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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34, Nov 2017

윤희
Yoon-Hee

고립의 아틀리에에서 태어난 관계의 조각

라틴어 ‘스쿨페레(sculpere)’는 우리가 잘 아는 어떤 단어와 닮았다. 바로 ‘조각(sculpture)’이 여기서 나왔다. 단단한 재료를 깎거나 쪼고 새기는 것을 뜻하는 스쿨페레는 ‘彫刻’이라는 또 다른 문자와도 의미가 꼭 들어맞는다. 로댕(Auguste Rodin)은 “조각이란 구멍과 덩어리의 예술이다(Sculpture is the art of the hole and the lump)”라고 말했다. 예술이 예술임을 자각하지 못하던 때에도 인간은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그리곤 했다. 나무, 돌, 금속 등의 덩어리를 뾰족한 도구로 쪼아 인간을, 동물을, 풍경을 혹은 그 무엇도 아닌 상상의 대상을 구현해냈다. 이처럼 조각은 여타 장르보다 유독 물질적이고, 예술가의 물리적 희생을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정신적이며 상징으로 가득하다.
● 이가진 기자 ● 사진 서지연

'Blanche' 2005 Acier 70(h)×300cm(diamè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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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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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것은 어쩌면 가장 고전적인 방식의 조각에 국한되는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전에 없던 재료를 동원해 평면과 입체를 오가는 다양한 도전들이 조각의 이름으로 소개되며, 언어의 틀을 깨고 지평을 넓힌 지 오래다. 너무나 당연하게 자신을 ‘조각가’라고 말하는 윤희의 작업 역시 장르나 카테고리를 쉽사리 규정짓기엔 독특한 구석이 많다. 학업을 마친 후 10여 년의 공백기에 마침표를 찍은 그가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80년대 초반, 처음 선택한 재료는 ‘흙’이었다. 물론 흙을 물에 개서 살을 붙이거나 깎아내는 전통적인 방식에는 흥미가 없었다. 


‘행위’는 조각가의 기본적인 언어라 여겼고, 그렇게 행위 자체가 곧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흙을 굴리고 던지고 바르고 문지르고 떼어내는 작업으로 거듭났다. 재료에 간단한 행위를 가해서 스스로 제 형태를 드러내게 하는 취지였다. 약 1300°C의 가마에서 종잇조각처럼 구워진 부스러기를 수없이 모으고, 한 구석에 깨진 채로 방치된 사기 조각들을 주워 바닥에 가지런히 놓은 <Bris Débris>(1985)는 폭신함과 날카로운 양면적 질감을 보여준다. 그렇게 얻은 ‘부스러기 조각’과 ‘깨진 조각’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작업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흙이라는 하나의 물질이 작가의 행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여러 모습으로 변모한다는 것을 체험했고, 의도적 개입 없이도 물질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점 역시 깨달았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사물의 본질에 관심을 갖게 되자 무엇보다 더욱 예리하게 관찰하게 되었다. 





<Les Trois Ombres> 2003 Bronze, 3 éléments

(118×118×120cm, 118×118×150cm, 118×118×150cm)




더불어 ‘의도대로 만드는 것’과 ‘물질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 그리고 ‘우연히 찾은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유리나 거울의 파편, 불에 탄 나무 조각부터 케이블, 구겨진 철판까지 그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갖가지 재료를 작품에 적용해 보았다. ‘temps accélérés’ 연작을 필두로 도자기, 나무, 알루미늄, 구리 등을 한데 모아 바닥에 팬 부분, 벽의 들어간 빈 곳을 메우는 시도는 회화적인 측면을 부각하면서도 건축물과 통합되는 작품이 되었다. 현재 윤희의 주 무기인 금속성 재료와의 첫 만남, 그 무궁무진한 변화의 기미는 이때부터 감지된다. 그는 흙을 다루던 방식처럼 금속의 물성을 먼저 파악하고자 했다. 한정된 공간에서 상대적으로 간단히 다룰 수 있는 주석, 납 등은 용접기로 녹여가며 떨어진 방울방울이 들러붙게 하고, 팽팽하게 묶여있는 용수철을 단번에 풀어보기도 하고, 얇은 구리나 철사의 쪼가리를 태우기도 했다. 고스란히 드러나는 재료의 밀도와 에너지는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거듭나게 한 인간의 존재를 깜빡 잊게 한다. 


