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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66, Jul 2020

한여름 밤의 예술

작열하는 한낮의 태양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마음 편히 누이는 곳에서 맞는 한여름 밤. 그곳이 사랑하는 이의 품이든, 자주 가는 단골 술집이든, 오롯이 나만이 있는 고요한 집이든지 간에 하루 동안의 열기를 씻어내고 바람을 쐬며 가만히 앉아있자면 문득 행복의 기운이 찾아올 때가 있다. 뜨겁고 후텁지근한 낮이 힘들어서일까.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의 영향일까. 이유는 몰라도 한여름 밤은 어쩐지 쉽게 로맨틱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아직은 고단한 현실이 곁에 있지만,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라는 김애란의 산문 『잊기 좋은 이름』 속 문구를 빌려 좋은 것과 좋은 것이 만나 더 좋은 것을 이루는 예술의 페어링(pairing) 기획을 선보인다.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당신의 2020년 한여름 밤을 응원하며.
● 기획·진행 김미혜 기자

Edwin Landseer 'Scene from A Midsummer Night's Dream. Titania and Bottom' 1848-1851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Felton Bequest,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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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허남웅 영화평론가, 이미혜 칼럼니스트, 정일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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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

고통과 영광이 교차하는 삶이라는 예술에 관해: 영화_허남웅

 

SPECIAL FEATURE Ⅱ

예술가의 맛있는 식탁: 음식()_이미혜

 

SPECIAL FEATURE Ⅲ

바보들의 이야기, 향기로운 꽃보다 진한: 사랑_정일주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빨강, 파랑, 노랑의 

컴포지션(Komposition mit Rot, Blau und Gelb)> 

1930 Öl auf Leinwand Bildmass: 45×45cm Rahmenmass: 

66×66×10cm Kunsthaus Zürich, Geschenk Alfred Roth, 

1987 Kunsthaus Zürich, the oldest art institution

 in Switzerland, founded in 1789. The Kunsthaus offers attractive 

exhibitions of international scope and one of the largest art collections 

in Switzerland, with works from the 13th century to the present day. 

With 20,000 members, its patron association, the Zürcher

 Kunstgesellschaft, is one of the largest of its kind in Europe 





Special featureⅠ

고통과 영광이 교차하는 삶이라는 예술에 관해: 영화

● 허남웅 영화평론가

 


인생은피에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이다. 피에트 몬드리안은 선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그렇게 생성한 면에 검정과 회색, 흰색과 더불어삼원색이라 일컫는 빨강과 노랑, 파랑의 색을 채워 넣은 그림으로 유명하다. 다시 정의하자면, 삶은 선과 면과 색이다. 계획도시처럼 인생의 플랜을 자로 그어 철저하게 짜놓아도 도대체 어떤 빛깔로 채워질지 예측할 수 없는 추상의 형태로 흘러간다. 인생이 가시적으로 잘 풀리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튀어나온 변수로 비가시적인 미래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그래서 피에트 몬드리안의 그림을 볼 때마다 나를, 우리네 삶을, 인간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고통이 있기에 영광이 따르고, 찬란한 영광의 시간이 지나면 기나긴 암흑기가 찾아오는 법이라고 할까.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 <페인 앤 글로리(Pain and Glory)> (2019)고통과 영광이 자전거의 두 바퀴로 흘러가는 인생을 피에트 몬드리안의 선과 면과 색의 맥락에서 풀어가는 이야기다.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Antonio Banderas))는 영화 감독이다. 아니, 한때 감독이었다. 지금도 감독으로 불리지만, 메가폰을 잡아본 지 오래다. 연출을 그만둔 건 아니다. 시나리오 작업은 하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만한 수준은 아니어서 책상 서랍에 영화로 만들지 못한 시나리오만 수십 편 쌓여있다. 다행히 한창 영화를 만들 때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있어 살바도르의 회고전이 열릴 때면 행사 참석을 부탁하는 연락이 오고는 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 

<페인 앤 글로리(Pain and Glory)> 

© El Deseo Photo: Manolo Pavón 




이번에도 초청을 받았다. 선뜻 응하지 못한 건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어(Asier Etxeandia))와 함께 와달라는 조건이 붙어서다. 살바도르는 알베르토와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다. 알베르토가 살바도르와 연을 끊었다. 살바도르가 알베르토의 연기를 비판하는 통에 자신감을 잃어 배우 생활이 엉망이 됐다. 영화 쪽에서는 캐스팅이 없고 그나마 설 수 있는 연극 무대가 있어 간신히 경력을 이어가는 중이다. 살바도르가 초청 건으로 알베르토를 찾아와 악감정은 잊자고 화해를 청한다. 알베르토는 살바도르가 쓴 자전적 시나리오를 무대에 올려 연기할 수 있게 허락한다면 받아들이겠다고 조건을 건다. 이들에게 남아 있는 건 마음속 상처다


