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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28, May 2017

근대로의 리와인드

Rewind to Modern

빼앗긴 들에 봄은 올 것인가를 고뇌하던 한국, 아니 조선은 끝내 해빙의 계절을 맞이했다. 어쩔 수 없이 식민지배와 맞물려 있는 근대 시기는 ‘근대화=서구화’라는 일종의 고정관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거리를 누비며 낯선 삶의 양식을 퍼트리던 신세계에서 ‘신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미술계 역시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우선 엄밀한 의미의 근대는 없다는 주장부터 ‘근대’라는 시기를 언제부터 언제까지 봐야할지를 가르자는 목소리는 많다. 전통회화의 맥을 이어받은 작품과 서양 미술의 영향을 받아 한국적으로 재탄생시킨 분파를 양축으로 삼고, 19세기와 20세기를 잇는 터널을 건넜던 이들을 다시 떠올리는 5월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정리되지 않은 과거는 미심쩍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E.H.Carr)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역사적 공과는 보는 시각,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현재를 디디고 재점검하는 한국 근대미술부터 ‘거장’의 왕관을 쓰지 못하고 쉽게 잊혀버린 이름, 근대미술의 흔적과 마주치게 되는 공간까지, 지난 줄 알았으나 여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시절의 조각을 여러 각도에서 맞춰보자. 이제 낡은 필름을 조심스레 과거로 돌려볼 시간이다.
● 기획·진행 이가진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사진 ⓒ 김용관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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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섭 미술평론가, 김현숙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이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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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우리 삶과 같이 달린 한국 근현대미술을 반추함_임창섭

 

SPECIAL FEATUR 

잊혀진 미술가, 진환과 변영원_김현숙

 

SPECIAL FEATUR 

이곳에서 근대미술과 만나다_이가진




이쾌대 <군상4> 1948 추정 캔버스에 유채 

177×216cm 개인소장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Special feature

우리 삶과 같이 달린 한국 근현대미술을 반추함

● 임창섭 미술평론가

 


“어린애가 허공에 매달려 오색구름 속을 뛰노는데, 살결은 따뜻하고 팔과 종아리 살이 포동포동하다” 연암 박지원은 북경에서 천주당을 찾아 들어가 성화(聖畵)를 보고 『열하일기(熱河日記, 1780)』에 이렇게 적었다. 이때부터 간간히 볼 수 있었던 서양 그림은 여러 분야 서적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고, 화가들이 조선에 직접 방문하여 그림을 그리는 일도 잦아진다. 서화(書畵,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와 공예(craft) 개념만 존재하던 조선에 양화(painting)의 존재와 재료 그리고 기법이 알려지고, 이것으로 사회와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는 미술문명론이 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다. 하지만 1910년 국권이 상실되면서, 서양미술을 능동적으로 체득할 기회도 함께 사라졌다.  150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국 근현대 역사와 한국 근현대 미술은 많은 시간을 함께 겪은 동반자였다


일제강점기와 1945년 해방, 1950년 한국전쟁, 그리고 한국사회와 정치변화의 격동을 겪으며 슬픔과 웃음, 좌절과 희망이라는 궤도를 작용과 반작용의 동력관계 속에서 움직여왔다. 한국 근현대 미술이 우리사회가 체험한 것들을 반영한 예술 제작태도를 보여주었고, 어떤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힘을 제공하여 한국 근현대 문화를 만들고 변화시켜왔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이것 모두 우리의 삶의 흔적이고 예술이고 우리가 만든 문화이다. 부침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1910(1909?)년 고희동이 일본 동경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에 입학한 이듬해부터 김관호, 나혜석, 김찬영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 화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들이 5년 뒤 차례로 귀국하면서 일반인도 서양 그림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유화(oil painting)라는 재료로 그리는 그림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점점 유학생 숫자는 늘어나 1915년에는 장발, 공진형, 김창섭, 1920년대는 황술조, 오지호, 김종태, 심형구, 김인승, 구본웅, 이인성, 도상봉 등이 일본에서 그림공부를 했다. 일제강점기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한국인은 총 64명이고 이중에서 양화과 졸업은 43명으로 전해진다





나혜석 <자화상> 1928 캔버스에 유채 63.5×5cm 

사진제공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1916, 일본 관전(官展) <문부성미술전람회>(1907 창설)에 한국인 최초로 특선한 김관호의 <해질녘>이 초창기 유학생들의 대표작품이다. 이 시기의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그 면모를 살피는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당시 신문기사에 작품사진은 실리지 않았지만, 지식인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었던 사건이고, 본격적인 유화 도입기에 중요하면서 의미 있는 역사가 되었다. 그렇지만 국권이 상실된 시기에 부유층 젊은 자제들이 다른 분야가 아닌 서양 그림 즉 양화라는 예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유학을 선택했다는 것이 어떤 사회적 요청이 있었는지 아니면 신기한 행위의 소산물이나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이었는지 면밀하게 연구할 문제이다. 이론(異論)이야 있겠지만, 19세기 후반 서구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모던 프로젝트가 정치적, 경제적 국가구조를 확립시키면서 식민주의와 패권주의라는 지배이념을 만들어낸다