그중에서도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실행한 금속 용액 조각은 그 과정의 강렬함 때문인지 결과물에서 작가의 손길을 실감하기가 더욱 어렵다. 분명 눈앞에 있지만,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 도통 오리무중의 상태인 무언가를 본 마냥 말이다. 작가 자신도 ‘절호의 찬스’였다고 여기는 작업 <Les Trois Ombres>(2003)는 커다란 원추 주형에 청동을 녹인 액체 250-300kg을 단번에 부어 돌려낸 것인데, 그 용액은 무려 1200°C에 달했다. 주둥이를 벌린 틀 위로 쏟아지는 고온의 금속액이 폭발하기도 하고 용암이 분출하듯 튀어 오르는 극도로 위험한 도전이었다. 로댕은 지옥의 문 가장 높은 곳에 “세 악령(그림자)”을 놓아 고통과 절망에 짓눌린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다. 윤희가 동명의 작업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 격렬한 과정이 빛처럼 지나간 후 그림자처럼 남은 3개의 원뿔형 조각이다. 





<Insondable> 2012 Acier chrome 

13 éléments 69cm(diamètre)




개별 오브제는 같은 틀에서 나왔음에도 태생적으로 같은 모양이 될 수 없는 모순을 지녔다. 작품의 내용도, 작업방식도, 결과물도 모두 다르지만 ‘구멍’과 ‘덩어리’가 조각의 핵심이라는 로댕의 격언만큼은 이 두 예술가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을 것이다. 점성, 온도, 양, 힘, 방향, 속도 등 본래의 물성과 작가가 가하는 요인이 결합되면서 순식간에 형태를 만들어 내는 이런 작업들은 그야말로 ‘찰나’를 포착해 ‘각인’하는 일이다. 제목부터 ‘순간을 잡다’인 <Saisie d’Instant>(2012)는 이런 면모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청동이나 황동을 녹여 얇은 막들이 둥글게 말리도록 만든 작품은 그 모양새가 흡사 말라비틀어진 고목(古木)의 껍질이나 타다 만 종이, 생명체가 벗어놓은 허물을 떠올리게 한다.


단단하고 생명력이라곤 없을 것 같은 금속 액으로 어떻게 이런 형상을 빚어낼 수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외관은 손대면 바스락하고 부서질 것 같지만, 엄연히 금속성의 성질을 품고 있는 야무진 상태다. 작가는 이런 작업을 “돌출된 것”이라 표현한다. 개입이 최소화된 상황에서 주어진 상황이 스스로 작용하도록 두면 물질 그 자체의 원초적인 에너지와 존재 방식만으로도 자연히 어떤 형상을 드러내고, 자신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주류 미술계라고 일컬어지는 속세와 거리를 둔 생활에서 오랫동안 수양된 겸손함일까. “자연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생성과 소멸, 갱신을 일으키는 창조와 변화도 스스로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어딘지 명상가적 분위기를 풍긴다. 반면, 단단하고 무거운 작품을 만들 땐 고행자적인 태도가 선명하다. 