살바도르는 감독을 하면서 얻은 스트레스의 후유증으로 지금은 툭하면 찾아오는 두통에, 시도 때도 없는 사레질에, 등에 받은 척추 수술 때문에 아프다. 알베르토는 배우 생활이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살바도르를 향한 원망 때문에 마약을 피우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함께했던 과거에 잘 나갈 때가 있었는데 남남이 된 지금은 살바도르나 알베르토나 지나간 영광이 남긴 단물을 빨아 연명해야 하는 처지가 아이러니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데 예술가의 처지가 인생무상(人生無常)이다. 인생 참 덧없다. 색으로 치면, 하얀색의 공백이거나 파란색의 헛됨이거나 빨간색의 상처투성이다몬드리안에게 세상은 비가시적으로 이뤄진 코드 이미지였다. 그에게 회화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래서 택한 방법은 평면의 캔버스에 추상으로써 세계를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선 구성(Composition in Line)>(1917)을 작업할 때만 해도 몬드리안이 해석하는 세계는 수직과 수평의 대립이었다. 우리가 아는 선과 면과 색의 몬드리안 그림으로 바뀐 건 <노랑과 빨강과 검정과 파랑과 회색의 구성(Composition with Yellow, Red, Black, and Gray)>(1920)부터였다. 중앙에 큰 정사각형이 위치한 주변으로 여러 크기의 사각형이 배치되고 그 안을 원색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었다. 사각형으로 이뤄진 여러 개의 공간 배경이 선으로 연결된 디자인은 인간으로 연결된 이 세계의 구조를 형상화한 듯하다.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의 풍경을 갖게 되는 관계가 몬드리안의 그림 속에서는 수학의 기하학처럼 계획되고 구획되어 추상의 형태로 제시된다. 어렵지만, 이미지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면 그 안에 인간의 삶이 코드로 변환되어 반영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글이라는 것도 그렇다. 문장이라는 선이 문단이라는 공간을 이뤄 그 안의 내용에 따라 삶에 관한, 예술에 관한 다양한 해석의 색을 갖는다. 평론가 또한 예술에 숨겨진 세상의 이치와 인간을 찾아 드러내는 직업이란 점에서 몬드리안과 같은 예술가와 통하는 데가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 

<페인 앤 글로리(Pain and Glory)> © El Deseo 

Photo: Manolo Pavón 





지금은 중단된 상태인데, 유명 동영상 채널에 영화와 명화를 연결해 설명하는 콘텐츠를 1년간 업데이트하며 인기를 끌었다. 제목은()씨네로 영화 속 벗은 몸이 단순한 눈요깃감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비슷한 맥락의 명화와 비교했다. 예를 들어 <가장 따뜻한 색, 블루(Blue Is The Warmest Color)>(2013)에는 여자와 여자의 베드신이 등장한다. 남자와의 관계에서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던 주인공이 여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면서 성 정체성을 깨닫는다. 그때 손을 맞잡은 체위의 구도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가 로마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에 작업한 <천지창조(The Sistine chapel ceiling)>(1511) <아담의 창조(The Creation of Adam)>를 떠올리게 한다. 


벽화의 우측 상단에 자리한 신이 좌측 하단의 아담을 응시하며 손가락을 내밀어 생명을 불어넣는 내용이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주인공 소녀가 파란 머리의 소녀를 만나 관계의 새로움에 눈 뜨는 설정과 맥락이 통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를 찾아줘(Gone Girl)>(2014)는 극중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보호하는 척 관계를 가지려는 남성의 목을 베는 장면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유디트 I(Judith I)>(1901)와 비교했다. 아이가 더는 태어나지 않는 근 미래 배경의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2006)에서는 흑인 여성이 목장에서 아이를 낳아 안아 올리는 순간을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1485년 경)으로 유사성을 밝혔다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틀 만에 백만 조회 수를 기록한 편도 있었고 업데이트를 하면 평균 수십만은 기본이었다. 이제 나도 유명 크리에이티브가 되는 건가, 한 달에 수백, 수천만 원씩 통장에 찍히는 건가, 부푼 기대도 잠시, 동영상 채널에서는 해당 콘텐츠가 청소년에게 유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성인 인증을 걸었다. 19금 콘텐츠가 되는 순간, 조회 수와 상관없이 광고를 걸 수도 없어 수익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색씨네라고 제목을 지었을 때은 다양한 사랑의색깔(color)’을 의도했던 건데 어떤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뜨겁기도 하고 관계의 피()를 나타내기도 하는 입체적인 빨간색을, (lust)’의 의미로만 축소하고 왜곡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유디트 I(Judith I)> © Belvedere, Vienna

