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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74, Mar 2021

미술과 다큐멘터리즘

Art and Documentarism

“다큐멘터리의 이미지 주제는 그것의 피사체도 아니고 리얼리티도 아닌, 대상이 그 앞에서 빛나게 할 수 있는 현재이다.” 히토 슈타이얼은 저서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에서 미술을 넘어 현실 세계에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다큐멘터리의 형식과 표현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큐멘터리 이미지가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 현실이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예술에서 다큐멘터리는 어떠한 모습을 비추고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해 다큐멘터리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이 무엇인지, 다큐멘터리적 태도의 창작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고민하고 이미지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 그리고 그 끝에 서있는 동시대 미술, 다큐멘터리즘을 살핀다. 여기에 놓인 이론과 조언은 우리 시각이 믿는 맹목적 진실성에서 한껏 벗어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 기획 정일주 편집장 ● 진행 김미혜 기자

라리사 샌소어(Larissa Sansour) 'In the Future They Ate from the Finest Porcelain' 2019 film 29min © the artist and Søren L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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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라 이미지 문화연구자, 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권태현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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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No. 1 

다큐멘터리적 태도: 

현실 기반의 비판적 활동에 관하여_이나라


SPECIAL FEATURE No. 2 

리얼리즘 - 재현 그리고 이미지의 진실_서동진  


SPECIAL FEATURE No. 3

스트리밍되는 세계와 다큐멘터리_권태현





라리사 샌소어(Larissa Sansour) <In Vitro> 2019 film, 2 channels 28min © the artist and Søren Lind





Special feature No. 1

다큐멘터리적 태도: 현실 기반의 비판적 활동에 관하여

● 이나라 이미지 문화 연구자, 동의대 영화·트랜스미디어연구소 전임연구원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documentary(프랑스어 documentaire)’는 우선 프랑스어 명사 도큐멍(document)에서 파생된 형용사이자 명사다. 도큐멍은 문서, 기록, 자료를 뜻한다. 정보를 기입 내지 저장하고 있는 물리적이거나 (예를 들어 종이) 물리적이지 않은 (예를 들어 정보 파일) 지지체다. 도큐멍은 동시에 문서 등 지지체에 저장된 정보인데 기록, 확인 등의 쓸모를 가진다. 따라서 도큐멍은 자료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는 문서, 기록, 자료와 관련된 작업을 지칭할 것이다. 정작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다큐멘터리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다큐멘터리적 태도의 창작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다큐멘터리 연극 <평범한 고유성-인물 삼면화 I(Singularités ordinaires-TRIPTYQUE DE LA PERSONNE TOME 1)>1)에 대한 묘사로 ‘다큐멘터리적 태도’2)를 조망하는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무대에 세 사람의 인터뷰 영상이 상영된다. 프랑스 농촌에 거주하는 86세의 아르튀는 숨어서 음악을 배웠다. 64세의 윌프리드는 은퇴한 전직 프랑스 국립 오페라의 발레리나로, 1970-1980년대 포스트 모던 극을 창작하면서 주류 발레계에서 멀어졌다. 


41세의 미셸은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이탈리아 아르메니아계 가족에 의해 고등 교육을 받은 아프리카 출신 여성으로 바에서 시간을 보내며 내내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관객은 세 인물의 인터뷰 자료를 보고 듣는다. 세 사람의 일상, 충동, 갈등이 그들의 목소리, 표정, 쉼표 속에 전달된다. 연극 <평범한 고유성>은 한편으로 현실(reality)에 다가가 현실을 ‘조사’하고 ‘포획’해 작업의 ‘자료’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적이다. 즉 실존하고 있는 인물의 삶과 증언을 다루는 작품, ‘현실에 기반한 작품(the reality-based work)’3)인 셈이다.


