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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46, Nov 2018

황영자
Hwang YoungJa

화가는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재현된 기억, 그 응집체로서의 황영자 회화에 대하여

회화는 오랫동안 재현의 문제에 사로잡혀 왔다. 대상을 말 그대로 ‘재현’했던 사실주의 회화로부터 회화사는 점차 작가의 역할에 대해 주체적인 권한을 부여해 왔고, 이러한 경향은 ‘무엇’을 그려내는가에 대한 고민을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적인 담론으로 전환시켰다. 또한, 사진 매체의 출현과 함께, 회화는 한층 더 그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 내기 위해 화가의 손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 순간 회화는 ‘모방’의 범주에서 탈주해 자신을 ‘표현’의 범주에 안착시키면서, 그 자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이자 ‘대상’으로서 자기-규정하였다. 그리하여 예술가들은 회화를 생산하는데 요구되는 일종의 물질적, 비물질적 ‘테크닉’에 천착하기도 했다. 이후 미술사의 다양한 분기점을 지나면서, 이제 회화는 하나의 미술 ‘매체’로서의 성격을 확고히 하고 있다. 따라서 창작자와 감상자 모두에게 동시대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구는 그것을 ‘왜’ 그렸는가 하는 의문의 지점으로부터 새로이 출발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회화는 ‘재현’의 논의를 ‘표현’에 대한 논의로 돌려냈고, ‘무엇’을 그리는가보다 ‘어떻게’ 그리는가에 대한 논의, 그리고 ‘매체성’의 강조를 통해 ‘환영’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지속하면서 그것을 ‘왜’ 그렸는가에 대한 미학적 개념으로 그 초점을 이행했다.
● 장진택 독립 큐레이터 ● 사진 서지연

'산책' 2011 162×130cm 캔버스에 아크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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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택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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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회화는 하나의 전형적인 미적 형식이자 포스트-매체의 하나로서 그 위상을 거의 정립한 듯하다. 그러나 회화와 작가를 응시하는 감상과 해석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작품을 생산해야 하는 작가와 무엇인가를 담아내어야만 하는 작품의 위치에서도 무엇을 그리는가에 대한 숙고는 여전히 유효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전자에게는 작품을 마주함에 있어 누가 그것을 그렸는가에 대한 확인도 필수 불가결한 미적 판단의 요건이다이제 황영자의 회화를 바라보자. 그의 회화는 주로 강렬한 색채를 띠며, 구상적인 다양한 도상들과 인물 혹은 그 대리를 맡는 상이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면에는 특정한 구도가 존재하며, 이 구도는 작품이 함축하는 특정한 감정의 순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우울한 감정이든, 행복했던 감정이든, 그러한 양가의 감정이 뒤섞여서 있든, 작가의 화면을 메우는 색채는 작가의 경험을 통해 내면화된 특정한 기억의 파편들을 비추어낸다. 작품 대부분에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홀로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수의 인물이 한꺼번에 출현하기도 한다. 만일 실제 인물의 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는 인물을 대신하는 사진이나 인형 그리고 마네킹이 그 자리를 대신하거나, 그 인물이 그 공간에서 머물렀음을 암시하거나, 인물과 관련된 어떤 상징들이 암시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인물의 표현은 지극히 감각적이다. 그는 현존하는 인물을 그리는 한편,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그리기도 하며, 우리의 상상을 통해서만 창조할 수 있는 혼종적인 대상을 그리기도 한다. 





