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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49, Feb 2019

김호득
Kim Hodeuk

섬네일(Thumbnail)과 지필묵(紙筆墨)의 농담

일필휘지, 기운생동, 현대적 동양화. 김호득의 작업에 항상 붙는 어구들이다. 강렬하고 실험적인 김호득의 작업에는 그만큼 선명한 언어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이런 작가의 작업에 새로운 언어-글을 보태는 건 늘 조심스러운 일이다. 또 글은 얼마나 새로울 수 있을지, 기존 해석과 다른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지 미심쩍기도 하다. 하지만 재고할 수 있는 대상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또 견고한 공동체에 모서리 하나쯤 삐져나와도 괜찮다는 생각에 글은 오히려 단출하게 나아갈 수 있다. 틈입 불가능할 것 같은 공동체를 홀가분하게 마주하며 나름의 결을 추가하려는 이 글은 작가가 지속해온 동양화와 일면 상통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전통적 동양화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왼손잡이 작가의, 광목에 망설임 없이 올려진 먹이 만든 배접되지 않고 공중에 매달려 하늘거리는 그 동양화 말이다.
● 권혁규 전시기획 ● 사진 권현정

'흔들림, 문득-공간을 느끼다' 2009 한지, 먹물 3400×980cm 시안미술관,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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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규 전시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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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문득 폭포


서두에 언급한 어구들이 공통적으로 향하는 장면들이 있다. 바로 산, , 폭포와 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한 작업들이다. 작가는 1980년대 중반부터 자연을 주제로 작업을 진행해왔다. 작가는 자연의 외형이 아닌 대상의 본질을 감지하며 특유의 기운과 에너지를 화폭에 담으려 했고, 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붓의 움직임으로 가시화됐다. 그리고 이 감각적인 붓의 움직임은 농묵의 흔적부터 여기저기 튄 먹과 갈필의 장면까지 실로 다양한 필묵의 흔적을 만들며 자연의 깊이와 힘을, 또 생기 가득한 움직임과 속도를 드러낸다. 이 같은 작업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폭포>일 것이다. 대상의 외형적 특징은 물론 비가시적 성질을 동시에 담아내려는 듯 작가의 필묵은 갑자기 휘날리는 물보라처럼 화면에 들이닥쳐 언제 봐도 같지 않을, 계속 흐르는 자연의 시공 속 폭포를 만들어낸다작업은 분명 폭포의 감각으로 충만하다. 여기서 폭포는, 선명하게 다가오는 그 감각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늘 우리는 폭포를 잘 알지 못한다. 미뤄 짐작건대 오늘날 대부분의 관람객은 작업 속 폭포의 경험도, 기억도 갖고 있지 않다. 어릴 적 부모님과 같이 가거나 혹은 이런저런 여행 때 잠깐 구경한 폭포가 일생 중 경험한 폭포의 전부일 것이다. 많은 폭포를 본 사람이라도 스마트폰 알람으로 시작되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으로 마무리되는 분주한 도시 일상의 연쇄 속에서 폭포의 감각을 애써 간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어쩌면 폭포는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대상일지 모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폭포는 소리꾼이 득음을 하고, 무당이 도를 닦는 속세에서 벗어난 곳으로 수렴되곤 한다. 또 지구 반대편의 나이아가라와 이구아수 폭포는 디지털 시대의 무릉도원처럼 PC와 스마트폰 배경화면으로 설정된다. 이처럼 정형화된 환상으로 저 멀리 존재하는 게 오늘의 폭포다. 하지만 폭포의 기억과 경험이 빈약한 오늘의 관람객들마저도 김호득의 폭포를 선명히 감지한다. 관람객은 작가의 폭포를 마주하며 낙하하는 물줄기가 만드는 소리를, 바람을 타고 얼굴로 돌진하는 물보라를, 흠칫 놀라 한 발짝 물러나는, 기억에도 없는 상상의 경험과 감각을 자연스럽게 재생한다. 





<폭포> 2007 광목에 수묵 128×152cm 




압축된 표현으로 이미지 너머의 대상과 감각을 정확하게 호출하는 김호득의 작업을 오늘날의 섬네일(Thumbnail) 혹은 인덱스(Index) 같은 축약된 기표로 등치시켜본다. 무언가의 섬네일을 만들고 인덱스를 구성한다는 건 생각처럼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90분의 축구 경기를 몇 개의 장면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경기 전반의 흐름은 물론 개별 선수의 움직임부터 전술적 변화, 관중의 반응까지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관통한 하나의 장면이 만들어질 때 감상자는 비로소 그 안의 열기와 환호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섬네일의 올바른 작동은 뻔한 클리셰를 이용한 호소가 아닌 대상의 치밀한 관찰과 정확한 표현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폭포를 포함한 김호득의 자연 연작도 마찬가지다. 얼핏 간단해 보이는 작업은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대상을 꿰뚫는 감각의 결정체를 사유하며 반복적인 실험과 훈련을 거쳐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작가는 자세부터 리듬감, 붓을 쥐는 힘, 획을 만들 때의 호흡 등 그 어느 것도 어설프게 가져가지 않는다. 모든 조건과 움직임을 예민하게 기억하며 수없이 많은 이미지를 만들고 다시 덜어내는 과정을 반복할 때,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집착 없이 그냥, 문득 진행될 때 비로소 폭포의 감각으로 휘몰아치는 장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산산산3> 2017 130×162cm 

