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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43, Aug 2018

우리의 타자_난민, 예술

Our Own Others the refugee, Art

지금 미술에서 난민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최소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의 타자’인 난민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 제주도에 예멘 난민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난민은 ‘타자의 타자’였으며, 우리는 그 문제를 큰 불편 없이, 실은 깊게 고민하지 않고 언급해왔다. 심지어 미술인들은 유럽의 첨예한 현안인 이 문제를 비엔날레 같은 대규모 국제 행사를 통해 흔하게 접하면서 국제 미술계의 ‘핫 이슈’라는 이미지까지 얹어 소비하곤 했다. 그랬던 난민이 이제 ‘우리의 타자’가 되었고 극심한 혐오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해외 작가들이 난민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를 따져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우리의 혐오만큼 갈급하지는 않다. 그래서 내게 난민과 미술이라는 주제로 주어진 이 지면에서 난민을 다룬 작가들을 나열하고 작품을 소개하는 일은 가급적 피하려 한다. 난민이 우리 미술의 본격적인 화두이건 아니건 간에, 그것이 불거지게 한 현상들이 그 자체로 미술의 문제와 맞닿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 기획 편집부 ● 글 안소현 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정 보(Zheng Bo) 'Pteridophilia 1' 2016 Ongoing Video Duration 17min 14sec Photo: Wolfgang Trager Photo Courtesy: Manifesta 12 Palermo and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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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현 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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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예멘 난민을 반대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은 난민의 문화적, 종교적 차이와 그로 인한 폭력의 가능성이다. 반대로 난민을 수용하자는 입장에서는 그들이 사실 위험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건 모두 잘못된 논리이다. 우리는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 이유로 누군가의 행동을 예측하고 일반화할 때 그것을 차별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본다는 것은 그가 규범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게 아니라,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다고 보는 편이 옳다. 따라서 난민 수용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들은 위험한 행동을 할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정당한 판단은 아니다. 누가 타인의 미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겠는가? 인권의 문제가 모든 현실적 문제를 초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그 기초적 이념을 상기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모든 차별의 논리에 근거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통계이다. 이주민과 난민이 증가하면 범죄가 증가한다는 통계, 테러리스트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라는 통계, 난민의 성범죄율이 높다는 통계가 등장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자국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난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난민과 관련하여 확산되는 통계 수치에 신빙성이 없다는 자료가 수없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 논리라면 일관되게 전 세계적으로 최상위의 성범죄율을 보이는 자국민 남성부터 추방해야 한다는 비아냥 섞인 반박도 등장했다. 물론 이것은 논의의 근거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이지만, 사람들은 또다시 내국인과 외국인의 인구수 대비 성범죄율을 따지며 난민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먼 통계 논쟁을 진행 중이다. 난민 문제에서 이런 통계가 위험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인권 단위를 차별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우선 난민은 항상 개별적 인격이 아닌 집단 혹은 무리로 간주되고 명명된다. 언론은 난민 신청자 중에 불법 성매매를 한 여성이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사람들의 ‘난민=범죄자’라는 인식에 또 하나의 증거를 보탰다.


E. B. 잇소(E.B. Itso) <Sheddings>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i Nicolai Wallner

 



그런데 통계에 근거한 주장과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해 특히 여성들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더 많은데, 거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여성들은 지금 여성을 개별적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혐오하거나 대상화하는 것과 싸우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아닌 ‘난민’으로 뭉뚱그리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국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난민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성매매한 남성에 대한 언급 없이 ‘난민 신청을 한 여성’을 부각하는 논리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 어느 쪽이든 개별적 인격체로서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련의 예술계 미투 사건에서 우리는 가해 남성을 옹호하는 이들이 그의 인격을 얼마나 꼼꼼하게 세분하는지 지켜보았다. 성범죄는 나쁘지만 예술적 창작력과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논리는 그래서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님에도 매우 위험하게 소비되었다. 그렇게 죄-인격, 남성-인격, 예술-인격을 나누는 세분된 인격을 왜 여성과 소수자, 약자들에게는 허용해주지 못하는가? 언제나 덩어리로 ‘퉁쳐지는’ 여성들이 난민의 인권을 지켜주려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몫 없는 자들은 몫 없는 자들을 알아보는 것이다. 송상희가 <변강쇠가: 사람을 찾아서>(2015) 이후에 자기 재현의 수단을 갖지 못한 여성, 난민, 유랑자 등을 수없이 엮어 그들을 ‘개체’로 보아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해 온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쿡킹 섹션스(Cooking Sections)