 Photo: Johannes Stoll 




<페인 앤 글로리>의 알베르토에게 상처받은 빨간색은 이제 배우 생활의 재기를 의미하는 열정으로의 환원이다. 알베르토는 화해의 조건으로 살바도르의 시나리오를 받아 1인극을 무대에 올린다. 무대에 선 알베르토의 등 뒤 배경은 <빨강과 파랑과 노랑의 구성(Composition with Red, Blue and Yellow)>(1929)과 유사하다. 몬드리안의구성시리즈에서 영감을 얻은 듯 거대한 면을 반으로 구획하여 각각 빨간색과 하얀색을 채워 넣었다. 살바도르를 만나 화해하기 전까지 텅 빈 하얀색에 공백과 치유가 불가능해 보였던 빨간색의 상처가 별안간 연기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순수의 하얀색과 영광의 시간을 재현할 것만 같은 열정의 빨간색으로 변모했다. 몬드리안은 <선 구성>에서 수직과 수평의 대립을 기호처럼 캔버스에 작업할 당시각각의 요소는 그 반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대립은 서로 맞서기도 하지만, ‘+’의 형태로 교차하면서 공통분모를 만들기도 한다. 공통분모의 지점을 파고들어 발전시킨 것이 바로 선과 면과 색의구성시리즈로 몬드리안의 작품은 더욱 입체성을 띠게 되었다. 하나의 단어로 속박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은 시소의 무게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결정되는 게 아니라 무수한 시간의 변수 속 고통과 영광이 교차하며 여러 가지 색깔을 갖는 것과 같은 이치다알베르토가 부진했던 영화 연기에서 재기를 모색하는 연극 연기로 삶의 무대를수평이동한다면, 영화 감독으로 은퇴 상태나 다름없는 살바도르는 오랜만에 찾아온 옛 연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사랑에 눈떴던 빨간 욕망의 시절로수직이동하여 마음의 위안을 찾고자 한다. 어릴 적 살바도르는 머리가 뛰어났다. 동네 조각가 형에게 읽고 쓰는 법을 알려줄 정도였다. 그 대가로 살바도르는 조각가 형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고 다비드상과 같은 아름다운 그의 육체에 반해 처음 사랑을 느꼈다. 살바도르에게 있어 사랑은 예술이었고 그래서 감독으로서 세상의 쓸모를 잃은 현재의 그는 실연한 상태처럼 삶의 의욕이 없다<페인 앤 글로리>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살바도르는 영락없는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Women On The Verge Of A Nervous Breakdown)>(1988), <욕망의 낮과 밤(Tie Me Up! Tie Me Down!)>(1990), <라이브 플래쉬(Live Flesh)>(1997), <내 어머니의 모든 것(All About My Mother)>(1999), <그녀에게(Talk To Her)>(2002) 등 많은 대표작을 발표했지만 <내가 사는 피부(The Skin I Live In)>(2011), <줄리에타(Julieta)>(2016) 2010년대 이후 필모그래프는 평작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 영화는 제가 70년 동안 살아온 결과물입니다.” 알모도바르의 얘기처럼 <페인 앤 글로리>에는 그의 인생은 물론 그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예술을 대하는 방식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예술을 사랑하고 그 과정에서 사랑의 관계를 경험했던 알모도바르에게 삶은 또 하나의 예술이다. 곳곳에 예술 관련한 미장센을 암호처럼 배치하여 삶을 은유하기를 즐기는 감독의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과거의 영광을 잃은 살바도르와 알베르토 주변에 인생무상을 라틴어로 표현한바니타스(Vanitas)’의 의미를 담아 해골 이미지가 들어간 앨범 커버와 연극 포스터 등을 심어둔다. 직업적 생명을 잃은 살바도르의 집에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대상으로 한 정물화를 벽에 걸어두는 활용이 그렇다. 다시 말해, 알모도바르는 몬드리안이 그랬던 것처럼 사각의 스크린을 삶과 예술의 선으로 구획하여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의 특수한 이야기를 색으로 담아 보편으로 설득한다. 수직과 수평이, 특수와 보편이, 현재와 과거가, 고통과 영광이 교차하며 이루는 성질은 순환이다. <페인 앤 글로리>에는 어린 살바도르가 엄마와 함께 기차역의 벤치에서 잠을 자는 장면이 영화의 처음과 끝에 원을 그리듯 반복해 등장한다. 그 구도의 분위기가 꼭 성모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피에타를 떠올리게 한다


다르다면, 이들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것. 삶은 고통스러워도 액자 속에 갇히거나 조각으로 박제되지 않는다. 삶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예술이다. 알모도바르는 <페인 앤 글로리> 2019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은 물론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르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수상의 영광은 모두 <기생충>이었다!) 예술에서 구원을 찾은 살바도르와 알베르토, 그리고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다르게 나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구원을 향한 기대감을 놓은 것은 아니어서 동영상 채널에 업로드했던 영화와 명화의 콘텐츠 20여 개의 내용을 글로 옮겨 정리하니 책 한 권 분량이 나왔다. 여기에 기획서를 덧붙여, 열심히 출판사에 출간 타진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흥미를 보인 출판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는 건 언젠가 보답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서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 알모도바르가 몬드리안의 예술을 경유해 증명한바, 고통의 시간이 있었기에 영광이 있으랴. 예술이 주는 삶의 교훈이다. 언젠가 찾아올 기쁨의 빨간 날을 위하여!  

 


글쓴이 허남웅은 『딴지일보』와 『FILM 2.0』에서 영화 기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프로그래머 업무를 거쳐 현재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매체 글쓰기를 비롯해고민상담소’(YouTube), ‘허지웅쇼’(SBS 라디오), ‘낭만서점’(팟캐스트) 등에도 출연하고 있다.

