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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27, Apr 2017

전시를 쓰는 방법

My Exhibition Note

전시 기획에 관련된 글을 읽고, 곱씹듯 작품을 감상하고, 리플렛을 받아들고 나오다 따로 생산된 굿즈를 득하는 것으론 도저히 성이 차질 않는다. 미리부터 일정을 확인해 금쪽같은 시간을 들여 찾아온 전시, 한번 보고 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희미해진다. 사진으로 담아둬도 시간이 흐르면 불필요한 정보처럼 인식되고 각종 잡지에 실린 전시 리뷰들도 내 감상과 딱 맞아 떨어지진 않는다. 감명 깊게 본 전시, 한때 내 마음을 뺏었던 전시를 온전하게 소장할 수 있는 법은 없는 걸까. 당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달 편집부는 당신이 그 전시를 온전히 기록할 수 있는 리뷰 쓰기의 기승전결을 소개한다. 왜 자신만의 전시 리뷰가 필요한지, 그리고 그 리뷰가 나중에 당신 삶에 어떤 기록으로 남을지 설명하고 문학, 패션, 트렌드에 정통한 다섯 명의 글쟁이들이 각각 미술 글쓰기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끝으로 글 쓸 때 참고할 미술 글쓰기 책들을 묶어 덧붙인다. “미술은 아는 만큼 보이고, 쓰는 만큼 더 잘 보인다”고 특집 필자 정민영은 말한다. 글을 쓰고 싶지만, 망설이던 당신이라면 이 기사를 놓치지 말자.
● 기획·진행 정일주 편집장, 이가진 기자

'Philippe Parreno: My Room Is Another Fish Bowl' at Brookly Museum 설치 전경 ⓒ조나단 도라도(Jonathan Dor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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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주, 정민영, 김홍기, 서동현, 문소영, 백다흠, 이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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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글로 소장하는, 나만의 전시_정일주


SPECIAL FEATURE 

글쓰기, 최고의 작품 감상법_정민영

패션전시를 읽고, 쓰는 방식_김홍기

솔직하게, 흥미롭게_서동현

전시 기억하기 - 사적으로, 때로는 전문적으로_문소영

어떤 다른 ‘자극’하기 - 조지아 오키프, 뉴멕시코_백다흠

 

SPECIAL FEATURE 

우리를 도와줄 책들_이가진





Special feature

글로 소장하는, 나만의 전시

● 정일주 편집장

 


고백건대, 팔구 년 전 잡지를 훑다 나는 종종 감탄한다. 내가 쓴 리뷰 때문이다. 싱그러운 구성에 어휘는 어찌나 독창적인지, 읽는 내내 “어쩜…, 어머…”하며 마음을 홀딱 빼앗긴다. 어떤 글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과연 내가 쓴 글인가?”라는 경이로움마저 느낀다. 글을 써서 돈 버는 사람들끼린 “포텐셜이 터졌다”든지 “글발이 동났다” 등의 우악스런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쓴다. 대부분 사람들은 “글은 쓸수록 는다”고 여기지만, 사실 사람 머릿속의 지식 용량은 정해져 있고 글의 구성을 잡고 문장과 단어를 구사하는 것은 그 용량을 기반으로 얼마나 효율적으로 짜 맞추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에, 많이 쓸수록 글재주가 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빽빽하게 끼워놓은 꽂이에서 하나씩 곶감을 빼먹듯, 지식의 용량이 줄어들면서 글의 매력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경험을 쌓으며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은 오래도록 글발을 유지한다. 


알아주는 글쟁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창 피부에 물이 오르는 때가 있듯 글에도 물기가 도는 때가 있다. 적어도 내 주변의 글 쓰는 이들을 보았을 때 그 시기가 짧은가 긴가의 문제이지 그 시기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글을 ‘엄청나게 엄청난 나르시시즘’으로 시작했는데, 오래전 자기 글과 사랑에 빠지는 건 어쩌면 글을 쓰는 모든 이들이 경험하는 일이다. 지금보다 경력이 짧을 때 말하듯 후루룩 썼던 글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곱씹고 되씹느라 한나절에 한 페이지 채우기가 힘들어진다. 당신도 예외일 수 없다. 반짝하는 섹시한 문장이 스칠 때, 절대 놓치지 말고 글로 정리해야 한다. 당신이 머뭇거리는 동안, 한참 후 당신이 당신한테 반하는 그 황홀한 찰나를 기어이 놓칠지 모른다. 




<Road to Victory>(2017.1.27-4.9) by Antonis Pittas, 

Hordaland Kunstsenter, Bergen, Norway 

상세 설치 전경 All images courtesy of the artist and

 Annet Gelink Gallery, Amsterdam  Antonis Pittas 2017




글로 전시를 담다


직접 본 전시를 글로 쓰는 것은 중요하다. 「퍼블릭아트」를 보는 당신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만큼 미술에 애정을 갖고, 그것을 보는 눈을 지녔으며, 그 애정과 식견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하나의 줄거리를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들이 완성해내는 전시는 글 쓸 수 있는 많은 정보와 감성, 단서들을 제공하는데, 그것을 아무나 캐치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어야 가능하다. 한 명의 작가가 꾸민 전시이든 여러 작가가 참여하는 기획전이든 혹은 특정 단체가 꾸미는 그룹전이든 분명한 기획을 바탕으로 하기 마련인데, 그 주제가 보는 이에게 어떤 자극을 주는가부터 그것에 대한 개인적 의견이나 제언 등으로 글 가지를 뻗을 수 있다. 각 작품이 지닌 내용과 표현방식, 전달하는 메시지도 글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마치 영화를 보고 전체 내용과 상황, 여러 등장인물을 배제한 채 오직 여자주인공에만 초점 맞춰 이야기를 풀 듯, 하나의 전시를 보고도 특정 작품이나 작가의 메시지에만 포커싱 해 글을 쓸 수 있다. 형식은 본인이 정하기 나름이고, 전시리뷰엔 태클을 걸만한 분명한 잣대도 없다. 그러니 이만큼 유연한 글쓰기가 또 있을까. 무엇보다 전시를 글로 기록하는 것은 그것을 보다 면밀히 보고 자세히 보게 한다. 보고 기록하지 않으면 그 전시는 금방 잊히지만 찬찬히 적어놓은 리뷰는 오래도록 그 전시를 회상하고 음미하게 한다. 오래된 스냅사진을 보며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리뷰는 머릿속에 전시를 파노라마로 펼쳐놓는다. 사진에 비유했지만 사실 글에는 사진보다 더 복합적이며 다양한 정보가 응축된다. 글에는 당시의 이념과 철학, 사고방식과 관계 등이 면밀히 연관돼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시 어떤 책을 읽고 있었는지부터 내가 과연 어떤 이론에 사로잡혀있었는지, 사회의 정치적 이슈는 물론 개인적으로 즐겨 사용하던 단어까지 문장에 고스란히 녹아든다. 

   

 


안규철 <기억의 벽> 2015 종이나무 

1400×520cm(벽면) 280×60×400cm(계단)

촬영 이의록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가까이 보아야 예쁘다


기록을 남겨 전시를 소장하는 것뿐 아니라 전시를 면밀히 살펴보는 의미에서도, 리뷰는 중요하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작품이 더 분명하게 보이며 보다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작품을 보며 가슴으로 음미하는 중간, 머리는 빠르게 ‘글 쓸 거리’를 수집하며 가동되는데, 자칫 놓칠 뻔한 디테일과 속성이 이때 파악되는 경우가 많다. 작품과 전시를 늘 보는 이들에게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보는 전시와 직접 글을 써야 되는 전시를 관람할 때 뇌의 박동과 해석능력은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전시 리뷰는 특별한 형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추고 싶다면, 전시가 제공하는 기본 인쇄물을 활용해보자. 전시 제목은 물론 기간과 장소, 참여 작가와 출품작 등 정보가 분명하지 않으면 글의 신빙성이 떨어지니, 간단한 리플릿과 엽서만이라도 반드시 챙겨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어떤 경로로든 정보는 확인할 수 있지만 전시에서 수합한 자료가 주는 단서가 따로 있을 수 있고 전시를 본 후 잔상을 정리할 때도 큰 도움이 된다. 전문지의 리뷰를 참고하거나 미술 글쓰기를 주제로 한 책들에서 글 틀을 따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지금 당신이 그럴듯한 전시를 보았다면, 가장 예쁜 시절의 ‘인생 샷’처럼 ‘굉장하게 굉장한’ 전시 리뷰를 남겨보자. 


