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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31, Aug 2017

관객 참여형 공공미술의 허와 실

Pros and Cons of Participatory Public Art

프랑스의 큐레이터이자 비평가인 니꼴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는 현대미술을 관계의 미학으로 정의한다. 비록 1990년대 현대미술에서 보인 양상을 토대로 한 것이긴 하지만, 새로움이 더는 미학적 기준이 될 수 없고 관계를 통해 새로운 기준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동안 미술의 여러 영역에서 설득력을 얻어왔다. 특히 도시 공간에서 미술의 역할론이 대두되는 가운데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lauss)로부터 시작된 공공미술에 대한 담론과 관계 미학이 만나면서 관객 참여형 공공미술은 미학적 근간을 하고 시도되고 확산하여 왔다.
● 기획 편집부 ● 글 한은주 ㈜소프트아키텍쳐랩 대표

하우메 플렌자(Jaume Plensa) 'Crown Fountain' 2004 Glass, stainless steel, LED screens, light, wood, black granite and water Photo: Patrick Pysz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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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주 ㈜소프트아키텍쳐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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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확산 당시 상당히 많은 프로젝트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실패담으로 회자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잘 알려진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기울어진 호(Tilted Arc)>(1981-1989)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람들은 광장을 지나치게 예술가의 임의적 예술 행위에만 초점을 두어 공공 공간이 지닌 일상과 현실을 도외시했다는 평가가 이뤄졌다. 이 프로젝트 실패는 공공에 대한 해석에서 참여의 결여에 기인한다고 진단 내려졌다. 뒤이은 존 에이헌(John Ahearn)의 뉴욕 사우스 브롱스에서의 ‘공공미술 프로젝트’(1991)는 기획단계에서 앞선 실패를 교훈 삼아 공공의 참여를 고려했다. 


1988년 그가 우범지대로 유명했던 그 지역의 경찰서 앞 교차로에 설치할 조각품의 의뢰를 받고 4년 뒤인 1992년 공공미술의 장소 특정성에 충실하기 위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주제로 구상조각을 완성했다. 주로 흑인과 히스패닉 계통의 사람들의 거주지였던 이곳에 웃통 벗고 라디오에 한 발을 올린 채 한 손에 농구공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 언제든지 시비를 걸 준비가 된 듯한 모습의 흑인 청년 코리(Corey), 스케이트보드를 사준다는 말에 혹해 선뜻 모델이 된, 레깅스를 입고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검은 피부의 아가씨 달리샤(Daleesha), 후디를 쓰고 화려한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반려견 핏불을 데리고 있는 레이몬드(Raymond)가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표현한 구상조각은 공공미술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자신들의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보고 싶었던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설치를 반대했다. 결국, 이러한 형태의 관객참여도 5일 만의 철거라는 실패로 끝났다. 21세기 들어서면서 도시화의 확산에 따른 외부공간의 질적 성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공공미술에서 공공의 의미를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가 등장한다. 그 가운데 공공미술의 공공성에 관한 사안이 대중과 예술의 커다란 간격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것이 계몽과 같은 일방적인 수단으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지난 세기 동안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공공의 벽에 부딪혀 철거되는 운명을 맞게 된 공공미술을 돌아보면 결국 관객소통의 부재가 원인이었다. 아무래도 공공미술의 의뢰인은 개인 수집가보다는 공공기관이 되며 예술의 수혜를 특정계층에만 국한하지 않고 공공이 널리 누리도록 하는 것을 프로젝트 성패의 잣대로 삼기 때문에 소통은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소통 방식 중 하나로 공공미술의 관객참여는 하나의 트랜드를 형성하기까지 이른다.




크리스토와 잔느 클로드(Christo and Jeanne-Claude) 

The Umbrellas, Japan-USA 1984-91 

Photo: Wolfgang Volz  1991 Christo




우선 관객 참여형 공공미술은 무엇일까? 첫째, 관객의 참여는 기획단계에서부터 이뤄질 수 있다. 공공미술이 장소 특정적 작업의 성격을 지니다 보니 특정 장소와 관련 있는 사안을 공공미술의 주제나 소재로 삼는다. 존 에이헌의 ‘브롱스 프로젝트’도 기획단계에 몇몇이긴 하지만 주민의 참여를 유도했다. 공공미술 소재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마틴 루터킹(Martin Luther King Jr.)과 같은 위인의 동상을 원했다. 그렇다고 존 에이헌이 주민들이 원하는 위인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성공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위한 길일까? 최근 공공미술의 형태로 확산된 벽화마을 프로젝트의 명암에서도 기획단계의 관객참여에 대한 시사점을 엿볼 수 있다. 