인터뷰가 상영되는 무대에선 콜렉티브 멤버들이 퍼포머로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음악을 연주하며, 코멘트를 덧붙인다. 콜렉티브의 인류학적 연구는 실재 인물들의 몸과 날 것의 말, 일상을 연극 무대로 옮겨 오고, 무대에서 벌어지는 콜렉티브의 퍼포먼스는 일상을 모방하며, 심지어 일상이 되고자 한다. <평범한 고유성>은 다큐멘터리적 개입으로 희곡과 삶, 무대와 일상, 배우와 실존 인물 사이의 전통적인 경계를 지운다. 아르튀나 윌프리드의 계획되지 않은 삶의 파동이 희곡의 유기적 구성을 방해하며 일상의 시공간은 무대는 통일성에 균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In Free Fall> 2010 Video (color, sound) 32min © 2021 Hito Steyerl





21세기 예술의 “다큐멘터리적 전회”를 촉발한 계기로 우리는 1997년 카트린 다비드(Catherine David)가 예술 감독을 맡은 ‘도큐멘타 X (documenta X)’, 2002년 오쿠이 엔위저(Okuwui Enwezor)의 ‘도큐멘타 11(Documenta11)’, ‘도쿠멘타 11’의 협력 큐레이터였던 마크 내쉬(Mark Nash)가 2004년 무빙 이미지를 중심에 두고 기획한 <진실과의 실험(Experiments With Truth)>4), 2003년 시작된 ‘코펜하겐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Copenhagen International Documentary Festival, CPH:DOX)’, 2010년 초입 작가, 감독, 큐레이터, 연구자들이 참여한 ‘베를린 다큐멘터리 포럼(Berlin Documentary Forum)’ 등의 행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의 다큐멘터리 실천은 사진, 영화, 무빙 이미지 분야 너머 전 방위적으로 확대된다. <평범한 고유성>이 예시하는 것처럼 문학, 연극, 춤, 만화, 서커스 등에서도 다큐멘터리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이 1926년 경 에스키모를 기록한 플래허티(Flaherty)의 영화 <모아나(Moana)>에 대한 리뷰에서 ‘다큐멘터리’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후 20세기 내내 주로 사진이나 영화처럼 인덱스 이미지를 생산하는 매체의 특정 장르를 지칭하던 낱말은 21세기에 이처럼 의미의 외연을 확대하게 된다. 다큐멘터리는 이제 인덱스 이미지를 반드시 산출하거나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기반의 실천 양식을 지칭하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진실, 정보, 객관성 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문법을 갱신하고 확장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출현 역시 목격하고 있다. 물론 다큐멘터리의 확장된 영역, 예를 들어 다큐멘터리 문학이 21세기에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닌 것처럼 다큐멘터리 문법의 갱신 역시 초유의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 다큐멘터리 영역의 기술적 혁신은 문법의 혁신을 야기한다.  1960년대 경량 카메라와 동시 녹음 기술의 등장은 다큐멘터리 제작의 문턱을 낮추고 피사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장 루슈(Jean Rouch)와 같은 인류학자, 에드가 모랭(Edgar Morin)과 같은 사회학자의 시선이 담긴 민속지 다큐멘터리가 출현했다.  


2012년 루시앙 캐스탱 테일러(Lucien Castaing-Taylor)와 베레나 파라벨(Véréna Paravel)이 고프로(GoPro) 카메라로 이제껏 잡아내지 못했던 대양 원양 어선의 감각을 포획한 것도 마찬가지의 사례라 할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드론, 3D, 디지털 시각화 기술 등에서 창의적 언어를 발견해나간다. 기술적 혁신의 차용이 아니더라도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다큐멘터리적 기록과 픽션적 구성의 교차, 공적 주제와 사적 목소리의 공존, 인류학적 연구, 시, 퍼포먼스의 자유로운 차용을 목격하는 일은 이제 더는 낯설지 않다.  






‘베를린 다큐멘터리 포럼 3(Berlin Documentary Forum 3)’ May 29-June 1, 2014 

at Haus der Kulturen der Welt Michael Baers: An Oral History of Picasso in Palestine Yazid Anani,

 Michael Baers, Dalia Taha, Robert Hamelijnck, Nienke Terpsma & Samir Harb

 (from left to right) © Marcus Lieberenz / Haus der Kulturen der Welt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나 할 포스터(Hal Foster) 같은 이론가는 다큐멘터리나 아카이브의 확장된 형식을 고찰하면서 정치적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에 전력을 다했다. 랑시에르는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규정을 새롭게 하면서 두 장르 사이의 이분법을 폐기한다. 랑시에르는 진실을 모방하지만 진실이 아닌 이야기라는 픽션에 대한 전통적인 규정을 대신하여 기억을 조직하는 하나의 기술로 픽션을 규정한다. 동시에 랑시에르는 다큐멘터리(또는 픽션)의 확장된 형식을 “다큐멘터리적 픽션”이라 명명한다.5) 랑시에르는 다큐멘터리적 픽션의 이미지와 말하기 방식을 아리스토텔레스적 필연성, 서사적 핍진성, 진실임직한 것(vraisemblance)을 모방하는 ‘진실 효과’의 생산에 골몰하는 이미지와 말하기의 방식과 구분하고 싶어 했다. 