  


나스티비셔스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설치 전경 사진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사진 홍철기





Special feature -

글쓰기, 최고의 작품 감상법

 정민영 미술 칼럼니스트

 


서점에 필사 관련서가 넘친다. 시나 소설, 인문서 가운데 글 전체나 일부 구절을 한쪽 페이지에 예시하고 다른 쪽 페이지는 비워둔 채 따라 써보게 한다. 예전처럼 책을 읽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쓰는 과정을 통해 문학작품과 인문서를 깊이 음미하게 만든다. 그리기 책도 눈에 띈다. 한때 유행한 ‘컬러링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상용품이나 동식물 등을 그려볼 수 있게 돕는 책들이 늘고 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물들도 막상 설명해보라고 하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려보면 다르다. 구체적인 생김새를 세밀하게 알 수 있고, 사물을 보는 눈까지 키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전시회나 작품에 관해서도 글을 써봄으로써 깊이 사랑할 수 있다. 그동안 보기만 했던 작품들을, 글쓰기 과정에서 자세히 보고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글쓰기는 곧 생각하기여서, 쓰기의 미덕은 작품 진하게 품기로 통한다. 보고 마는 것(아이쇼핑)과 본 것을 써보는 것(라이팅)은 체험의 질에서 큰 차이가 난다. 작품 감상의 절정은 바로 글쓰기다.



작품에 정답은 없다


작품에 관한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일부 미술사나 미술이론 전공자들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들은 전공자의 시각으로 미술사적인 맥락에 의지하며 쓸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작품 감상의 정답은 아니다. 감상에는 정답이 없다. 작가도 자기 작품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표현한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또 감상은 작품에 숨겨둔 의도를 찾아내는 것이라 여긴다. 사람들은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이 작가의 의도 찾기에 집중한다. 하지만 작가가 의도한 대로 작품에 표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한 원로작가는 작가의 의도가 작품에 표현될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의 허상을 직시하며, “그림에서 표현이란 무수한 경우 수의 우발점들을 발생시키는 과정이자 장치”이기도 한 탓에, 의도된 것이 표현된 것이 아니라 표현된 것이 의도된 것으로 드러난다는 역설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그림을 직접 그려보면 내 뜻과 달리, 역시 그림으로 ‘표현된’ 것만이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작업과정에는 예측불허의 우연이 무수히 개입하므로, 더 이상 표현주체인 작가가 표현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작품 속의 의미를 읽어낸다는 말도 문제다. 이 말은 작가의 의도가 작품에 내장돼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그 원로작가는 “내가 만나는 의미의 세계조차 내가 (이미) 투영한 의미일 뿐이지, 대상에 고유하게 내재해 있는 의미는 아닌 것”(이상의 인용은 홍명섭,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에서)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감상은 관람자가 작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린 문제가 되고, 그 ‘효과’를 어떻게 즐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된다. 관람자의 감상에 의해, 거꾸로 작품의 의미가 생성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축구공으로 운동(사용)을 해서 건강에 효과를 보듯이, 전시회나 작품도 마음껏 사용하여 그 효과를 누리면 된다. 원로작가의 탁견이다. 감상의 효과를 누리기에 글쓰기만한 것이 없다. 감동을 받은 전시회에 관해 글을 써보면, 전시회를 구석구석 받아들이게 되고, 새삼 해당 작가에 대한 애정지수까지 높아진다. 또 해당 작가의 작품 스타일과 같은, 미술사 속의 정보들을 찾아보게 된다. 생각과 관심의 확산이 글쓰기로 발생한다. 미술작품에 관한 글을 쓰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작품이 텍스트가 아닌 탓에 난감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다. 하지만 직접 써보면, 난감함이 괜한 기우였음을 깨닫게 된다. 비문자(非文字) 예술의 문자화도, 독후감이나 영화감상 쓰듯이 하면 된다. 미술에 관심 있는 일반인이 참고할 수 있는 글쓰기 요령을 몇 가지 언급해본다.





<Blue Time, Blue Time, Blue Time> 

빌레흐반 현대미술관 설치 전경 사진 ⓒ Blaise Adilon  



미술에 관한 글쓰기, 이렇게 해보자


‘나’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를 하자. 미술에 관한 글은 곧 자기 생각 쓰기다. 전시회나 작품을 보면서 받은 자신만의 감동이나 생각이 중요하다. 객관적인 정보는 나중에 챙겨서 보완하면 된다. 평론 같은 정보에 주눅 들지 말고, 우선 주관적인 감상에 충실할 일이다. “그림을 처음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 없이 그저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일 게다. 평론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식은 온전한 작품 감상의 장애가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 난 다음에 지식의 힘을 빌려 다시 보는 것이 가장 풍성한 감상방법이 될 것이다. 내가 본 느낌이 틀린 게 아닐까 싶은 두려움 따윌랑 접어두는 편이 나으리라.” 『일상예찬』, ‘옮긴이의 말’에서


미술 전공자들은 전공자의 처지에서 작품을 감상한다. 그렇다면 비전공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 전공 분야(관심 분야)의 시각으로 감상하면 된다. 일반인은 각자 자기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 전문적인 시각이 외려 미술 전공자들이 보지 못한 부분을 읽어낼 수 있고, 작품에 색다른 빛을 더해줄 수 있다. 미술 저술가들 중에는 사회학자, 불문학자, 영문학자, 법학자, 경영학자, 과학자,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철학자 등 비전공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이 미술에 관해 쓴 글은, 저마다 자기 분야의 장점이 살아 있어서 색다른 시각으로, 읽는 재미가 각별하다. 독자를 염두에 두자. 그러면 자기만 알 수 있는 독백 같은 글쓰기나 난해한 글쓰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까운 지인에게 자기 감상을 들려준다고 생각하고 글을 쓰면, 보다 요령 있고 구체적이 된다. 간혹 경험이 적은 필자 중에는 전시회나 작품에 관한 묘사(정보 제공)를 생략한 채, 쓰는 경우가 있다. 


필자가 경험한 사실도, 독자는 글로 묘사해주지 않으면 해당 전시회나 작품을 알 길이 없다. 독자를 설정해두면 상대방이 이해 가능한 글쓰기를 하게 된다. 세 개의 키워드를 챙겨보자. 전시장을 돌며 작품을 감상하다가 자신이 받은 느낌이나 생각을 세 개의 키워드로 정리하고, 또 많은 작품 중에서 몇몇 작품을 집중해서 보면 뼈대 있는 글을 쓸 수 있다. 세 개의 키워드로 생각을 정리하는 글쓰기는 사이토 다카시(Saito Takashi)의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을 참조할 만하다. 요령은 간단하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세 개의 키워드(‘키 콘셉트’)로 압축하면 된다. 그리고 세 개의 키워드를 연결해서 논리를 구축하다보면, 생각이 선명해지고 글이 실해진다. 그 과정에서 생각의 힘도 키워진다. 키워드를 중심으로 글을 쓰면, 횡설수설하는 글쓰기를 예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작품들 간의 공통성에 주목하거나 지금 현실과 작품 간의 관련성, 나아가 다른 작가의 작품과 관련성 등을 찾아보면 훨씬 개성 있는 글쓰기가 된다. 전시회명이나 작품명에 주목하는 것도 방법이다. 전시회명을 함부로 짓는 기획자나 작가는 없다. 그것은 전시회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압축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작품명 역시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는 만큼, 이를 중심으로 전시회나 작품을 찬찬히 곱씹어보는 것도 좋다. 





