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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66, Jul 2020

최욱경: Wook-kyung Choi

2020.6.18 - 2020.7.31 국제갤러리 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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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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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질풍노도


소통과 치유는 예술에 대한 기대치로 가장 많이 거론된다. 누구나 소통과 치유를 말하지만 쉽게 이룰 수는 없다. 소통이 되어야 치유가 되고 자기 치유는 곧 타자의 치유 가능성을 부여하는 만큼, 양자는 연결될 것이다. 소통이라는 민주적 가치, 치유라는 정상성의 회복에 비해, ‘예술은 더 빼어나고 독특한 무엇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치 또한 있지만, 소통과 치유는 현대 예술을 보편성과 연결해주는 최소한의 지점으로 소중하다. 예술은 이미 확립된 코드에 자신을 맞춰가면서 만들어지는 단선적 성과나 그에 따른 경쟁력이 아니라, 자기 언어를 통해 말하는 것이기에 더욱 내밀하면서도 총체적이다. 그 개인적 언어는 공통적 언어보다 더 빠르거나 더 느리다. 예술적 치유는 의사의 기술이 아니라 샤먼의 그것과 더 유사하다. 즉 작가 자신은 누구보다도 병을 심하게 앓은 그리고 극복한 환자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과업은 그만큼 만족도 절망도 크다. 명확한 이미지가 많지 않은 최욱경(1940-1985)의 작품들은 허물어지고 짓기를 반복하는 끝없는 게임임을 보여준다.

최욱경처럼 40대 중반의 한창 작업할 나이에 요절한 작가를 보면, 후세의 사람들이 ‘천재 화가’라고 불러주는 것과 무관하게, 작가 자신은 소통과 치유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작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기준은 철저히 상대적이다. 훌륭한 작가일수록 그 기대치는 높을 것이다. 최욱경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부딪친 문화의 차이나 자신이 위치에 대해 고민했다. 1940년생 여성 작가로서, 당시 화가로서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치면서 이뤄낸 사회적 지위도 있었다. 작가의 때 이른 죽음은 자살은 아니었지만, 삶과 예술에 있어 죽음에 버금가는 자기 소모의 결과라고 할 만큼 열정은 컸다. 일생에 걸쳐 작업할 것이라는 사실 외에 확정된 것이 없는, 매번 다시 시작되는 극도의 소모적 과정은 매 작품 벽을 마주하는 절망감을 낳았을 것이다. 시집을 출간하기도 한 작가에게 예술적 감성과 사유의 출구는 그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욱경의 그림에는 나아감의 증거이기도 한, 계속해서 나타나는 벽들에 부딪힌 흔적이 역력하다.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를 감성과 영감을 순간적으로 받아내기 위한 속도감 있는 화면의 흔적들은 소소한 감수성이나 머리에서만 맴돌아 나온 개념을 넘어 온몸을 부딪친 피 튀기는 장으로 다가온다. 재현주의에 대한 모델이 창이나 거울이라면, 최욱경의 기본 어법이었던 추상미술의 모델은 텅 빈 벽이다. 1963년 미대를 졸업하자마자 건너간 미국은 전무후무했던 문화적 격동기였음과 동시에, 현대미술에서는 평면이라는 회화의 조건이 널리 공유되고 이 보편적인 문법(랑그)을 통해 각자 어떻게 발화(파롤)할 것인가가 문제시된 시점이었다. 그림에 정확한 연대를 표시해 놓지 않은 작품들이 이 전시에서도 꽤 많다. 흑백과 컬러 두 부류의 작품들로 나뉜 전시장에는 크랜부룩(Cranbrook Academy of Art) 재학 중에 그린 초창기 작업부터 1975년경의 작품까지 나와 있다. 작품들은 유화, 아크릴 물감, 목탄, 콩테, 오일 파스텔, 잉크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이번 전시에 나타나는 팝적 스타일이나 콜라주 또한 추상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이전 시대보다 더 추상화된 세계, 즉 평평한 기호가 실제 세계를 점유하는 경향에 대한 반응이다.

팝아트(Pop Art)는 기호화된 현대사회를 쿨하게 반영했지만, 최욱경은 그조차도 자기 안에 품었다가 내놓는다. 컬러 작품만 모아놓은 전시실의 화사한 분위기 속에 자리한 작품 속 핫도그는 ‘HOT DOG’라는 단어를 제외한다면 팝아트처럼 매끄러운 경계선을 가지지 않는다. 모노톤의 또 다른 전시 공간에서는 서예를 떠올리는 필획들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추상표현주의의 드로잉적 요소가 강한 최욱경의 어법이자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작가로서의 자의식이기도 하다. 캔버스, 종이, 인화지 등 다양한 바탕 면에 구현된 그림, 콜라주, 판화 등 종류도 다양하다. 컬러든 흑백이든, 크기가 작은 작품들이어도 실험적이다. 먹을 사용하면서도 한지가 아닌 인화지 위에 그린 작품은 작가를 사로잡은 격렬한 감정을 보다 즉각적으로, 그리고 생경하게 드러낸다. 최욱경은 “여자이자 화가로서의 나의 경험은 내 창의력의 원천이 되었다. 내 작품에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각각의 작품은 내 삶의 성장이고, 내 감정을 시각 언어로 풀어놓은 것”이라고 밝힌다.



