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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68, Sep 2020

모놀리스의 역설

France

Rachel Rose
2020.3.13-2020.9.13 파리, 라파예트 앙티시파시옹

태고의 시절, 한 유인원 무리의 우두머리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포효하며 던져 올린 짐승 뼈다귀가 순식간에 지구를 넘어 광활한 우주를 항해하는 우주선이 되어 나타난다. 수백만 년 동안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발전을 거듭한 인류의 역사, 그 장대한 대서사시를 불과 10초 남짓한 짧은 시간에 응축시킨 이 장면은 20세기 SF 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1968년 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의 도입부를 강렬하게 장식하는 신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과감하고 유명한 점프 컷으로 회자된다. 생존을 위해 뼈다귀를 집어 든 원시 인류가 어느덧 최첨단 과학기술이 집적된 우주선을 발명해 미지의 세계인 대우주를 탐험하고, 일명 스타 차일드(star child)로 불리는 초인적 인류로 거듭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큐브릭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과 조건에 대해 심도 있게 고찰한 바 있다. 이는 그야말로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인간은 스스로 도구와 연장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에서 명명한 ‘호모 파베르(Homo Faber)’적 인류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고증해낸 듯하다. 영화 속에서 먼 미래사회로 설정한 2001년이 지나간 지도 어언 20년이 흘렀다. 스크린 세상 밖으로 나온 21세기 현 인류는 과연 어디쯤 이르렀을까, 우리는 또 어떤 진화를 꿈꾸고 있나.
● 정지윤 프랑스통신원 ● 이미지 Fondation d’entreprise Galeries Lafayette 제공

'Fifteenth Born' 2019 Rock and glass 6 3/10×9 3/5×8 1/10in (15.9×24.4×20.6cm) Photo: Andrea Rossetti ©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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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윤 프랑스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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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속에서 인류는 총 세 번의 변혁을 맞이한다. 그리고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그 결정적 순간마다 검은빛을 띤 신비스러운 직육면체 돌기둥, 모놀리스(monolith)가 등장한다. 모놀리스와 접촉한 이후 인류에게 찾아온 변화는 실로 혁신적이다. 채집활동으로 삶을 영위해 온 유인원은 우연히 발견한 짐승의 뼈를 도구로 인지하고 비로소 사냥을 하기 시작했고, 달 착륙에 성공한 인간은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목성까지 도달할 수 있었으며, 목성에서 마지막 모놀리스를 목도한 주인공, 데이비드 보먼(D. Bowman)은 자신이 신인류로 재탄생할 것을 예고하며 모험을 끝낸다. 그러나 다소 경이롭게 그려진 영화의 결말과는 달리 실제 큐브릭은 인류가 진일보하는데 큰 원동력이 된 도구와 문명, 과학기술의 발전을 결코 낙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감독은 그 속에 내재된 인간의 잔혹한 폭력성을 보았다. 유인원 손에 쥐어진 뼈는 사냥 도구를 넘어 심지어 동종(同種)까지 서슴지 않고 살육하는 무시무시한 흉기로 둔갑했고, 뒤이어 연결되는 우주선을 공격용 대량살상 무기, 궤도 핵폭격 플랫폼(FOBS)으로 묘사한 이유다. 그렇다





Installation view of <Rachel Rose> 

Photo: Andrea Rossetti





사실 인류가 일구어낸 진보의 역사는 곧 세상의 만물과 더 나아가 나를 제외한 모든 타인까지 지배하고 소유하고자 했던 인간의 지나친 욕망으로 얼룩진 피의 역사이기도 하다. 양날의 칼처럼 선과 악,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역사, 여기에 모놀리스의 역설이 있다. 이 역설은 불가피한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이 비극적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현재, 파리에 위치한 갤러리 라파예트 재단(Fondation d’entreprise Galeries Lafayette)의 복합문화예술공간, 앙티시파시옹(Lafayette Anticipations)에서 진행 중인 레이첼 로즈(Rachel Rose)의 개인전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겠다전시의 주인공, 레이첼 로즈는 2015년 역량 있는 젊은 예술가에게 주어지는프리즈 예술가상(Frieze Artist Award)’ 수상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뉴욕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가 개최되는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Fridericianum), 런던 서펜타인 세클러 갤러리(The Serpentine Sackler Gallery) 등 세계 각지의 유명 미술관, 갤러리를 비롯해베니스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Sao Paulo Biennial)’와 같은 국제무대에 서며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입지를 공고히 다졌다. 그의 작업은 디지털 기법을 역사용한 몽타주(montage),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사운드 왜곡과 같은 해체적 성향이 강한 영상 기법을 이용한 것이 큰 특징으로 디지털 시대의 구현할 수 있는 실험 영화, 비디오 아트의 형태와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에서 처음 개최되는 이번 전시에서도 이러한 작가의 영상 미학을 느낄 수 있는 필름 작업과 더불어 최근 작업한 사진과 조각 신작들까지 함께 만나볼 수 있다.