 

 



압델라티프 케시시(Abdellatif Kechiche) 

<가장 따뜻한 색 블루(Blue Is The Warmest Color)>

 

 



Special feature Ⅱ

예술가의 맛있는 식탁: 음식()

 이미혜 칼럼리스트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Attila Marcel)>에서 마담 프루스트의 집을 찾은 주인공은 그가 건넨 홍차와 마들렌을 먹으며 과거의 상처를 치유한다. 어떤 음식의 맛과 향은 잊혔던 어느 시절 누군가와 함께했던 순간, 그 거리의 풍경, 그날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감각에 예민한 예술가 중에 미식가가 많은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모티브를 따 온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어떤 때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마치 독약을 삼키기라도 한 듯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방법이 있다. 그래서 특별한 만찬에는 늘 적당한 술이 필요한 법. 원효로의 갤러리 바꽃술(kkotssul)’은 한국 디자이너와 미술가들이 만든 가구와 생활 소품을 소개하고 우리 술과 함께 경험하는 곳이다


갤러리에 서서 바라만 봤던 멋진 의자와 테이블에 턱 하고 앉아 마음 편히 술과 안주를 먹고 마셔보자는 취지인데, 디자인적 경험이 많지 않은 일반 대중 다수를 타깃으로 삼은 사장의 의도와 달리 단골손님이라고는 죄다 예술가나 디자이너, 혹은 예술과 디자인 계통 종사자 일색이다. 이것만 봐도 예술가가 타 분야 사람들에 비해 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억지다. 다만 예술가들이 유독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구도심의 낡고 작은 주택을 개조해 젊은 작가들의 재능과 열정으로 세운 이곳에서 모든 게 생동하던 1960년대 맨해튼을 떠올리며 추억과 봄 술에 취한 80대의 갤러리스트 부부, 야심한 시각 느닷없이 들이닥쳐 독주 몇 병을 비워내고는 자신들의 사진 속 풍경처럼 외로운 골목을 비척대며 걸어가던 사진작가들, 고요한 새벽 우렁찬 성악 발성으로 노래를 불러 나를 당황시킨 수줍음 많은 미술가. 그리고 묵묵히 이 모든 자리를 지키며 술과 안주를 챙겨 내오던 내가 본 게 허상은 아닐 테니까.




Ivan Timofejevitš Hrutski

 <Omenoita ja viinirypäleitä korissa> 

1826-1885 Oil, Oil on canvas 46.5×65cm

 © Finnish National Gallery




과거로 돌아가 보자. 모든 미식가와 애주가가 예술가가 되는 건 아니지만 예술가 중엔 유난히 그런 경우가 많다. 식재료를 나열한 정물화를 무수히 많이 그려낸 탓일까? 많이 먹어본 사람이 그 맛과 향을 시각적으로도 잘 표현하기 때문일까? 아무튼 요리에 대한 예술가들의 사랑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다. 20세기 천재 화가 피카소(Pablo Picasso) 역시 소문난 식도락가였다. <미식가(Le Groumet)>라고 명명한 작품도 있다. 단발머리 소녀가 식탁에 선 채로 수프를 먹는 그림인데, 얼마나 맛있는지 숟가락으로 그릇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는다. 피카소는 이 허브 수프에 래디시(radish)의 붉은 뿌리를 소금과 함께 곁들였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 산골 마을에서 먹고 느꼈던 야생의 음식 재료에서 그 독특한 색감과 조형 감각을 익혔는데, 『피카소의 맛있는 식탁(Table de Picasso)』이라는 책을 보면 그가석쇠에서 불이 춤추듯 해변에서 춤추는 정어리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해산물 중에서도 대구요리를 가장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대구요리는 피카소의 고향 카탈루냐 사람들이 특히 사랑하는 음식이다. 또한 피카소는 숱한 여자들과 바람을 피운 난봉꾼으로도 유명하다. 잘 먹고 다닌 탓에 기운이 넘쳤던 걸까? <뱀장어 마틀로트(La Matelote d'anguilles)>는 피카소보다 쉰 살 가까이 어렸던 그의 마지막 아내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가 즐겨 만들던 요리로, 피카소는 이 작품으로 그의 음식솜씨를 기렸다. 마틀로트는 적포도주와 양파로 양념한 프랑스식 생선 스튜다. 라스베이거스에 가면피카소라는 이름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이 있다고 하니, 피카소를 사랑하는 예술 애호가라면 한번 찾아가 보라.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또 어떤가. 궁중 요리사 경력을 지닌 이르네상스 맨은 친구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와 함께세 마리 개구리 깃발 식당이라는 요상한 이름의 술집 겸 식당을 개업한 적이 있다. 비록 접시 위에 달랑 네 조각의 당근과 앤초비 한 마리만을 올리는 파격을 시도함으로써 양 머리 케이크 따위에 길들여져 있던 15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지만, 사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웰빙 요리사였다. 다빈치의 요리 비법과 요리 관련 발명품에 관한 메모가 적힌 소책자 『엘 코덱스 로마노프(El Codex Romanoff)』에 따르면 스파게티를 개발한 것도 바로 그였다. 이를먹을 수 있는 끈이라 명명한 다빈치는 내친김에 국수 가닥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삼지창 모양의 포크까지 발명했다.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은 그의 요리 열정을 집대성한 인류 음식사의 걸작이다. 풋참외꽃으로 치장한 검둥오리 넓적다리, 장어 요리, 잘게 썬 당근을 곁들인 삶은 계란과 빵 등 그는 무려 2년여의 공을 들여 이 음식들을 한 상 가득 차려냈다. 어쩌면 그는 천재 예술가나 과학자보다 최고의 요리사로 기억되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트레이 위의 과일(Fruit on a Tray)> c.1840