다큐멘터리적 픽션은 진실 효과를 생산하는 이미지나 말하기 방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미적 예술 체제’ 시대의 민주주의적 쓰기 사례인 셈이다. 그러므로 다큐멘터리적 픽션은 필연성과 핍진성의 서사가 삭제한 몫 없는 자들의 몫, 미시 서사를 호출한다. 다큐멘터리적 픽션은 이질적 미디어, 이질적 시간, 이질적 담론의 교차를 제안하고, 해방적 기능을 수행하는 정치적 예술이다. 포스터는 다큐멘터리라는 용어 대신 ‘아카이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정치적 이미지의 아카이브’라는 개념으로 ‘물리적 현실’을 방기하지 않고, 역사에서 추방된 정보의 몫을 되찾으며, “연결될 수 없는 것을 연결하려는” 21세기 무렵의 진보적이고 정치적인 예술의 실천을 소묘하고자 했다.6) 마찬가지로 에리카 발솜은 다큐멘터리를 특정 카테고리 또는 장르로 정의하는 대신 하나의 비판적 방법으로 정의했다. 이 비판적 방법은 세계의 가변적이고 다층적인 현실을 우선 고려하는 행위, 참여, 창작의 태도를 뜻한다.7)






‘베를린 다큐멘터리 포럼(Berlin Documentary Forum)’ June 2-June 6, 2010

at Haus der Kulturen der Welt Product of Other Circumstances, Xavier Le Roy, Performance






포스터는 <실재의 귀환>에서 1960년대 이후 후기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두, 시민권 운동의 확산이 미술의 영역을 어떻게 확장했는지 언급한 바 있다. 그는 1960년대 이후 매체 탐구, 전시 공간에 대한 지각, 현상학적 탐색을 수행했던 미술이 이후 사회학적인 것과 인류학적인 것을 지향하며 담론적 네트워크로 이동한다고 주장한다.8) 이러한 인류학적 전회 속에서 시각예술의 다큐멘터리즘 또는 다큐멘터리적 태도 역시 부상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류학적 다큐멘터리스트의 등장으로 미술은 예술적 자율성의 환상뿐 아니라 백인, 성인, 남성, 인간 중심의 시각을 벗어날 기회를 얻는다. 


시각 예술가들은 이제 문서고의 안과 밖을 헤집으며 공식적 기록과 기념비가 배제했던 기록, 타자들의 기록을 새로이 발견하고자 한다. 이들은 발견한 것들의 맥락을 연구하며, 기록과 연구의 결과들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평범한 고유성>의 경우 콜렉티브 GdRA의 구성원 크리스토프 륄(Christophe Rulhes)과 줄리앙 카시러(Julien Cassier)가 세 인물의 인터뷰를 수행했다. 륄은 인류학자이자, 작가, 연출가, 작곡가이고, 카시러는 안무가, 무대감독이자 곡예사다. 이들의 다큐멘터리 연극은 협업의 소산으로, 연구자, 영상 연출가, 뮤지션, 서커스 곡예사, 연극배우, 시각 예술가, 무용가, 디지털 미디어 아티스트들과 함께 협업한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Liquidity Inc.> 2014 Video (color, sound; 30:00 minutes)

 wood, plastic, and lounge seating Acquired through the generosity of the Acquisitions 

Circle Installation view of <Hito Steyerl: Liquidity Inc.>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Boston, 

2017–2018 © 2021 Hito Steyerl Photo: Charles Mayer





그러나 다큐멘터리적 예술이 늘 진실을 구출하고 비판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다큐멘터리적 예술이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현실을 간단하게 독해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다큐멘터리적 재현이 진실을 확실하게 보증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다큐멘터리적 예술은 비판에 실패한다. 다큐멘터리적 재현 역시 특정한 진실을 생산하는 담론에 속하기 때문이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다큐멘터리와 진실, 권력이 맺고 있는 이중적인 관계에 주목하면서도 여전히 다큐멘터리적 형식의 가능성에 신뢰를 보낸다. 슈타이얼은 진실을 생산하는 권력에 결부되는 다큐멘터리를 인간의 언어로서의 다큐멘터리라 지칭하고, 사물의 언어로서의 다큐멘터리에서 힘을 발견했다. 


