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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53, June 2019

니콜라스 슬로보
Nicholas Hlobo

의식과 무의식 속, 일렁이는 정체성

찢어진 캔버스. 땀땀이 바느질된 선들이 유유자적 캔버스 위를 흐른다. 흰 바탕을 가로지르던 선들은 강과 약의 완급을 조절하며 유려한 곡선을 만들어내며 넘실대다가, 어느 순간 와르르 캔버스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우리 정신의 무의식 속 어딘가에, 혹은 우리 신체의 세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면 어딘가에 저런 형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보편감 안에서 작가의 정신은 작업을 응시하는 관람객의 정신과 이어진다. 회화와 조각 사이에 위치한 현실로, 존재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한껏 담아낸 형상이 넘쳐흐른다.
● 문선아 독립 큐레이터 ● 사진 리만 머핀(Lehmann Maupin) 제공

'Imilonji Yembali (Melodies of History)' Installation view Credit: Museum Beelden aan Zee Hague, Netherlands Photo: Wim de Boer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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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아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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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원주민 공동체 중 하나인 코사(Xhosa)족 출신이자 동성애자임을 당당히 밝히며 작업해 온 니콜라스 슬로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는 개념적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의식적 차원과 무의식적 차원을 오가며 자신의 정체성의 다양한 층위들을 섬세하게 드러내는데, 작가는 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스스로가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는 과정부터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넓은 질문이라고 스스로 밝힌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 역시 어떻게 자신을 바라보는가를 생각하는 지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자신의 내부로만 소급하지 않고, 세계와 만나 보편감을 형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특히, 작가가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적극적 태도는 작업의 제목을 짓는 방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정체성과 언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작가는 고의로 영어나 전시를 진행하는 국가의 언어 대신 Dyumpu, Ibuthathaka, Yila 등 코사어로 된 제목들만을 제시한다. 나는 코사족의 후손이다. 자라면서 점점 모국어가 상실돼가는 현실 속에서 희미해지는 정체성을 느꼈다. 나 자신조차 무의식중에 코사어보다 영어를 더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작업 제목에 대한 번역 요청을 항상 받아 왔지만 억지로라도 코사어를 사용하려 해오고 있다. 이것은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내 강한 신념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작업에 대한 선입견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번역된 언어가 있으면 작업보다 그 뜻에 먼저 집중하기 마련이고, 이때 감상에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끼어들 수 있지만, 자신은 관람객들이 백지상태에서 오롯이 그 작업의 정체성을 마주하길 바란다는 것.





<Isilima sesinambuzane phezu kwechibi> 

2015 Ribbons, tea, and watercolor 

on paper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그의 말을 따르기라도 하듯, 관람객들은 전시장 안에서 그의 작업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만나게 된다.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들며, 회화와 조각 사이를, 구상적인 형상과 추상적인 형상을 오가는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고, 오히려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 모든 구분을 넘는 어떤 조각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 이 작가의 작업을 더 여실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한다. 그리고 조그만 단서를 찾아 헤매는 관람객들에게 그가 제시하는 알쏭달쏭한 언어로 된 캡션들은 이러한 생각을 한층 심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전반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언어의 이면에 숨겨진 힘의 논리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다시 기의를 숨겨내는 방식을 통해 작업의 신비성을 한층 고조시킨다. 


작가의 이러한 전략은 언뜻 -식민주의(post-colonialism) 담론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작업의 형식적 차원에서 역시 유사한 지점들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대표적 작업 방식은 캔버스를 나이프로 찢은 후, 포기할 부분을 포기해 가며 수정할 수 있는 부분들을 보수해가며 이를 꿰매는 것. 찢긴 캔버스를 꿰맨다 해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고, 그 자국은 남게 되는데, 작가에게는 그 자국, 흔적까지도 작업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작가가 찢긴 자국에 다양한 색감과 구상을 덧입혀 작업을 구성해내는 과정은 그 흔적을 원래대로 되돌리기보다 가장 아름답게 보수하기 위한, 모든 상처를 수용해낸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이라 하겠다.




