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초대 국립박물관장이자, 고고학자였던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Christian Jürgensen Thomsen)은 고대의 유적과 유물들을 정리하기 위해, ‘3 시기법(Three Age System)’을 고안했다. 1836년, 그가 집필한 『북유럽 고대학 입문서(Early Scandinavian Archeology)』를 통해 처음 소개된 이 시대 구분법은 문자가 존재하지 않던 선사(先史)시대를 유물 즉,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된 재료에 따라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분류하여 시대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인류가 걸어온 440만년,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돌, 청동, 철로 모두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톰센의 이론은 애당초 서구 문명에 입각해 정립된 까닭에 세계의 모든 지역과 국가에 적용될 수 없다는 맹점이 있다. 그런데도 3 시기법의 골자는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시대분류체계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인류의 눈앞에 놓인 유일한 자원(resource)이라곤 돌 뿐이었던 태초. 돌을 마찰시켜 불을 피우고, 그 돌에서 추출한 청동과 철로 만든 도구의 진화는 곧 인류 생존의 역사이자, 문자의 등장과 비견할만한 거대한 사회적 변혁을 일으켰음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Métal Hurlant> Détail d’essai balistique de 1872
Musée Naval de Lisbonne Photo: Alexandre Estrela,
2019 Courtoisie de l’artiste
돌, 청동, 철로 시작된 인류의 도구 제작은 선사시대에서 멈추지 않았다. 땅과 땅을 잇는 거대한 교량을 비롯해 하늘 높게 쌓아 올려진 초고층 빌딩들, 도처에 널린 전기 케이블, 우리가 매일 들고 다니는 핸드폰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보다 더 정밀하고 숙련된 테크닉을 발휘해 수많은 도구를 생산해내고 있다.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선사시대나 현대나 돌, 청동, 철은 인간에게 가장 유용하고 익숙한 자원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자원과 21세기의 자원이 가장 극명하게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어디일까? 아마도, 비물질 자원의 출현일 것이다. 선사인들이 돌을 잘게 부수었다면, 현대인들은 세상을 비트(bit)와 픽셀(pixel)로 나눈다. 현실을 스쳐가는 빛과 소리들이 실시간으로 무한대의 데이터로 환산되고, 꿈과 상상은 ‘가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차원의 현실로 탄생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에테르(aether)와 수많은 에너지가 끊임없이 순환하는 시대, 우리에게는 또 어떤 창조력이 남아있는가.
<Métal Hurlant> Détail d’essai balistique de 1872
Musée Naval de Lisbonne Photo: Alexandre Estrela,
2019 Courtoisie de l’artiste
대지를 잠식시킬 듯한 웅장한 소리가 전시장을 가득 메운다. 거대한 암석들이 떨어지며 굉음을 토해내고, 금속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날카로운 쇳소리,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징 소리가 교차하며 들려오는 이곳은 바로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 알렉산드르 에스트렐라(Alexandre Estrela)가 구현한 <울부짖는 금속(Métal Hurlant)>전시 현장이다. 전시 타이틀이 시사하듯,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금속들의 강렬한 디테일과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사운드로 에워싸인 공간은 마치 우주에서 이제 막 지구가 탄생한 태초의 순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물씬 자아낸다. 작가는 기존의 시네마 스크린이 보여준 ‘환영적·재현적 공간’에서 탈피하여, 영상 이미지를 구성하는 소재들의 매체성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집중적으로 선보이며,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금속판으로 제작된 스크린, 소리와 이미지의 반복(loop), 점멸효과(flicker), 초근접 촬영, 아웃포커스, 정지된 이미지, 공간감을 강조한 엠비언트 음악(ambient music) 등 실험영화에 등장하는 전위적인 테크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내러티브와 리얼리티에 기반한 전통적인 영상 문법을 허물고 관객에게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Exhibition view <Alexandre Estrela. Metal Hurlant>
Fondation Calouste Gulbenkian - Délégation en France,
Paris, March 13 - June 16 2019 ⓒ Guillaume Pazat
에스트렐라의 작업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스크린이다. 그는 백색 영사막 대신 돌, 구리, 철, 알루미늄 등 가장 원시적인 마티에르(matière)를 사용해 스크린을 직접 제작한다. 그리고 그 스크린의 표면을 긁고 파내어 금속이 본래 지닌 특유의 질감 효과를 두드러지게 하거나, 혹은 흰 염료로 두껍게 덮어 물감의 무거운 물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러한 까닭에 금속판에 투영된 이미지들은 우리가 이때껏 백색 영사막에서 보아온 선명한 이미지들보다 입자가 거칠고, 건조하며, 그 형태가 불분명하다. 그는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기타 사운드와 신디사이저의 전자음이 무한 반복되며 빚어내는 대자연의 소리를 따라, 레코드판 밴드의 패어진 홈 사이를 바늘이 훑고 지나간다. 엠비언트 음악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로버트 프립(Robert Fripp)과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1975년에 발표한 곡, <An Index of Metals>가 삽입된 동명의 비디오 작업은 금속 파편과 같은 초미립자를 확대, 관찰할 때 사용되는 주사전자현미경(Scanning Electron Microscope)으로 음원이 재생되는 순간 동안 레코드판의 표면을 촬영하고, 그것을 사운드와 동기화(sync)한 결과이다.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는 레코드판, 그 속에 담긴 소리의 파형, 바늘의 진동을 따라 흐르는 전류. 우리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스크린에 옮긴 작가는 비물질적인 ‘소리’와 그 소리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물질 매체인 ‘레코드판’의 관계성을 시청각적으로 치환해낸다.
<Metálica> Image de voyage, Timor oriental, 2009 Courtoisie de l
이 같은 작업방식은 <Metálica>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징소리, 그 템포에 맞춰 스크린 표면 위로 일어나는 미세한 파동을 시각화한 이 작업은 드럼연주자, 가브리엘 페란디니(Gabriel Ferrandini)가 구리로 만들어진 스크린을 악기 삼아 실제로 연주한 순간을 담아낸 것이다. 이 밖에도 에스트렐라는 동전에 긁힌 자국들이 곳곳에 남은 교통티켓 자동판매기를 알루미늄 스크린에 담은 <Coin Scratch Plate>, 깜박거리는 형광빛 조명을 스크린에 반사시켜 빛의 반향과 속도를 물질화한 <자갈(Balastro)>, 공중에 매달린 스크린을 지탱하는 케이블과 화면에 선형으로 깊게 패어진 홈을 하나로 이어, 스크린의 내부공간과 외부세계를 연결한 <집적회로(Circuito Integrado)>를 통해 감각과 지각, 가시계와 비가시계, 물질과 비물질, 프레임의 안과 밖, 쉬포르(Support)와 쉬르파스(Surface)와 같이 이항대립적 구도에 놓인 개념들의 공존을 시도한다. 전시장 끝, 공업용 황동 밸브와 동전들이 보인다. 점점 강하게 투사되는 빛 속에서 보잘것없던 금속들은 금으로 변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금으로 만들어 준다는 현자의 돌처럼, 작가의 스크린은 언제나 세상의 논리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며 이변을 일으킨다. 초현실적 SF 장르와 괴기스러운 호러물을 실어 큰 호응을 불러일으킨 프랑스 성인만화지 『메탈 위를랑(Métal Hunant)』. 70년대, 비주류, B급 감성을 대표했던 ‘울부짖는 금속’은 에스트렐라의 스크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가 아닐 수 없다.
글쓴이 정지윤은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현대미술과 뉴미디어학과에서 「기계시대의 해체미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 대학원 이미지예술과 현대미술 연구소에서 뉴미디어 아트를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상호관계 분석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