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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55, Aug 2019

귀 기울여 들어보는 그들의 이야기

Switzerland

William Kentridge, A Poem That Is Not Our Own
2019.8.6-2019.10.13 바젤, 쿤스트뮤지엄 바젤 | 게겐바트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는 그간 굵직한 국제 전시, ‘카셀 도쿠멘타(documenta)’(1997, 2003, 2012), 영국 테이트 모던(2018), 뉴욕 현대미술관(1998, 2010) 또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특별전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영화감독, 무대 공연 연출자, 배우, 음악인, 강연사 등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는 총체적 예술 활동가로, 60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거대 규모의 프로젝트로 활발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작가의 폭넓은 참여로 이루어진 이번 바젤에서 열린 회고전은 1980-1990년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와 그 결말, 민주화 희망으로 이어진 정치적 혼돈의 시기 속 그의 초기 회화 작업과 현재의 총체 예술 구현(무대공연, 그림자놀이, 영상, 콘서트 등 장르의 동시적 구현)들이 주제 면에서 같은 맥락에 서 있음을 모티브로 하였다. 그의 초기 작업의 소재였던 이주, 망명, 끝없는 행진 등이 시간이 지나며 어떤 식으로 변주되고 새로운 맥락들을 창조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본 이번 전시는 그의 미술 세계가 명료한 언어로 풀 수 없는 혼란을 기반으로 한 복합적이며 거대한 시스템임을 보여준다.
● 김유진 스위스통신원 ● 사진 Kunstmuseum Basel 제공

'Right Into Her Arms' 2016 ⓒ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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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스위스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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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단된 이미지, 반복되는 이야기들


사실 켄트리지의 작업이 미술 이론에 관한 별 이해 없이도 모두에게 쉽게 다가오는 것은 일단 직접적이고 단순한 그의 표현 수단 때문일 것이다. 묵직한 목탄으로 그려낸 드로잉을 지우고 또 다시 그리는 행동을 반복하거나, 일정 부분을 확대, 축소하여 재편집한 애니메이션은 그의 전형적 예술 형태다. 지우개나 천으로 지우는 과정에서 남은 잔상이나 훅 불어서 생긴 목탄 찌꺼기들이 여전히 남아있기도, 또 다른 형태로 되돌아오기도 하며 생각의 전개, 기억의 소멸 혹은 기억의 재구성처럼 그려지고 영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예전의 잔상과 새로 생긴 흔적은 뒤섞이고, 때로는 흙에서 되살아난 유령처럼 새로운 모형을 만들어 낸다. 생각을 추상화하지 않고 드로잉으로 담아내는 호소력 있는 표현력과 (오토 딕스(Otto Dix), 게오르그 그로츠(George Grosz) 등 독일 표현주의 작가나 고야(Francisco Goya), 호가트(William Hogarth) 같이 역사를 진솔하게 담은 화가들이 자주 역사적 레퍼런스로 논의된다.) 영화 기술을 이용한 시각적 서술이라는 특성은 관람객을 쉽게 사로잡는다. 쉬운 접근과는 달리 작품 해석은 생각보다 용이하지 않다





Props for <The Head & The Load> 

2018 Photo: Gina Folly 

 




생성과 소멸의 긴장감 속에 그가 그리는 잔혹한 정치적 폭력 사태나 요하네스버그 근처의 척박한 풍경은 물처럼 흐르며 오히려 관람객을 혼돈 속으로 빠뜨린다. 대부분 10분에서 20분가량인 영화들을 본 후 요약하려는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까닭은 필자의 무지일 수도 있으나 일정 부분은 켄트리지의 불확실성과 임시성을 강조하는 콘셉트에 기반한다고 본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생각들과 다양한 이미지로의 여행은 누구 하나의 기억이나 웅대한 서사시가 아닌 때로는 상충관계에 있는 입장들과 여러 감정이 섞인 끝나지 않은, 또 않을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1985년에 제작된 <Vetkoek/Fête Galante>는 그의 가족과 이웃, 친구들이 등장하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초기 작업으로, 그리려 하는 소재를 드로잉으로 남기려는 노력과 계속 지워지는 숙명적 재난 사이를 그리는 영화다. 영화 속 등장하는 전제, 남느냐 사라지느냐의 전쟁 <The Battle between Yes or No>가 말해주듯 임시성과 불확실성은 이미 주제로 자리 잡고 있다.





<More Sweetly Play the Dance> 

2015 Photo: Gina Folly 

 


 

흔적과 그림자


흔적을 지우는 것은 기억의 상실, 역사의 묵언과 연관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검열과 규제가 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의 역사와도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글로컬(glocal) 한 현대 미술계에서 작가의 삶과 그가 속한 사회의 이해는 작품 해석에 중요한 전제 중 하나일 것이다. 작품의 해석을 지배하진 않더라도 서도호의 작품을 보며 한국의 근대사를 논하지 않거나, 카데르 아티아(Kader Attia)의 작업을 보며 아프리카의 식민화를 빼고 그들의 작품에 근접하기 힘들듯, 켄트리지의 작업세계의 이해는 남아공의 역사와 그의 정치적 입장을 빼고 설명하기 힘들다. 인종 차별과 이에 따른 엄격한 국가적 규제와 반정부 투쟁들로 어지러운 요하네스버그에서 인권변호사 아들로 태어난 켄트리지는(그의 아버지는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스티브 비코(Steve Biko) 등 인권 운동가들을 변호했었다.)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의 부조리와 부도덕한 정치인의 삶, 그들의 자본주의적 탐욕을 1980년대부터 목탄화로 그려왔다. 


