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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37, Feb 2018

이재용
Rhee Jae yong

번지는 시간, 얼룩 같은 기억

꿈은 아주 분명하게 나뉜다. 마치 좀 전에 본 영화처럼 스토리는 물론이거니와 장소와 인물, 심지어 곳곳에 놓여있던 소품들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꿈이 있는가하면 분명 무슨 꿈인가 꾸었는데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내가 그 곳에 있었는지, 배경은 지금 사는 시대인지 혹은 과거나 미래인지 이런저런 기억을 더듬느라 점점 더 아득해지는 꿈으로 구분된다. 득과 실의 여부, 혹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가르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꿈일지라도 기억을 더듬게 되기 마련인데 하물며 눈을 뜨고 실제 경험하는 일은 오죽할까. 사는 동안 겪는 모든 순간은 기억의 줄기와 첨예하게 닿아 사슬을 만든다.
● 정일주 편집장 ● 사진 서지연

'Memories of the Gaze_cityscape' 2009-2017 옥수 160×10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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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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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은 기억의 뭉텅이 안에서 시간을 찍고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작가다. 자신이 가진, 또는 누구나 지니고 있을법한 시간 그리고 추억에서, 실을 뽑아내듯 살포시 가닥을 찾고 그것을 끈기 있게 화면으로 옮긴다. 숨 쉴 틈을 만든 듯 공백이 많은 그의 사진엔 시간이 흐릿하게 켜켜이 존재한다. 어떤 청자와 그것의 영문 모를 움직임이 있고, 번민하는 건물과 바스러질 듯 얇은 꽃잎도 등장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각각의 주체들은 그러나, 이재용의 손길로 길들여져 마치 애초부터 거기 있었던 듯 자연스레 관람객과 마주선다


그의 화면은 수채화처럼 맑은 겹이 여러 개 포개져있다바탕 이미지 위에 투명도를 조정한 이미지가 하나 둘 쌓이고 종국에 수백 장의 사진들이 얹혀지면 시간이 지난 이미지는 모습을 감추며 사라진다. 이 점이 기억과 닮았다. 우리는 더러 이미지로 고정된 기억은 앞으로 끄집어 올리기도 하고 불필요한 기억 이미지는 삭제한다. 기억을 다시 더듬으며,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기억을 만드는 것이다. 이미지를 쌓으며 형태도 구체화된다. 처음엔 그저 흐릿한 상태였다가 서로 맞닿는 지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생김새가 드러나고 색이 분명해진다. 기억의 연상 작용같이 그는 사진을 완성한다.





<Memories of the Gaze_ricemill> 2012 수동정미소 160×107cm 




정지된 화면, 사진에 시간을 중첩해 담는 이재용의 작업은 2009년 시작돼 2012년 개인전에 처음 선보였다. “중첩의 의미는 인간 시각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몸부림과 같다”고 말하는 그는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며 그러한 인식이 각자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유지되는가라는 물음에서 작업이 시작됐다고 술회한다. 그 이전의 작업은 무의식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록한 꿈 노트를 이미지화했는데 꿈을 분석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나 융(Carl Gustav Jung)의 분석방식이 적용되기엔 세밀한 부분이 부족했고 그래서 단순히 꿈을 이미지화하는 것에서 그쳤다고 실패 요인을 분석한 작가는 이윽고 경험했지만 사라져버린 것들, 인식의 문턱을 넘었지만 스스로에게 감춰진 기억들에 관심을 집중했다.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났고,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할 단서를 ‘변화’에서 찾은 것이다. 그리고 변화는 시간의 차이에서 드러난다고 그는 확신했다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도구가 사진이었다. 사진은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정지시키고 가두기 때문이다. 첫 대상은 식물이었다. 씨를 뿌리고 꽃망울이 터지기 전부터 15분 간격으로 셔터를 열고 일주일간 기록한 후 그렇게 얻은 600여장의 기억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기억의 시선’이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제목은 이런 과정에서 도출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재용의 작품은 사라질 기억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모니터를 통해 다시 응시하며 기억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대상은 달리 기억된다는 사실이 중첩 작업의 시작이었다그는 ‘사라지려는 힘과 버티려는 힘’이 균형을 이루는 대상을 주인공으로 선택한다. 이런 팽팽한 긴장이야말로 물질로서의 의미를 넘어 생명력 혹은 정체성이라 부를만한 성질을 지닌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대상 선택은 일관되데 작업 방식은 대상의 존재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정미소 같은 건축물은 그 주위를 360도 돌면서 촬영하고 50여 장의 사진으로 최초 중첩이미지를 만든다. 매년 같은 방식으로 마주하고 (시간)이미지를 쌓는데 관람객에 보이기 전까지 대략 5년 정도가 소요된다





