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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38, Mar 2018

정원에서 공원으로

Public Art and Landscape Architecture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h)는 진흙으로 한 쌍의 인간을 만들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으로 영원한 아침 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정원을 선사했다. 어느 날 아후라 마즈다는 빛의 사자 아리만(Ahriman)에게 횃불을 들고 하늘을 비추라는 사명을 주었는데 아리만은 그 사명을 망각하고 불을 꺼뜨렸고, 결국 낙원에서 추방되어 어둠의 심연으로 던져져 버렸다. 이때부터 아리만은 악의 화신이자 어둠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 역시 아리만을 도왔다는 이유로 상계, 곧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어, 악에 노출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땅을 경작해야 살아갈 수 있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이를 불쌍히 여긴 아후라 마즈다는 속죄의 도구로 빛의 공간인 정원을 만들고 관리할 기회를 주었는데, 여기에는 고된 육체적 수고가 수반되어야 했다. 이 묘사에 사용된 파라데이소스(paradeisos)는 그리스어로 ‘정원’을 뜻한다.
● 기획 편집부 ● 글 박승진 design studio loci 대표 ●기획 · 진행 김미혜 기자

노마드 스튜디오(Nomad Studio) 'Green Varnish' 2015, Site-Specific Installation at Contemporary Art Museum of Saint Louis Image by David Johnson ⓒ Nomad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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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진 design studio loci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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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나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명이 정원 건설을 열심히 하였던 것은 정원이 희망과 향수의 장소인 동시에, 인류의 영혼을 구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바빌론의 공중정원(BC 700)은 이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낙원을 유지하고 가꾸고 아름답게 정비하는 군주의 임무를 실현하는 국가적 장소였다. 종교에 따라 세부적인 묘사가 좀 다르긴 해도 서구사회의 정원은 인류의 등장과 함께 낙원이라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정원은 히브리어로 울타리(Gan)가 둘러쳐진 쾌락(Oden)의 공간으로 정의되는데, 오늘날 ‘Garden’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므로 정원(Garden)은 태생적으로 외부(악의 세계)와 격리된 공간이며 엄격한 폐쇄성을 전제로 한다. 혹독한 자연환경 위에 구축된 이슬람 정원에서 시작하여 르네상스와 더불어 예술가들의 야외전시장으로 기능한 토스카나의 정원들, 왕과 귀족들의 권력을 바탕으로 탄생한 거대한 프랑스의 기하학적 정원들까지 모두 담은 높고 외부와 단절된 하나의 견고한 성채를 이룬다. 서구 유럽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전통정원들 역시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내밀한 공간이었다. 


정원은 지금도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의 한 근간을 이루는 실체적 공간이지만, 미술관이나 화랑의 벽면에 갇힌 작품들이 한정된 그룹의 예술적 취향을 위해 봉사한 것처럼, 근본적으로 내부지향적이며 사적 공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Walks and Talks of an American Farmer in England』라는 다소 긴 제목의 책이 1852년에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젊은 저자는 수개월 동안 영국을 여행하면서 리버풀 인근의 비큰히드 공원(Birkenhead Park)에서 만난 빵 가게 주인과 산책자들과의 대화, 자신의 소감 등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는데, 그의 이름은 바로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그는 귀국하여 자신이 경험한 비큰히드 공원을 벤치마킹하여 뉴욕 맨해튼에 거대한 공원인 센트럴파크(Central Park)를 만들게 된다. 이 센트럴파크는 인류가 ‘공원(Public Park)’이라는 빛나는 발명품을 향유할 수 있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이 대형 공원이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1876년의 일이니, 이제는 도시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공원’의 역사는 불과 채 150년이 되지 않는다. 센트럴파크의 등장은 이전까지 사적 영역에 한정되었던 정원사 혹은 정원건축가들의 재능이 비로소 일반 대중 곧 공공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 할 뿐 아니라 ‘Landscape Architecture’라는 새로운 전문분야의 탄생을 선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웨스트 8(West 8) <Wonder Holland> 2004 

Rome, Italy Client: Royal Embassy of the Netherlands

  Jeroen Musch 

 

 