이런 서구국가의 힘과 지배논리에 대처하지 못한 국가는 쓰라린 역사를 갖게 되었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서 근대 문화 또한 주체적인 행위로서 발전적 전개이기보다는 서구의 주변 문화라는 특수한 변형형태로 드러났다는 평가이다. 이러한 인식은 전통문화와 근대문화의 갈등, 즉 주체적 민족문화와 서구 제국주의문화를 이식한 일본 근대문화와의 부딪침 때문에 생성되었다. 당시 신지식인은 신교육과 계몽을 통하여 민족의 힘을 고취한다는 민족주의자로서 자부심과 식민주의를 합리화시킨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제국주의를 받아들여 신문물과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민족적 열등감이 충돌하고 있었다. 근대미술 역시 이러한 민족적 자부심과 동시에 열등감이 공존하는 사회적 배경논리를 고려해야 한다. 서화협회가 결성한 뒤 1921년 첫 전람회를 열었지만, 1922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가 개최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화협회 명분은 점점 퇴색한다


입상에 대한 혜택만이 아니라, 신문기사를 비롯한 세간의 평판에도 차별이 생기면서 일본이 문화정책의 하나로 조성된 <선전>에만 미술가들이 몰렸기 때문이다. <선전>은 일본인, 한국인 모두 출품할 수 있었고 분야도 1부 동양화, 2부 서양화 및 조각, 3부 서예로 나누었다. 이렇게 구분된 각부는 부침이 있다가 1932년 사군자(四君子)는 동양화부로 통합하고, 서예를 폐지하고 그 자리에 공예부를 신설한다. 이때 사용하기 시작한 동양화라는 명칭에 이견들이 많지만, 물론 공예부도 목공, 금속, 도자, 염색 4개로 구분한 것도 마찬가지, 어색하지만 지금까지도 미술 장르를 구분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1935 캔버스에 유채 130×196cm 

호암미술관 소장 사진제공 이인성기념사업회





출품작가도 점점 늘어나 공예부가 신설된 해에는 한국인 출품 입선자만 74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렇게 횟수를 거듭할수록 이를 통한 출세 작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양화부 추천작가로 우대되면서 이름을 얻어 소위 아카데미즘을 형성하게 된다. 짧은 시간에 조성된 이런 흐름은 서구와 같은 아카데미즘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아카데미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여기에 속하는 작가를 들라면 김인승, 심형구, 이마동, 이종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사실적이면서 보수적인 시각에서 기법은 뛰어나지만, 사회적 현상을 반영하거나 자신의 개성을 확연히 드러낸 작품을 제작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한편, 서구의 신문화, 신지식이 유입되면서 여러 논쟁들이 등장하는데 20~30년대에는 프로미술론과 향토예술론을 들 수 있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이 결성되어 프로미술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주로 김복진, 안석주, 강호 등이 활동하였다‘계급투쟁의 수단으로서 미술 활동이 거둔 성과는 미미했는데 그것은 포스터라는 선전미술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라는 자체평가와 마찬가지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10년 만에 끝이 난다. , <선전>이 거듭될수록 소재주의와 향토예술론이 떠오르는데, 이는 문학에서도 이광수의 『흙』, 이기영의 『고향』 등 농민문학이 생산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주장이 힘 있게 등장하게 된 이유는 짧은 서양미술 도입시간과 <선전>에 초대된 일본심사위원의 이국적 취미가 반영된 심사평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점점 험악해지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반영된 현실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향토예술론에 적합하다고 평가받았던 작품은 <선전> 최고 인기작가인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서>였다. 하늘이 차지하는 면적은 작아지고 장대한 산과 땅은 양식화되어 뒤로 밀려나고 있다. 등장하는 식물들과 인물은 정확한 관찰을 통해 그리기보다는 양식화된 소재로 언급됨으로써 자연풍경을 관찰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풍경은 하나의 창조된 기록물로 바라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작품은 시대에 따라 의미의 생성과 소멸이 있는 가변적 공간이기에 <경주의 산곡에서>를 향토예술론과 꼭 연관 지을 필요는 없다.