<Soundings: A contemporary Score> 

(2013.8.10-11.3) 설치 전경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사진 조나단 무지카(Jonathan Muzikar)




물론 작품명이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감상을 방해하거나 제한한다고 생각하여 ‘무제’로 표기하는 작가도 있다. 그렇더라도 작품명은 일반인이 작품이라는 바다를 향해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나침반이 된다. 관람자는 작품명을 기점으로 드넓은 감상의 바다로 나갈 수 있다. 에피소드를 챙기자. 미술에 관한 글쓰기에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 중의 하나가 에피소드다. 에피소드는 양념이다. 에피소드가 곁들여진 글은 일단 흥미를 끈다. 관심만 가진다면 에피소드는 얼마든지 있다. 전시회나 작품과 관련된 필자의 에피소드, 작품과 관련된 직·간접적인 에피소드, 작가의 에피소드, 그리고 미술사 속의 관련 에피소드, 전시회나 작품과 관련될 만한 책 속의 에피소드 등이 그것이다. 이런 에피소드를 글에 적절히 삽입하면, 읽는 즐거움과 함께 해당 작품과 전시회·작가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다. 미술 관계자들이야 미술사적인 정보나 조형적인 면을 중심으로 작품을 이야기하겠지만, 일반인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일반인은 자기 위치에서, 자기 시각으로 보고 쓰면 된다. 에피소드를 통해 스토리텔링을 하면 읽는 즐거움까지 주는 글쓰기가 가능해진다. 무엇보다 쉽게 쓰자. 전문가들을 흉내 내기는 금물이다. 자기 언어로 말하듯이 쓰면 된다. 미술평론가나 미술 관계자들의 글은 전공자를 염두에 둔, 미술계 내부에서 통용되는 글쓰기다. 따라서 특정 개념이나 용어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인이 미술평론가의 글을 보면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덕분에 글쓰기에 대한 사람들의 고질적인 거부감이 사라졌다. 구어체가 일반화되면서, 미술계 바깥을 지향하는 재미있는 글이 늘고 있다. 문제는 소통 가능한 글쓰기다. 이번에 나온 대통령 탄핵 판결문은 글쓰기의 한 전범이 될 만하다. 흔히 법률문장은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다.(예전에 미술평론도 그런 지적을 받았다!) 생경한 용어뿐만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이 결국은 주어와 술어를 잃게 만들기도 한다. 이번 판결문은 간결하고 명확해서 한글 문장으로 논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일반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국민과의 소통에 성공했다. 미술계의 글쓰기도 이렇게 체질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쓰기는 깊이 사랑하기다


미술은 아는 만큼 보이고, 쓰는 만큼 더 잘 보인다. 미술에 관한 글쓰기는 미술을 깊이 사랑하기다. 미술품 수집이 미술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면, 미술에 관한 글쓰기는 작품에 표현된 작가의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최고의 감상법이다. 작품을 보고 또 보며 글을 쓰는 행위는 작품을 가슴에 심는 경건한 의식이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김춘수 시 <꽃>에서)던 작품은 쓰기를 통해 비로소 ‘꽃’이 된다.  

 


글쓴이 정민영은 월간 『미술세계』 편집장과 단행본 형식의 미술교양지 계간 『이모션』 편집인을 각각 역임했고, 현재 미술출판사 ()아트북스 대표이사로 있다. 지은 책으로 『편집자를 위한 북디자인』(2015), 『정민영의 미술책 기획노트』(2010)가 있고, 함께 지은 책으로 『일그러진 우리들의 영웅—한국 현대미술 자성록』(2001), 29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문화의 지형도』(2007), 21세기 한국인 무슨 책을 읽었나』(2007) 등이 있다.

 



디올 컬러스 그룹 테마_레드와 핑크





Special feature -

패션전시를 읽고, 쓰는 방식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패션전시를 보러 가다


나는 패션 큐레이터다. 패션의 거대한 세계를 전시라는 형식을 빌려 의미를 풀고 읽는 일을 지금껏 해왔다. 패션전시의 방법을 공부하기 위해 남들이 기획한 패션 전시도 부지기수로 봐야 했다. 패션전시는 디자이너 회고전에서부터, 세계적 규모의 패션 브랜드들이 펼치는 마케팅적 성격이 강한 전시, 독립 디자이너가 자신의 창조성을 선보이기 위한 예술적 시도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과 깊이도 다 각각이다. 디자이너가 중심이 되는 전시 외에도 패션 품목을 하나하나 쪼개어 의미를 푸는 전시도 있다. 단추의 역사를 다루거나, 시대별 모자의 유행과정을 설명하거나 스니커즈에 담긴 하위문화적 의미를 풀기도 한다. 심지어는 패션을 설명하는 개념어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전시도 있다. 가령 글래머(Glamour)란 개념을 테마로 다양한 시대의 옷을 선별해서 글래머란 미적 용어의 의미를 묻는 식이다. 패션전시도 일반 미술 전시와 다르지 않다. 깊이 파고들수록 영역은 확장된다. 옷은 시와 같다. 시가 언어로 지은 존재의 집이듯, 옷은 직물로 인간의 몸 위에 지은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웨어러블의 조건을 묻다


패션은 한 사회의 특정 시점에 허락된 웨어러블(Wearable)에 대한 정의를 내려온 역사다. 웨어러블이란 ‘입을 수 있는 것’의 뜻과 범위, 아름다움의 조건을 말한다. 여기에는 어떤 옷을 입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의 문제도 포함한다. 즉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무엇을 입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웨어러블의 역사는 옷을 입기 위해 사람의 인식을 바꾸는 투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수많은 패션전시를 유형별로 설명한 이유는 리뷰를 쓸 때 무엇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현재의 관점에서 웨어러블의 조건을 묻고 대답하는 것. 이것이 패션전시의 리뷰를 쓰는 출발점이다. 패션은 미술과 달리 비평이란 용어보다 리뷰란 용어를 더 선호해왔다. 1850년대 이후, 서구 패션은 대중을 위한 민주화의 길을 걸었고 이 과정에서 리뷰 형식의 글이 등장했다. 현대에 들어와 패션을 둘러싼 리뷰는 다양해졌다. 패션 전시와 쇼는 물론이요. 자신의 옷을 런웨이가 아닌 대안공간에서 설치미술 방식으로 보여주는 디자이너도 있다. 이 모든 것이 리뷰의 대상이다. 리뷰를 쓰면, 전시의 의미가 더욱 친밀하게 다가오게 된다. 전시를 소장하는 멋진 방법인 셈이다.




이사 겐즈켄(Isa Genzken) <Oil XV & Oil XVI> 

2007 MMK Museum fur Moderne Kunst Frankfurt am Main 

 Isa Genzken / Galerie Daniel Buchholz, VG-Bildkunst 

Bonn 2016 사진 악셀 슈나이더(Axel Schneider) 

 

 


한 벌의 옷을 읽는다는 것


패션전시 리뷰를 쓰려면 옷을 한 장의 그림을 읽듯 자세히 봐야 한다. ‘의미를 읽다’란 뜻은 무엇일까? ‘읽다’는 뜻의 독일어 단어 ‘lesen’의 어원을 보면 모으다, 고른다, 들어 올린다는 뜻을 갖고 있다. 패션을 읽고 쓰려면 전시장에서 본 한 벌의 옷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모으고, 그중에서 꼭 쓰고 싶은 것을 선별해, 해부대 위에 들어 올려야 한다. 이후 글로 쓴다. 패션 리뷰를 쓰는 것도 미술작품 리뷰와 다르지 않다. 작품을 입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선과 형태, 부피, 양감, 질감을 공부하고, 명도와 공간 내 작품 배치의 문제나 빛의 사용과 색채의 조합까지 꼼꼼하게 봐야 한다. 회화 장르 하나만 놓고 보자. 유화와 아크릴, 수채와 과슈, 프레스코와 템페라, 잉크와 스프레이 등 그림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별 특성까지 공부한다. 이후에는 미술사를 통해 시대별로 대상을 어떻게 그려왔는지 살펴본다. 