 Watercolor on velveteen (Theorem painting)

 Overall: 16 3/4×21 1/4in (42.6×54cm) 

Framed: 19 1/2×23 7/8×1 1/8in (49.5×60.6×2.8cm) 

Gift of Edgar William and Bernice Chrysler Garbisch 

© National Gallery of Art




실제로 다빈치의세 마리 개구리 깃발 식당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팝업 레스토랑도 존재한다. 토탈미술관은 지난 4월 코로나 이슈로 인해 한적해진 서울의 한 레스토랑을 빌려세 마리 개구리 식당이라는 팝업 행사를 진행했다. 손님들 모두 개구리 눈 모양의 초록색 머리띠를 착용해야 하는 이 식당의 메뉴는아로미 세서미 샌드위치’, ‘크리미 왕눈이 스파게티’, 그리고 개구리 젤리와 연잎 모양 허브가 얹어진 칵테일녹색 무지개 연못 모히토등이다. 셰프로 행사에 참여한 유용선 작가의 요리 그림이 새겨진 코스터가 특별 에디션으로 현장에서 판매되기도 했다. 토탈미술관은 이전에도 푸드 콘텐츠 기획사 심플프로젝트와 함께모바일 키친: 오픈 레시피프로젝트를 운영한 바 있다. 미술가와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로부터 각자의 사연이 담긴 그림 레시피를 전달받은 요리사가 이를 바탕으로 실제 요리를 완성해 판매하는 방식이다


그래픽-제품 디자인 스튜디오 제로랩이 이동식 주방을 만들었고 영수증에는 레시피의 가치, 노동의 가치 등의 항목이 공란으로 남아 손님이 직접 음식의 전체 가격을 책정하여 완성된 음식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대한 가치를 고민하게끔 유도했다. 당시 기억에 남았던 몇 가지 음식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개념 미술가이자 미디어아트의 선구자 안토니 문타다스(Antoni Muntadas)의 토르티야다. 토르티야는 피카소도 즐겨 먹었다는 스페인식 오믈렛이다. 재료는 간단하다. 감자 4, 양파 6, 계란 11, 올리브 오일만 있다면 준비 끝이다. 요리 방법도 쉽다. 먼저 감자와 양파를 썰어 팬 위에 올리고, 올리브 오일을 뿌려 재료를 익힌다. 그리고 계란을 풀어준 다음 익힌 감자와 양파를 함께 섞어 팬에 붓는다


중불에서 익힌 후 팬을 뒤집어 토르티야를 접시에 담으면 끝이다. 천 원짜리 김밥과 원가 자체는 별반 차이 없지만, 이 레시피를 제공한 사람이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문타다스라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물론 이 음식의 가치엔 문타다스가 직접 그린 재료 스케치도 포함된다. 신보슬 책임 큐레이터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시작은 문타다스 때문이었다. 토탈미술관에서 한국 첫 개인전을 준비하던 동안 작가는 미술관이 문을 닫는 저녁 6시마다 큐레이터들에게 진토닉을 한 잔씩 말아주었다고 한다. 한번은 토르티야를 만들어주겠다며 필요한 재료와 만드는 방법까지 손수 그림으로 그려 설명했는데, 그 그림을 보고 요리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Ethel Gabain <A summer night> 1918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Felton Bequest, 

1938 © The estate of Ethel Gabain

 




행복을 그리는 작가로 유명한 에바 알머슨(Eva Armisén)의 토마토 콜드 수프는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 스페인 사람들이 즐겨 먹는 전통 음식 가스파초를 살짝 변형한 것으로 그의 그림처럼 사랑스럽고 기분 좋아지는 맛으로 기억된다. 정승 작가는 파리 유학 시절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배운 매콤한 아리사(Harissa) 소스를 곁들인 닭가슴살 샌드위치를, 김도균 작가는 유학 시절에 즐겨 먹던 피쉬소스 파스타를 떠올리며 피쉬소스 대신 까나리 액젓을 곁들인 짭조름하면서도 담백한 파스타를 완성했다. 신제현 작가는 그룹 전에 참여한 프랑스 작가들이 한 번도 낙지를 먹어본 적 없다는 말에 무용수, 음악가와 함께 낙지 비빔면을 만들어 먹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낙지 비빔면의 맛이야 특별할 게 없지만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비벼먹는 낙지 비빔면은 재미있다. 


