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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45, Oct 2018

조습_광光

2018.8.15 - 2018.9.20 갤러리 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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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하 독립큐레이터, 사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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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유령의 빛나는 사건



모든 인물 사진은 촬영되는 순간 멈춤(pause)과 포즈(pose)를 통해 상징과 의미의 장()으로 편입된다. 포즈를 취하려면 순간 정지해야 더욱 선명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인물 사진에서 포즈는 언어이다. 모델(spectrum)은 촬영하는 사람(operator)의 의도에 맞춰 포즈와 코드를 취해, 보는 이(spectator)에게 이미지 언어를 전달한다. 사진의 중요한 세 가지 축으로 피사체(spectrum)와 사진가(operator), 관람객(spectator)을 꼽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피사체를 스펙트럼으로, 관람객을 스펙테이터로 명명하며 인물사진의 역학관계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스펙트럼에는 볼거리 혹은 유령이라는 함의가 있다. 그리고 바르트가 관람객을 오디언스(audience)라 하지 않고 스펙테이터(spectator)라고 칭한 것은 볼거리만 좇아가는 이미지 시대의 현대인들을 향한 경종의 의도로 보인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생생한 주체로서의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죽은 이미지에 대항해 살아있는 이미지는 어떠할지, 이미지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 대해서 혹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세계를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지, 바르트는 그의 책 『카메라 루시다』에서 아주 아름답게 서술하고 있다. 사진은 촬영함과 동시에 죽음의 영역(spectrum)으로 건너간다. 이미 죽은 이미지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섬광 같은 순간은 흔치 않은 경험이고, 사진을 보고/찍는 일은 그러한 경험을 환기하는 일일 뿐이다. 조습이 사진으로 볼거리들을 다시 제공하려는 것은 어쩌면 생생한 이미지에 대한 열망 때문이 아닐까.





<광光-09> 2018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29×86cm 

 




조습은 그동안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정교하게 세팅된 무대를 배경으로 무수한 인물들을 연기해왔다. 그는 기이하고 우스꽝스럽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포즈를 통해 사진에 강렬한 메시지와 해학을 심었다. 관람객은 뻔히 조습임을 알면서도 그가 연기한 사건과 인물에 몰입하게 되는데, 조습의 사진에서 포즈는 그만큼 사진의 서사를 형성하는데 주요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습은 스스로 피사체-유령(spectrum)이면서 사진가(operator)이다. 때때로 사진 속에서 관객(spectator)이 되기도 한다. 분명히 있었던 것의 물리적인 흔적이 사진의 본질이라면 조습은 사진 미디어의 존재론적인 측면을 설득력 있게 부각했다. 분명히 존재했으나 지금은 잊힌, 실제 사건과 인물들을 소환하는데 사진만큼 정치적인 장치는 없을 것이다. 피사체로서 조습과 촬영자로서 조습, 관람객으로서의 조습을 사진의 안과 밖에 위치시키며 본다/찍는다는 행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 조습의 사진이 주목받은 이유이다.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대부분 이생의 사람들이 아니거나, 이생에서 보이지 않았고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조습이 자신의 몸을 빌려 하나하나 호출해 낸 사람과 사건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굵은 선분을 남겼다면, 신작 <광光>에서는 역사에서 누락되거나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공동체의 기억을 더듬는다. 기억은 가상의 영역이다. 실재하지만 보이지 않고, 기억하는 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마치 유령 같은 것이다. 사진-종이 유령으로 귀환한 <광光>의 인물들은 전달하려는 메시지보다 선명한 몸짓이 두드러진다. 몸짓은 강렬해지고, 메시지는 모호한 조습들이 사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우리 역사의 활인화(Tableau Vivant)를 만들었다.  조습은 현대판 디오니소스 대축제를 이끄는 무당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현과 재생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두 번 태어나는 기구한 운명을 가졌으나, 늘 기운이 생동하는 신이었다. 그가 가는 길에는 사랑과 자유와 무질서와 축제가 광()적으로 함께 했다. 


비극을 재현함으로써 재생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광光>에서도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역사의 무대에 한 번도 불려오지 못했던 사람들, 갖은 모순과 부조리로 뒤얽힌 사건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배경 속에서 스포트라이트의 세례를 받아 충분히 빛나고 있다. 재현을 통해 비로소 재생되는 사진 이미지의 주술적 소통이 이러하지 않을까. 종이 유령들이 빛(광光)을 받게 한 조습은 이제 무당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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