주민에 의한 계단벽화의 자발적 훼손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이화마을 벽화와 이와 비슷한 형태로 기획되었지만,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감천마을 벽화의 생사는 다르다. 이화마을의 주민들 일부가 계단벽화를 페인트로 지운 이유는 낙후된 동네에 원하지 않는 벽화를 마구 그려 가난을 관광 상품화 한다는 것이었다. 벽화로 환경미화가 이뤄진 듯하지만, 공공미술은 일상 환경에 설치되는 것이므로 주민들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일상공간의 리듬을 원치 않은 개입으로 흩트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에 반해 감천마을의 벽화는 생생히 살아있다. 심지어 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의 좋은 사례로 자주 회자된다. 그렇다고 이화마을과 감천마을 벽화 프로젝트의 성패가 기획단계에서의 주민참여의 여부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 기획가나 예술가의 관점과 더불어 주민의 관점을 실행 이후에도 살펴야 하며 이를 지속해서 공공미술 프로젝트 운영에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화마을 벽화의 수혜자는 인근 상점들일 뿐 실제 벽화를 위해 골목길을 내어 준 사람들은 아니었다. 감천마을의 경우도 처음에는 이 마을에서 상행위하는 사람들에게만 수혜가 돌아갔고 대다수 주민은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이후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법이 달랐다. 이화마을은 초기 기획대로 공공미술을 실행한 후 그저 구경거리로 보러 온 사람들만 공공의 반응이라고 여겼다. 


감천마을의 경우 주민의 불만에 귀를 기울여 벽화로 인한 수혜를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적용했다. 결과적으로 감천마을에 사는 공공과 골목길 벽화를 관람하러 온 공공 사이의 균형이 맞춰지자 공공미술로서의 벽화에 대한 만족감이 높아지고 장소 애착도 높아졌다. 공공미술은 그저 인지도 있는 작가가 완성도 있는 프로젝트를 공공장소에 세운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공공미술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유연한 관객참여기획이 모색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두 마을의 벽화 프로젝트를 통해 알 수 있다.





카렌 란셀 & 허먼 마트

(Karen Lancel & Hermen Maat) 

<만남의 장소> 시연  

 


둘째, 실행단계에서의 관객참여가 있다. 제작과정에 관객 즉 시민이나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다. 미국 벨링햄에서 해마다 열리는 ‘초크 아트 페스티벌(Bellingham chalk art festival)’은 예술가와 시민들이 색분필을 가지고 공공장소 보도의 정해진 구역에 그림을 그리는 공공미술 행사다. 시민참여를 통해 바닥의 분필 그림이 완성되며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을 골자로 공공미술이 이루어진다. 비슷한 형태로 ‘담꽃 프로젝트’가 있다. 김대성 교수의 지휘 아래 계원조형예술대학과 이화여고 학생들이 협업하여 공공장소인 이화여고 담벼락에 공공미술을 완성한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색분필을 사용해 작업함으로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워지는 시한부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제작과정 참여는 완성된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결되고 사람과 장소성의 연결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기억하게 만든다. 다만 예술의 아마추어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보장할 수 없기에 위의 사례들은 과정에 의의를 두고 점차 사라지는 일회성의 프로젝트를 선택했다. 셋째, 완성 후 적극적인 상호작용의 관람을 통해 관객참여 공공미술을 만들 수 있다. 상당수의 관객 참여형으로 분류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이 방식을 표방한다. 


관람의 방식을 체험이나 경험을 통해 이뤄지도록 하며 공공미술의 장소 특정적 상황을 담아 관객과 적극적인 소통이 일어나도록 한다. 크리스토 자바체프와 잔느 클로드(Christo Javacheff and Jeanne-Claude)의 ‘플로팅 피어스(The Floating Piers)’처럼 생경한 장소성을 예술로 구현하여 장소 경험을 통해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이에 속한다. 미국과 일본에 설치되었던 ‘우산(The Umbrellas)’작업도 생경하고 예술 언어로 조절된 장소 경험이라는 참여를 끌어낸다는 측면에서 결을 같이 하는 작업이다. 천대광의 <반딧불이 집>은 가설건축 형식을 취하여 만든 야외설치 조각이다. 