<몽상가들> 2018 

60.6×60.6cm 캔버스에 아크릴릭   




이들은 화면 바깥을 정면으로 주시하기도 하고, 무신경한 시선을 던지며 화면 속의 어딘가를 무심히 바라보기도 한다. 황영자는 캔버스나 목재 위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며, 때때로 유리, , 사진이나 잡지 등을 화면 위에 콜라주 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회화 표현적 특징은 틀림없이 작가만의 일정한 시각 예술성을 형성하면서 작가의 회화를 자가-유형화하고 있다. 하지만 회화적인 기법 또는 미학적 개념에 대한 선형적인 추종을 작품 제작에서 배제함으로써 일반적인 양식 규정을 위한 작품의 연속성과는 거리를 둔다. 그리고 이 불규칙성이 그의 회화를 미술사에 편입된 계보의 노선이나 전통의 경향을 비껴가도록 이끈다.  작가는 일상에서 경험했던 순간적인 체험이나 감정을 포착하고, 이에 대한 이후의 감상적인 소회에서 오는 특정한 기억의 편린들을 그림으로 옮긴다. 그 때문에 모든 작품은 개별적인 작가의 느낌과 연관된 서로 다른 서사를 담아내고 있다. 


찰나의 기억은 그 기억이 생산되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주체의 뇌리에 매번 다르게 새겨지게 되는데, 이 기억은 그 기억이 최초에 생성되는 순간과 그것을 다시금 떠올리는 시간 사이의 격차에 따라 또다시 재생산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 기억에 의존하여 하나의 화면에 다양한 도상을 혼재시킨다. 그러나 황영자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색채의 선택과 사용법, 인물의 형상 표현의 방식, 선호하는 구도나 상황의 연출과 같은 최소한의 시각적 공통분모가 존재하지만, 작품에서의 표면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보면 기억-작품-개별 서사를 이어내는 작가의 개념적인 인식의 흐름은 꽤 무유형적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 작가가 작업을 위해 선택하는 기억이나 상황, 대상이나 그 표현에서의 가시적인 패턴이 존재할지언정 작가 회화의 주요한 작동 원리인 기억의 내면적 활성화의 패턴은 무작위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작품과 연관한 다층적인 구성요소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때에야 우리는 작가의 작품과 온전히 연동할 수 있게 된다.




<고딕(Gothic)> 2018 

120×105cm 캔버스에 아크릴릭   




이처럼 주관적인 감정의 재현을 알레고리적 도상으로 점철시켜 구현한 황영자의 작업을 굳이 미술사적 사조에 대입시켜 보자면, ‘서사 회화의 범주 정도에 이를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의 작품은 실제적인 시공간성을 내포하면서도, 동시에 상실하고 있고, 작가의 상상력에 기초한 초현실적인 표현을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실제 경험한 특정한 순간의 기억에 기대어 있다. 이와 같은 양면적 특징은 그의 회화에 전통적인 서사 회화와의 차별성을 부여한다. 나아가 이 양면성은 직관성 지시성이라는 상충적인 미적 특질을 그의 작업으로 함께 끌어들인다. 그뿐만 아니라, 작품은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나 작품으로서의 자율성을 획득하고 있으면서도, (황영자 회화의 경우) ‘기억 재현함으로써 작품 자체에 곧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 표현 방식에서도 황영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거나, 현실 세계에 실재하는 재료를 화면 위에 덧붙이기 때문에 이를 미메시스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와는 대비적으로 화면에 구나 절 혹은 문장을 적거나 상징의 수사를 도상에 투영하기도 함으로써 이를 디에게시스적(diegesis)이라 볼 수도 있다. 이렇듯 황영자의 회화는 있음과 있음 그리고 없음과 없음의 의미를 동시적으로 내포한다. 이러한 혼종적 특징은 그의 작품을 어느 한쪽의 것으로 정리해 내려는 시도에 혼선을 유발하며, 이는 작가의 의도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황영자 회화는 함축하는 동질성-이질성’, ‘실재성-상상성’, ‘물질성-비 물질성  형식성-무형식성 등과 같은 상호대립적이거나 이율배반적인 가치를 모두 조명하거나 한꺼번에 매몰시켜버리면서, 자신을 항상 동시대적인 의미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언제나 살아있게 만든다.        




