학적 사유가 이미지 및 이미지로서의 역사와 조응하며 빚어낸 사유의 결정체들이라 할 만하다. 디디 위베르만은 이들 개념을 제안하며 바사리(Giorgio Vasari) 이후 교조화된 예술가들의 연대기, 뵐플린(Heinrich Wölfflin) 등의 양식론, 고정된 의미 파악에 경주하는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이후 도상해석학적 방법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한다. 흔적으로서의 이미지, 계보학적 이미지, 이미지의 물성, 징후로서의 이미지, 자리바꿈의 기호로서의 이미지, 비유사성의 이미지, 정념의 이미지·가시적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던 협소한 의미의 이미지 개념은 이와 같이 확장된다. 






페드로 코스타 <THE DAUGHTERS OF FIRE>

 2015 비디오 프로젝션 반복 08





디디 위베르만은 미술사학자의 임무가 ‘일반론’의 제안이라기보다 사안에 대한 이론을 제출하는 ‘전문가’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디디 위베르만은 자신의 저작 속에서 방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한다: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종교화, 소설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남긴 데생, 토니 스미스(Tony Smith), 솔 르윗(Sol Lewitt) 등의 미니멀리즘 조각 작품,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등의 동시대 회화,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나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의 영화, 왕빙(Wang Bing), 빌 비올라(Bill Viola) 등의 비디오 작업 등이 그 일부를 이룬다. 이를테면 디디 위베르만은 ‘모든 예술작품’에 대한 이론을 제안하기보다 ‘우리를 잡아끄는’ 일부의 예술작품들을 응시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떤 이미지들, 어떤 작품을 응시하는가? 이들은 가시적인 재현 너머로 우리를 이끄는 이미지들이다. 다시 말해 의미의 일의성이나 명백함 대신 불안과 동요를 드러내는 이미지, 상실의 기억을 복기하는 이미지, 이질성과 이타성의 계기들을 포함하고 있는 이미지, 역사의 순간을 잡아채는 이미지들, 말하자면 계보학적 이미지의 권능을 확인토록 하는 이미지들이다. 동시에 디디 위베르만은 각각의 작품을 분석하며 자신의 개념을 새로이 확장하고 창안한다. ‘전문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디디 위베르만은 철학적 일반론의 소모품으로 개별 작품을 사용하는 철학적 개입을 거부하고 각각의 시각적 구성물이 매개하는 빛나는 사유의 가능성을 세심하게 뒤쫓는다. 그는 ‘변증법적 이미지’, ‘잔존’, ‘징후’, ‘몽타주’ 등의 개념을 끊임없이 호출하되 매 순간 작품이 제공하는 감각적 지평에서만 이들을 펼쳐낸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2000년대 이후 디디 위베르만은 민중이나 역사의 이미지에 대한 다양한 저작을 펴낸다. 이와 함께 디디 위베르만은 회화, 영상, 인류학적 사진 등의 자료를 배치하며 <아틀라스>, <유령의 시간>, <봉기> 등의 전시를 기획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시각적 구성물, 아카이브 자료에서 출발하여 이미지의 권능을 확인하는 이론적 도정, 작품을 선택하고 배치하는 큐레이팅 작업을 통해 디디 위베르만은 자신의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실천한다. 디디 위베르만은 어떠한 단어나 이미지도 홀로 완전하거나 완벽하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저작이나 자신이 기획한 전시장 내에 각각의 불완전한 이미지들을 뒤얽고, 배치하고, 재몽타주한다. 이야말로 단 하나의 완전한 진리를 제시하는 일 못지않게 탁월하게 역사를 증언하고 사유하도록 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3. 비평가로서 랑시에르는 비판적이거나 전위적인 예술작품에 대한 호의를 숨기지 않는다. 모더니즘의 자율성 테제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자기붕괴를 비판하는 랑시에르는 불순함과 이질성을 산출하는 예술의 작동, 예술의 영역을 침범하는 삶의 요소들 사이의 교환과 쟁투에 주목한다. 바로 이 지점, 예술과 비예술, 예술과 삶 사이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지점이 정치의 지점이다. 랑시에르는 ‘절대적 수동성’의 가장 특권적인 사례로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소설의 ‘문체’를 예시하기도 하고 포르투갈의 동시대 감독 페드로 코스타(Pedro Costa)의 작품에서 어떻게 빈자들의 감각적 세계의 면면이 가시화하는지를 밝혀내기도 한다. 불완전한 이미지가 증언하는 바에 주목하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아우슈비츠 캠프에서 건져낸 4장의 흐릿한 사진에 대한 긴 비평문을 적었다. 그는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영화 <스트롬볼리(Stromboli)> 속 참치잡이 어부들의 노동의 장면을 꼼꼼히 분석하기도 했다. 자끄 랑시에르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18세기 디드로처럼 비평을 게을리 않는 철학자다. 그러나 디드로와 달리 이들은 세계의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 재 아래 묻힌 기록들을 감각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예술의 역할에 주목하며, 예술의 역할을 증언하는 기록자가 되고자 한다. 이들은 불화의 기록자로서의 비평가이다.  


[읽을 만한 책]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_미학과 정치』 도서출판b 2000

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2008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11

자크 랑시에르 『영화 우화』 인간사랑 2012 

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현실문화 2014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현실문화 2016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_이미지의 정치학』 길 2012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 만일 2016


[참고할 만한 사이트]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기획한 전시 관련: 

<봉기(Soulèvements)> http://soulevements.jeudepaume.org/ 

<Georges Didi-Huberman and Arno Gisinger: Nouvelles histoires de fantômes>

http://www.palaisdetokyo.com/en/event/georges-didi-huberman-and-arno-gisinger



글쓴이 이나라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발터벤야민의 이미지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파리 팡테옹 소르본 1대학에서 「현대영화 이미지의 물질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서울대, 경희대 등에서 강의하며 현대영화, 영상, 현대 프랑스 미학이론에 대한 연구 및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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