김기창 <정청> 1934 비단에 채색 

159×314.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40년대를 지나가면서 일본 제국주의가 전시체제라는 시국을 들어 무지막지한 탄압을 가하자, 많은 지식인들은 일제정책에 동조하거나 혹은 현실에 대한 무비판과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제강점기 36년에 종지부를 찍는 1945년 해방을 현실적, 정신적 준비 없이 허망하게 맞이했다. 흔히 해방공간이라고 부르는 시기를 무엇보다 우리의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 부재한 상태로 맞았기에 갖가지 비현실적, 비민족적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냈다고 해석해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해방 직후 미술 단체의 난립은 정치이념 대리전 양상 이상 아니었으며, 예술적이고 실질적으로 미술이 진행해 나갈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일제 식민지문화 잔재청산과 민족미술 수립에 대한 해방공간에서 노력은 이념대립으로 나타났고, 그 노력의 결과는 아무런 소득 없이 ‘한국전쟁’이라는 비극 때문에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 시기에 눈여겨 볼만한 사항은 30년대부터 비평 활동을 하던 김주경(1947 월북), 김용준(1950 월북), 윤희순(1947 사망), 오지호 등이 ‘민족미술론’ 특히 ‘조선향토색론’에 대한 논의가 약화되면서 대두된 ‘순수미술론’을 식민지문화 잔재청산이라는 문제와 결합시키면서 이들의 주된 비평관이 되었고, 해방 후부터 정부수립까지 이러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김용준, 윤희순이 한국미술사를 저술하기도 한 맥락을 만들었다. 그러나 강대국에 의한 분할점령은 우리들 스스로 자주 국가를 세우는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1948년 남한의 단독 정부수립 이후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당면한 적으로 인식하면서 점차 소위 이념대립(정부수립 이전까지의 이념대립과는 다른)이 심화되어갔다. , 남한은 반공을 국시로 삼으면서 당시 활발하게 한국미술 혹은 비평을 했던 이들을 좌익성향으로 파악하고, 그들의 활동을 억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끝이었으나 곧 새로운 차원의 문제가 시작된다. 1949 9 22일 문교부 고시 1호에 의해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이다


<국전>이라는 관전은 일제 식민지문화 잔재의 청산과 민족미술의 수립이라는 절대명제 대신에, 보신과 입신을 위해 세력을 형성하여, 세속적인 명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함으로써 등장한 것이다. 이런 격변의 상황을 예감한 것인지 이쾌대는 ‘군상’ 시리즈를 제작했다. 특히 <군상 Ⅳ>은 장대한 서사를 보는 느낌만큼이나 당시로는 보기 드문 대작이다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하지 못해 북한군에 의해 강제 부역한 이유로 국군에게 체포되어 부산 피난수용소에 수감된다.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그가 북한을 선택한 이유도 우리 역사만큼이나 아이러니하다. 남한에 사랑하는 처자식이 모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선택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애절한 마음을 갖게 만든다





박서보 <원형질 No.1-62> 1962 캔버스에 유채 

163×131cm 사진제공 서보미술문화재단 





한국전쟁이 휴전을 맺고 1953년 두 번째 개최된 <국전>이지만 태생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서 많은 문제를 껴안고 출발한 관전이었다. 일제 식민지문화의 대표적인 전형이었던  <선전> 모습을 모방했다는 사실에서부터, 예술이 정치권력의 유지에 이용당하고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언론을 활용했던 사실, 여기에 미술인들의 권위의식과 파벌의식 등이 빚어낸 총체적인 모순덩어리였던 것이다. 1981 30회를 마지막으로 민간에 이양될 때까지 <국전>은 수많은 이야기를 생산해냈다. 오죽하면 「국전여화(國展餘話)」라는 제목으로 일간지에서 시리즈 기사로 다룰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해방공간에 이념대립이 사라진 공백에 일제 식민지문화 잔재청산을 위해 국전심사위원 선정을 통해 시도했지만 그것마저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참혹한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로 전후(戰後)의 모든 미술인을 ‘대한미협’으로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하면서 정작 중요했던 일제 식민지문화 잔재청산에 대한 의식은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우대립의 소멸과 일제 식민지문화 잔재에 대한 희박한 의식은 국전을 통하여 새로운 대립양상을 만들어 낸다. 즉 아카데미와 아방가르드, 보수와 신진, 수구와 전위라고 불리는 대립양상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 <국전>은 자신도 모르게 반() 국전의 세력을 의도치 않게 양성한 것이다. 아카데미즘 양식을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신진세력은  화가로서 입지가 전무했기에 당연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자신들에 의해, 자신들만을 위한, 자신들의 그림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국전>에 반기를 들고 등장한 것이다. 이런 세력의 대표그룹은 현대미술가협회(1957 창립, 김영환, 김종휘, 김창열, 김청관 등이 첫 전시에 참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현대전>이라는 이름으로 1958년 봄 3, 가을 4회를 열었는데 이 전시부터 앵포르멜(Informal)에 다다른 전시라고 평가하면서부터 한국 현대미술에 ‘앵포르멜’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국제적인 미술사조와 같은 궤도를 돌고 있다는 안도감 혹은 앵포르멜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 현대미술 형성에 이론적 배경이 되었음은 틀림없다그 이듬해 <현대전>은 ‘우연과 미지의 예고를 품은 영감에 충실하고 나의 개척은 곧 세계의 제패로 이어진다’는 당찬 선언과 함께 5회 전시를 열었고, 1960 6회에는 아방가르드의 승리를 선언한다. 앵포르멜이라는 기폭제를 받아 그들의 작품형식은 폭발하고 만 것이다. 이들은 1961 60년미술가협회와 <연립전>을 열었고, 1962년에는 아예 두 단체를 합쳐 악뛰엘이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이제 전위미술의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하지만 격동의 한국역사는 또다시 큰 파랑에 휩쓸리게 된다. 이 시기의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품 하나로 박서보의 60년대 작품 <원형질 No.1-62>를 보는 것으로 이글을 맺는다.  

