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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65, Jun 2020

허구영
Heo KuYoung

자폐적 예술, 그리고 불사조의 탄생을 기다림

허구영의 작품은 난해하다. 숱한 이미지와 오브제, 텍스트들이 복잡하게 조합되어 있다. 형식주의 미학이 추구하는 시각적 완결성 보다는 작품이 의도하는 개념이 제작과정에서 적확하게 드러나는가의 여부에 더 무게를 둔다. 작품의 결과보다는 과정이나 궤적을 중시한다. 단위작품이라 하더라도 평면이나 입체적 속성의 완결형이라기보다는 공간 안에 유연하게 구부러진 곡면처럼 다시 시작되거나 변형될 것 같은 진행형이다. 작품들은 특정 공간 내에서 자기증식하기도 한다. 그는 일정기간 동안 탐구하는 중심개념을 전시회의 명칭으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천착한다. '이 사람을 보라', '작업실',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명제들은 현대미술사의 중요 담론들과 접맥되어 있고, 그의 작품은 이러한 담론들과의 상관성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라 생각된다. 비교적 최근까지 사용해온 '작업실'이란 명제는 그의 작품의 특성과 추구하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작업실'이란 일정기간 동안 작업한 결과물들을 한 공간에 모아 전시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개별 작업들을 한 자리에 모음으로써 자신의 작업이 추구해온 궤적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 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장 ● 인물사진 김영웅 작가

'작업실' 2018 1992년부터 현재까지 행한 나의 작품과 관련한 기록물과 오브제 가변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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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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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영화 티켓에서부터 영수증, 작은 낙서가 제시하기도 하고 금박 입힌 오브제들을 액자와 함께 또는 독립적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동일한 물건들을 두개씩 짝을 맞추어 늘어놓거나 바닥에 쌓아 놓기도 한다. 벽이나 바닥에 길이를 확대한 눈금자를 그려놓고 오브제를 병치하여 근대가 근거하는 도량의 기준을 살짝 비틀어 보이기도 한다. 사물의 면들을 절단하여 바닥과 벽면에 부착하여 마치 일부가 매장된 듯한 오브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현대미술사의 중요담론을 제기한 서적의 제목이나 고전이 되어버린 현대미술사의 작품들을 패러디하기도 하고 가족이나 친근한 동료 작가들과의 추억이나 소소한 기억들을 소환한다. 사회 정치적 문제들을 함의하고 있는 오브제들을 무심하게 나열해 놓기도 한다. 독립된 작품들을 다른 작품들과 매칭하여 인테리어의 소품처럼 공간을 점하기도 한다. 영상 미디어를 사용한 설치작업 형태의 매체확장적 작업과 월 드로잉(Wall drawing) 등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진 허구영의 작업은 삶과의 관계 맺기라는 생태학적 태도를 가지고 마치 자신의 생각이 미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을 예술로 재문맥화 하려는 듯하다.





<오월> 2017 손바닥에 꽃가루(사진), 

사진 위에 꽃가루로 finger print 31×45cm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의 화두를 가지고 일정기간 동안 집요하게 탐구를 지속한다는 점이다. 그 화두들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변곡점을 형성하는 담론들과 연관된 것이다. 자신의 작품의 전거로 삼았던 폴 세잔(Paul Cézanne),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 등 대가들에 대한 오마쥬를 시도하고 그들의 작업을 둘러싼 담론들을 소화해내면서 자신의 문제들을 풀어간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그의 석사논문에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그는 1960-1970년대 서구의 모더니즘 이후의 다양한 예술인 미니멀과 포스트미니멀, 과정예술과 개념예술, 랜드아트 등 모든 영역들에 폭넓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작품의 익명성, 비결정적 대상으로서의 예술의 의지, 개념, 대지, 반형식 등의 주제에 좀 더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한 장으로부터(from one sheet)> 2019 

캔버스에 아크릴 스프레이 162.2×130.3cm 




 미술작품을 하나의 언어로 규정할 때, 미니멀리즘으로 정점에 도달했던 형식주의 모더니즘은 언어의 물질적 존재인 기표를 작품의 본질로 삼았다고 할 수 있고, 형식주의 모더니즘 이후의 개념미술, 행위예술, 대지예술 등은 상대적으로 기표보다는 기의를 본질로 탐구하는 언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광의적 개념미술로 지칭할 수 있지만 본인은 개념미술로 분류되는 것을 탐탁해하지 않는다. 개념예술과는 다른 좀 더 적절한 언어 찾고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뒤샹이 언급한망막적(retinal) 미술로부터 벗어나 비망막적 예술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뒤샹의 <(Fountain)>(1917)에서 보듯, 오브제로서의 변기 보다는 변기에 결부된이라는 개념과 장소이동을 통한 재문맥화를 통해 예술의 개념과 지경을 크게 확장시켰던 점에 접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르셀 뒤샹과 발데사리의 작품에 관심을 두고 오브제의 비물질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오브제의 비물질화는 사물보다는 특정한 공간 안에서 오브제가 만들어내는 과정과 개념을 중시하는 태도이다.