<Bris Débris> 1984/1985 Porcelaine 

10×200×200cm




산업 현장에서 도저히 들 수 없을 무게의 덩어리를 찾으러 다니고, 남프랑스의 외딴 산악지대에 있는 작업실로 그것들을 옮겨 손으로 길들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 은둔과 고립에서 응축된 집념이 예술가로서의 사명감을 실현하는 얼마나 강력한 원동력이 되는지 감히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Rupture>(2005)나 <Blanche>(2005)는 강철로 만든 조각으로, 설치된  장면을 보면 먼 옛날 의식을 기원하던 제단이나 어딘가에서 갑자기 날아온 파편처럼 숲 한가운데 놓여있다. 혹자는 이런 작품을 보곤 “태곳적부터 침식되어 온 이름 모를 존재나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운석”같다 평하기도 한단다. 그만큼 예술적 ‘맥락’보다는 모종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윤희의 작품이다. 2006년 ‘바다 미술제’에 출품했던 <BADAKA>는 스테인리스로 지름 120cm짜리 구(球를) 만들어 해안에 드러난 암석 사이에 설치했는데, 화이트큐브를 벗어나 파도치는 바다에 놓인 그의 작품은 특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둥근 스테인리스 덩어리에 내재한 힘도 어마어마하련만 자연에 놓인 폼에선 어쩐지 온순하게 보였고 어디론가 굴러가지도 않은 채 세찬 물살을 버티며 묵직한 관계의 역설을 암시했다. 그에게 하나의 작품이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시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묻자 ‘무엇으로 어떻게 시작하는지, 언제 멈추는지, 어디에 어떻게 놓는지’라는 답을 내놨다. 결국 작품의 전(全) 단계를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리지만 특히 ‘언제 멈추는가’와 ‘어디에 어떻게 놓나’의 부연설명은 윤희의 작업관과도 직결된다. 그가 멈추는 순간은 ‘끝’을 의미하는 완성의 단계가 아니다. 논 피니토(non finito), 즉 미완성의 개념을 기반으로 삼는 작품에선 자연스럽고, 한 지점에 잠시 머무른 듯 변화의 잠재성으로 열린 순간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작가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고 명료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더라도,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해야 하기 때문이다. 





<Saisie dinstant> 2012 Laiton et bronze 

90×680×740cm Dimension variable 




또한, 작품과 주어진 공간 간의 관계가 성립되는 상황을 조성하는 ‘어디에 어떻게 놓는지’의 문제 역시 중요하다. 여건에 따라 임의로 여기저기에 자리할 수 있는 오브제 자체만으로는 조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윤희가 참여하는 <Lumière Matière>전이 열리고 있는 프랑스 살스 요새(Forteresse de Salses)는 독특한 건축 양식과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재다. 이곳 전시에서 작가는 아주 오랜만에 묵직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건물 내·외부에 놓인 작품의 총 무게만 25톤에 달하지만 둔탁하고 강하기보다는 고요함과 긴장감이 느껴지는 설치가 돋보인다. 그는 공간과 금속 작품들이 유기적 결합을 이루는 것이 조각 행위이고, 기존의 풍경과 오늘날 만들어진 존재(작품)가 통합되며 새롭고 독특한 조응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관람자가 그 전체와 하나가 된다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의 메카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윤희가 그리는 ‘감수성의 메카’는 사실 아직 완벽하게 이루지는 못한 꿈이다. 1990년대 중순에 착상해 아이디어를 숙성시키다 최근 본격적으로 추진해온 ‘하나의 작품(une œuvre)’프로젝트가 그 실현을 위한 숙원사업이다. 이제까지의 작품세계를 아우르는 집합체로서 다양한 조각물 간의 관계 설정, 공간 배치를 통해 총체적인 ‘장소’를 창조해 내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끊임없이 암초에 부딪힌 결과, 또다시 출구를 모색해야 하는 실정이다. 작품과 작가, 관람자 사이의 가장 순수하고 직접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단 ‘하나의 작품’이 놓일, ‘그곳’에서 얻게 될 적요와 흥분이 꼭 실현되기를 기원한다.

 

 

 

윤희




작가 윤희는 1950년생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0년대 초반 도불, 파리에 정착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살롱 드 몽루즈, 젠느빌리에 에두아르 마네 갤러리, 일본 메바시 키타칸토 미술관, 예술의전당, 대구 시공갤러리 등에서 수차례 전시를 연 바 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정부기관(FNAC) 소장품으로 와롱성에 설치되었고, 한국에선 부산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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