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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57, Oct 2019

사회적 관점에서 기념의 문화

Culture of Commemoration from a Social Perspective

기념물은 돌로 된 거울(石鏡)이다. 심미적 가치 때문에 중요할 때도 있지만, 이 돌 거울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각 시대의 모습이 이 속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한 인물의 조상이나 군상, 기념비와 기념탑, 때로는 기념비적 건축물까지 포함해 ‘나이의 가치(Alterswert)’에 기대어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역사적 기념물이라고 부른다.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기억의 소실을 막기 위해 기록을 남겨왔다. 헤로도토스(Herodotos)가 남긴 『페르시아 전쟁사』의 목적이 고대 그리스 세계가 겪은 엄청난 사건이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히브리인들도 야훼의 기적적인 도움을 경험한 후 이 은총을 세세토록 기억하기 위해 그 자리에 커다란 돌기둥을 세웠다. ‘에벤에셀(Ebenezer)’이라고 명명된 이 거석에는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 새겨있다.
● 기획 편집부 ● 글 최호근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 19 stainless steel statues Lincoln Memorial on the National Mall in Washington D.C. USA Dedicated on July 27, 1995
Scultured by Frank Gaylord of Barre, VT and casted by Tallix Foundries of Beacon, NY © Kire Marince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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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근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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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에 저항하려는 사회적 본능을 표현하기에 돌처럼 좋은 재료는 없었다. 그렇기에 청동기 시대에는 고인돌을 세웠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도시의 언덕에 석조 신전을 세웠다. 기억 각인에 더 민감했던 나라는 로마제국이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훼파한 티투스(Titus) 장군은 로마로 돌아와 거대한 개선문을 세웠다. 이 개선문은 로마 시민들에게는 영광의 기념물이었으나, 고향을 잃어버린 채 이산의 운명으로 떠밀린 유대인들에게는 치욕의 기념물이었다. 

티베리우스(Tiberius)를 비롯한 로마의 황제들이 로마의 언덕에 세운 석조 원주와 개선문은 근대 서구 주요 도시들의 경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을 기리기 위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세워진 원주가 그렇고, 파리 샹젤리제 언덕 위에 있는 개선문, 베를린 중심에 서 있는 승전기념물(Siegessäule)이 그렇다. 정치적 인간(Zoon Politikon)의 본성에 가까운 기념물 세우기는 국민국가 성립 이후 더 빈번하고 대범하게 나타났다. 국민국가 간의 치열한 생존 경쟁이 크고 작은 전쟁을 유발하면서, 대중의 동원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이렇게 해서 조국에 대한 개인들의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국립묘지와 함께 무명 용사 기념물과 각양각색의 전승기념물이 유럽 곳곳에 조성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독일 라이프치히 외곽에 세워진 ‘민족대회전기념물’이다. 무명 용사들의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고졸한 옛 독일 양식을 차용해 건립한 이 기념물은 파리 에펠탑보다 더 높은 인공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되어왔다.




<민족대회전기념물> October 18th, 1913 Leipzig, Saxony, Germany © Andrey Shcherbukhin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석조 일색이었던 서구 기념의 풍경에 변화를 가져왔다. 조국의 승리를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른 용사들에 대한 숭배 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참전 국가들은 앞다퉈서 주요 전투와 전쟁영웅들의 주제로 한 기념조형물을 곳곳에 세웠다. 과거와 다른 것은 개인의 동상보다 청동 재질로 만들어진 군상들이 급속하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이오지마 기념물(Iwo Jima Memorial)’로 약칭되는미국 해병대 전쟁기념물이다. 거대한 석조 원반 위에 또다시 엄청난 크기의 청동 조형물이 얹힌 이 기념물은 바람에 펄럭이는 거대한 성조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 의미 있는 대상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호소하기 적합하다


사상자만 수만 명에 달할 만큼 치열했던 유황도 전투를 기억하기 위해 건립한 이 기념물은 규모의 웅대함과 조형적 완성도, 그리고 토포그래피(topography)의 힘 때문에 전쟁기념물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인간의 희생을 초래한 제2차 세계대전은 이오지마 기념물과는 또 다른 양식의 기념문화를 만들어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과거의 기념물이 조국의 영광과 승리한 전쟁, 그리고 대의를 위해 희생한 국민들을 현창하는영광의 기념물(Ehrenmal)’이었다면, 이후의 기념물은 인간의 희생을 성찰하고 전쟁의 무상함을 고발하는경고의 기념물(Mahnmal)’이 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것이살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Denkmal für ermordeten europäischen Juden)’이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이 전대미문의 기념물은 우리에게홀로코스트 상기기념물(Holocaustmahnmal)’이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유대인 석관을 모티프로 삼아 높이가 다른 2,711개의 직육면체 시멘트 기둥으로 조성된 이 회색빛 기념물의 복합체는 그사이를 방문객이 오갈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하나의 도심 기념공원으로 봐도 좋겠다. 그러나 이곳은 석관과 석관 사이의 간격이 매우 좁게 설계된 탓에, 그 사이를 두 명의 성인이 함께 이야기 나누며 걸어갈 수 없다. 그렇기에 매우 불편한 기념공원이다


