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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47, Dec 2018

이해민선_야외

2018.10.27 – 2018.11.25 갤러리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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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언 갤러리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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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ve*



이해민선에게는 1990년대의 냄새가 난다. 세기말이기 전에 90년대는 폭발했고, 거칠었고, 당당했으며 동시에 부조리했고 아이러니했다. 청춘이었던 이들은 신세대니 엑스세대니 하며 자신을 스스로 자유롭고 당당한 존재인 양 포장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그건 일종의 발악 같은 것이었다. 그때 청춘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지막 꽃을 피우고 그러려니 어른들의 겨울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유롭고 아름답다고 여겼던 시기가 실은 속부터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었다는 건 참 인정하기 싫은 아이러니다. 인정하기 싫은 아이러니의 냄새가 이해민선의 작품에서 난다. 


그 살기 좋다는 시애틀에서 시작된 그런지 록(grunge rock)을 플레이리스트에 올려놓고 온종일 들으며 앉아있는 기분이 된다. 정제되지 않으려 부러 애쓰는 목소리와 단순하고 거칠게 긁어대는 기타와 서너 명이 단출히 꾸려가는 밴드의 형태 같은 것들을 그의 작업에 대입하면 얼추 들어맞는다. 그런지 록이라는 장르의 탄생에 시대와 사회의 부조리함과 그 안에서 발악하며 사는 사람들이 쥐어짜듯 뱉어내는 목소리를 생각하면 이해민선의 작품 속 풍경이 눈앞에 확 그려진다이해민선의 작품들은 애달프다. 잃어버린 금이빨이라도 찾아야 살겠다 싶은 이들은 돌 속에 파묻힌 이빨을 찾으러 돌산을 헤매고 압도적인 돌무덤 앞에서 하찮을 정도로 작은이들은 한 덩어리인 듯 치고받는다. 팔 위에 올려진 과일들은 작가가 뚫어 놓은 숨구멍이라기엔 너무 작아서 되려 안쓰럽다. 저 과일이라도 내려놓으면 싸움이라도 쉽지 않았을까 싶다.





<바깥> 2018 면천에 아크릴릭 181.8×227.3cm





 도시의 끝에서 경계를 따라 오가며 보게 되는 풍경들은 TV에서 보여주는 반짝이고 훈훈한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내던져져 방치된 방수포와 그 위에 떨어졌던 빗방울과 온갖 부스러기들이 만든 누렇게 바랜 자국들을 두고 작품의 아름다움을 논하고, 생의 찬란함을 노래할 여유는 없다. 하얗던 방수포가 변색되도록 비가 내렸고, 햇빛이 쏟아졌다. 매끈하던 표면은 거칠게 일어났을 것이고 말라붙은 물 자국은 아예 무늬였던 듯 자리 잡았을 것이다. 밤이면 검은 어둠 한가운데 난 구멍처럼 텅 비어 보였을 것이다. 지난한 삶의 시간이 금이빨을 감춘 돌멩이들처럼, 누렇게 바랜 빗물 자국처럼 작품에 쌓였다. 얇게 여러 번 발라낸 오일물감과 아크릴은 은유인 듯 작품 속에서 흘러내린다. 삶은 이러하다고 냉정하게 정의하지 않고 그런 삶을 동정하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작품 위에 둔다. 그걸 보는 이들은 애달프다.


그의 작품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 그 순간과 풍경들이 어떤 결을 가졌는지다. <바깥>(2018)에서 반복적인 붓질이 만드는 발색은 시간이 쌓인 풍경의 흔적이고 그것은 노지에 쌓인 방수포의 질감을 유추하게 한다. <금이빨을 잃어버린 자가 찾아온 곳>(2018)에서 흑연을 칠하고 뭉개며 그린 돌무덤은 사실은 매끄럽지만, 돌멩이를 만지며 느끼는 질감을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사물의 표면은 정직하다. 겪은 시간과 사건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그 지점에 이해민선의 태도, 풍경과 시간과 사람과 작품을 대하는 방식이 있다. 풍경 뒤에 숨어있을 이야기를 그려 감정을 폭발시키며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보이는 곳, 볼 수 있는 곳을 재현하고 그 질감을 공유하면서 그 안에서 어떤 식이든 해석하게 한다. 감사한 것은 그 태도가 냉정함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랬다면 그의 작업 속 풍경은 아예 살풍경이 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가슴이 시려 오래 지켜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풍>(2018)은 그래서 조금 다르다. 구멍 뚫린 플래카드 위로 내가 여기 있다.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로 유추되는) 텍스트가 보인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작업이 근래 이해민선에게 있었나 싶다. 거친 풍경(배경) 위에 바람에 찢겨나가지 않도록 구멍까지 뚫린 플래카드가 위태롭게 걸려있다. 구멍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텍스트지만, 직접적이고 분명히 말한다. ‘존재라는 단어가 이해민선의 작업 속에서 얼마나 빈한하게 은유 되고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플래카드 위의 문장들은 단단하다. 고단한 현실의 조각이었을 바로 그 문장이 뜨겁게 다가오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이 선언처럼 오늘의 삶을 정의하고 지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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