작가이자 비평가인 메리 앤 코즈(Mary Ann Caws)가 쓴 『모던 아트 쿡 북(The Modern Art Cookbook)』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는데 전설적인 예술가들이 즐겨 먹은 음식 레시피를 공유해 우리가 실제로 재현해볼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여기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만들어 먹었던 딸기 케이크, 반 고흐(Vincent van Gogh)만의 독특한 양파 조림,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빨간 돔 요리를 비롯해 음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유명 작품의 레시피들이 대거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 책의 표지에 등장하는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의 그림 <파란 생선(Blue Fish)>은 신선한 줄무늬 농어를 소금과 후춧가루, 레몬, 타임 등으로 마리네이드한 뒤, 버터를 발라 석쇠에 굽는다. 군침 도는 이 레시피들을 따라 요리해보는 것도집밥 백선생의 레시피를 따르는 일만큼이나 흥미로운 경험일 것이다.





<세 마리 개구리 식당>

 유용선의 그림이 새겨진 코스터 

이미지 제공: 토탈미술관  




요즘 서울 원효로 꽃술에서는 봄부터 알차게 여문 제주의 하귤을 베이스로 준비한 구구모(gugumo)의 여름 한정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구구모는 파주의 타이포그래피 학교를 졸업한 요리사와 출판사를 다니던 친구들이 함께 운영하는 요리 스튜디오인데 요리를 주제로 한 전시 기획이나 전시 케이터링을 주로 하고 있다. 오랜 시간 설탕에 졸인 하귤 콩피와 제철 완두로 만든 달큼한 완두 감자 샐러드, 햇빛을 듬뿍 받은 토마토와 옥수수, 여러 무늬의 강낭콩과 퀴노아가 모여 재미있는 식감을 만들어내는 하귤 드레싱의 콜드 샐러드, 하귤 소금과 화이트 와인 식초에 절인 여름 참외 절임 등이 수비드 방식으로 조리한 돼지 안심과 함께 서브 된다. 여기에 바질 즙을 곁들인 포천의 내추럴 막걸리, 모히토만큼이나 신선한 향의 문배술을 베이스로 한 제주 귤 칵테일, 조선 시대 양반가에서 여름마다 만들어 먹었다는 이화주에 얼린 포도, 누룽지 칩 등을 곁들여 요거트처럼 떠먹는 막걸리 칵테일을 함께 구성했다


이 음식과 술 역시 지금 꽃술과 서초동의 화원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 전시 <[]의 정원(The Garden of Things)>의 일부다. 이유는 분명하다. 예술과 디자인, 그리고 음식과 술 모두 우리의 무의식을 깨우고 감각을 채우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전시 공간은 마담 프루스트의 신비로운 아파트처럼 식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감각적 경험으로 각인되는 기억과 추억 소환을 위한 나름의 장치다. 내가 바라는 건 이 싱그러운 풀 향기와 초여름의 맛과 향, 아름다운 사물들의 수런거림이 잠시 우리를 행복했던 어떤 시절로 데려가 주는 것. 예술과 음식이 가진 마법이란 바로 이런 영혼의 여행이 아닐까?  

 

 

글쓴이 이미혜는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문화매개학과 석사 과정 중이다. 패션지 『보그』의 피처 디렉터로 근무하며 미술과 디자인 관련 칼럼 및 디자인 전시 기획을 진행해왔다. 현재는 독립기획자로 활동하며 한국 디자이너들과 한국 술을 소개하는 갤러리 바 꽃술을 운영하고 있다.

 



<세 마리 개구리 식당>

행사 전경 이미지 제공: 토탈미술관





Special feature Ⅲ

바보들의 이야기, 향기로운 꽃보다 진한: 사랑

 정일주 편집장 

 


한 시인은 말한다. “사랑이란, 세상은 아무 관심도 없는데, 두 사람이 손잡고 골짜기에 풍덩 빠져서, 마치 온 지구상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요란을 떠는 것이며그러다 서로 싫증나거나 둘 중 한 사람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면 슬그머니 그 골짜기를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그러나 누구나 첫 눈에 반해 깊은 골짜기로 쑤욱 빨려드는 운명 같은 사랑을 꿈꾼다. 설령, 나중 언젠가는 피폐한 모습으로 험한 골짜기를 빠져나와야 할지라도 말이다.  

 



헤리트 반 혼토르스트(Gerrit van Honthorst)

 <콘서트(The Concert)> 1623 

Oil on canvas Overall: 48 5/8×80 11/16in (123.5×205cm) Patrons' 