그러나 방문객은 이 장소가 비극적 죽음을 애도하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기꺼이 그 불편을 감수한다. 석관 사이를 걸으며 느낀 감정은 지하에 마련된 작은 규모의 추모 기념관에서 그 이유를 발견한다. 지상에서 종횡으로 줄 맞춰 조성된 시멘트 석관들을 통해 대량학살이 거대한 파도처럼 표현되었다면, 지하 기념관에서는 희생자들의 사진이 등장하고 가족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때문에, 익명성의 천막이 거둬지는 느낌이다. 이 기묘한 경고성 기념물은 나치 과거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독일 사회의 오랜 의지를 표현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두 세대를 거치며 확인된 독일 국민의 집단적 반성 의지가 유대계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n)의 착상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펠릭스 드 웰던(Felix Weihs de Weldon) <해병대 전쟁 기념비(The Marin Corps War Memorial)> 

November 10, 1954 Arlington, Virginia, USA © Brandon Bourdages





전쟁에 대한 사회의 성찰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있다. ‘베트남 전쟁 기념물(Vietnam War Memorial)’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20대의 대학생 마야 린(Maya Lin)이 설계한 이 기념물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첨탑의 양식이나 용맹한 장병들의 군상을 처음부터 포기했다. 전몰 장병의 명단이 적혀있는 긴 검은색 화강암 벽이 둔각의 형태로 지면 아래에 길게 세워져 있다. 방문객은 벽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서 벽면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마감처리 덕분에 거울처럼 빛나는 벽면에 새겨진 망자들의 이름 위에서 자기 얼굴을 확인하면서 사뭇 진지해진다. 


이 기이한 기념물은 기이한 전쟁 경험에 대한 미국 사회의 숙고의 산물이다. 만약에 베트남 전쟁이 개전에서부터 정당했거나, 미국이 이긴 전쟁이었다면, 이처럼땅으로 꺼지는식의 설계는 없었을 것이다. 망자를 추모하기 위해 그렇게 설계했다고 하더라도, 마야 린의 작품이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선정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베트남 전쟁 기념물 건립을 요구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파격적 재현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통적인 군상을 추모의 벽 중앙에 추가로 배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 제안은 공모전 당선자인 린이 분명하게 거절했다


그 결과 추모의 벽 양 끝 부분에 이름들이 새겨진 벽면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3-4인으로 이루어진 참전용사 입상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 군상도 승리의 확신에 찬 과거의 조형 방식과는 문법을 달리했다. 지치고 겁먹은 표정으로 추모의 벽에 적힌 동료 장병들의 이름을 바라보는 모습, 그리고 중상 입은 장병을 가슴에 품은 채 비탄에 빠진 간호 장교들의 조상이 그곳에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베트남 전쟁기념물은 전쟁 경험에 관한 미국 사회의 다양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상이한 기대를 복합적으로 반영한 것이다이제 현대 국가 기념물에서 국민의 동원 의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민주화가 진척되고 사회가 다원화될수록, 모노톤의 색채, 단일한 목소리를 공공 기념물에서 찾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는 추세다. 워싱턴 D.C.의 기념공원에 세워진 베트남 전쟁기념물과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국전 참전기념물은 이처럼 사회의 다성성(多聲性)과 다원성을 중시하는 현대 기념물의 문법을 잘 보여준다. 이제 우리나라의 기념물 풍경을 바라보자. 근대 국민국가 이후 우리의 생각과 풍경에 영향을 준 최초의 서구식 기념물은 아마 독립문일 것이다




<현충탑> 1967 국립서울현충원, 서울, 대한민국 사진 제공: 최호근





소박하다 못해 조잡하기까지 한 복제품처럼 보이지만, 이 기념물이야말로 독립을 향한 시대의 염원을 담고 있기에, 역사적 가치를 충분히 지닌 우리 국민 기념물의 시초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우리의 도시경관과 함께 기념의 풍경도 빠르게 바뀌었다. 목조 일변도의 공공 건축이 석조 중심으로 바뀌었고, 일본의 군국주의를 표상하는 충혼탑이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1945 8 15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지배자들은 이 땅에서 떠나면서 일본풍의 건축이 빠르게 사라진 데 비해, 일본화된 서구식 기념의 풍경은 쉽게 소멸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곳곳에 세워진 승전기념탑은 일본 충혼탑의 복제품이었고, 전몰 장병 기념조형물은 일본이 자랑했던육탄 3용사기념물의 재판과 다름없었다.


