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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40, May 2018

1986년 이후 대안적인 음악과 미술

Germany

Beauty is in the Street! Underground and Improvisation.
Alternative Music and Art after 1968
2018.3.15-2018.5.6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무대 위에 연주자들이 등장했다. 색소폰을 들고 올라선 피터 브뢰츠만(Peter Brötzmann)은 백발에 흰 수염을 갖춘 노인의 모습이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사진에서처럼 그는 여전히 풍채 좋고, 당당한 포즈를 지녔다. 자유로운 옷차림을 고수했다는 이유로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직접 독자적인 재즈 축제를 만들어버린 그였다. 청년의 그는 지금보다 더 패기 넘친 모습이었을까? 이날만큼은 그도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색소폰의 즉흥적인 선율이 무대를 휘저었고, 케이지 하이노(Keiji Haino)의 날카로운 보컬과 기타 멜로디, 그리고 드럼 연주가 더해졌다. 모든 악기가 전력을 다해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쯤, 노장의 연주자들은 음악으로 극렬히 저항했던 때의 무대로 회귀하고 있었다.
● 박은지 독일통신원 ● 사진 Akademie der Künste 제공

Peter Brötzmann and Albert Mangelsdorff 'Free Music Market'(Quartier Latin/Berlin) 1971 Photo Werner Bethsold ⓒ Werner Bethsold/ FMP-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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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지 독일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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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어시스턴트로 활동하기도 했던 피터 브뢰츠만은 1968년 ‘Free Music Production(이하 FMP)’를 조직한 초기 멤버다. ‘베를린 재즈페스티벌(Jazzfest Berlin)’의 무대에 오르기 위해 젊은 연주자는 당시 관례에 따라 정해진 의상을 입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에게 단순히 의상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주류 음악계가 지닌 권위와 모순, 그 안에서 억압적인 상황에 놓인 젊은 연주자가 겪는 부당함에 관한 것이었다. 끝끝내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그는 ‘Total Music Meeting(TMM)’을 기획한다. 그리고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재즈곡을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조건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서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뮤지션들의 작은 모임에서 출발했지만, FMP는 사회주의 체제하에 있던 동유럽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 DDR), 기타 유럽 국가와 미국의 연주자들과 교류하는 국제적인 조직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이는 FMP의 활동이 음악적 고민에 국한되지 않고, 당대 시대정신에 부합한 예술적 실천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Akademie der Künste  ⓒ Mareike Wenzlau  




올해는 1968년 파리에서 일어난 5월 혁명이 50주년 되는 해이다. 당시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가1968년을 전후하여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저항운동을 통틀어 ‘68혁명’이라고 부른다면, 이 사건은 우리 삶에 여전히 유효한 패러다임을 가져다준 문화적 혁명이었다. 68혁명’은 청년과 노동자들에 의해 시작됐다. 그러나 이는 당시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음악과 미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FMP의 활동은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에게 즉흥연주는 사전에 정해진 규칙이 아닌, 연주자의 직관에 음악을 맡긴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기성 사회의 권위적인 분위기에 억압되었던 인종, 계층, 성에 속한 구성원들이 광범위하게 연대했던 당시 시대적 상황처럼, 그들은 남성 중심적인 음악신에서 소외된 여성 음악인들과 체제와 정치적 이념에 의해 핍박받던 연주자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시각예술과 문학, 무용 등 다방면의 예술가들과 협업했던 FMP의 활동은 공연뿐 아니라 전시와 토론, 녹음, 출판 등 다양한 형태로 대중 앞에 선보였다. 베를린 예술아카데미(Akademie der Künste)에서 진행 중인 전시 <1968년 이후 대안적인 음악과 미술(Under ground and Improvisation. Alternative Music and Art After 1968)>은 켜켜이 쌓인 세월만큼이나 방대하게 축적된 FMP의 아카이브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했다. 1969 FMP의 첫 전시가 열리기도 했던 예술아카데미의 전시장에는 기록 영상과 대형 출력된 이미지들이 당시의 무르익었던 분위기를 대신해서 전달했다. 전시된 자료들은 이제껏 FMP가 발매했던 앨범과 포스터, 출판물이 주를 이뤘으며, 전시 기간 내에 기획된 다수의 연계공연과 토크 프로그램 등이 시대적 간극을 상상력으로 좁힐 수 있도록 도왔다. 





 Wiktor Gutt & Waldemar Raniszewski 

<Wyrazy na twarzy(Expressions on a Face)> 

1987   Wiktor Gutt / Collection of Muzeum Sztuki, Łódz

 



이번 전시는 FMP의 아카이브와 함께 동유럽의 미술과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관한 작품들도 선보였다. 이는 폴란드의 도시 우치에 위치한 근대 미술관에서 기획된 전시 일부가 베를린에 순회한 것으로1), 주로1968년부터 1994년까지 동독과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사회주의 정권에 대항적인 태도를 미적 태도로 발전시켰던 예술가들을 소개한 것이다. 전시는 FMP의 아카이브 자료와 동유럽 작가들의 작품이 분리되어 전시되었지만, 68혁명’ 이후 대항문화의 징후들을 담고 있는 예술 활동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전시로 읽히는 데 무리가 없었다. 동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하나의 범주에 속하기 어려운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사진과 텍스트, 이미지, 3차원의 오브제 등을 콜라주 한 작품과 음악과 미술에서의 이벤트들을 기록한 영상이었다. 