<Memories of the Gaze_ricemill> 2015 황곡정미소 160×107cm 




이 시간에도 그는 200여개의 정미소를 작업하고 있다. 청자는 대부분 박물관 수장고에서 촬영을 진행한다. 배경과 조명을 세팅하고 나면 학예사들이 청자를 조심스럽게 회전시킨다. 접근과 촬영 자체가 까다로운 유물의 특성상 이때 작가는 대상이 서서히 돌 때 렌즈에 잡히는 모든 면을 세밀히 기록한다. 그런가하면 도시의 변화를 기억하는 시티 스케이프 작업의 경우 카메라를 특정 위치에 고정한다. 제자리에 놓인 카메라는 15분 간격으로 이미지를 촬영, 전송하고 작가는 이미지를 선택해 쌓는 작업에 몰두한다. 베를린에도 6대의 카메라가 설치돼 이렇듯 기억을 고이 기록하고 있다. 다만 카메라를 붙박이로 설치할 수 없는 장소에선 GPS 등 위치 파악 장비를 통해 촬영 때마다 장소를 더듬는다이쯤에서 정미소, 청자, 꽃이 받은 시선을 종합하고 시각화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생성하는지 묻자 그에게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서 스스로 살아 움직여야 한다. 그러려면 그것에 반응하는 관람객이 있어야 하고, 두 축의 상호작용에서 어떤 의미가 창출된다


이때, 사람마다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기 때문에 보편적 아름다움을 앞 선에 세운다. 뻔한 표현이지만, 처음 마주한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보이길 바라며 작업한단 뜻이다. 첫 대면에서 시선을 끌지 못하면 어떤 의미작용도 이뤄지지 않는다. 마주하면서 기억, 슬픔, 자기이해, 회복 등 여러 감정들이 뒤섞이고 서로 불균형인 상태가 균형을 맞춰가며 사람들은 비로소 의미를 찾는 듯하다. ‘켜켜이 쌓인 다중의 이미지를 찾다 보면 때론 기억 속으로 때론 복잡한 감정들이 정돈된다’는 컬렉터의 소감을 들었다. 시선의 종합과 시각화가 개인적으론 기억의 명확한 고정이라면 관람객에게는 치유와 균형의 중심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Memories of the Gaze_forest1> 2013 160×107cm




긴 호흡의 작업 중간 중간 이재용은 바다에 가라앉는다. 고압으로 압축된 공기통을 짊어 메고 남태평양 바다 30-40m 아래에 선 채, 그는 물의 기운과 생물의 역동을 느낀다. 자신이 한없이 나약한 존재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대한 인간임을 깨닫는 일련의 시간은 그에겐 반드시 필요한 약과 같다. 예전 그는 영화 포스터와 광고 등 상업사진으로 명성을 얻었다. 영화 전문지와 패션 잡지에 수시로 등장하며 확고한 영역을 구축했던 그는 그러나 지금은 미술에만 집중한다. 두 파트 간 작가적 차이와 밸런스를 조절하지 않고 한쪽을 묵살한 셈이다. 상업사진과 현대미술은 예상보다 더 멀리 떨어져있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렇다. 더러 두 가지 일을 겸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가 있지만 이재용은 상업사진의 습성이 몸 안에 흐르면 순수작업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런 경험을 했고 그것에서 벗어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15년간 상업사진으로 재화를 창출하면서 내 작업을 해야겠단 생각을 버린 적이 없음에도 화려한 생활을 포기하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다 선배와의 2인전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상업사진에 찌들어, 영혼 없이 그저 화려하기 만한 자신의 사진을 감지하곤 비로소 물욕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것에 집중할 수 있다’는 상업사진과 가장 큰 차이에, 그는 온전히 기준을 맞추고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돈을 쓴다.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이의 작품과 경쟁하거나 비교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지극히 두렵기 때문이다. 미래가 또렷한 상업사진에 비해 순수작업은 미래에 대한 염려뿐 아니라 당장의 현실도 인지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불안이 매번 의욕적인 작업 태도를 만들고 자신에게 침잠할 여유를 제공한다고 작가는 피력한다.





