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회전기념물> October 18th, 1913 Leipzig, Saxony, Germany © Andrey Shcherbukhin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석조 일색이었던 서구 기념의 풍경에 변화를 가져왔다. 조국의 승리를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른 용사들에 대한 숭배 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참전 국가들은 앞다퉈서 주요 전투와 전쟁영웅들의 주제로 한 기념조형물을 곳곳에 세웠다. 과거와 다른 것은 개인의 동상보다 청동 재질로 만들어진 군상들이 급속하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오지마 기념물(Iwo Jima Memorial)’로 약칭되는 ‘미국 해병대 전쟁기념물’이다. 거대한 석조 원반 위에 또다시 엄청난 크기의 청동 조형물이 얹힌 이 기념물은 바람에 펄럭이는 거대한 성조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 의미 있는 대상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호소하기 적합하다.
사상자만 수만 명에 달할 만큼 치열했던 유황도 전투를 기억하기 위해 건립한 이 기념물은 규모의 웅대함과 조형적 완성도, 그리고 토포그래피(topography)의 힘 때문에 전쟁기념물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인간의 희생을 초래한 제2차 세계대전은 이오지마 기념물과는 또 다른 양식의 기념문화를 만들어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과거의 기념물이 조국의 영광과 승리한 전쟁, 그리고 대의를 위해 희생한 국민들을 현창하는 ‘영광의 기념물(Ehrenmal)’이었다면, 이후의 기념물은 인간의 희생을 성찰하고 전쟁의 무상함을 고발하는 ‘경고의 기념물(Mahnmal)’이 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것이 ‘살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Denkmal für ermordeten europäischen Juden)’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이 전대미문의 기념물은 우리에게 ‘홀로코스트 상기기념물(Holocaustmahnmal)’이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유대인 석관을 모티프로 삼아 높이가 다른 2,711개의 직육면체 시멘트 기둥으로 조성된 이 회색빛 기념물의 복합체는 그사이를 방문객이 오갈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하나의 도심 기념공원으로 봐도 좋겠다. 그러나 이곳은 석관과 석관 사이의 간격이 매우 좁게 설계된 탓에, 그 사이를 두 명의 성인이 함께 이야기 나누며 걸어갈 수 없다. 그렇기에 매우 불편한 기념공원이다.
그러나 방문객은 이 장소가 비극적 죽음을 애도하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기꺼이 그 불편을 감수한다. 석관 사이를 걸으며 느낀 감정은 지하에 마련된 작은 규모의 추모 기념관에서 그 이유를 발견한다. 지상에서 종횡으로 줄 맞춰 조성된 시멘트 석관들을 통해 대량학살이 거대한 파도처럼 표현되었다면, 지하 기념관에서는 희생자들의 사진이 등장하고 가족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때문에, 익명성의 천막이 거둬지는 느낌이다. 이 기묘한 경고성 기념물은 나치 과거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독일 사회의 오랜 의지를 표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두 세대를 거치며 확인된 독일 국민의 집단적 반성 의지가 유대계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n)의 착상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펠릭스 드 웰던(Felix Weihs de Weldon) <해병대 전쟁 기념비(The Marin Corps War Memorial)>
November 10, 1954 Arlington, Virginia, USA © Brandon Bourdages
전쟁에 대한 사회의 성찰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있다. ‘베트남 전쟁 기념물(Vietnam War Memorial)’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20대의 대학생 마야 린(Maya Lin)이 설계한 이 기념물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첨탑의 양식이나 용맹한 장병들의 군상을 처음부터 포기했다. 전몰 장병의 명단이 적혀있는 긴 검은색 화강암 벽이 둔각의 형태로 지면 아래에 길게 세워져 있다. 방문객은 벽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서 벽면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마감처리 덕분에 거울처럼 빛나는 벽면에 새겨진 망자들의 이름 위에서 자기 얼굴을 확인하면서 사뭇 진지해진다.
이 기이한 기념물은 기이한 전쟁 경험에 대한 미국 사회의 숙고의 산물이다. 만약에 베트남 전쟁이 개전에서부터 정당했거나, 미국이 이긴 전쟁이었다면, 이처럼 ‘땅으로 꺼지는’ 식의 설계는 없었을 것이다. 망자를 추모하기 위해 그렇게 설계했다고 하더라도, 마야 린의 작품이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선정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베트남 전쟁 기념물 건립을 요구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파격적 재현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통적인 군상을 추모의 벽 중앙에 추가로 배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 제안은 공모전 당선자인 린이 분명하게 거절했다.
그 결과 추모의 벽 양 끝 부분에 이름들이 새겨진 벽면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3-4인으로 이루어진 참전용사 입상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 군상도 승리의 확신에 찬 과거의 조형 방식과는 문법을 달리했다. 지치고 겁먹은 표정으로 추모의 벽에 적힌 동료 장병들의 이름을 바라보는 모습, 그리고 중상 입은 장병을 가슴에 품은 채 비탄에 빠진 간호 장교들의 조상이 그곳에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베트남 전쟁기념물은 전쟁 경험에 관한 미국 사회의 다양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상이한 기대를 복합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이제 현대 국가 기념물에서 국민의 동원 의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민주화가 진척되고 사회가 다원화될수록, 모노톤의 색채, 단일한 목소리를 공공 기념물에서 찾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는 추세다. 워싱턴 D.C.의 기념공원에 세워진 베트남 전쟁기념물과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국전 참전기념물은 이처럼 사회의 다성성(多聲性)과 다원성을 중시하는 현대 기념물의 문법을 잘 보여준다. 이제 우리나라의 기념물 풍경을 바라보자. 근대 국민국가 이후 우리의 생각과 풍경에 영향을 준 최초의 서구식 기념물은 아마 독립문일 것이다.