카탈린 라딕(Katalin Ladik)의 영상 <Poemim>은 그가 자신의 얼굴을 투명한 판지에 일그러뜨리면서 시작된다. 그는 숨을 마시고 내뱉는 소리를 내다가 시를 낭독하기도 하고, 이내 자신의 신체를 활용해 여성성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그의 영상작품 옆에는 종이 콜라주 작품 <Sunset> <Loc k>가 자리했다. 이 작품들은 텍스트와 악보가 부분적으로 조합된 것인데, 예측 불가능하게 진행되었던 퍼포먼스와 달리 정제된 색면과 선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주로 잡지에서 가져온 사진과 텍스트, 악보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음률체계를 형성하고, 그것을 악기로 변환한 사운드를 제작했다. 스스로를 시인으로 표현했듯, 그의 관심사는 글자를 새롭게 조합/배열하고, 그것을 시각적 혹은 청각적 형식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E-E) Evgenij Kozlov <KINO> 1985  

(E-E) Evgenij Kozlov / Collection of Muzeum Sztuki, Łódz  





앞선 작품이 집요한 미적 실험의 결과물이었다면, 엘스 가브리엘(Else Gabriel)의 작업은 보다 일시적이고 열린 구조를 갖는다. <미디어타워(Medientrum)>는 일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다양한 오브제들을 쌓아 둔 것이다. 그는 작은 냉장고와 선반, 라디오를 차례로 쌓고, 그 안에 음식물과 책, 조명 등 잡동사니들을 수집해두었다. 동독의 사회참여적인 예술가 그룹 ‘Auto-Perforation Artists’에 속했던 그는 1988년 라이프치히의 전시에서 퍼포먼스와 낭독회, 강연, 공연 등 비물질적인 형태의 작업을 선보였으며, 타워에 가득한 음식과 오브제들은 당시 전시를 방문한 관람객들이 전시 참여를 위해 맞바꾼 것들이다. 


1970년대 서베를린과 마찬가지로, 동유럽에서도 음악과 미술, 영화와 퍼포먼스가 뒤얽힌 축제들이 존재했다. 루츠 담벡(Lutz Dammbeck)의 작품 <Storyboard REALFilm> 1985년 당시 동독의 도시, 크로스빅에서 개최된 ’인터미디아(Intermedia)‘를 위해 제작된 것이다. 그의 기록영상에는 사진과 영상을 활용한 초현실적인 무대와 소품, 추상적인 형태의 의상디자인과 즉흥적인 퍼포먼스로 가득한 무대가 등장한다. 체코에서도 공산당의 예술가 검열이 강화되면서 프라하를 중심으로 한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프라하 재즈 데이(Prague Jazz Days)’는 당시 음악인들이 당국의 감시에 맞서 재즈와 록, 펑크 음악을 자유롭게 공연할 수 있던 플랫폼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잡지(Jazz Petit) 출판과 실험 영화제작, 연극, 퍼포먼스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함께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빅토르 구트(Wiktor Gutt)는 주로 당시의 음악 축제에 참가한 인물들을 피사체로 삼았다. 






Zorka Ságlová <Throwing Balls(Házení mícu) 

in Borín Pond, Happening in Pruhonice> April 1969 

 Ján Sagl / Collection of Muzeum Sztuki, Łódz, VG Bild-Kunst, Bonn 2018





붉은 별이나 동물의 얼굴, 추상적인 패턴을 그리고 음악축제에 참가한 젊은이들의 얼굴 사진에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느끼는 흥분과 비장함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페이스 페인팅은 주로 그때의 기분을 즐기거나 개성을 표출하는 방법이지만, 사진을 찍었던 1970~80년대의 폴란드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작가는 당시 이러한 분장이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의사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경찰에 연행되어 강압적으로 얼굴이 씻기기도’ 했다고 회고했다.2)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영화를 나치 정권의 ‘정치의 예술화’에 맞서는 ‘예술의 정치화’를 실천할 수 있는 매체로 보았다. 


파시스트의 선동에 마비된 대중의 의식을 깨우기 위한 예술적 수단으로써 영화를 언급한 것이다.3) 68혁명’ 전후의 예술가에게 정치적 실천과 예술적 실천은 분리되지 않는 하나였다. 때로는 미적 목적보다 사회적 목적을 우위에 두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과 달리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위해 공통된 양식이나 조형언어를 따르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정치적 실천과 사회참여는 창작자의 자유를 관철하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시민으로서 해야 할 정치적 요구와 예술가로서 수행해야 할 미학적 실천 사이에서 동요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이는 한때 극렬히 저항했던 예술가의 빛바랜 흔적이기보다 현재 진행 중인 동시대 예술가들의 고민에 가까워 보였다.  

 

[각주]

1) Notes from the Underground. Art and Alternative Music in Eastern Europe, 1968-1994 Museum Sztuki in Ł ódz, 2016-2017

2) <Alternative music and art after 1968> 전시 카탈로그 p. 56.

3)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1936

 


글쓴이 박은지는 성신여자대학교에서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취득 후, 국립현대미술관 인턴을 거쳐()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국제교류를 위한 전시업무를 담당했다.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교(UDK) 미술교육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아티스트 북을 리서치하고 그것에 관한 이론 및 전시기획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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