<Memories of the Gaze_mirror> 2015 고래불 160×107cm




이재용에게 사진은 관찰자이자 실험자의 자세를 가르친다. 작업을 위해 여러 실험과 훈련을 마다하지 않으며 같은 이유로 매주 청계천에 나가 새로운 도구나 재료에 대해 장인들에게 묻고, 궁금증을 해결하고 노트한다. 그가 작업을 위해 한 첫 실험은 식물의 성장과 음악과의 관계였다. 거짓말 탐지기가 ‘인간에 대한 식물의 반응에서 착안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실천에 옮겼다. 땅에 호박 모종을 심고 팝송을 들려주며 반응을 살폈다. 


이어 바흐(Johann Sebastian Bach)를 틀고 현악 연주도 들려주었다. 그러자 믿기 어려운 일이 눈앞에, 아니 카메라에 기록됐다. 호박 넝쿨들이 소리 나는 방향으로 뻗기 시작하더니 결국 스피커를 휘감았다. 그 시작점이 바흐였고 현악 연주에선 극에 달했다. 비록 작품 자체에 직접적 영향을 발휘하진 않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그에게,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변주가 결과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음을 확신시켰다. 지난해 그는 작업실을 실험실로 개조했다. 구름을 만들어 찍는 사진작가 베른나우트 스밀드(Berndnaut Smilde)의 영상이 도전의 시발을 제공했다




<Memories of the Gaze_cityscape> 2009-2017 옥수 160×107cm




처음에 안개를 만들고 구름 형태를 만든 그는 비를 뿌렸다. 그에 만족하지 않고 토네이도와 번개를 생성하는 테슬라코일까지 만들었다. 사막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모래 폭풍도 형성했는데 이런 실험을 바탕으로 그는 작품을 구체화하고 있다지금껏 이재용은 사진의 형식적 틀 안에 있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스펙터클한 결과를 얻기 위해 설치 혹은 미디어를 융합하지만 그는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른 매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주변 도움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며 값비싼 하드웨어 덕분에 현실적 제약을 실감하고 적당한 시기에 매체 운용을 위한 팀을 꾸릴까 계획도 세워보는 그다. 형식은 변화될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그는 제 작업에 최적화된 도구, 사진에 집중할 뿐이다‘기억전달자’. 작가로서 자신을 이렇게 수식하는 이재용은 지금 바다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을 딛고 또 그 물을 머리에 이고 앞을 지나는 거북이에게 옅은 미소를 날리고 있을지 모른다. 뇌로 그리고 눈으로 끊임없이 장면을 스크리닝하고 레이어드하며 말이다. 


 

 


이재용





작가 이재용은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갤러리 사이, 스페이스 22, 갤러리 EM 등에서 일곱차례 개인전을 비롯해 베를린 아시아 미술관, 델피나 파운데이션, 문화역 서울 284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대학원 졸업 후 영화 포스터 및 광고 작업에 주력하던 그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하며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소버린 아시안아트 프라이즈 최종 리스트에 오르고 포스트-포토그래피와 같은 사진 전문 서적 등에 실리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에 그의 작업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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