미술사 공부의 구력이 더해질수록 공동체, 권력, 신체, 젠더, 전쟁, 사회의식 등 특정한 테마 아래, 수많은 작품을 엮어서 통일성 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방식은 패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재단기술의 이해, 소매, 칼라, 단추의 배치, 실루엣 등 색상과 무늬, 프린트 등 한 벌의 옷을 구성하는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 과거 한 TV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반짝이는 운동복을 입고 나와서는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제품”이라고 말하는 대사가 유행어가 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옷에서 봉제수준을 보는 것은, 그림에서 화가가 사용하는 붓의 놀림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자질구레한 것까지 봐야 하는가? 의문도 들것이다. 한 벌의 옷을 보라. 고도의 디테일 덩어리다. 무한 복제된 것 같은 엇비슷한 형태 속에서 작은 디테일이 옷의 아름다움을 결정한다. 나는 핸드백의 잠금 방식 하나만 갖고도 수차례 글을 썼다.




<Making & Unmaking> An exhibition curated by 

Duro Olowu at Camden Arts Centre

 2016 설치 전경 Courtesy of Camden Arts Centre 

사진 마크 블로어(Mark Blower)

 



패션사를 공부하는 이유


좋은 리뷰를 쓰기 위해 복식사의 이해는 필수적이다. 현대패션의 아버지라 불리는 디자이너 찰스 프레데릭 워스(Charles Fredrick Worth)는 ‘패션이란 반복되는 옷들이 항상 새롭게 보이도록 만드는 기술이다’라고 했다. 현재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특정 시대에 태어난 발명품이다. 점퍼와 반바지는 르네상스에, 남성 슈트는 바로크 시대에, 코트는 18세기에 태어났다. 중요한 건 한 벌의 옷이 어떤 진화과정을 통해 현재에 이르렀는지, 그 옷을 탄생시킨 사회적 제조건을 공부하면 패션에 관한 깊은 글을 쓸 때 좋다. 현대의 디자이너들도 끊임없이 과거의 옷을 참조한다. 역사적인 실루엣과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는다. 패션잡지를 읽다 보면 툭하면 ‘90년대의 귀환’이 어떻고 하는 식의 제목을 단 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기사에서 소개한 옷이 90년대 패션의 주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패션전시의 절반이 이 패션사에서 캐낸 소재와 인물을 다룬다. 


패션디자이너는 매년 2회에 걸쳐 자신이 발표하는 컬렉션에 ‘라인(Line)’이란 단어를 쓴다. 가령 2차 세계대전 이후 디오르(Christian Dior)는 코롤레 라인(Corolle Line, 꽃봉오리)의 옷을 발표했다. 꽃봉오리 형상에서 영감을 받은 듯 보이는 실루엣을 가진 옷들이 패션쇼에 나왔다. 전후 피폐한 사람들의 마음을 환하게 하기위해, 프랑스 패션의 자존심과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꽃봉오리를 택했다. 이렇게 라인이란 단어에는 ‘공통으로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디테일’이란 뜻이 담겨 있다. 디자이너나 브랜드가 발표하는 라인의 주제의식에 맞추어 실제 패션쇼에서 본 옷을 비교하며 써야 한다. 주제의식과 옷의 실루엣과 색채가 잘 조합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주제의식도 폭이 넓어서 어떤 디자이너는 사회정치적 현안을 다루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기도 한다. 패션리뷰를 잘 쓰려면 복식의 광범위한 측면들을 유념해야 한다. 한 벌의 옷을 산업적 측면의 패션으로, 예술 및 사회적 측면의 의상(Dress)으로, 정신적 차원을 묻는 모드(Mode)로 다양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읽기의 관점에 따라 리뷰의 성격도 달라진다.



 

<Making & Unmaking> An exhibition curated by

 Duro Olowu at Camden Arts Centre

 2016 설치 전경 Courtesy of Camden Arts Centre 

사진 마크 블로어(Mark Blower)




패션은 글쓰기다


패션쇼도 읽기의 대상이다. 쇼는 전시에 비해 변수가 더 많다. 모델의 신체와 옷의 맞음새, 직물의 재질감과 광택의 정도, 패션쇼장의 배경음악이나 조명, 공연 요소까지 다 고려해야 한다. 최근에는 패션쇼에 나오는 모델의 국적과 문화적 다양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들도 많다. 패션쇼에 등장하는 50여 벌의 옷은 눈앞에서 빨리 지나간다. 옷이 주는  첫 느낌을 계속 기억하고 복기하며 정리해야 한다. 패션쇼를 보면서 미술의 퍼포먼스 아트를 떠올린다. 패션 관련 리뷰를 잘 쓰고 싶은 이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좋은 글쓰기의 원칙’ 중 일부를 소개한다. 첫 번째, 움직이는 카메라처럼 대상을 포착하라. 두 번째로 현실을 미화하지 않는 진솔한 글을 쓰라. 마지막으로 긴장이 텍스트 전반에 흘러야 하며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글을 쓰라. 이 원칙을 유념하며 리뷰를 써보자. 패션에 대한 글쓰기 작업을 전시와 런웨이로 국한시키지 말 것. 


샤넬(Gabrielle Chanel)의 말처럼 패션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생각과 격식, 사건에도 패션은 묻어난다. 옷을 입은 타자의 표정, 제스처, 스타일링의 방식도 각각 리뷰의 대상이다. 한국의 시몬느 핸드백 박물관에선, 가방을 메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마네킹의 포즈를 새로 설계해 만들기도 했다. 소셜네트워크(SNS)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다양한 패션의 이미지들에 비해, 제대로 된 패션리뷰를 읽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다. 한 벌의 옷은 인간을 읽는 렌즈다. 일상에서 우리 자신을 미학적 대상으로 만드는 실천과정이다. 우리에겐 패션을 소재로 쓸 리뷰들이 넘쳐난다. 그러니 지금 당장, 시작하라. 