Permanent Fund and Florian Carr Fund © National Gallery of Art 




어둠 속에서 연애는 시작된다


빠져들면 안 되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미친 듯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의도적으로 약속 장소를 탁 트이고 사람이 많은, 밝은 곳으로 택하곤 하는데 이는 그나마 자신의 감정을 단속해 보겠다는 허약한 의지의 표현이다. 어두운 곳에선 들끓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 할 거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랑에 빠진 이의 힘없는 반항인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감정의 농도가 진해진다는 것은 사춘기 아이들조차 다 아는 뻔한 진리다. 그를 향해떼제베(TGV)’ 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마음에 제동을 걸 때 빛을 쫓듯, 반대로 그를 유혹하고 싶을 때 어둠을 이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스타벅스나 커피빈에서 만나던 커플이 어느 정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 어둑어둑한 극장이나 인테리어가 후진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기는 순리처럼 말이다. 로코코를 대표하는 프라고나르(Jean Honoré Fragonard, 1732-1806)의 작품 <빗장(Le Verrou)>(1777)은 어둠 속에서 발기한 남녀의 사랑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관능적이었던 18세기 로코코 양식 중에로틱이 극에 달했던 프라고나르.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질펀한 이 그림에는, 여인의 허리를 감싸고 방문을 걸어 잠그는 거침없는 남자와 뿌리치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힌 여인이 등장한다. 마치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기다리던 순간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는 듯한 애매한 표정은 여인의 마음속에서 대립하는 감정들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갈등은 이미 오래 지속되긴 글렀다. 두 연인은 어두운 곳에 있고, 그들의 몸은 이미 달을 대로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서로 점잔을 빼는 사이인데 어둠까지 없다면, 적어도 당장 그들의 관계는 발전하지 못한다. 앞으로도 한참을 상대방이 휘젓는 손끝과 달싹거리는 입술을 그저 바라봐야만 할뿐 그것을 내 것으로 취하기는 영 힘들단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어둠이 존재한다면 상황은 급반전된다. 그리고 알다시피 스킨십이란 시작만 하고나면 가속이 붙기 마련이지 않은가. 간혹우리는 손만 잡자는 번연한 거짓말을 뱉어내는 상대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다만믿는 척하는 것일 뿐 문장 그대로 곧이 믿는 이는 없다. 절대로.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도둑맞은 키스(The Stolen Kiss)> © Hermitage Museum 




여기 어둠 속에서 사랑이 용솟음치는 그림은 또 있다. 역시 프라고나르의 작품인데 <도둑맞은 키스(The Stolen Kiss)>(1787-1788)의 배경 또한 어둠이 한껏 내려앉은 공간이다. 현관을 들어서는 것인지 혹은 돌아서서 나가는 것인지 애매한 남성이 가냘픈 여성을 한껏 끌어당겨 그 볼에 입 맞추고 있다. 여인은 사뭇 놀란 눈치지만 결코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래 사랑은 보통 이렇게 시작되지. ‘이래도 되는 걸까?’조금도 더 참지 않을래!’란 두 마음 사이에서 시작된단 말이다. 그리고 가장 좋은 타이밍이 바로 진한 어둠을 앞두고 헤어지는 찰나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여인은 그 순간을 한껏 이용해 남자의 키스를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앙큼한 여우들이 그렇듯. 흥분과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화면이 어쩌면 신비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화사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제대로 이입되는 그림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까닭에 어렵고 난해해 우리의 이해를 외면하는 작품보단 로코코의 솔직한 양식이 시선을 더 잡아끄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어둠이든 알코올이든 어떤 것이든 작용해내숭을 한 꺼풀 벗어내면, 관계는 진일보한다. 그것이가 되던, 혹은가 되던 말이다.

 


사랑에 전부를 거는 당신


영화나 소설마다 사랑을 묘사하는 말들은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절대 잊히지 않는 명대사는 역시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이제 막 자신을 향해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있는 이영애에게 한 말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의 울부짖음에 극장엔 무서우리만치 강한 정적이 흘렀다. 서글프게도변하는 사랑은 매우 쉽게 감지된다. 다들 섣불리 믿고 싶지 않은 것일 뿐 그것은 애써 골똘히 생각하고 근거를 마련하거나, 각 상황을 따지지 않아도 마음으로 몸으로 느껴진다. 그와 맞잡은 손끝으로도,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음성으로도, ‘지금 사랑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철철이 바뀌는 계절만큼이나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물론 사랑할 때는 그야말로그가 나이고 내가 그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존 커린(John Currin) <Kissers> (2006)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콜로라도 출신으로 현재 뉴욕에서 작업하고 있는 작가는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끈적하게 엉킨 화면 속 남녀는 마치애초부터 우리는 하나였던 존재!’임을 과시하는 듯하다. 용광로처럼 불끈 달아오른 감정에 거추장스러운 금붙이도, 셔츠와 장갑도 벗지 않은 채 사랑을 나누는 그들에게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없다. 사랑이 극에 달했을 때 그것을 만끽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 현명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 사랑이 내게 바짝 밀려와 있을 때 그 사랑을 흠뻑 누리는 것이 그 사랑에 더 이상 초라한 미련을 남기지 않는 방법일지도. 그러나 사랑은 생각보다 쉬이 변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저토록 본능에 충실한 사랑이 그저 행복해보이지만은 않는다. 어쩌면 은근하고 미적지근하게 사랑하는 사람들보다 더 크게 가슴팍을 찌르는 사랑의 칼날을 짐작하는 까닭이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빗장(Le Verrou)> © 2007 Musée du Louvre / 