 


글쓴이 임창섭은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 공예의 반란을 꿈꾸며』, 『꿈을 그린 추상화가: 김환기』, 『이 그림, 파는 건가요?』 등을 출판했고, 외에 여러 논문을 발표했다. 전시로는 <한국근대미술 새로 넓게 보기>, <자료와 그림으로 보는 부산의 근현대 풍경>, <한국미술 대항해의 시대를 열다> 등을 기획했다. 2007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예술총감독,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 실장,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개발원 창조원 조감독으로 있었다. 현재는 울산광역시청의 울산시립미술관 건립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황술조 <여인좌상

1935 사진제공 대구미술관






Special feature

잊혀진 미술가, 진환과 변영원

● 김현숙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불과 십여 년 전에는 이중섭과 박수근 정도만 언급해도 미술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축에 낄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한국 경제의 급성장과 함께 K-컬쳐에 대한 국제적 수요가 증가하자 한국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현저하게 높아져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나 미켈란젤로(Michelangelo)를 모르는 사람도 박수근과 이중섭은 알 정도로 변화가 일어났다. 미술시장 또한 급성장해서 박수근의 <빨래터>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중섭, 천경자의 작품가가 고공행진을 하고 단색화 계열 작품들이 상위 블루칩으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최근에는 김환기의 작품이 65 5,000만 원에 낙찰되면서 한국 미술품의 최고가를 갱신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작년 가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개최했던 유영국(劉永國) 전이 미술계 안팎으로 크게 반향을 일으키면서 대중적 인지도도 한층 확대되었다. 이들 최고가의 블루칩 미술가들이 갖춘 기본 여건이라든가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무엇보다 뛰어난 작품세계가 보장되어야 하며 다음으로 유통과 연구의 터전이 확보될 수 있을 만큼 작품 양이 확보되어야 한다. 거기에 작가 개인미술관이나 기념관이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는 개인 미술관이 있어 전시, 홍보, 교육, 연구의 기본 요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 천경자의 경우는 서울시립미술관에 상설전시관이 있으며 유영국은 유영국문화재단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 외에 장욱진(張旭鎭), 이응노(李應魯), 김기창(金基昶) 등도 각각 미술관이나 기념관이 있어 화명을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작가적 위상이 높은 이쾌대(李快大)와 이인성(李仁星), 한국화가로 변관식(卞寬植), 이상범(李象範)은 개인 뮤지엄은 없으나, 작품 수가 많아 회고전 기획이 가능하며 화집 및 작가연구텍스트가 비교적 두터운 편이다


만약 차후에라도 개인미술관이 설립된다면 이들의 화명은 현재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국내외에 더욱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미술사적 평가와 위상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주목을 받지 못한 이들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많다. 월북미술가 다수가 이에 해당되는데, 일단 유존 작품이 희귀해서 극소수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화명이 논의되는 경우가 많다. 이쾌대처럼 유족이 월북 이전의 작품을 다량 보관하고 있다가 해금이 되자 일괄 공개했거나 배운성(裵雲成)처럼 파리의 한 유학생이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묶음의 작품이 대량 국내로 들어온 경우를 제외하고는 월북미술가들의 작품은 일견할 기회도 많지 않고 작품 수도 빈약한 형편이다. 대표적인 예로 근원 김용준(金瑢俊)을 들 수 있다.





박노수 <비폭(飛瀑)> 1964 한지에 수묵담채 

215×155cm 사진제공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20세기 전반의 한국 미술계에 미친 영향력과 뛰어난 작가적 역량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인물이지만 작품 규모와 수적 한계 때문에 개인전 한번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 김용준과 비교해서 청계(靑谿) 정종여(鄭鍾汝)의 경우는 월북 이전의 작품이 상당수 남아있고 대작이 적지 않다. 그런데 내면의 잠재력을 열정적으로 끌어올려 쏟아낸 대규모 작품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회고전이 개최된 바 없기 때문인지 아직까지 청계의 작업과 기량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확립되지 못했다. 다행히 ‘청계정종여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작품과 자료의 발굴 및 수집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멀지 않은 시기에 청계의 작가적 면모가 종합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화에 대한 시장의 저평가와 대중적 인기의 저조함도 한국화의 저변화를 막는 큰 장애요소로 극복의 대안과 전략이 필요하다위에서 언급한 작가들 외에 불과 한 세기밖에 지나지 않은 세월을 뒤로하고 망각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 미술가들은 부지기수이며 이름만 겨우 남았을 뿐 작품이 모두 사라진 작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까지 합하면 족히 100명 남짓 되지 않을까