 


글쓴이 김홍기는 국내패션큐레이터 1. ‘패션’이라는 언어로 삶과 사회를 푼다. 대학에서 경영학과 연극영화를 전공했으며, ()신세계 그룹에 입사, 아동복 바잉과 상품기획을 담당하며 패션이론과 복식사 연구를 시작했다.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에서 MBA 과정을 마쳤다. <현대미술, 런웨이를 걷다> <팝 쿠튀르>전 등 독특한 패션전시를 기획했고 라디오 팟캐스트 <패션 메시사>를 인기리에 진행했다. 지은 책으로는 『샤넬 미술관에 가다』, 『댄디 오늘을 살다』, 『하하 미술관』, Wearing a New Future-K fashion』이 있고 『패션 디자인 스쿨』,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패션색채예측』, 『불멸의 보석』, 『신발 디자인 교과서』, 『쇼킹 라이프』를 번역했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열린 손

1963 애나멜 39×42cm  FLC/ADAGP 2016 





Special feature-

솔직하게, 흥미롭게

 서동현 『아레나 옴므 플러스』피처 에디터

 


내 취향의 언어


잡다한 이것저것을, 그 중에서도 가장 트렌디하고 감각적인 것을 골라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 패션잡지의 ‘소명’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구보다 빨리, 무엇보다 빠르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어떤 것을 직접 체험하고 독자에게 글과 사진으로 전달하는 것이 나의 임무다. 그런데 요즘엔 라이벌들이 참 많이 생겼다. 파워 블로거 혹은 인플루언서라 불리는 영향력 있는 소셜네트워크(SNS) 스타들이 때로는 패션지 기자들보다 더 빨리 정보를 얻고 경험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요즘 같은 때에는 쓴 사람의 지문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솔직한 글이 필요하다. 새로운 공간, 인물, 콘텐츠를 소개하는 것 뿐 아니라 전시 리뷰도 마찬 가지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를 글로 남기는 대신 어떤 점을 흥미롭게 봤는지에 대한 감상을 적는 것이 중요하다. 객관적인 사실을 요약해 기본적인 정보를 전달한 뒤 나머지는 전시 전반에 대한 나의 생각을 보여준다. 될 수 있으면 친근하게, 내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나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내 취향과 감상을 전달해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전시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성공이다. 패션지에 실리는 기사는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켜야 한다는 ‘숙명’을 안고 있기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평론보다는 전시에 대한 솔직한 내 생각을 내 언어로 표현하는데 집중한다. 이 모든 것은 내 취향을 솔직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배영환 <, 생각, > 2016 혼합재료 225×210cm 

<사각 지구본> 2016 혼합재료 110×110×110ccm

 플랫폼-엘 설치 전경 

 



무엇을 볼 것인가


어떤 전시를 봤는지, 그 선택부터가 내 취향을 반영한다. 그래서 글의 도입 부분은 이 전시를 선택한 이유에서 출발한다. 얼마 전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전을 보고 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평소 ‘좋은 취향’을 강조하는 이들이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책 사진을 찰칵 찍어 SNS에 올린다는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건축에 대해 큰 관심이 없기에 그를 현대건축의 기준을 세운 건축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떤 점이 그토록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찬양하게 만드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보통은 어느 정도 전시 작가의 이력이랄지, 대표작이랄지 기본적인 정보를 파악하고 가는 편인데 이번엔 왠지 그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상태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흡수하고 싶었다. 아는 척 대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전시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즉, 이 전시는 내가 한 번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의 철학과 가치관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소장하게 될 터였다. 이렇게 ‘무엇을 볼 것인가’는 ‘어떻게 볼 것인가’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 전시에 대한 글의 색깔을 결정하게 된다. 나에게 ‘르 코르뷔지에 전시’는 그의 건축과 생에 대한 무지함에서 출발해 이해로 귀결됐다.



전시장 풍경 스케치


전시의 성격에 따라 관람객들의 풍경도 제각각인데, SNS를 열심히 하는 이들이 흥미로워할 전시라면, 게다가 휴대폰 촬영이 허가되어 있다면 이는 결국 치열한 ‘앵글 싸움’이 될 것이다. SNS에 멋진 사진과 함께 짧은 감상을 남겨야하기 때문이다. 뭐 이런 곁다리 같은 전시장 풍경 이야기가 중요하진 않지만 전시의 성격을 보여주므로 재미있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예를 들면 디 뮤지엄에서 열리는 전시들은 ‘힙스터’들의 천국이라는 풍문처럼, 전시에 관심을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도 꽤 재미있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르 코르뷔지에>전의 열기는 뜨거웠다. 건축학도들를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도슨트 신청을 할까 하다 이 전시는 철저하게 내 시각으로 담아내고 싶단 생각에 맨 몸으로 입장했다. 대신 작품에 대한 설명, 그리고 전시가 진행되는 흐름에 집중하기로 한다. 이토록 무식한 상태로 무언가를 감상하는 건 처음이라 흥분되기도 했다.





르 코르뷔지에 <책 읽는 누드 여성> 1932 석묵연필, 

컬러잉크, 수채화 74×53cm  FLC/ADAGP 2016 

 



글의 톤을 잡을 것


이렇게 도입 부분이 마무리 되었다면 본격적으로 전시에 대한 개요와 감상을 적을 차례다. 르 코르뷔지에가 살았던 시대 배경, 그가 왜 현대건축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전시장 입구 벽에 잘 설명이 되어 있다. 이런 기본적인 정보를 짧게 언급하고 나면 이제부터는 이 전시를 내가 큐레이팅 할 차례다.  내 배경 지식과 이해도에 따라 전시를 감상하는 폭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이해도 0에서 시작하므로 어린아이와 같은 해맑은 수준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몰랐던 사실을 적는 것도 중요하지만,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과정을 글로 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테면 ‘전시 내용이 이럴 것이다’라고 함부로 예측했는데 그 예상이 깨진다던지, ‘이런 사람일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알고 보니 아니었다든지 하는 흐름이 담기면 좋겠다. 앞서 ‘무지함을 넘어 이해로 가는 과정’을 전체적인 글의 톤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쓰는 <르 코르뷔지에>전은 무지몽매했던 사람이 현대건축에 눈을 뜨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왜?’라는 질문


여기서 하나 더, ‘왜’라는 키워드가 있으면 더욱 좋다. 르 코르뷔지에의 경우, 전시 도입부터 ‘그가 많은 오해와 질타를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수차례 언급했듯 나는 ‘르 코르뷔지에 무식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왜?’라는 질문이 따라왔다. 아니 현대건축의 틀을 만든 똑똑한 사람이 왜 비난을 받았지? 무엇 때문에 그가 ‘악플’에 시달렸지? 하는 궁금증은 전시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줬다. 이는 전시 리뷰의 큰 흐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세계 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유럽에 집을 잃은 많은 이들을 위한 공공주택을 건립했지만 보수적인 건축가나 사상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가 기존의 통념과 관념을 부수고 전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집’의 형태가 100여 년 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니 꽤 놀라웠다. 그리고 그 많은 이들이 그의 책을 읽고 SNS에 올린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전시 내내 초반에 떠올린 의문을 하나씩 풀어갔다. 아마 미리 예습을 많이 하고 갔더라면 애초부터 ‘왜?’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았을 거다. 공부를 안 하는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




로베르트 쿠시미로프스키(Robert Kuśmirowski)

 <STRONGHOLD> 2013 나무, , 피그멘트, 페인트, 판자, 

고무, 플라스틱, 유리, 금속, 커튼, 종이,  Lyon Biennale, 

dep. in MAC LYON 800×2400×2200cm  



열심히 보고 듣기


도슨트 신청은 하지 않았지만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다니는 무리들과 동선이 겹치기 마련이다. 그럴 땐 굳이 귀를 닫으려 노력하기보다 오히려 듣는 편을 택한다. 도슨트 관객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가이드가 굉장히 사소한 일화 같은 것을 준비하는데, 이는 작품 설명에 나와 있지 않은 것이므로 나름의 ‘꿀팁’이 되겠다. 이런 것들이 글에 포함되면 내 감상만을 적는 것보다 더 풍성해진다. 또 관람객들 중에 유독 여자친구에게 큰 소리로 설명해주는 남자들도 있는데 쓸 만한 내용을 걸러 적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전시장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도 양념처럼 가볍게 담아보자.



전시의 재구성


초집중하며 관람한 전시도 끝이 보인다. 잘 알지 못했던 르 코르뷔지에가 전시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되었다. 내 시각에서 다시 해석한 그의 이야기를 적는다.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나열하기보다 그 사실을 통해 내가 재구성한 전시에 대한 감상을 써내려가는 것이다. 문장은 너무 길지 않게, 예시는 구체적이고 친근하게 담아낸다. 번역체와 만연체를 경계해 자칫 ‘허세’로 흐를 수 있는 소지를 원천 차단하는 것도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몰랐던 어떤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나만 몰랐던 어떤 것을 고백하는 것.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솔직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이번 전시 리뷰의 포인트가 되겠다. 글이 뻔하지 않게 흘러가려면 뻔하지 않은 감상을 담아야한다. 어떤 이유로 선택했고, 어떤 점을 몰랐고, 그래서 어떤 것을 알게 되었는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의 언어로 솔직하게 적는 것. 무지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알아가는 기쁨’으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내가 전시를 소장하는 방법이다. 