대지예술(Land Art)과 조경(Landscape Archi- tecture)의 조우


1970년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의 그레이트솔트호에 거대한 나선형의 방파제가 만들어졌다. 길이가 457m에 이르고 돌을 쏟아부어 축조한 방파제의 폭은 4.6m에 이른다. 이 독특한 형상의 축조물은 미술가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의 대지 작업으로 <Spiral Jetty>라고 명명되었다. 이보다 한 해 앞선 1969년, 네바다 사막 한복판에 깊이가 12m 길이가 30m에 이르는 거대한 도랑 두 개가 만들어졌다. 땅을 깊게 파고 흙은 옮긴 이 단순한 행위에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는 <Double Negative>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번에는 조금 진화된 작품이 등장한다. 1977년 뉴멕시코주의 광활한 벌판에 길이 6m의 스테인리스 봉을 70m 간격으로 400개를 꽂아, 내리치는 번개를 유인하는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의 이른바 <Lightning Field>. 1960년대 후반 전시관을 박차고 나온 대지예술은 미국을 중심으로 광활한 자연이라는 환경 속에서 새로운 개념의 작품들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이러한 아방가르드적 접근은 당시 센트럴파크 이후 정체기를 겪고 있던 조경가들과 모더니즘에 안주해 있었던 설계자들에게 새로운 자극과 지표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조경가들의 작업 대상인 ‘땅’이 그 자체로 예술적으로 조형적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간파했고, 그런데도 대지 예술가들의 작업이 접근성의 한계로 인해 대중(Public)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 대표 주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조경가 조지 하그리브스(Geroge Hargreaves)다.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캔들스틱 포인트(Candlestick Point)나 빅스비파크(Byxbee Park)는 이전의 조경가들이 너무나 당연시 여겼던 ‘자연’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디자인의 핵심으로 다루었다. 정교하게 설계된 대지의 조형뿐 아니라 바람, 햇빛, 그늘, 이것들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변화를 그대로 노출하고 오히려 강화하였다. 이처럼 대지 예술가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자연 혹은 자연현상을 도시 가까운 위치로 전진 배치하고 대중들에게 개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작업이 예술가의 작가적 관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공원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활용함으로써 공공의 재원을 기꺼이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 <The Lightning Field> 

1977 Long-term installation, western New Mexico 

 The Estate of Walter De Maria Photo: John Cliett, 

July 1979 Courtesy Dia Art Foundation, New York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라는 작업, 혹은 행위


우리말로 ‘조경(造景)’이라고 번역되는 ‘Landscape Architecture’는 말 그대로 ‘경관을 건축’하는 작업이다. 경관(景觀)은 흔히 풍경이나 경치로 이해되는데, 적어도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자연물과 인류가 구축한 구조물을 통칭한다. 경관을 건축한다는 ‘조경’은 ‘공공’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인 봉건시대에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며 센트럴파크의 등장과 함께 만들어진 말이다 보니, 태생적으로 공공성을 생명으로 한다. 더구나 조경은 근대도시의 산업화로 급격히 발생하게 된 도시보건과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치유행위였으므로 시작부터 막중한 공적 임무를 부여받은 셈이다. 땅은 유한한 자원이다. 


그 법적 소유권을 떠나 전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지구적인 공적 자산이다. 조경가들은 이 실체적 자산에 자연을 개입시킨다. 토양은 식물을 성장시키고 빗물을 정화할 뿐 아니라 복사열의 전달을 막아 쾌적한 도시환경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토양을 바탕으로 자라나는 풀과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향기를 전달하고 때때로 동물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도시 공간에 이렇게 자연이 건강하게 자리 잡을 수 있으려면 ‘디자인(Design)’이라는 합리적인 창작 행위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조경설계(Landscape Design)라고 부른다. 그리고 설계작업의 결과물로 만들어지는 공간은 대중들의 미적 쾌감을 유도할 수 있어야 하므로, 이 지점에서 조경과 공공미술의 접점이 이루어진다.




토포텍1 (Topotek1), BIG 아키텍츠(BIG Architects), 수퍼플렉스

(Superflex) <SuperKilen Urban Park: The red square>

 Copenhagen, Denmark @ Iwan Baan 

 


 

조경 속으로 들어 온 공공미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조경가 마샤 슈왈츠(Martha Schwartz)는 1989년 애틀랜타의 한 쇼핑센터 중정에 특이한 조경공간을 선보인다. 식물을 제한적으로 사용했지만 지구를 상징하는 구형 조형물과 평면적이고 반듯한 수반,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진 수백 개의 금개구리 모형, 수반을 가로지르는 강렬한 붉은색의 보행교가 시선을 자극한다. 앞서 조지 하그리브스가 대지예술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자연현상을 강조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이러한 팝아트적인 조경공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또 한 사례를 살펴보자. 