<현충탑> 1967 국립서울현충원, 서울, 대한민국 사진 제공: 최호근
소박하다 못해 조잡하기까지 한 복제품처럼 보이지만, 이 기념물이야말로 독립을 향한 시대의 염원을 담고 있기에, 역사적 가치를 충분히 지닌 우리 국민 기념물의 시초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우리의 도시경관과 함께 기념의 풍경도 빠르게 바뀌었다. 목조 일변도의 공공 건축이 석조 중심으로 바뀌었고, 일본의 군국주의를 표상하는 충혼탑이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지배자들은 이 땅에서 떠나면서 일본풍의 건축이 빠르게 사라진 데 비해, 일본화된 서구식 기념의 풍경은 쉽게 소멸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곳곳에 세워진 승전기념탑은 일본 충혼탑의 복제품이었고, 전몰 장병 기념조형물은 일본이 자랑했던 ‘육탄 3용사’ 기념물의 재판과 다름없었다.
국립서울현충원이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의 전통과 서구식 전통이, 또 일본의 전통과 일본식으로 전유된 서구의 전통이 계통도 두서도 없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퓨전과 융합이지만, 인색하게 말하면 잡탕에서 멀지 않다. ‘현충문’이 고려 시대 목조 건축의 전통을 표방한다면, 높이 솟은 ‘현충탑’은 일제 충혼탑의 확대 증보판이다. 풍수의 원리에 따라 조성된 이곳에서 우리는 조야한 형상의 이국적인 오벨리스크형 기념물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전쟁 초기에 죽은 함준호 장군을 기리기 위한 작은 비다. 희생 장병들의 위패를 모신 봉안관에는 그리스의 조각 양식을 연상시키는 ‘비천상’이 있다.
그러므로 기념문화의 측면에서 볼 때, 이 동작동 국립묘지는 엄격한 질서 속에서 자리 잡은 무질서를 여실히 보여준다. 임기응변과 무사유, 벤치마킹이라는 이름 속에 행해지는 저급한 모방은 진작 끝나야 했다. 그러나 기념의 시대가 도래한 지 오래되었어도,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가장 이상한 것은 ‘국가를 위한 죽음’을 현창하는 현충원의 방식을 ‘국가에 의한 죽음’을 추모하는 공간에서 답습하는 현상이다. ‘광주5.18민주묘지’가 대표적이다.
<이한열 열사 운동화> 사진 제공: 최호근
광활한 부지, 엄청난 규모의 민주의 문, 그에 어울릴 만큼 높이 솟은 추모의 탑, 그리고 군인묘지와 똑같이 일렬로 정돈된 묘지와 묘석에 이르는 ‘광주5.18민주묘지’의 풍경은, 이곳이 과연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사회를 염원했던 망자들을 기리기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내게는 염색한 군복을 할머니에게 입히고, 크기 줄인 군복을 어린 소년에게 입힌 것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므로 ‘광주5.18민주묘지’는 우리에게 기념의 문화를 생각하게 해주는 출발점이다. 이곳은 우리에게 과거의 경험을 잊지 않겠다는 결의가 세대를 넘어서는 기억의 창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내용물에 따라 포장지가 다르고 담아야 할 음식에 따라 그릇을 달리해야 하는 것처럼, ‘국가를 위한 죽음’을 기념하는 방식과 ‘국가에 의한 죽음’을 기념하는 방식이 같을 수는 없다. 부적절한 기념의 방식은 생생한 기억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기억의 정치에 힘써왔다. 희생에 바탕을 둔 이 기억의 정치가 아니었다면, 민주주의의 발전과 국민 권리의 신장도 없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제도적 구현을 위해 힘써온 기성세대에게는 사실 세련된 기념이 필요 없다. 아무 기념물이 없어도, 그럴듯한 기념공원이 없어도, 그들이 체험한 사건은 이미 생생한 기억으로 몸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 세대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그들에게는 민주항쟁으로 빛났던 1987년도 낯설고 먼 과거사일 뿐이다. 정서적 공감을 유발하는 기념, 시대적 요구에 따라 의미 번역을 도모하는 교육이 없다면, 과거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에벤에셀의 돌기둥을 역사의 현장에 세웠다고 해서, 구원의 감격이 천년을 넘어 전해지지는 않는다. 과거를 현재에 이어주는 것이 기억이라면, 우리는 기념을 통해서 이 기억에 생생한 기운을 계속해서 불어넣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1987년 6월의 민주항쟁이 세대를 넘어 계승될 수 있을까? 그 단서는 이한열 기념관에 있는 ‘주인 잃은 신발’ 한 짝과 연세대 교정에 세워진 이한열 추모 기념물 속에 있다. 또 영화 <1987> 속에서 우리는 기억의 소생과 세대 전승의 가능성을 본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기억의 정치판’에서 눈을 들어 ‘기념의 문화’를 궁리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 사회를 꿈꾸는 자들이 기념의 미래를 숙고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이제 국가의 시대와 더불어 거대한 석조 기념물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움직이는 기념물, 사라지는 기념물, 물성 없는 기념물까지 적극적으로 구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이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기념이다.
글쓴이 최호근은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Universität Bielefeld)에서 막스 베버(Maximilian Weber)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에 관한 다수의 책과 글을 발표했으며, 최근에는 기념시설 조성에 힘쓰면서 동서양의 기념문화 비교에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