<The Raven of Death and Resurrection> 

1975 캔버스에 아크릴릭 

85×85cm ©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굳이 여성임을 밝히는 대목이 신선하다.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1960년대 한국에서 여성 화가가 몇 명이나 있었겠나. 생전 사진을 보면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술과 담배도 상당했다는 일화는 의외의 진술이다. 여성은 오랫동안 타자였다. 대개 타자는 스스로 밝히지 않는다. 다만 대상화될 뿐이다. 타자는 이질적으로 또는 이국적으로, 불온하게 또는 신성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최욱경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이 중요하다고 밝히는 부분도 그렇다. 자신을 전방위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에세이와 시도 즐겨 썼던 작가에게 모호한 관념주의가 들어설 여지는 없었다. 최욱경이 미국에서 접한 추상미술이나 그 영향 관계 속에 놓인 한국적 모더니즘에서의 주류, 남성, 화가들을 둘러싼 예술적 담론을 물들였던 것은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경향이 농후했다. 그들의 실제 작품이 그것을 둘러싼 담론과 달랐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물론 최욱경 역시 그러한 감정과 경험을 표현하는 시각적 언어를 중요시한다. 추상미술은 무엇보다도 조형 언어의 자율적 가치를 중시했던 것이다.

최욱경의 잘 알려진 작품 스타일인 화면 가득히 펼쳐지는 꽃의 모티브는 꽃을 재현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꽃이 있다면 꽃은 춤추고 흐느끼고 찢기며 다른 존재와 결합하거나 변모한다. 이름 모를 식물이자 우주적 존재에는 실재에 대한 감각이 남아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작가가 유학 갔던 미국적 추상보다는 유럽적 추상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역동의 드라마를 돋보이게 하거나 때로는 잡아주는 추상적 평면들과의 조화가 있다. 생애주기로 볼 때 보통 10-20대가 질풍노도의 시기지만, 최욱경의 경우 40대에도 그러한 광풍이 느껴지며,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죽음 또한 그 결과이지 않았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죽기 전에 이미 상징적으로 죽는다. 철들 무렵에, 아무리 늦어도 생업에서 은퇴하기 전에 말이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오직 하나의 삶과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연대 미상에 무제로 붙여진 작은 작품들은 다양한 재료들이 시도된 실험들이다. 작품 <Untitled>(1974)에는 최욱경이 자주 그리던 꽃의 구도가 있다. 화면의 중심에 생식 기관 같은 구멍이 보인다.

종이 위에 잉크와 펜으로 그려진 작품의 검정 바탕색은 밝은 형상을 빛나게 한다. 격렬한 몸짓과 상흔이 있는 형태는 관상용 꽃이 아니라 스스로 보고 행동하는 꽃이다. 1960년대로 추정되는 작품 <Untitled>에서 물감 튀긴 자국들은 화면과 혈투를 벌이는 듯한 치열성이 느껴진다. 검은 배경과 밝은 형상의 대조는 가장 근본적인 두 범주라고 할 수 있는 빛과 어둠의 투쟁 같기도 하다. 바넷 뉴만(Barnett Newman) 같은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화가가 공간과 빛을 다루었던 다소간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경향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작품 <The Raven of Death and Resurrection>(1975)에서 배경을 이루는 검은 평면은 격렬하게 움직이는 듯한 입체감 있는 유기적 형상을 안정감 있게 지지한다. 오렌지, 블루 등의 화사한 색이 조합된 정물화 구도의 작품은 추상적이면서도 1960년대의 팝아트적인 발랄함이 느껴진다. 1960년대의 종이 콜라주 작업에는 어두운 바탕에 추상적 형상이 전경화되어 있다. 평면적 배경에는 공간감을 주는 밝은 선들도 긋거나 남겨 놓는다.

1960년대의 <Untitled> 작품 중 노랑, 연두, 주황, 청색 등 화사한 색들을 펼쳐 바른 작품은 색은 부드럽지만 행위는 격렬하다. 화면 하단에 장난기 어리게 남겨 놓은 또는 그려 넣은 붉은 하트 표시는 여성/화가에게 사랑이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흑백 작품에는 남녀가 결합하는 상당히 구체적인 형상들도 보인다. 여성은 남성-인간-백인 주체에게 자연적 대상으로 간주되곤 했는데, 그러한 대상적 존재가 주체가 되어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면? 은폐되고 침묵하던 바닥의 것들이 올라오면서 전에 없었던 자리를 잡기 위해 요동칠 것이다. 재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 했던 숭고의 미학은 최욱경에게 적절했다. 숭고의 미학을 실현했던 추상미술의 전통에서 최욱경의 작품은 정신이나 신비보다는 몸과 정념에 더욱 밀착한다. 그러나 큰 작품이든 작은 작품이든 비슷하게 관철된 추상적 배경과 유기적 형상 간의 단절감에서 추상회화의 분명한 특성이기도 했던 이원론적 관념 또한 발견된다. 하지만 이곳과 저곳 사이의 단절은 연결을 위한 조건이자 조화를 찾기 위한 운동을 낳는다. 


*<Untitled> c.1960s 종이에 잉크 25×32.5cm ©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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