켄 스미스(Ken Smith)는 2004년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MoMA)의 옥상정원을 개수하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정원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게 단 한 포기의 식물도 심지 않았다. 위장복 패턴으로 디자인된 평면 위에 재활용 고무칩, 분쇄된 유리, 쇄석, 인공바위와 인조나무가 가득 찬 공간이다. 접근이 안 되기 때문에 오로지 주변의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것만 가능하다. 식물의 사용 유무가 미술과 조경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 않으므로, 조경가들의 작업이 반드시 살아있는 식물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코펜하겐의 흥미로운 작업, 시티 듄(City Dune)과 수퍼킬렌 공원(Superkilen Urban Park)을 살펴보자. 


도심 한가운데 나란한 은행 건물 사이에 만들어진 시티 듄은 덴마크 북부지방의 모래언덕에서 착안해 디자인된 계단형의 조경공간이다. 화이트 콘크리트를 과감하게 사용한 간결한 디자인에 생태적인 방식으로 식물들이 유지관리 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이 더해졌다. 부지 전체에 대한 조형적인 완성도도 높아 대지예술의 느낌이 강하게 드러난다. 반면 주거단지 깊숙한 곳에 쐐기를 박듯이 자리한 수퍼킬렌 공원은 강렬한 컬러가 눈을 압도한다. 3개의 영역으로 구분된 공원은 입구부터 바닥과 벽면이 온통 형광에 가까운 붉은색이다. ‘검은 광장’ 영역은 선명한 흰색의 선형패턴을 바탕으로 주변 이민자들의 도시에서 공수된 다양한 상징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었다. 


이 두 작품은 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조경 디자이너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미국과 유럽에서 여러 상을 휩쓸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구설에 오르는 일도 발생했다. 잘 디자인된 화이트 콘크리트의 광장은 뜻하지 않게 과격한 스케이트 보더들의 천국으로 변하면서 위험한 장소가 되었고, 시선을 압도하는 붉은 페인트 바닥은 비 오는 날 자전거의 통행을 금지할 만큼 사고 위험이 높았다. 도시 상징물을 공원에 설치하는 전 과정을 유튜브(YouTube)로 생중계하는 등 주민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었지만, 이민자들 간의 갈등이 오히려 증폭되어 주변의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스튜디오핑크(studiofink), 이고르 마르코(Igor Marko) 

<Northala Fields project> 2008 Client:

 Ealing Borough Council Image provided by studiofink



공공(Public)이라는 험난한 장벽


대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다. 거대하지만 막상 다가서면 각각의 개성으로 무장된 개인들이 드러날 뿐이다. 사회적 합의란 이런 날 선 개인들이 자신들의 검을 내려놓고 공동선을 추구함으로써 달성되는 가치일 것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내 담장을 넘는 순간 사회적 합의라는 잣대가 적용된다. 이 엄격한 공공성은 법과 규제로써 달성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사회가 오랫동안 축적한 품격으로써 제어되기도 한다. 예술가의 상상, 디자이너의 도발은 자유롭지만, 그것이 공적 영역 안에 구현되려면 작동하는 시스템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많은 경우 조경가들이 공공 공간에 실현하는 작업은 넓은 의미에서 공공미술의 범주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들이 개방된 도시 공간에 만들고자 하는 많은 작업은 넓은 의미의 공공조경에 해당한다. 두 경우 모두 일정 수준의 공공성을 전제로 한다. 뉴욕 연방 청사 광장에 설치되었다가 논란 끝에 해체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작품 <기울어진 호(Tilted Arc)>(1982)를 비롯하여 동시대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 작품들을 우리는 여럿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도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때때로 경계하는 것은 이 단어 뒤에 숨어 있는 집단이기주의나 행정편의주의를 심심찮게 발견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통해 얻는 예술적 쾌감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전제로 낯선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의미한다. 작가 혹은 설계자는 타성과 결별해야 하고 행정은 관행과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결별은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새로운 창작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글쓴이 박승진은 국토 경관(landscape), 도시 공간(urban), 정원(garden)을 작업 대상으로 하는 설계 스튜디오 design loci의 대표소장이다.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조경설계사무실 서안에서 오랫동안 실무를 했다. 조경건축 담론을 글로 생산해내는 전문가그룹 ‘조경비평 봄’의 일원으로 여러 권의 공저에 참여했다.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숙명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설계 스튜디오를 진행하였고,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에서 조경학 관련 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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