<1-Twins> 2019 좌대와 바닥에 다양한 오브제 가변 크기  

 <특별한 방-가족 1> 2014 천연 소가죽에 낙인(불박), 

엠보싱(냉박), 전 벽면에 템페라(안료-) 가변 크기 

 



그의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라지 글래스(The Large Glass)> <에땅 도네(Étant donnés)>에서 보듯, 과거의 개별 작품들이 전체 작품의 요소들로 활용되며,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오브제나 텍스트에 부여한 개념들의 증식이란 특성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실>은 뒤샹의 <라지 글래스>와 유사한 속성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뒤샹은 <라지 글래스>에 담긴 암호와도 같은 복잡한 의미와 다이나믹스를 자신의 <그린 박스(The Green Box)>(1934)를 통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설명을 참조하더라도 그 중층적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매우 복합적인 요소들의 조합이 개념을 증식시켜내기 때문이다. 뒤샹은 개념적 조작을 위해 영어와 불어의 의미는 다르지만 유사한 발음을 가진 단어나 문장을 혼용한 말장난(pun)을 중요한 전략으로 삼았다. 오브제와 이미지, 개념의 상관성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흩트려놓기 때문이다.





<세 개의 물음(three questions)> 

2019 철판에 용접 레터링 각




허구영은 스스로자폐적 예술가로서 자폐적 예술을 꿈꾼다한다. 자폐적 예술은 무엇일까? 그는 뒤샹이 말년에 체스에 몰두하면서 작품 활동을 접은듯했지만 실제 많은 유작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를 궁금해 한다. 실제로 뒤샹은 평생 자신이 추구한 탈모던의 관심사를 일상을 통해 추구했고 <에땅 도네>와 같은 걸작을 유작으로 남겼다. 뒤샹의 작업과도 같이 숨겨진 행위들 혹은 발표되어도 온전히 이해되지 못하는 사적인 작업들을자폐적 예술이라 명명할 수 있다면 허구영은 마치 그것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또 그가 오랫동안 중요하게 다루는 화두는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이다. 이는 존 발데사리가 그리스 신화를 차용하여 제시했던 명제이기도 한데, 발데사리는 자신의 작품을 태워 재로 만들고 그것으로 새로운 작품을 시도했다


허구영은 자신의 석사 논문을 태워 재로 만들고 이를 달걀과 섞어 템페라 물감을 만든 뒤 많은 작품에 사용한다, 템페라로 도색한 각종 오브제를 박스에 넣고 1년간 매장했다 꺼내는 등 일련의 시간성과 재생의 문제를 다루는 작업들을 시도한다. 작가가 꿈꾸는 비가시적 속성의 진정한 작품, 작품의 정수를 불사조라 한다면, 그가 지속적으로 질문하는 화두는물질적 속성의 경계인 재로부터 찬연히 빛나는 정신적 속성의 불사조를 어떻게 창작해 낼 수 있을까?’의 근원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현대미술의 담론들과 의존하고 있는 어법들을 모두 태워 버린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깨달음은 아닐까? 그래서 그가 시도하는 작업들을 예술작품이라 칭하는 것의 부적절함을 실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존 개념으로서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명확히 지칭할 수 없는 작업의 결과물 정도로 이해되길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자폐적 예술이 불사조처럼 날아오르길 기대한다.  

 

 


허구영




작가 허구영은 1966년 충북 옥천 생으로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0년대 소그룹 ‘로고스 앤 파토스’ 일원으로 참여한 그는 1993년 제3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00년 청주 스페이스몸미술관 <the night>, 2009년 대전 이공갤러리 <여기를 보라>, 2014년 쿤스트독의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2017년 누크갤러리의 <허구영의 낭만정원>, 2019년 아르코미술관의 <여전히 나에게 뜨거운 이미지 중 하나>를 선보였다. 또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 <젊은모색 94>, 1996년 대구문화 예술회관 <instal-scape>, 1998년 금호미술관 <그림보다 액자가 좋다>, 2008년 부산시립미술관 <낭비>, 2014년 사루비아다방 <막막>, 2018년 대전시립미술관 <전환의 봄, 그 이후> 등 기획전에 참여한 그는 현재 목원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화전공 조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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