소호와 펠릭스 연작중 하나인 <Felix in Exile>(1994)은 고향의 풍경을 지우고 떠올리는 망명 예술인을 다룬다. 펠릭스 타이틀바움(Felix Tatlebaum)과 소호 엑슈타인(Soho Eckstein) 이름으로 보아 아마 작가처럼 유대인일 것 같은 이 두 주인공은 작가의 삶이 투영된 인물들이다. 펠릭스는 망명한 시인이며 소호는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탐욕스러운 부동산 업자이다. 배경은 무척 다르지만, 둘 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늘 고독에 쌓여있는 인물이다. 영화는 거울을 통해 떠오르는 마음의 풍경을 빼면 펠릭스의 아파트 안에서만 일어난다. 그가 상상하는 남아공의 풍경은 떠오르고 사라지며 지워진다. 시체도 사건도 지우는 하얀색 천과 파란색 샤워기의 물줄기는 자주 등장하며 물처럼 흐르는 사건들의 잡을 수 없음과 정권의 폭력적 지움의 행위를 시사한다. 하지만 지우고 지움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운 상처는 흔적을 남기며 계속 되돌아온다.





Excerpts from libretto for <Waiting for the Sibyl> 

2019 LED-Frieze Neubau Photo: Julian Salinas 





풍경은 켄트리지 작업에서 기억이 잊히고 또 기억이 생성되는 지점으로 작용한다. 작가는 드로잉과 영상 속에서 그가 태어나 사는 요하네스버그와 주변 지역, 현대적인 대도시의 풍경, 교외의 황량한 자연 풍경, 금광 사업지, 휴가지 해변, 분쟁과 상처로 황폐해진 곳, 어찌 보면 역사의 중심이 아닌 주변지를 대부분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는다. 실제로 많은 민중 대부분의 흑인은 특정 지역에서만 살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1913원주민 거주 지정(Natives Land Act)’을 통해 흑인들은 지정 구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으며, 1923년에는 도시 안에서도 인종에 따라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이 규정되어 자유로운 이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심지어 모든 교육기관도 인종에 따라 나뉘어 있었다.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가 꽃폈던 동네, 예를 들어 재즈 음악의 중심지였던 소피아타운(Sophiatown), 강제 이주시킨 소베토(Soweto) 지역, 또 광산 같은 노동의 공간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켄트리지의 작업에서 하얀 캔버스는 단지 평면이 아닌 역사가 쌓인 공간이다. 드로잉이 생성되고, 지워지고 잔상들이 겹치면서 이 공간들은 남아공의 근대화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정치적 계략과 실행 그리고 그에 반하는 수많은 투쟁이 지나간 흔적의 자리이다.





Backdrops made for <Sophiatown> 

1989 Photo: Julian Salinas




하지만 관람객 마음에 파고드는 작업의 힘은 이것이 단지 사회에 대한 고발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강한 비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우리의 발전을 도모하는 진화론적 사고와 이를 뒷받침하는 지식체계가 서구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식민지 폭력을 뒷받침했다는 것을 주제화한다. <What Will Come (Has Already Come)>(2007) 1935년 아비시니안 전쟁, 즉 아프리카 마지막 독립군과 파시스트의 전쟁 참상을 19세기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방에 설치되거나 군사용 지도 읽기로 설치되었던 아나모픽 판에 영상으로 비춘다. 인물들은 둥근 통과 판 위로 길게 늘어져 그림자 괴물처럼 그려진다. 과학적으로 발달한 도구가 무시무시한 전쟁전략에도 쓰일 수 있음을 시사하는 작업이다. ‘1차 세계 대전에 대부분 짐꾼으로 징용됐던 역사의 주인공일 수 없던, 아프리카의 이백만의 참전자들을 기억하는 퍼포먼스 작업 <The Head and the Load>(2018)나 아프리카 짐꾼의 역사를 주제화한 비디오 작업 <Kaboom!>(2018)은 근대화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 토지계획, 측량, 강제 이주 정책, 국가의 경계선 지정 등이 얼마나 잔인한 결과들을 낳았는지 보여준다. ‘우리의 것이 아닌 시라는 제목 ‘A Poem That Is Not Our Own’ 처럼 이 전시는 역사가 유명인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 아닌 잊힌 다른 주변인의 흔적임을 다양하게 조명했다.    

 

 

글쓴이 김유진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취리히 대학 미술사학과에서 「Remake in the tension between the global and local art scene」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스위스 한 재단에서 예술 소장품 관리를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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