Angèle Dequier 




김성진의 <Pure reason>(2007)에는 살짝 맞부딪치는 남녀의 입술이 등장한다. 이들의 입맞춤은 매우 조심스러우며 정갈한 탓에 예의바르게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두 사람은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수줍은 커플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들은 이미 변하고 있는 서로의 마음을 키스를 통해 시험해 보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애인의 변한 마음을 알기 위해 휴대전화기를 들춰보고 이메일을 해킹하듯, 서로의 입술을 맞댔을 때 여전히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지 가늠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사랑이 변한다기보단 사람이 변하는 까닭에 애석하게도 그 망할 놈의 사랑은 얼마 오래가지 못한다. 더러는시간이 지날수록 더 사랑스럽다고 달짝지근한 말을 쏟아 놓는 커플들을 만나지만, 미안하게도 그들이 되뇌는 말은 일종의자기최면처럼 느껴진다. 비약하자면, 이미 사랑이 변하고 있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애써 진실 위에 흙 삽을 떠 얹는노동같아 보인단 말이다. 얼마든지 변하는 게 사랑이다. 사랑은 내게 찾아 왔을 때 그저 만끽해야 하는 커다란 선물일 뿐, 그것이 절대 변함없이 내 곁에 있으리란 생각은 애시 당초 접어두는 것이 현명하다. 트로트 가사처럼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이제는 남이 되어 떠나가느냐!”,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고 구차하게 사정하긴 싫다면, 사랑에 당신의 전부를 걸진 말아야 한다. 만약 이 논리에 충실하지 못한 이가 주변에 있다면? 통쾌하게 쏘아 붙여라.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열정을 지나 흐르는 사랑의 시간


하늘 아래, 가족 아닌 낯선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이렇게 잘 헤아려 준다는 게 신기했던 나날이 있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다는 믿음도 있었다. 춤을 잘 추던 모습이 멋있어 보였고, 그와 파트너가 되어 춤추는 순간엔 나는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행복한 여자였다. 빵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이젠 할 줄 아는 거라곤 춤추는 것밖에 없는 그가 못 미덥다. 물려받을 부모님의 재산이 없는 것도, 능청맞은 사업수완이 없는 것도 불만이다. 더 이상 서로에게 춤을 권하지 않는다. 서로의 이름을 새겨 넣으며 핑크빛 미래를 꿈꾸던개이어티 댄스팀(Gaiety Dance Team)’은 지금 해체를 목전에 두고 있다한 번의 이혼과 한 번의 사별로 서로 다른 파트너와 총 3번의 결혼생활을 했던 노먼 락웰(Norman Rockwell)은 연애와 결혼의 단맛과 쓴맛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미국의 가장 위대한 쇼윈도우를 자청하던 작가는연애의 위대한 쇼윈도우역할도 해주고 있다


축 늘어진 여자의 팔과 (아마도) 텅 빈 그녀의 지갑. 면목 없는 남자의 생각에 잠긴 포즈와 역시 텅 빈 바지주머니. 서로의 등을 맞대고는 있지만, 의지가 된다기 보다는 짐스러운 느낌이 더하다. ()만 없다면 자유롭게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낙관적인 마음이 반. ()마저 없다면 곤궁한 삶이 한결 비참해질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마음이 반. 현실 속의 오래된 연인들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젖은 낙엽처럼 신발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그가 없다면 더 멋진 사랑을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 반, 그만큼 우직하게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평생 만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반.





존 커린(John Currin) <Kissers>

 2006 Oil on Canvas 23×25in (58.4×63.5cm)

 © the artist and Gagosian




마커스 스톤(Marcus Stone)의 작품 속 두 연인도 이별의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지금의 자리가 불편한 듯, 시선을 피하고 리본만 만지작거리는 여자. 그런 여자가 못마땅한 듯 머리에 손을 괴고, 애꿎은 담벼락만 톡톡 두드리는 남자. 둘 사이의 어색한 기류가 갈색 톤의 배경 속에 나직하게 흐른다. 혹자는 이 그림을 두고, 수줍음에 뺨이 상기된 여자와 그녀 방향으로 몸을 완전히 기울인 적극적인 태도의 남자를 그린 것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밝고 화사한 조명속의 아름다운 여인과 연인을 그리길 즐기던 영국 태생 작가의 다른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이 그림이 사랑에 훌렁 빠진 새로운 연인이 아닌, 감정을 한결 묵힌 오랜 연인의 정서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도둑 키스(A Stolen Kiss)> <허니문(Honeymoon)> 등의 작품에서 보이는 남성들의 적극성과 로맨틱한 구도는 <두 연인(Two Lovers)>과는 구분된다. 여자는 안다. 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진즉에 담벼락을 가뿐히 뛰어넘고 여자의 허리를 한 팔에 가득 감고도 남았으리라는 걸. 커피숍을 한번 쑥 둘러보면 연인들의 교제시간이 대강 눈에 들어온다. 서로 손을 맞잡고 눈을 맞추며 끊임없이 속삭이는 커플은 분명 만난 지 얼마 안 된 신참 커플일 테고, 소파에 편하게 걸터앉아 이런저런 대화 중인 커플은 어느 정도 완숙기에 접어든 성숙한 커플일거다. 과연 우리 커플은 어디쯤 와 있는가? 어둑어둑 밤이 진해졌는데도 한 공간에서 각자 다른 일에 집중해 있고, 그 일에 굉장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면? Congratulation!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설렘의 자극 따윈 사라진지 오래고, 둘이 같이 있어도 혼자의 시간을 즐기는 득도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마커스 스톤(Marcus Stone) <두 연인(Two Lovers)> 

1906 Oil on canvas 36 1/4×19 1/4in (92.1×48.9cm) 

Privat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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