 

글쓴이 서동현은 『아레나 옴므 플러스』의 피처 에디터다. 영화 전문지 『프리미어』와 패션지 『W』를 거쳐 『갤러리아 매거진』에서도 음악과 공연, 전시 등 문화 전반의 이슈를 다뤘다. 무엇이든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즐거운 글을 짓는 것을 늘 목표로 한다.

 


 

샐리 스마트(Sally Smart) <The Exquisite Pirate (Oceania)> 

2006 캔버스에 합성 고분자 페인트와 다양하게 콜라주한 

섬유 가변설치Collection of The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Australia 사진 G. 베어링(G. Baring)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Special feature -

전시 기억하기 - 사적으로, 때로는 전문적으로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별 공부 없이, 별 열정도 없이, 보러 간 어떤 전시 이야기부터 해볼까 한다. 물론 전시 리뷰를 쓸 생각도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른 볼 일로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이집트 보물전> 이야기다. 기사를 쓴 후배에게서 크게 화려한 유물은 없다고 들어서, ‘그냥 온 김에 미라 구경이나 하자’하고 들어갔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공부도 해야지’하고 유물 설명을 꼼꼼히 읽었다. 그런데 어? 읽다 보니 점점 재미있어지는 거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고대 이집트인의 장례와 무덤 부장품에 관한 섹션이었다. 어린 시절 무서워 떨면서도 일부러 찾아보던 ‘투탕카멘(Tutankhamun)의 저주’ 이야기 같은 신비롭고 오싹한 판타지는 거기 없었다. 오히려 몇 천 년 시공을 뛰어넘어 현대 한국에까지 이어지는 빈부 격차와 ‘있어 보이려는 웃픈 몸부림’의 현실적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떤 이집트 ‘동수저’는 제례를 위한 신주 조각상은 비싼 규암으로 했지만 제사상은 규암으로 못 만들고 값싼 석회석으로 했다. 그나마 ‘흙수저’는 제사상이 아예 없고 신주 조각이 싸구려 석회석이었다. 또 다른 ‘흙수저’는 부장품 흙 항아리를 값비싼 돌 항아리로 보이게 하려고 돌무늬를 그려 넣었다. 진짜 금이 들어간 ‘금수저’ 미라 가면과 유족들이 대충 만든 ‘흙수저’ 미라 가면의 차이는 눈물 없이 볼 수 없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서 기억해둘 만하다고, 간단하게라도 리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례 빈부 격차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생각하고 관련 유물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블로그에 <고대 이집트 흙수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리뷰를 쓰며 위의 이야기들과 사진을 함께 올렸다. 그리고 총평을 했다. 고대 이집트 문화를 흔히 할리우드(Hollywood)가 그러듯이 기묘한 신비주의로 채색해 버리지 않고, 빈부 격차 등 그 시대 사람들의 리얼한 삶을 보여준 게 좋았다고. 사실 전시에는 다른 중요한 섹션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집트인의 독특한 자연관 및 신앙과 관련된 동물 미라 섹션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그 섹션에 가장 재미를 느낀 다른 누군가가 더 잘 쓸 것이니까. 내 블로그나 내 소셜네트워크(SNS) 계정에 올라갈 리뷰는 나의 시각에서 본 전시이고 그걸 명확히 하기 위해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전시 전체를 다루려면 잡다하고 모호해져 버린다. 어차피 전시 전체에 대해서는 전시를 연 기관의 웹사이트와 도록에 가장 잘 정리돼 있지 않은가. 물론 이 리뷰가 정보 전달 측면이 더욱 중요한 신문에 실리는 것이었다면 동물 미라 섹션과 전시 전체 구성 등도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기억할 만한 전시를 기억하고 또 사람들과 그 기억을 나누고자 블로그나 SNS에 올리는 것이라면 인상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간결하게 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유영국 <(Blue Mountain-Blue)> 1994 

캔버스에 유채 126×96cm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소장




그리고 그와 관련해 유물이든 미술작품이든 시각문화 전반을 자신이 주로 어떤 시각에서 보는지 생각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인상주의 그림 한 점을 볼 때도, 그와 관련된 화가의 개인사와 심리가 가장 궁금해지는지, 그 그림에 녹아있는 사회경제적 상황에 먼저 관심을 갖는지, 아니면 그 그림의 독특한 형식 및 기법이 자아내는 미학적 효과에 초점을 두는지…. 자신의 시각을 세워두었을 때 전시를 더 재미있게 보게 되고 리뷰를 쓰는 것도 쉬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기획전을 볼 때는 우선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의 의도와 시각을 먼저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라 구성된 전시를 보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한 의도와 시점은 전시작의 배치와 설명에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으니 전시장의 설명을 보아야 한다. 개인전일 때는 조금 다르다. ‘거장’으로 불리는, 미술사에 중요한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인 경우에는, 물론 큐레이터가 작가의 특정 시기에 초점을 맞춘다거나 특별한 앵글을 두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작가의 인생 흐름에 따라 시간상으로 구성돼 있다. 그 경우에는 앞서 언급한 여러 종류의 시각이 감상에 모두 동원될 수 있는데, 그때도 리뷰를 쓰려면 결국 어느 한 가지 시각에 초점을 맞추는 쪽이 더 힘 있는 글이 나올 수 있다. 회고전이 아닌 동시대 미술가의 최근작 개인전이라면 작가 자신과 큐레이터가 함께 정한 전시 의도를 먼저 보아야 한다.


거장의 회고전으로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는 지난 3월 1일 끝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유영국 탄생 100주년 회고전 <유영국, 절대와 자유>였다. 이 전시에 관해서는 나는 앞서의 <이집트 보물전>에 대한 글과 여러 가지로 대비되는 리뷰를 썼다. <고대 이집트 흙수저 인생>이 특별히 형식을 갖추지 않은 간략한 블로그 리뷰였다면, 유영국 전을 보고 쓴 <메를로-퐁티 색채론으로 본 유영국>은 정식 비평문에 가까운 것으로 내가 듣는 박사수업 기말 소논문이었다. 블로그나 SNS에도 좀 더 전문적인 리뷰를 올리고 싶은 이들을 위해 이 글 이야기도 간단히 하겠다. 유영국은 대중적으로 ‘한국 기하학적 추상의 선구자’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그림을 직접 본 사람들은 반드시 그 색채부터 언급한다. 


이 전시에서 나를 감동시킨 것도 색채였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절정기’로 언급하는 1960년대 작품에서는 노랑, 빨강, 파랑의 삼원색 및 보라, 초록 등이 주조를 이루는데, 그 높은 채도의 원색들은 모두 빛 혹은 심연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 그림들을 보는 순간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폴 세잔(Paul Cézanne)의 색채를 설명한 말, “내부로부터 은밀한 빛을 받은 것으로 보여 마치 빛이 거기에서 발산되고 있는 것 같다”가 떠올랐다. 특히 유영국의 1968년 <원-a> 등 같은 ‘원’ 시리즈가 모여 있는 코너는 감동적이었는데, 메를로-퐁티식으로 표현하면 빛의 원천인 태양이 유영국의 시지각에서 구성되어 탄생하는 그 “원초적 세계(primordial world)”를 절묘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느껴졌다. 