 <What Is Above Is What Is Below> 2018

 Mixed installations and packed lunches 

Photo: Wolfgang Trager Photo Courtesy: Manifesta 12 Palermo 

and the artist and the artist  



 

다른 한편 난민 문제는 경제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단,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측에서 앞세우듯 난민 유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 노동시장 혼란 등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무차별 성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 국회의원이 제주 예멘 난민의 제재 근거로 내세운 “무사증을 악용할 가능성”은 사실 제주도를 특별자치도로 지정하여 신자유주의 체제에 고스란히 노출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경제적 이윤, 특히 값싼 노동력이나 관광 이윤을 목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이방인을 받아들인 뒤, 사후적 제재를 가하거나 생존을 위한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뒤늦게 이방인의 숫자를 조절하려 하는 것은 사실 실패한 유럽 이주 정책의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프랑스의 대(對)알제리 정책이나 독일의 대(對)터키 정책들이 전형적인 예인데, 유럽의 많은 연구자는 그것이 극단화된 테러리즘의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에겐 이미 제1세계의 실패한 정책의 반면교사들이 주어져 있는데도 그 뒤를 고스란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2017년 소위 ‘그랜드 투어’인 유럽 대규모 미술 행사에서 당시 첨예한 논란의 대상이었던 난민 문제와 실패한 유럽 경제 정책을 ‘흥미롭게’ 감상했던 사람들이 제주 예멘 난민 문제에 ‘자국민을 먼저 보호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자못 씁쓸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국제도시를 표방하며 무차별적 개발의 모드로 들어간 제주도가 유럽이 현재 겪는 사회적 문제들을 쉽게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기시감도 착각이 아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여기서 필요한 것은 낭만적이고 인도적인 시선을 가진 예술이 아니라, 제도가 성급하게 양산한 문제들을 뒤늦게라도 곱씹고 되묻고 반복하는 지겹도록 끈질긴 예술이다. 





멜라니 보나조(Melanie Bonajo) <Night Soil>

 2014-2018 Video Trilogy Photo: Wolfgang Trager 

Photo Courtesy: Manifesta 12 Palermo and the artist  

4. <보이스리스-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6.26-8.15) 전시 전경




마지막으로 조금은 위험하게 들릴 수 있는 미술의 몫을 이야기하려 한다. 미술이 난민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이 인권의 문제와 경제 시스템의 부조리함을 지적하는 것뿐만 아니라 극도로 이기적인 예술가의 감각적 관심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고 본다. 전소정은 영상작 <광인들의 배>(2017)에서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Cristina Peri Rossi)라는 동명의 소설을 쓴 망명 작가의 감각에 대한 탐닉을 감추지 않는다. 우루과이 출신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망명한 이 소설가는 자신을 스스로 ‘여성, 동성애자, 좌파, 망명인’으로 위치하면서 고국에서도 망명지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견고한 땅을 딛고 서지 못하는 감각을 특유의 경계 언어로 풀어내는데, 전소정은 그런 감각을 시각, 청각, 촉각 등으로 번역하는 데 열중한다. 


영상에는 간혹 로시의 서글픈 자조의 언어나 지중해 난민을 다룬 뉴스 영상 등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그들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직접 다루지 않는다. 누군가는 작가가 이런 탐미적 태도로 난민을 소재 삼는 것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러나 왜 안 되는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그들의 불안정으로 가득한 삶을, 듣도 보도 못했던 말 한마디 안 통하는 땅에 삶을 통째로 부려놓으려는 그들의 절박함을 예술이 어떻게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하물며 더 이상 ‘멀리서 흥미로웠던’ 타자의 타자가 아니라 ‘턱 밑까지 치고 들어온’ 우리의 타자라면 어떻게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예술가가 인권과 사회경제 문제의 해결만을 위해 난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예술가는 극단적 이기심으로 그들을 맞아들여도 좋다고 생각한다. 때로 그들이 잔인한 구경꾼일지라도 그들의 시선이 날카롭고 섬세하기만 하다면 그 이후의 논의들은 훨씬 멀리, 근본적으로 확장되리라고 본다. 




에르칸 오즈겐(Erkan Ozgen) <보호자>

 2011 사진, 디지털 C-프린트 100×150cm

 ⓒ 에르칸 오즈겐




글쓴이 안소현은 전시를 만들고 글을 쓴다. 비평의 가능성을 넓히되 ‘여파’ 없는 글은 피하려 한다. 정치적이 되는 형태에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이며 비정기간행물 『포럼A』 편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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