인천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배를 형상화한 공공미술이다. 건축의 형식을 빌려 온 만큼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공간이 있으며 관람객은 안팎을 경험하며 더욱 적극적인 관람을 누리게 된다. 크리스토의 작업이 예술적 조경으로 얘기되기도 하는 것처럼 천대광의 <반딧불이 집>은 건축에서 행해지는 ‘파빌리온’ 프로젝트와 매우 유사하다. 자연환경이나 인공 환경에 공공미술을 개입하여 관객들과의 적극적 소통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공간 경험은 필수로 장착되어야 하는 요소로 보인다.




마사 슈바츠(Martha Schwartz) 의해

 다시 디자인  제이콥 제이비츠 플라자

(Jacob Javits plaza) *일명 연방 광장 1993-1996

 


그러나 자연이나 도시와 같은 거대 환경에서 관객과 소통하는 공간 경험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단순한 예술작품 설치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일반 관객이 공공미술을 관람을 위해 적극적 경험을 하는 동안 상당 부분 안전의 문제에 봉착한다. 아무리 단순한 구조라 할지라도 사람이 들어가 사용하고 경험하는 장치를 만드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크리스토의 ‘우산’ 작업의 경우도 이를 경험하던 한 관람객이 거대한 우산이 쓰러지는 바람에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크리스토나 천대광의 작품의 완성도에 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형식을 표방하는 상당수의 공공미술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고를 부주의한 예술관람 정도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공공미술이 예술적 차원을 넘어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실질적 방법을 밀도 있게 고민해야 한다. 건축 분야에서도 19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참여이론이나 참여 디자인에 대한 연구와 실행 프로젝트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미국의 존 하브라켄(John Habraken) 교수가 주창한 셀프헬프 하우징(self-help housing)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멕시코의 빈민 지역에 주거시설을 확충하는 사업을 시행하는 과정에 적용된 것으로 설계와 건설의 전 과정에 빈민 가족이 직접 참여하였다. 


놀라운 것은 다소 뒤떨어진 주거시설임에도 참여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거주 후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적 성취도, 건축적 완성도,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지속성에서는 그리 성공적이라 할 수 없었다. 그것을 만든 주민들이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그곳으로 이주해오면 만족도라는 것은 형편없이 떨어지고 장소 애착을 유도하기 위한 또 다른 도시 디자인적 건축적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건축 역시 주민 만족도가 공간의 질을 높이는데 절대적 요소가 될 수 없다. 공간에 대한 만족은 그저 한순간의 감정일 수도 있다. 


만족에는 실질적인 평가보다는 심리적인 요인이 더욱 많이 작용하며 건축가의 역할은 주민 만족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감의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데 있다. 그래야 인류와 역사는 진화하고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예술가가 관객참여형 공공미술을 대하는 방식에 선행교훈이 될 수 있다. 시민이나 주민 관객의 구성원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조성된 건축이나 설치된 공공미술은 이보다 길게 그 장소를 지킨다. 처음 환영받은 작품이 현재를 넘어 시간과 공간을 견뎌 장소성을 만들어 낸다는 보장은 없다. 예술은 관객 만족을 통해 성과를 인정받는 제품이 아니다. 건축과 마찬가지로 공공미술이 공공과의 소통으로 더욱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예술적 개입이 비추어야 하는 시간과 공간의 범위는 더 길고 넓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천대광 <반딧불이 >

 2015 송도아트시티 전경



글쓴이 한은주는 공간건축에서 실무 후 영국왕립예술대학원(Royal College of Art)에서 ‘도시공간에서의 위치기반 인터렉션디자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그래프(SIGGRAPH) 2009’에서 건축과 미디어 아트가 결합된 작품을 발표했으며, ‘2011년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초대작가다. 『SPACE』 편집장과 공간건축 이사를 역임했다. 최근 공공건축 최초 키네틱 건축인 목연리를 완공했으며, ‘세계건축상(World Architecture Award)’과 ‘레드닷 어워드(Red Dot Award)’를 수상했다. 현재 ㈜소프트아키텍쳐랩의 대표, 한양대 겸임교수, 『SPACE』 편집위원으로 예술작업, 글쓰기, 디자인공학 등의 작업을 통해 혁신적 도시디자인과 건축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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