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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65, Jun 2020

빌리 차일디쉬: 늑대, 일몰 그리고 자신

2020.4.23 - 2020.6.27 리만머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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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주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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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원한 그림


빌리 차일디쉬(Billy Childish)의 그림을 볼 때는 그의 미학적 지향이 어떤 것인지, 그의 예술이 어떤 사조와 연관되어 있는지, 그가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의식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그 자신이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니 그의 그림 앞에서 감상자 또한 그와 동일한 자유를 누린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예술은 하나의 풍경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풍경을 바라볼 때 우리는 ‘풍경의 의도’나 ‘풍경의 목적’ 같은 것을 묻지 않는다. 종로구 소격동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리는 빌리 차일디쉬의 개인전 <늑대, 일몰 그리고 자신>은 그 특유의 자유로운 그림들로 관람객에게 ‘풍경 속의 나’를 발견하게 하는 전시다. 

여기서 말하는 ‘풍경 속의 나’는 ‘풍경화에 둘러싸인 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출품작들 가운데는 실제 풍경화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그림도 있다. 무엇을 그린 그림이든 그의 그림은 보는 이에게 풍경 속에 있는 자유로움 혹은 해방감 같은 것을 느끼도록 해준다. 그는 작품을 통해 특정한 관념이나 느낌을 관람객에게 주입하려 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이 시대의 많은 미술가들은 특정한 철학이나 개념, 느낌으로 관람객을 몰아가고,  그 ‘지적 게임’을 통해 성공과 보상이라는 이득을 점유하려고 한다. 이때 예술은 해방의 힘이 아니라 속박하는 권력이 된다. 그런 까닭에 그는 예술의 본질로 끝없이 환원하려고 한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미술의 순수한 힘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에게 그것은 ‘자기를 주장하고 내세움’으로써가 아니라, ‘예술의 본성(本聲)을 듣고 따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 그림에서 뭔가를 느끼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나의 그림은 열려 있다. 내가 만약 그림에서 나를 주장하려 한다면 많은 폐해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스스로 그림의 전개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만큼 나의 그림은 내가 원한 게 아닐 수 있다. 누구도 원한 적이 없는 그림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림이 원한 그림이다.” 마치 진정한 기도는 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인 것처럼, 그래서 그 음성을 순종하는 자세로 내면화하는 것인 것처럼 차일디쉬는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화면에 표출한다. 그의 주변 세계는 늘 그에게 말을 걸어오고 이런저런 울림으로 그의 마음속에 울려 퍼진다. 그러면 그는 그것들을 의식과 지성의 힘으로 가공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즉각적이고 직감적인 방식으로 화면을 수놓는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들이 바로 ‘그림이 원한 그림’이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 역시 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들이다. 산기슭의 나무들 사이로 분주한 걸음을 옮기는 늑대(<늑대, 나무들 그리고 길>), 몰려든 구름 사이로 태양빛을 발하는 늦은 오후의 하늘(<나무들과 하늘>), 자작나무 사이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늑대(<자작나무 사이의 늑대>), 뭉크의 필치를 탄 듯한 반 고흐의 꽃(<붓꽃>) 등 그의 주변 세계가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이 삼투성이 좋은 그의 마음결을 거쳐 자연스럽게 화폭 위를 물들였다. 늑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딸이 늑대와 개를 좋아했고, 그로 인해 텔레비전 늑대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시청한 데 있었다는 그의 고백처럼, 세계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삼투되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그 과정은 그만큼 직관적이고 즉흥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한 번 붓을 들면 그 자리에서 끝낸다. 그런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다. 자연과 세계가 순수하게 그 스스로를 드러내는 시공간이 지금, 여기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누군가 ‘찬란한 과거’나 ‘장밋빛 미래’를 얘기한다면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그 어디도 아닌 지금, 여기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충실한 것, 그것이 그의 예술의 목적이자 삶의 목적이다.                                                                 


*<나무들과 하늘(trees and sky)> 2019 리넨에 유채와 목탄 72.05×84.06in (183×213.5cm) ©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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