김종태(金鍾泰), 윤희순(尹喜淳), 김복진(金復鎭), 임용련(任用璉), 백남순(白南舜), 길진섭(吉鎭燮), 김만형(金晩炯), 최재덕(崔載德), 문학수(文學洙), 김주경(金周經), 정현웅(鄭玄雄) 등은 뛰어난 미술가들이지만 요절했거나, 월북했거나 그도 아니면 작품이 거의 남겨지지 않은 경우들이다. 한편 비교적 작품이 많이 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아직 망각 속에 묻힌 작가로 임군홍(林群鴻), 구본웅(具本雄), 황술조(黃述祚), 김만술(金萬述) 등을 들 수 있다뛰어난 미술가들이 잊혀버린 안타까운 현상의 배후는 무엇일까. 어차피 모든 미술가를 역사로 기록하기는 불가능하며 기억할 수도 없으므로 망각이 부당하다고만 하기는 어렵다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무수한 작품들이 사라져버린 시대적 비극을 감안한다면 부당하게 사라져버린 미술가들의 복원과 재평가 작업을 역사적 과업이라 칭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이에 필자는 짧게나마 특별히 진환과 변영원이라는 화가를 소개하려 한다. 두 작가 모두 당대의 시대정신을 예민하게 흡수하면서 독자의 작품세계를 확립했다. 진환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다수의 작품이 일본에 남겨져 행방이 묘연하다. 변영원은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작업을 했기 때문에 작품 유실이 많지는 않지만 평가 절하되고 외면당했다. 이들이 남긴 작품의 수량은 미술시장을 풍성하게 할 정도는 아니나 작품세계를 가늠하고 평가할 정도는 된다





유영국 <작품> 1940 캔버스에 유채 

46×37.5cm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소장 





작품세계를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의 작업량이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진환과 변영원이 아직 무명에 가깝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두 작가의 작품은 시장이 먼저 반응하는 유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미술시장이나 대중에게 던져놓기 전에 먼저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판단인데, 짧은 지면이지만 기존에 알려진 정보에 필자의 해석과 평가를 곁들여 소개하도록 하겠다.1) 진환(1913-1951) 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화가는 전북 고창군 무장면 출신으로 일본미술학교(日本美術學校) 유화과(油畵科)를 졸업하고 이어서 도쿄미술공예학원(東京美術工藝學院)의 순수미술 연구실에서 2년 과정을 수료한 직후 강사까지 역임한 바 있는 재자(才子)였다


미술학교 2학년(23) 때에 <베를린 올림픽예술경기전> <군상>을 출품하여 입상했고, 같은 해 <신자연파협회전(新自然派協會展)>에서 장려상을 받았는데, 2학년생으로 같은 해 두 군데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으니 주변 인사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을 터이다. 이후 <신자연파협회전>에 연이어 수상을 거듭하다가 1939년 제4회전에서는 협회상을 수상하여 정식 회원으로 추대되기에 이르렀다졸업 후 도쿄미술공예학원 연구실을 다닐 때 이 학원 관련자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소토야마 우사부로(外山卯三郞)의 신임을 얻어 그의 집에 기거했다고 하는데, 진환의 뛰어난 재능을 눈여겨봤던 미술인 중 한명이 소토야마였을 것이다진환의 미술가로서의 재능은 <올림픽예술경기전> 출품작을 제작하던 중에 찍은 사진 속의 그림들, 다시 말해 출품작 <군상>을 통해서 가늠해볼 수 있다. 사진 속의 그림은 농구경기 선수들을 소재로 한 것으로 <군상>이 확실하다고 추정되는데 미술학교 2학년 학생의 솜씨라기에는 능숙하고 세련된 구성과 표현력이 확인된다. <군상>보다 더 앞서 제작된 작품으로 수채화 <구두>(1932)가 있다


미술학교 입학 전에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던 시절의 것인데 정확한 데생력과 깔끔한 묘사력, 맑은 색감의 구사가 돋보인다. 독학시절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법적인 완숙도를 넘어서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 두드러져 더욱 놀랍다화가 진환은 현재 한국 양화가 중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 할 수 있는 이중섭, 이쾌대와 함께 미술단체활동을 했으며, 두 작가와 오고갔던 편지 내용을 통해서 이들이 진환을 인간적으로 매우 신뢰했으며 작품에 대한 신뢰도 도타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쾌대는 진환이 즐겨 그린 소를 ‘무장의 소’라 칭하며 자주 언급하고는 했다.





주경 <애인> 1954 캔버스에 유채 

60.6×50.5cm 개인소장 사진제공 대구미술





오늘날 소의 화가는 단연코 이중섭이 독보적으로 손꼽히지만 진환으로서는 다소 억울한 일면이 없지 않을 듯하다. 이중섭보다 진환이 더 먼저 소를 그렸다고 증언하는 화가가 있을 정도로 진환 역시 소의 화가로 유명했으며, 「소의 일기(日記)」라는 짧은 수필 원고를 쓰기도 했다. 힘차면서도 온순하고 바위같이 생긴 몸에서 소의 덕성을 치환하는 방식은 진환과 이중섭의 공통된 지점이지만 이중섭이 소의 격정적 성격을 근대적 불안과 긴장으로 은유했다면, 진환은 전북 고창면 무장읍이라는 특정 공간, 다시 말해 ‘남도의 고향’에 유유자적하는 존재로 소의 지평을 확보했다. 따라서 중섭의 소가 배경을 생략하고 소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면 진환의 소는 배경과 일치를 이루며 고향을 은유하기 때문에 향토색으로 대변되는 황갈색이 주조색을 이룬다. 