백남준 기념관 내부 사진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그와 함께 유영국이 메를로-퐁티가 중요하게 다룬 화가 세잔과 그 스타일에서는 각각 추상과 구상으로서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을 지닌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산을 반복적으로 그린 점, 그것을 통해 몬드리안(Piet Mondrian)이 “진정한 시지각의 리얼리티”라고 말한 어떤 ‘근원적 실재’ 혹은 ‘자연의 원형’을 표현하려 한 점, 그리고 색채를 중시한 점 등이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서는 대상 혹은 세계가 감각과 사유가 뒤섞인 우리 몸의 시지각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회화는 그것을 화가의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으로서, 그 혼란스러운 교차관계와 시지각에 담긴 다른 감각의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색채가 중요하다. 그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유영국의 그림을 분석했으며 그 뒷받침을 위해 “유영국은 ‘색채의 화가’다. 


이 말은 ‘추상의 화가’에 선행한다”는 미술사학자 정영목의 말과 “주제를 무엇으로 하든지 간에 나의 경우, 결국 그림은 색깔이다”라는 유영국 자신의 말 등을 포함한 작가 노트와 비평문들을 공부하고 글에 포함시켰다. 전문적인 리뷰를 쓰려 한다면 하나의 미학 이론적 시점에서 작가 자신의 말과 평론가들의 말을 공부해 글을 쓰는 것이 한 방법이다. 물론 꼭 하나의 미학 이론적 시점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전시에 대해 전문적 리뷰를 쓰려면 먼저 힘부터 빠질 것이다. 우선은 모든 인상적인 전시에 대해 간략하더라도 리뷰를 남기는 습관, 그게 중요하지 않을까. 


 

글쓴이 문소영은 『중앙일보』 영어신문인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으로 미술 영문기사를 주로 쓰며 『중앙일보』와 『중앙선데이』에 정기적으로 국문 칼럼을 기고한다. 지난해부터 성신여대 겸임교수이며, 10년 넘게 네이버 블로그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을 운영해오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그림 속 경제학』(2014), 『명화의 재탄생』(2011) 등이 있다. 서울대 경제학부 학사, 석사 및 홍익대 예술학과 석사이며 지금 동대학원 박사 과정 중이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Black Mesa Landscape, New Mexico / Out Back of Marie's II> 

1930 oil on canvas mounted on board 24 1/4×36 1/4(61.6×92.1)

 Georgia O'Keeffe Museum. Gift of The Burnett Foundation 

 Georgia O'Keeffe Museum 





Special feature -

어떤 다른‘자극’하기 - 조지아 오키프, 뉴멕시코

 백다흠 『Axt』 편집장

 


지난 늦가을 런던에 다녀왔다. 출장이었다. 하루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하루가 저물었다. 일이란 게 원래 일정대로만 굴러가진 않으나, 이상하게도 잡혔던 미팅이 길어지거나 아님 새로운 미팅이 연이어 성사되었다. 해외출장이란 여행과 일이 교묘히 결합된 게 아니던가. 일을 가장한 여행이라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빡빡했다. 현지 스태프는 연신 일정이 많아 죄송하다며 런던의 정보나 미술, 역사, 가십 등 눈으로 보아야 할 것들을 입으로 풀어댔다. 출장 가기 전, 나는 런던의 그 수많은 미술관을 점령해보고자 내심 마음을 먹었었다. 3년 전 홀로 부랑자처럼 런던을 여행할 때 가보지 못했던 그 많은 미술관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또 될 수 있다면, 꼭 런던 외곽에도 나가보리라, 했었다. 물론 둘 다 이뤄지지 않았고, 도심의 랜드마크조차 가지 못했다. 여력도, 시간도 없었다. 전시를 본 건 고작 한 군데가 다였다. 그럼에도 그 한 군데의 전시를 고르는 것도 꽤 고민거리였다. 


무엇을 볼 것인가. 어떤 것을 간직할 것인가. 시간은 촉박했고 선택은 그만큼 신중해졌다. 편하게도 런던은 어디서 무슨 전시를 하고 있는지, 식당 한쪽에 꽂아 있는 정보지에 충분히 숙지 되어 있었고 나는 고르기만 하면 되었다. 결국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 가장 대중적인 미술관 테이트모던(Tate Modern)과 시내 중심이랄 수 있는 트래펄가 광장에 가까운 로열 아카데미 오브 아트(Royal Academy of Arts)였다. 테이트모던으로 결정하고 숙소를 나섰다. 왜 그곳을 골랐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가봤던 곳이었고, 딱히 관심 가는 오브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발길은 거기로 향했다.




<Don't Look Back: The 1990s at MOCA>(2016.3.12-07.11) 

at The Geffen Contemporary at MOCA 설치 전경 

courtesy of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 사진 브라이언 포레스트(Brian Forrest)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테이트모던 3층에 그의 그림들이 있었다. 우선, 첫 번째 섹션 ‘꽃.’ 수많은 꽃이 걸려 있었고, 나는 그 오키프의 꽃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흰 독말풀, 붓꽃, 양귀비, 카라, 백합 등을 정밀히 살펴보았다.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이 오키프는 접사된 오브제를 주로 다룬다. 그것도 매우 섹시한 ‘꽃’, 수술들을 주로 그렸다. 대체로 전체 부감이 아닌 부분들의 확대가 추상과 연결되었다. 왜 이 그림 앞에 서 있는가. 이 그림이 왜 나를 붙잡는가.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꽃 앞에서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고, 그 답은 여기서 내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결론을 내고 자리를 떴다. 나는 꽃을 지나 사진작가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와 함께했던 ‘사진’들을 지나 뉴멕시코로 향했다.(말년에 오키프는 미국 뉴멕시코에 정착했다. 개인적으로 뉴멕시코, 하면 사막이 떠오른다. 카우보이모자를 쓴 백인 남성도.) 그곳엔 동물 뼈, 뿔, 사막, 구름 등이 있었다. 


자연이랄 수 있는 것. 좀 더 근본적인 혹은 원시적인 것들이 되겠다. 나는 ‘꽃’에서의 시간보다 여기에서 좀 더 시간을 할애했다. 그건, 아마도 앞서 언급했던 질문들보다 다른 것, 즉 어떤 다른 ‘자극’ 때문이었다. 푼크툼(Punctum).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한 말이다. 미술이나 사진을 전공하면 입문 시 맞닥뜨리게 되는 말. 찌름. 자극. 타격. 미학적 테두리 안에서 작가가 관람자에게 주는 공격이랄까. 작품이 작가로부터 관람자에게로 완벽히 떠날 때, 그 푼크툼은 오롯이 수요자의 개인적 ‘자극’으로 존재한다. 주로 감정을 찌른다. 누군가는 깨달음이라도 하던데, 그건 좀 오버다. 푼크툼은 작품을 대면하는 순간 의식으로 들어가 감정을 건드린다. 의도하되 의도치 않은 우연함을 가장한다. 모호하지만 그건 꽤 중요하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수용자 개인적으로 각기 달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 ‘푼크툼’이 아니다.