Installation view of <Rachel Rose> 

Photo: Andrea Rossetti





짙게 깔린 어둠 속,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줄기들이 바닥 곳곳에 놓인 투명한 유리알들 표면에 반사되고 굴절되어 마침내 관람객의 시야를 밝힌다. 마치 거대한 우주 어딘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전시장 전체를 산란하는 빛들로 가득 찬 신비로운 공간으로 연출한 레이첼 로즈의 전시는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후속편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성격, 그 서사구조가 매우 닮아있다. 그는 큐브릭이 그랬듯 인류의 역사를 한 편의 모험담으로 재해석했다


인간이 걸어온 흔적들을 되짚으며, 가파른 속도로 성장하는 오늘날 현대문명 속에서인간다움이란 과연 어떠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근원적 성찰을 시도한 것은 진화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불완전성을 보여준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내러티브 구조와 유사한 부분이다. 작가의 예술세계가 통시적이고 동시에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띠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육체와 정신, 유한성과 불멸성, 자연과 인공지능 로봇, 생물과 무생물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사회·문화·과학·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폭넓게 조망한 점 역시 큐브릭적 세계관과 궤를 같이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레이첼 로즈는 인류가 탄생하기 이전인 태초의 시절로 되돌아간다. 부식되거나 깨어진 천연광물과 암석 조각들, 돌덩어리에 둥근 난()의 형태로 빚어진 유리가 결합된 조각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관람객을 반긴다





Installation view of <Rachel Rose> 

Photo: Andrea Rossetti





각 개체마다 <첫째(First Born)>(2019), <둘째(Second Born)>(2019), <셋째 아이(Third Born)>(2019)로 형제자매인 양 순서대로 이름 지어진 조각 시리즈탄생들(Borns)’은 잉태된 태아가 자궁 속에서 자라나고, 아기 새가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것처럼 탄생의 순간을 은유한 것이다. 돌과 유리, 이 둘은 서로 다른 형태와 상태, 마티에르(matiére)를 띠고 있지만 사실 본질은 같다. 기나긴 세월에 걸쳐 큰 바위가 부서지고 깨어져 작은 돌멩이로, 모래알로 되며, 그 수많은 모래알이 다시 뭉쳐져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유리다. 이처럼 작가는 소멸하지 않고 끝없이 순환하는 대자연의 섭리를 통해 탄생, 성장, 죽음, 자손을 통해 유전자를 남기며 재탄생하는 인간의생명 주기(life cycle)’, 그것이 곧 인류의 역사임을 환기시킨다


탄생으로 시작한 인류의 역사는 문명의 발달사로 이어진다. 18세기부터 20세기에 나온 동화책들의 삽화들을 콜라주하여 유럽 산업혁명의 발발로 시작된 핵가족화와 유년층의 고독을 이야기한 애니메이션 필름 <호수 계곡(Lake Valley)>(2016) 17세기, 영국의 한 시골 농촌에서 토지를 사유화하며 벌어진 이야기를 담은 <도깨비불(Wil-o-Wisp)>(2018)이 대표적으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최고조에 이른 시대, 문명과 기계의 무분별한 발달이 낳은 폐해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레이첼 로즈는 두 편의 비디오 작업 속에서 18세기 처음 등장한 동화책은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보급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정신의 산물이지만 여기에는 역으로 성인과 아동, 완전함과 미성숙, 앎과 무지를 분리시키는 의식이 깔려있으며,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인클로저 운동(enclosure)은 절대군주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신흥 대지주들이 대규모 농사를 위해 공유지를 독점하면서 수많은 소농민이 땅을 잃어야만 했던 역사적 사실을 들추어 보여준다





Installation view of <Rachel Rose> 

Photo: Andrea Rossetti 





이와 같이 영광스러워 보이는 인류의 진보, 그 뒤편에는 언제나 새로운 약자가 생겨나고 희생이 뒤따랐다.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하지만 욕망과 이기심이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그렇기에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진 진화의 모노리스를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하다. 본성을 억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단 하나의 방법은 우리 자신 역시 변화하는 수밖에 없다. 투명한 유리벽을 넘어 하늘이 비쳐 보이는 마지막 전시실, 정체 모를 액체 물질들이 천천히 유동하는 이미지들 위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1997년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Mir)에서 체류했던 우주비행사, 데이비드 울프(David Wolf)이다. 우주유영 당시의 경험과 느꼈던 감정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를 따라 우리는 그가 있었던 곳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본다. 베르그송은 호모 파베르를 단지 도구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도구를 이용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줄 알고, 더 나아가 자기 자신 역시 재창조할 수 있는 능동적 존재로 보았다. 아무도 없는 미지의 세상, 그곳에서 데이비드 울프가 체류한 기간은 무려 1년이다. 그가 바로 진정한 호모 파베르이자, 모노리스를 만나 스타 차일드가 된 사람일 것이다.   





Installation view of <Rachel Rose> 

Photo: Andrea Rossetti 





글쓴이 정지윤은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현대미술과 뉴미디어학과에서 「기계시대의 해체미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현재 동 대학원 이미지예술과 현대미술 연구소에서 뉴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상호관계 분석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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