<몽상가의 외출> 2010 

130×194cm 캔버스에 아크릴릭  




위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황영자의 그림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사소하거나 단순하게 보이던 각각의 인물들과 부유하는 도상, 그리고 이를 뒤덮은 색채는 이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아니, 이는 다가온다기보다, 우리의 시선을 은연히 끌어당기면서 솔직한 관심을 두길 기다리는 듯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한 관심의 촉구는 모든 이들을 향한 무한정의 것은 아니며, 진정으로 그것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와 태도를 서로 수반할 때 관심을 허락하려는 듯 보인다. 그의 회화를 대하며 그것이 마치 한 명의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겪는 것는 단지 작품이 언제나 시선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감각하기의 행위에 바탕을 둔 작품의 내적 필연성과 그 표현의 솔직함에 근거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작품의 감상이 요구하는 작품 혹은 작가와의 소통 가능성을 상기하게 된다. 본래 작품은 창작자의 욕구와 관람자의 반응을 함께 전제한다. 





<내 속에 여럿이 산다> 2006-2008 

162×162cm 캔버스에 아크릴릭  




단지 시대의 경향에 따라, 작업은 그 양 축 사이를 오가며 의미의 무게중심을 한쪽에 실어왔다. 이로 인해, 때로는 예술 작품은 표현 욕구를 중시하며 창작자의 감각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거나, 때로는 작품에서 관람자가 수용하게 될 지시의 임무를 강하게 표출하기도 했다. 그에 반해, 황영자의 회화는 그 두 축 사이의 균형 관계를 조성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 감상에 있어 몰입의 상황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의 작품은 우리의 시선을 미묘하게 옮겨가게 하면서, 화면 속 각각의 도상 그 이면에 자리한 근원적인 의미를 찾도록 유도한다. 그 시선은 곧 하나의 사유를 불러일으키면서 비로소 수집된 작가의 순간적인 감정 그 자체와 우리를 연결한다. 




<산책> 2011 

162×130cm 캔버스에 아크릴릭




황영자의 회화는 의인화된 기억의 응집이다. 그리고 이는 회화라는 매체를 에워싸고 있는 표현과 감상의 차원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뒤섞어버리면서 회화의 의미와 가치를 재정립한다. 과연 화가는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회화는 무엇을 담아낼 수 있을까? 황영자의 회화를 통해 이와 같은 의문에 다시 사로잡히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한동안 망각하고 있었던 본질적인 예술의 의미를 그의 회화가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쩌면 작가는 무엇을 그려야만 한다라거나 작품은 무엇을 담아내어야만 한다는 강제적인 명제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위의 명제는 예술만이 환기할 수 있는 풍요로운 의미와 가치를 규범이라는 틀 속에 쉬이 가두어 버린다. 이른바 경향의 논리 아래, 모두의 삶을 획일적인 구조로 통일하려는 거대 구조의 목표를 예술은 언제나 변칙적인 움직임으로서 무마시켜 왔다. 예술계에서도 그러한 거대 구조의 권위적 시도는 존재해 왔고, 이는 예술로 예술의 가치와 의미를 재 규범화하려는 모순적인 상황을 초래했다. 그 가운데 모든 권력적 욕망과 작별을 고하고 오롯이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며 진솔하게 자아를 표현하는 황영자의 작업은 분명 가치가 있다. 예술로서 당대적 가치와 의미의 규정에 끊임없이 균열을 가하는 그의 작업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환기할 수 있게 하는 자기 변환의 가능성을 증명해 왔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작가의 작업은 그 미적 실천의 과정이자 흔적이다.   

 

 

 

황영자




작가 황영자는 목포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내고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서울 강남 UM갤러리에서의 전시를 비롯 총 14번의 개인전을 선보였으며 헤이리 <PAJU Comtemporary Artists Festival>, 세종미술관의 <아시아 미술>, <서울 메트로미술관 개관 기념>, 서울시립미술관의 <여성과 생명>전을 비롯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개관>, 이탈리아 로마에서 <서울 현대미술 로마>, 사비나미술관의 <예술가와 술>전 등 다수의 기획전에 초대됐다. 현재 미술 동인 청유회 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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