당시의 첨단미술인 추상미술에 대해 이중섭은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해 적극적으로 추상화를 시도하지 않았지만 진환은 <()>(1941) <()>(1942)에서 보듯 공중을 나는 새와 산천을 반추상 양식으로 시도했다. 황갈색조의 반추상화는 모더니즘 미술에 개방적이면서도 작가 특유의 독특한 세계를 유지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3년에 가정 문제로 급작스럽게 귀국했던 진환은 부친의 가업을 이어 무장초급중학교 교장직을 수행해야 했는데, 1948년에 홍익대학교 교수에 취임하여 활동을 재개할 때까지 미술가로서의 활동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1950년에 전쟁이 발발하고 1951 1.4 후퇴 때 고향으로 피난하던 중 고향 근처에서 유탄을 맞아 사망하고 말았으니 38세의 이른 나이였다


그에게 몇 년의 시간만이라도 더 주어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어느 화가에 대해서보다 강하게 드는 것은 그의 재능이 너무 아쉬운 탓이다변영원(1921-1988)은 서울 출신으로 경기상업학교를 거쳐 1943년 일본의 데이고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광복 직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매우 낯선 이름의 화가 변영원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30점 가깝게 소장되어 있음을 알려준다면 대부분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어째서 국립현대미술관에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화가의 작품이 대량 소장된 것일까. 그 이유를 들으면 더 의아해질까 걱정도 되는데, 상당히 싼 가격으로 수집되고 기증도 받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국립미술관의 작품 수집과 기증이 작품가가 싸다고 해서 결정되지는 않으므로 두 번째 이유가 더 중요해 보인다. 아직 작가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변영원 작품의 수준을 높게 인정한 결정이었다





구본웅 <친구의 초상>

 1935 캔버스에 유채 62×50cm





이 지점에서 나는 미술관의 결정이 매우 타당했고 변영원은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작가의 사후 작품을 보관할 여유도 없었던 유족이 미술관에 작품을 맡기듯 넘겼지만 훗날 변영원의 진가가 높아진 후에는 크게 후회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작품이 국립미술관에 대량 소장됨으로써 폭넓은 감상이 가능해지고 그리하여 작가에 대한 재평가도 가능해지므로 역시 유족의 판단이 옳았다고 본다한편 변영원 작품이 소장된 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변영원 연구는 거의 진척된 바 없다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반공여혼>(1952)과 짝을 이루는 <감공(減共)의 여혼(女魂)> 1957년 신조형파전 창립전에 출품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언급되지 않고 있으니 <전위정신>이라는 작품을 제작할 만큼 전위를 표방했던 작가에게 ‘반공’과 ‘감공’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의미였을지를 묻지 않고서야 작가론이 성립할 수 있을까. 변영원의 작업은 입체파와 초현실주의를 절충한 1950년대 작품만 소개되어 왔었는데 1960년대로 이행하면서 화풍도 크게 변화한다. 2016년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3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소장품전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의 ‘순환 1: 이면(Circulate Part 1: The Other Side)’에 전시된 변영원의 ‘합존’ 시리즈 작품들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제작된 ‘합존’ 시리즈는 우주 전체의 만물은 서로 상대적으로 연관되어 생성되고 변화한다는 논리를 도형화, 추상화한 시리즈물로 한국 미술사상 매우 선구적일 뿐 아니라 색과 면의 경쾌하고 조화로운 구성과 세련되고 우아한 색감이 매우 뛰어나다자유와 전위의 가치 수호에 앞장섰던 변영원의 작업은 1960년대 이후 음양론이나 역()사상 같은 동양철학과 만나 우주만상(宇宙萬象)의 ‘합존조형(合存造形)’ 세계를 이루었다. 원과 원이 만나 경계를 이루면서 상호 대응하고 생성하며 움직이는 구조는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추상화와 달리 우주적 생명의 원리와 이치에 대한 긍정적 포용이다근대의 도시적 감성과 논리가 동양 철학과 화해하며 펼쳐지는 하모니는 작가 생전에는 이해받지 못했다. 생활은 극도로 곤궁했고 고독과 소외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를 방증하듯 적어도 반세기는 앞서 나갔던 예술가의 그림 다수가 제목도 없어 ‘미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전에 딱 한번 뵌 적 있던 그의 얼굴이 가물거리는데 오히려 그의 그림은 눈앞에서 명료해지고 있으니 화가의 재평가와 복권이 멀지 않았다는 신호가 아닐까. 

 

[각주]

1) 진환에 대한 연구는 윤범모 「진환」, 『한국현대미술100년』, 현암사, 1984, 221~227쪽 참조; 변영원에 대해서는 이구열의 선구적인 조사가 있었다.

