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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57, Oct 2019

더 화이트큐브: 한국 미술계에서 당신의 운을 시험해 보세요

20219.8.29 - 2019.9.22 인스턴트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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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정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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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은 가혹하지요. ‘공정한’ 운이라면 더더욱



조그만 화이트 큐브에 원형의 테이블과 네 개의 의자, 그리고 주사위가 구르는 보드게임 판. 이 모두는 제도 비판이라 하기엔 미흡하며, 완전히 유희적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전시를 조성한다. 김정모의 전시 <더 화이트큐브: 한국 미술계에서 당신의 운을 시험해 보세요>는 서문에서 밝히기를빈곤한 현실을 전제했다. 그러나 어떤 현실이 전시를 석연치 않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 현실을 두고 빈곤 혹은 그에 준하는 절하된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 게임의 전제가 문제적으로 보인다. 물론, 김정모의 게임은 일정 수준 현실을 재현했다. 게임에서 미디어, 입체, 퍼포먼스, 평면 등을 매체로 택한 구성원들은, 주사위를 던져 결정된 확연한 계급차(흙수저/금수저/다이아수저), 학력차(대졸/석사/박사)를 드러내며 게임에 참여한다


성원들은 수 차례에 걸친 게임 동안 유수의 제도 미술관, 레지던시, 갤러리 명이 적힌 카드를 취하며, 각자의 개인전 및 단체전의 경력을 쌓아야 한다. 전시 참여로 인해 새로운 비용, 인맥도 얻을 수도 있다. 그렇게 얻은 성과는 경력 란에 30개의 동그라미 스티커, 인맥 란에 16개의 세모 스티커를 채우면서 기록된다. 전체 게임이 끝나면, 참여자들은 기록을 바탕으로올해의 작가상을 노려볼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은 현실보다 단순하고, 그래서 잔인했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영리하게 비용과 인맥을 사용한 이들이 두각을 드러냈고, 안타깝게도 초기 자본이 없던 흙수저 출신의 퍼포먼스 아티스트는 계속 기금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다른 금수저 출신 아티스트들과 너무 격차를 벌리고 말았다. 게임 중반이 지나자 성원들은 모두 한 뜻으로 흙수저 출신 퍼포머의 성공, 즉 전시나 레지던시 참가 카드를 취할 수 있게 된 때마다 박수를 쳤다. 그의 성공에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올해의 작가상후보를 노리고 있는우리에게 그가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매 판마다 카드를 얻으면서 차분히 경력과 인맥을 쌓는 대신, 가끔 도박이 하고 싶으면 황금열쇠를 사용할 수도 있다




<더 화이트 큐브> 2019 

나무,  종이에 인쇄, ABS 29×29×5cm





황금열쇠에 따르면, 운이 닿은 아티스트는 큐레이터 혹은 평론가의 추천으로 굵직한 비엔날레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의 운이라는 것이 항상 좋기만 하진 않은 것처럼 황금열쇠는 낙심할 결론을 도출하기도 하고, 사실 그게의 문제인가 싶은 것들도 건드린다. 가령, ‘#미투표절 의혹’. 게임에서 나와 경쟁을 다투던올해의 작가상유력 후보자는 황금열쇠에 운을 시험했다가 미투와 표절 의혹에 걸렸다. 그런데 이 카드가 게임에서 하는 역할 - 카드를 뽑은 본인이미투에 연루된 당사자인 이유로 한 판을 진행할 수 없는 페널티 (표절 카드도 마찬가지다.) - 은 적잖이 당황스럽다. 여차하면 (재수 없으면) 걸려드는 것이 미투 혹은 표절이라는 이 전제는 대체 무엇인가?


미술계라는 현실을 비유하는 전체 게임 판, 행위자의 행위에 대해서 경력과 인맥이라는 데이터 밖에 남기지 않는 해당 게임의 구조가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에 윤리적 주체, 행위자의 속성에 관한 의문은 한 바퀴 판을 돌리지 못하는 정도의 불운을 야기할 뿐이다. 이 지점에서 게임은 완전한 비관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현실을 웃도는 염세적 시선. 그럼에도 김정모의 게임은 스스로의 선명한 비관주의를 희석한다. 게임은 공정성을 논하기 어려운 작금의 시대상과 맞물려 리얼과 리얼리티를 떨구고 한없이 가벼워진다


법의 논리 안에 선 자와 밖에 선 자, 특혜 혹은 차별의 경계에 선 자로서 자신을 끊임없이 정당화하고 검열하는 시대에 공정성을 말하기란 쉽지가 않다. 약간의 기지와 주사위 놀이에을 시험하는 이 게임판, 학력과 부모 재력을 기본값으로 갖는 게임 보드 안에서공정성을 논하기란 확실히 무리인 것이다. (전시 서문은 이것이 공정한 게임이라고, 주사위 놀이를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고 쓴다.) 미술계라 불리는 작은 현실에 대한 이상한 염세주의가 전시를 구성한다. 그에 더해, 게임이라는 가상의 구조체는 폭력과 염치를 감추어 버리는 죄의식의 만연함을 통제 기제 안에 편입시킨다. 이렇듯 김정모가 제안하는 게임은 비관을 품고 불편을 야기하지만, 이에 대한 공통의 감각을 구하지 않은 채 진행에 박차를 가한다. 어떻든 게임은 끝났고, 퍽 기분이 산뜻했다. 나는 황금색 스티커로 된올해의 작가상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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