 



섬네일-인덱스 너머


산수화는 내면의 이상향을 풍경으로 형태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축약된 표현으로 대상의 특성을 담아내고 가보지 못한 곳의 경험을 상상하게 하는 김호득의 작업은 절제된 선으로 이상향의 공간과 분위기, 기운을 끄집어내는 동양화의 오랜 전통과 맞닿아 있다. 앞서 설명한 작업은 이런 동양화의 전통을 자신만의 즉흥적이고 긴장감 있는 화면으로 재해석한 시도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작가는 자연-대상의 특징을 체화하는 등가물로서의 작업, 또 그것을 삼차원의 공간에 확장 설치해 경험 가능한 상황으로 공유하는 작업 등을 통해 동양화의 사고를 확장해왔다. 인덱스를 쌓아 인덱스의 인덱스를 만들고, 섬네일 너머의 광활한 시공을 전경화하는 이 작업들은 다양한 재료와 물성을 탐구하며 평면과 입체, 그리고 설치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 과정의 시작이자 배경은 광목이다. 광목은 일반 종이와 달리 광택 없이 미세한 색을 띠며 적당한 두께를 갖는다. 또 먹을 무조건 흡수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먹고 나머지는 내놓는다. 작가는 이러한 광목의 특성을 긴장감 있게 활용하며 먹을 먹이고 순간적으로 응고시킨다. 또 여백을 활용하며 다양한 화면을 구성한다. 즉 광목은 작가에게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감을 갖는 하나의 독립된 시공으로 설정된다.




<서울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작품전> 

설치 전경 2017 서울대미술관, 서울 

 



작가의 작업이 광목에서 공간적 실험으로 진행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인다. 그 과정의 중간 어딘가 <바람바람>(1998)과 같은 작업이 있다. 작업에서 자연은 붓질과 먹의 과시가 아닌 단순하고 정제된 필묵의 자국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바람의 흔들림을 점과 터치로 옮기며 화면 전체를 채운다. 또 작업을 배접하지 않고, 벽에서 조금 떨어진 공간에 매달아 설치한다. 그렇게 바람의 떨림이 스쳐간 점들로 채워진 작업은 공간에 매달려 주변 공기에 미세하게 반응한다. 이후에도 작가는 공간을 물리적 대상이 아닌 호흡하는 세계로 인식하는 작업을 지속한다. 전시장 바닥에 먹물로 채워진 수조를 설치하고 그 위에 광목이나 한지를 매달아 자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먹물이 한껏 스며든 종이를 구겨 비정형의 모양을 만들어서 우주와의 관계 속 찰나를 상상하게 한다. 이처럼 입체와 공간으로 확장된 작가의 시도는 인위적 자연과 그리는 행위를 공감각적 장면으로 대체시키며 이미지가 전달하지 못하는 자연의 단초들, 그것의 미세한 떨림을 현실화하는 등가물로서의 작업을 도모한다.





 개인전 설치 전경 2012 리안갤러리, 대구





위 실험들은 작가의 주된 매체인 평면으로 다시 귀착된다. 결국 작가의 작업-평면, 입체, 설치는 궁극적으로 같은 곳을 지향한다. 작업은 이미지를 대상과 떨어트려 생각하지 않는다. 대상을 사유하며 문득 어떤 흔들림을 감지한다. 어쩌면 작업에는 분명한 대상도 목적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젤과 족자로 상징되는 서양과 동양의 이미지, 그 개념의 간극은 대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을 것이다. 하나의 고정된 화면에 대상을 포획하려는 욕망을 거부하고 불연속적 흐름에 집중하며 다양한 시공과 시점을 간직하는 것이 결국 동양화의 사유 방식은 아닐까. 작가는 이러한 사유를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해왔다. 제한된 시공도 대상도 없이, 지금문득, 그냥 어떤 시지각적 현현으로 전환하며 강렬하고 잔잔한 또 농담 같은 떨림을 만들어왔다.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 흑과 백, 평면과 공간, 언어와 비언어와 같은 상투적이고 납작한 형식의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다양한 겹과 결을 가설해 왔다. 이처럼 벗어날 수 없는 두 개의 기둥 사이에 계속 비정례적인 결을 추가하며 그 사이를 풍성하게 만드는 과정, 그것이 작가가 지속하는 작업일 것이다. 

 


 


김호득




작가 김호득은 먹으로 평면 혹은 공간을 채우고 비워 흔들림, 여백,  등의 이치를 표현해 온 작가다. 먹을 이용하되, 서양화와 동양화를 가리지 않는 기법으로 유명한 그는 1986년 관훈갤러리를 시작으로, 일민미술관, 학고재, 김종영미술관, 대구미술관, 타이베이 레드 골드 갤러리(Red Gold Gallery) 등에서 30여 회 넘게 개인전을 연 바 있으며, 국내외 유수의 미술기관에서 열린 수많은 그룹전에 참여했다. 1993 김수근문화상을 시작으로 1995 토탈미술상, 2004 이중섭미술상, 2008 금복문화상 미술상 수상하며 실험성과 예술성을 꾸준히 인정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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