 


글쓴이 김현숙은 한국근현대미술사를 전공하고 동양주의미술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덕성여대 학술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이다.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미술사학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근대미술소장품 기획전 : 

관물(觀物), 사물을 보는 법>(2015.3.25-6.28,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전경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Special feature 

이곳에서 근대미술과 만나다

● 이가진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주소 :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전화 : 02-2022-0600

 

한국 근대미술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기관 중 하나를 꼽는다면 국립현대미술관이 빠지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영문 명칭은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이름에 명시된 ‘모던과 컨템포러리’가 말해주듯 근·현대를 아우르고 있다. 현재는 4(과천관, 서울관, 덕수궁관, 청주관) 체재로 운영되지만 처음 국립현대미술관이 자리 잡은 곳은 그 중 덕수궁이다. 덕수궁미술관에는 굴곡진 한국 역사가 오롯이 담겨있다. 덕수궁 석조전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석조 건물로 그자체로 문화재(등록문화재 제81)기도 하다애초엔 왕가에서 사용했던 거주지로서 역할 하다가 1933년부터는 일반에 공개돼 조선 고미술품과 일본의 근대미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1909년 황실에서 조선 고미술품을 수집해 창경궁에 만든 이왕가박물관은 1938년 덕수궁으로 옮겨오면서 석조전과 신관을 통합해 이왕가미술관으로 개칭했다. 이왕가미술관은 “문화가 없는 조선에 미술을 진작한다”며 건립됐으나, 정작 당대 일본 문화(근대미술) 위주의 전시로 조선의 문화는 과거의 것을 진열하는 것에 그쳐 식민 통치를 공고화하는 역할에 불과했다는 비판도 있다.


1973년부터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경복궁(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이전하며 1986년 과천관 신축 때까지 덕수궁에 머물다, 1998년 분관으로 재개관 한 후, 덕수궁미술관으로 정식 직제화 된 것은 2002년부터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부터 실제 이뤄지는 전시까지 덕수궁미술관은 ‘근대미술’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장소다. 19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 근대미술을 비롯해 아시아 및 서구 근대미술까지 범위를 확장해 기획전시, 소장품전시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올해 3월까지는 ‘한국근대미술 거장전’시리즈로 변월룡, 이중섭, 유영국의 대규모 회고전을 열어 근대미술가들의 작업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집중해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 이전에도 <한국근대미술소장품 기획전: 관물(觀物), 사물을 보는 법>(2015.3.25-2015.6.28), <명화를 만나다 : 한국근현대회화 100>(2013.9.17-2013.10.13),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 근대를 묻다>(2008.12.23-2009.3.22) 등 소장품을 중심으로 주제전을 갖는 등 꾸준히 근대미술을 알리는 조사연구 및 전시 기관으로 자리매김 해 왔다.





고희동 가옥_사랑방 사진제공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고희동 가옥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5 40

전화 : 02-2148-4165

 

‘최초’라는 타이틀에 유난히 열광하는 한국에서 최초의 서양화가로 기록된 이가 있다. 바로 춘곡 고희동. ‘최초의 서양화가’, ‘최초의 유화가’ 등의 수식을 갖고 있으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겨진 작품이 3점뿐인데다, 그중 1점은 그마저도 일본에서 소장중이라 널리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관으로 중국에서 영어를 배운 부친은 개화기 지식인이었고, 춘곡 자신도 그 뒤를 이어 14세에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던 중 프랑스인 도예가 르미옹(Leopold Remion)를 통해 서양화를 접하게 됐다


그러던 중 1909년 일본동경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에서 본격적으로 서양의 유화를 배웠다고 하니,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야말로 ‘글로벌’하게 살았던 것. 1918,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엔 창덕궁 근처에 터를 잡고 목조 기와집을 지어 생활한 곳이 현재 고희동 가옥(등록문화재 제84)으로 남아있다. 고희동 가옥은 무엇보다 화가의 집답게 사랑방 옆에 화실을 따로 둔 개량한옥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 시절의 집기와 화구가 거의 그대로 남아 방문객을 반긴다. 정갈하게 놓인 낡은 바둑판, 방금까지 붓을 들었다 잠시 놓고 나간 듯한 책상까지 모든 장면이 생생하다. 그곳에서 오지호, 도상봉, 전형필, 이상 등 근대 문화예술계를 이끌었던 이들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니, 마치 과거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예술을 논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희동은 서양화를 단순히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전통적 수묵화법을 기초로 삼고 서양화의 색채나 명암법을 접목시키는 등 시대 변화에 영민하게 반응했다. 현존하는 대표작 <부채를 든 자화상>(1915)은 앞섬을 푸르고 부채질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는 예술세계만큼이나 일상에서도 서구의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일상적 전통과 조화시키고자 했음을 볼 수 있어, ‘근대성’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이처럼 화가 개인으로, 나아가 당대 문화예술 전반에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인만큼 여전히 연구되어야할 부분이 많다. 그 일환으로 고희동 가옥은 2012년 개관 이래, ‘춘곡 고희동과 친구들’이라는 주제로 그의 작품과 근대미술을 아우르는 전시를 지속적으로 열어왔다. 현재는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과 종로구가 협약을 맺고 역사적 유산으로서 유지 및 관리를 맡고 있다. 수요일부터 일요일, 10시부터 17시까지 개방한다.