국립서울현충원이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의 전통과 서구식 전통이, 또 일본의 전통과 일본식으로 전유된 서구의 전통이 계통도 두서도 없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퓨전과 융합이지만, 인색하게 말하면 잡탕에서 멀지 않다. ‘현충문이 고려 시대 목조 건축의 전통을 표방한다면, 높이 솟은현충탑은 일제 충혼탑의 확대 증보판이다. 풍수의 원리에 따라 조성된 이곳에서 우리는 조야한 형상의 이국적인 오벨리스크형 기념물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전쟁 초기에 죽은 함준호 장군을 기리기 위한 작은 비다. 희생 장병들의 위패를 모신 봉안관에는 그리스의 조각 양식을 연상시키는비천상이 있다


그러므로 기념문화의 측면에서 볼 때, 이 동작동 국립묘지는 엄격한 질서 속에서 자리 잡은 무질서를 여실히 보여준다. 임기응변과 무사유, 벤치마킹이라는 이름 속에 행해지는 저급한 모방은 진작 끝나야 했다. 그러나 기념의 시대가 도래한 지 오래되었어도,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가장 이상한 것은국가를 위한 죽음을 현창하는 현충원의 방식을국가에 의한 죽음을 추모하는 공간에서 답습하는 현상이다. ‘광주5.18민주묘지가 대표적이다





<이한열 열사 운동화> 사진 제공: 최호근





광활한 부지, 엄청난 규모의 민주의 문, 그에 어울릴 만큼 높이 솟은 추모의 탑, 그리고 군인묘지와 똑같이 일렬로 정돈된 묘지와 묘석에 이르는광주5.18민주묘지의 풍경은, 이곳이 과연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사회를 염원했던 망자들을 기리기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내게는 염색한 군복을 할머니에게 입히고, 크기 줄인 군복을 어린 소년에게 입힌 것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므로광주5.18민주묘지는 우리에게 기념의 문화를 생각하게 해주는 출발점이다. 이곳은 우리에게 과거의 경험을 잊지 않겠다는 결의가 세대를 넘어서는 기억의 창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내용물에 따라 포장지가 다르고 담아야 할 음식에 따라 그릇을 달리해야 하는 것처럼, ‘국가를 위한 죽음을 기념하는 방식과국가에 의한 죽음을 기념하는 방식이 같을 수는 없다. 부적절한 기념의 방식은 생생한 기억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기억의 정치에 힘써왔다. 희생에 바탕을 둔 이 기억의 정치가 아니었다면, 민주주의의 발전과 국민 권리의 신장도 없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제도적 구현을 위해 힘써온 기성세대에게는 사실 세련된 기념이 필요 없다. 아무 기념물이 없어도, 그럴듯한 기념공원이 없어도, 그들이 체험한 사건은 이미 생생한 기억으로 몸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 세대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그들에게는 민주항쟁으로 빛났던 1987년도 낯설고 먼 과거사일 뿐이다. 정서적 공감을 유발하는 기념, 시대적 요구에 따라 의미 번역을 도모하는 교육이 없다면, 과거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에벤에셀의 돌기둥을 역사의 현장에 세웠다고 해서, 구원의 감격이 천년을 넘어 전해지지는 않는다. 과거를 현재에 이어주는 것이 기억이라면, 우리는 기념을 통해서 이 기억에 생생한 기운을 계속해서 불어넣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1987 6월의 민주항쟁이 세대를 넘어 계승될 수 있을까? 그 단서는 이한열 기념관에 있는주인 잃은 신발한 짝과 연세대 교정에 세워진 이한열 추모 기념물 속에 있다. 또 영화 <1987> 속에서 우리는 기억의 소생과 세대 전승의 가능성을 본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기억의 정치판에서 눈을 들어기념의 문화를 궁리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 사회를 꿈꾸는 자들이 기념의 미래를 숙고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이제 국가의 시대와 더불어 거대한 석조 기념물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움직이는 기념물, 사라지는 기념물, 물성 없는 기념물까지 적극적으로 구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이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기념이다.  

 



글쓴이 최호근은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독일 빌레펠트 대학교(Universität Bielefeld)에서 막스 베버(Maximilian Weber)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이후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에 관한 다수의 책과 글을 발표했으며최근에는 기념시설 조성에 힘쓰면서 동서양의 기념문화 비교에 관심을 갖고 있다현재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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