로르 프루보스트(Laure Prouvost)

 <After, After> 2013 리옹 비엔날레(Lyon biennale) 

설치 전경 사진 블레즈 아딜론(Blaise Adilon) 

courtesy the artist and Collection FRAC Bourgogne

 



나는 그 오키프의 뉴멕시코 섹션에서 그 푼크툼보다 바르트가 동시에 언급했던 ‘스투디움(studium)’에 대해 생각했다. 푼크툼과 달리 스투디움은 쉽게 말하자면, 작가의 의도대로 작품을 액면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공통된 감각을 공유하자는 말이다. 또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정보와 상징을 제외한 이면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는 것. 감정의 유무는 빼고 말이다. 너무 건조한가. 심심한가. 아니, 이건 건조하고 습하고의 문제라기보다는 작품이 건네는 무수한 반응에 관한 수용 입장에 대한 갈래이다. 이 작품이 왜 나를 서 있게 만드는가. 다시 떠오른 이 물음 앞에 정확한 답이 필요한가 싶었다.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 자연(自然). 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이루어진 것. 인위적인 형태를 최대로 배제한 형태에서 오는 원시적인 아름다움. 그것을 빼고 나머지는 없었다. 그 외에 나는 다만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인과적 사고나 1차적 반응만으로 이끌어낸 오키프의 말년의 작품 앞에서 나는 꽤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림이 우연하게 개인적 감정을 공격하는 것과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정보와 상징의 정밀한 인식에서 나오는 날렵한 이유들이 더 낫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나는 오키프의 ‘꽃’이 풍기는 감정의 출몰보다 말년의 오키프가 그려낸 가미 없는 ‘자연’의 날것에 꽂힌 것이었다. 그뿐이었다.




<Don't Look Back: The 1990s at MOCA>

(2016.3.12-07.11) at The Geffen Contemporary at MOCA 

설치 전경 courtesy of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 사진 브라이언 포레스트 




뉴멕시코는 농장이 많았으니, 그 가축의 사체들이 자연에 의해 휘발되는 게 천지에 널려 있었겠다. 자연스러움. 삶이 생동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죽어 흩어져 사라지기까지를 캔버스로 옮겨오기. 오키프는 말년에 그러한 자연 작용의 오브제에 몰두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그림 대부분은 클라이맥스도 없고 감정도 말라 보였다. 그럼에도 그 그림들은 나를 멈춰 세웠다. 무엇을 볼 것인가. 어떤 것을 간직할 것인가. 반나절 허락된 시간 속에서 전시를 경험하는 것. 작품을 둘러보고 제목을 기억하고 화가의 생의 고저를 아는 게 다가 아닌 것만 같다. 어느 때는 개인의 경험으로(감정), 혹 때로는 작가의 의도에 발맞춰 동선을 따라가도 무방하다는 것. 정답은 없다. 테이트 모던을 나오면서 오키프의 그림들은 머릿속에서 바로 휘발되었다. 바쁜 일정 속에서 한 가지 딴 짓을 했다는 즐거움을 빼면 대체적으로 어떤 느낌, 어떤 반응은 없었던 것 같다. 어느 한 작가의 전시를 보며, 작품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 걸 보면, 나도 이제 작품의 거대한 의미망을 스스로 조율할 줄 아는 건가, 싶었다. 그럴 리가. 작품은 스스로 존재한다. ‘자연’처럼. 저절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다. 목적성을 갖되 목적하지 않는다. 오키프의 말년의 그림처럼 말이다. 


* 이 글의 청탁서에는 이런 요구사항이 적혀 있었다. ‘전시를 보고 리뷰를 쓴다면 어떻게 쓰겠는가?’ 나는 청탁서의 요구사항을 오독해(무시한 채) 최근에 경험했던 전시 리뷰 한 꼭지를 쓰고자 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리뷰’에 대한 올바른 습작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글쓴이 백다흠은 격월간 문학잡지 『Axt』 편집장이다. 평상시에는 잡지 일을 한다. 그 일이 하기 싫을 때에는 종종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Road to Victory>(2017.1.27-4.9) by Antonis Pittas, 

Hordaland Kunstsenter, Bergen, Norway 

상세 설치 전경 All images courtesy of the artist an

d Annet Gelink Gallery, Amsterdam Antonis Pittas 2017






Special feature

우리를 도와줄 책들

● 이가진 기자

 


간결한 문장, 생생한 묘사, 핵심을 찌르는 논증. 이 모든 것은 좋은 글의 전제조건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면 글쓰기 실력도 는다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비책’, ‘지름길’같이 식상한 문구는 넣어두겠다. 작품을, 나아가 전시를 보는 안목이 생기는 것도 그것을 정돈된 글로 바꾸는 일도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백지를 앞에 두고 식은땀이 날 때 한번 들여다보면 뭐라도 써볼 용기가 생길 책 몇 권을 곁에 두는 것은 어떨까. 


 

『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창비


전시리뷰도 글쓰기의 한 방식이다. 정해진 형식과 방법이 없다고 해도, 문장을 재료 삼아 글을 쓰기에 ‘어떻게’를 고민해야 하고,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요소들이 있다. ‘글쓰기 교본’으로 정평이 난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문장은 어떤 것이든 언어의 기록이기에 ‘말을 짓듯 글을 쓰라’고 강조한다. 이 책의 초판은 1948년에 나왔다. 그간 시대가 변했고, 말도 달라졌다. 종종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작법의 원칙, 풍부한 예문과 다양한 표현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에는 지용, 문장에는 태준’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당대의 문장가였던 저자는 ‘높고 낮고 깊고 얕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감상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했다. 높낮이와 깊이를 두려워 말고 작품에서 받은 감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리뷰 작성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퇴고의 중요성도 잊지 말 것.




카렌 미르자 & 브래드 버틀러(Karen Mirza and Brad Butler)

 <You are the Prime Minister>

 2014 네온 200cm Courtesy the artists; waterside

 contemporary, London; and Galeri Non, Istanbul

 



『현대미술 글쓰기』

길다 윌리엄스 지음 / 안그라픽스


이 책의 부제는 ‘아트라이팅에 대해 알고 싶은 모든 것’이다. 거의 유일무이한, ‘현대미술에 관한 글쓰기’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저자는 예술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자기만의 시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수단으로서 쓰기를 강조한다. 그림이 “시각적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듯, 아트라이팅도 “보이는 것을 글로 옮기는 글쓰기 과정을 통해 예술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고 난해하고 화려한 글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쓰면 된다. 작품이나 전시에 관해 쓰는 글도 결국은 의사소통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자. 특히 3부에선 전시회 리뷰 쓰는 법을 콕 집어 설명해 실용적인 조언이 된다. 원서가 영어인 번역서다 보니 자세한 문법상의 규칙까지 따르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과 상관없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일단, 현대미술을 사랑하라!’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지음 / 열화당


글 쓰는 법, 문법 규칙, 의성어·의태어까지 글쓰기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책은 많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자. 특히 예술에 관한 글에서 ‘독창적인 시각’은 문장의 기술에 앞선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로 시작하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가장 먼저 작품 보는 눈을 열어준다. 번호가 매겨진 일곱 편의 글은 하나하나가 잘 쓴 에세이의 교본이기도 하다.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았던, 자기도 모르게 보수적으로 좁아진 시야의 한계를 깨고 새롭게 보기를 시도하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나, 보는 만큼 쓸 수 있다. 기획자의 설명, 작가에 관한 공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각자에겐 한 작품과 만났을 때 발휘되는 ‘촉’이 있다. 그 촉이 무엇을 잡아낼지는 작품을 직접 보기 전엔 절대로 알 수 없다.   



 



『혼자 가는 미술관』

박현정 지음 / 한권의책


논문을 쓰거나, 전문적인 평문을 쓸 때는 일정한 형식, 규칙에 얽매이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자유로운 글을 쓸 때도 괜히 ‘예술작품’이라는 점에 발목을 잡힐 때가 있다. 하지만 사적인 경험, 살아온 이력에 비추어 본 내용을 쓸 때, 오히려 글에 생기가 도는 경우도 있다. 저자는 오래 미술사를 공부했지만, 책에는 오롯이 한 명의 감상자로서 예술작품과 나눈 이야기만을 담았다. 배영환의 작품에서 자신의 재수 시절을 상기하고, 빌 비올라(Bill Viola)의 영상 앞에선 죽음과 관련된 기억의 조각을 소환한다. 적당한 균형만 유지한다면, 이렇게 작품에 자극받아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개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 부차적인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추억과 경험을 총동원해 작품과 내밀한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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