 




작업실에서 권진규 1971 사진제공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권진규 아틀리에

주소: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로 26마길 2-15

전화: 02-3675-3401

 

지난 오랜 세월 회화가 누린 권력의 힘을 보여주듯, 근대미술작가를 떠올리면 대부분 화가들의 이름이 앞선다. 한국 근현대 조각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권진규는 그래서 좀 더 특별하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도쿄예술원, 무사시노 미술학교 조각과 등에서 조각을 공부한 그는 1959년 귀국 후 전통문화 연구에 몰입, 테라코타와 건칠(乾漆) 기법을 사용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구현한 정직한 구상조각에는 고도로 절제된 긴장감과 정적인 분위기로 영원을 향한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있다


, 닭 등 동물상에는 고요한 명상적 인간관과는 달리 역동적인 힘이 드러나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았을 여러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지원의 얼굴>(1967), ‘자소상’시리즈 등의 대표작을 남기고 이르게 세상을 떠났다. 이런 그의 작품 세계의 무대가 된 권진규 아틀리에(등록문화재 제134)는 작가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해 머물며, 20여 년간 다양한 작품을 탄생시킨 곳이다. ‘아틀리에’라는 이름에 걸맞게 건물은 작업을 최우선으로 삼고 지었다. 대형 작품을 만들고, 보관하기 쉽게 천장을 높이 지어 내부에 작품을 진열하기도 했다. 또한 조소 작업을 하기 쉽도록 바닥은 흙을 다져 마감하고, 작업에 필요한 화덕과 우물도 별도로 두었다. 반면, 권진규가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방은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만큼 작았다. 작업실이 주가 되고, 거기에 현관과 방을 덧붙인 셈이다.


이런 그의 아틀리에가 2006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된 이후에는 보수 및 복원 공사를 거쳐 시민문화유산 3호로 거듭났다. 성북구 동선동 비탈길에 자리 잡은 조각가의 작업실에 다다르려면,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 역 1번 출구로 나와 동선동 주민 센터, 슈퍼마켓, 식당을 두루 지나야 한다. 무거운 조각재료, 생필품을 들고 부지런히 길을 올랐을 그를 떠올리면, 걸음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아무 때나 이곳을 방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월부터 11월까지는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4, 12월부터 3월 동안은 매월 넷째 주 금요일 오후 4, 한 달에 한 번, 사전 예약을 받아 개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잠긴 문 뒤 공간이 멈춰져 있진 않다. 실제 가족들의 살림채로 사용되었던 곳에서 예술가 입주 프로그램이 운영되어, 권진규의 뜻과 에너지를 이어받은 작가들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청운의 꿈을 품었던 일본 유학 시절과 달리 돌아온 고국에서의 외로움, 상실감 등을 견디게 했던 작업에의 열정이 고스란히 남겨진 아틀리에에서 근대와 당시의 예술을 곱씹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권진규 <지원의 얼굴03> 

1967 테라코타 32×27×49cm 개인소장 

사진제공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주소: 서울시 종로구 옥인1 34

전화: 02-2148-4171

 

경복궁 서쪽 일대를 일컫는 세종마을. 여기에 속하는 통인동에서 태어난 세종대왕의 이름을 따왔다. 조선시대에는 상촌(上村)이라고 불린 지역이다. 경복궁역에서 통인시장을 지나 인왕산 가까이로 쭉 올라가다보면 한적한 골목에서 만나게 되는 절충식 가옥이 있다. 바로 2013 9월 문 연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다. 1973년 남정 박노수가 소유해 2011년도 말까지 거주한 이곳은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로 등록되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박노수는 전통적인 화체를 바탕으로 간결한 운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를 특징으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작가다청전 이상범을 사사하고, 신선한 색채감과 동양적 선묘를 바탕으로 광복 후 한국화 1세대로서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2011, 자신의 작품 뿐 아니라 그간 수집해온 고미술품 등 1,000여 점을 사회에 환원하며 꾸려진 박노수미술관은 작가가 살았던 집을 개조한 것인 만큼, 생활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진 않았다. 윤기 나게 닦인 마루에 들어서면 거실, , 부엌이 아늑하게 자리 잡았고, 나무 계단을 올라 가면 여러 개의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따사롭게 들어온다. 이 동네의 고즈넉한 기와지붕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건물은, 1930년대에 지어진 근대식 가옥이다


본래 친일파 관리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 한옥, 양옥에 중국식 기법이 섞인 2층집으로 당시의 권세를 드러내듯 호사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앞선 건축물이 그러하듯, 혼재된 양식에서 느껴지는 기묘함을 품은 이곳 역시 그 자체로 근대를 되짚어볼 수 있는 유의미한 장소인 것만은 분명하다여기에 박노수라는 예술가의 삶과 작업이 더해져 더욱 흥미로운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주된 전시공간인 내부 뿐 아니라 외부 곳곳에도 남정의 손길이 묻어있다그가 가꾼 다양한 수목, 소장했던 정원석, 수석 등의 볼거리가 정원을 지키고 있다박노수미술관은 개관전 <달과 소년>을 시작으로 <화가의 집>, <청년 박노수를 말하다> 등의 기획전으로 매번 공간과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고, 매년 시대별로 남정의 작업세계를 훑어볼 수 있는 전시를 마련해 미술사적 위상을 다지는 데 기여하고 있다. 현재 다섯 번째 기획전인 <취적-피리소리>를 열어 1970년대 작품 및 아카이브, 대표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오는 8 27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전경 

사진제공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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