<Intlantsana> 2017 Ribbon on canvas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작가는 찢는 행위는 자신의 드로잉과 같고, 꿰매는 행위는 단순해 보이지만 아무리 작은 부위를 바느질하더라도 결코 아무 생각 없이 해서는 안 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너무 힘을 줘도, 너무 느슨해도 안 된다손수 손을 비롯해 내 몸을 사용하기에 바느질할 때마다 손목, 목 근육까지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단순히 일만 하면 이 몸의 반응을 느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을 집중하여, 온 신체를 통해 수행해내야 하는 찢고, 꿰매는 행위는 강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작가는 그 과정 자체가 자신에게 매우 소중하다고 밝히는데, 특히 이 행위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나이프의 폭력적인 행위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약탈하고 지배하며 식민지화한 폭력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내 조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 또한 식민지 역사를 지녔다고 말한다


작가의 말처럼, 아프리카 대륙은 서구에 의해 찢겨 나뉘는 고통을 겪었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인 지배를 받았고, 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독립을 이룩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 부작용 혹은 흔적들을 내포한 채로 다시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작가는 침략을 한 자와 침략을 받은 자 사이의 아이러니한 공존과 평화가 이뤄지는 모습을 많이 봐 왔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개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며 찢어졌다가 다시 꿰매지는 것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자신에 대해 수많은 재정의를 내리며, 자신을 형성해 간다고 말한다. 해서 작가가 다시 꿰매는 과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행위이자, 역사가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써가는 과정이 된다. 




Installation view <Nicholas Hlobo: Ulwamkelo> 

Lehmann Maupin July 12 - August 24, 2018 

Photo: Matthew Herrmann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한편, 작가는 리본, 가죽, 나무, 고무 등을 작업의 주된 재료들로 활용하는데, 종종 여성성을 상징한다고 여겨지는 재료-리본, 남성성을 상징한다고 여겨지는 재료-가죽, 나무 등을 한데 엮어 하나의 작업으로 만들어낸다. 예컨대, <Ibuthathaka>에서는 리본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곡선과 딱딱한 가죽들이 형성해 내는 직선이 어우러지고, 이 조합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정신적 생명력을 담은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낸다. 또한 최근작 <Dyumpu> 등에서 엿볼 수 있듯, 브론즈, 구리 및 금관악기 등 강한 성질의 재료를 주조해 부드럽고 우아한 리본 스티치의 곡선을 표현하기도 한다. 특정 재료에 내재한 상징적 연관성을 충분히 활용해 상반되는 두 가지 재료를 뒤섞어 작업에 보다 포괄적이고 다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코사족 후예라는 정체성에 이어, 스스로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 작가는 외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삶의 지혜와 코사족 전통을 배웠는데, 가부장적 사회에서 리본과 바느질은 남성에게 금지어였다. 강한 남성성을 강요받으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여성, 남성 이분법적 접근보다 포괄적이고 다각적으로 성 정체성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탐색하는 작가의 성향은 작업 안에 가감 없이 드러난다.





<The Encyclopedic Palace> 54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La Biennale di Venezia, 2011 

Photo credit: Mario Todeschini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자신은 화가라기보다 조각가라고 말하는 슬로보는 이제 고정된 사물 속에 의식·무의식적 사고의 운동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명력을 발하여 움직이는 조각으로 한발 더 나아가기 시작했다. 최근 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 작가는 퍼포먼스가 애초에 조각과 다른 형식이 아니라 조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행위이며, 관람객과 소통하고 교감하기 위한 행위라고 말한다. 슬로보의 작업은, 혹시 작가의 머릿속 한 장면으로 본 떠 놓은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전적이며, 그 매력은 가감하거나 숨기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자신이 무의식으로 빠지는 지점, 의식으로 나오는 지점에서 항상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찾으려 한다는 작가는, 세상의 구조를 자신의 안에 담아내고, 그러한 자신을 다시 작업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세상을 드러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탐험하는 그곳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가로지르는,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순환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그의 작업이 어떤 다른 차원으로 발전해 나갈지, 기대해보자.  

 



 니콜라스 슬로보

Credit: Museum Beelden aan Zee Photo: Wim de Boer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작가 니콜라스 슬로보는 197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 타운에서 출생해 현재 요하네스 버그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작업을 해오고 있는 그는 2002년 요하네스 버그의 테크니콘 위트워터스랜드(Technikon Witwatersrand)에서 학위를 수여 받았으며스웨덴 웁살라 미술관(2017), 오슬로 예술건축 및 디자인 미술관(2011), 런던 테이트 모던(2008), 보스턴 현대 미술관(2008) 등 해외 유수 미술 기관에서 개인전을 연 바 있다또한 파리 루이비통 재단(2017), 파리 퐁피두 센터(2015),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아프리카 미술관(2015) 등에서 열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이밖에도 시드니 비엔날레(2012), 팔레 드 도쿄 트리엔날레(2012), 베니스 비엔날레(2011), 리버풀 비엔날레(2010), 광저우 트리엔날레(2008) 등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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