진실에 대한 회의 없는 믿음을 생산하는 정치를 비판할 수 있는 힘 말이다.9) 사물의 언어를 가시화하는 다큐멘터리는 재현의 객관성, 정확성을 통해 다큐멘터리적 진실을 장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다큐멘터리는 다큐멘터리적 ‘불확실성’을 핵심으로 삼는다.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 다큐멘터리가 우리에게 재현하고 있는 바가 실재와 일치하는지 의심하게 할 때에야 다큐멘터리적 임무를 수행한다.10) 결국 다큐멘터리적 태도란 인간의 언어로 물리적 세계를 함부로 포획하고 전유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실천의 태도이며, 물리적 세계에 잠재해 있는 세계 변혁의 힘, 즉 비판의 힘을 발견하기를 그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의 태도라 할 것이다. PA


[각주]

1) 프랑스의 다원 예술가 콜렉티브 GdRA의 작품이다. GdRA의 작업에 대해서는 https://legdra.fr/fr

2) ‘다큐멘터리적 태도’라는 표현은 21세기 예술의 “다큐멘터리적 전회”의 주요한 계기 중 하나로 꼽히는 ‘베를린 다큐멘터리 포럼’(2010-2014)의 결과로 출간된 책 『다큐멘터리 : 학제를 너머』의 서문 ‘The Documentary Attitude’(Erika Balsom)에서 따왔다. 

Erika Balsom and Hila Peleg(ed.), Documentary Across Disciplines, MIT Press, 2016, p. 10-19

3) 에리카 발솜(Erika Balsom)의 “현실기반 공동체(The Reality-based Community)”라는 표현을 참조하여 현실을 포획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지칭하는 것으로 필자가 제안하는 표현이다. 발솜의 글 원문은(https://www.e-flux.com/journal/83/142332/the-reality-based-community), 이 글의 한국어 번역은 다큐 웹진 『도킹』(http://dockingmagazine.com/contents/16/113/?bk=main&ckattempt=1)에서 읽을 수 있다.

4) Fabric Workshop and Museum, Philadelphia, 2004-2005

5) Jacques Rancière, La fable cinématographique: 유재홍 옮김, 「다큐멘터리적 픽션」, 『영화 우화』, 인간사랑, 2012

6 Hal Foster, “An Archival Impulse” in October, Vol. 110 (Autumn, 2004), pp. 3-22. Gabriel Ferreira Zacarias, Entretien avec Hal Foster(https://doi.org/10.4000/marges.1329) 그러나 두 사람의 차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무엇보다 할 포스터는 동시대 미술의 역사화를 정식화하지 않으면서도 모더니티, 포스트 모더니티를 구분하여 이론화하고, ‘아카이브 충동’이라는 개념으로 포스트 모더니티 이후 미술의 주목할 만한 경향을 이론화하고자 한다. 반면 ‘예술체제론’을 개진하는 랑시에르는 모더니티, 포스트 모더니티, 포스트-포스트 모더니티을 구분하는 대신 19세기 이후의 미적 예술체제의 작동방식을 이론화하고자 한다.  

7) Erika Balsom, ‘The Documentary Attitude’, 위의 글, p. 18에서 인용 및 참고

8) Hal Foster, The Return of the Real: 할 포스터, 이영욱, 조주연, 최연희 옮김, 「민속지학자로서의 미술가」, 『실재의 귀환』, p. 268-316

9) Hito Steyerl, Die Farbe der Wahrheit: 안규철 옮김, 「사물의 언어: 다큐멘터리 실천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 『진실의 색』, 워크룸프레스, 2019

10) 히토 슈타이얼, 앞의 책, 「다큐멘터리의 불확실성 원리」에리카 발솜 역시 다큐멘터리적 불확실성을 가정하는 태도의 비판적 의의를 인정한다. 그러나 발솜은 2017년 발표한 글 “현실기반 공동체”에서 다큐멘터리적 재현의 진실성과 허구성을 따져 묻는 1990년대 이후 다큐멘터리 창작의 어떤 경향을 비판한다. 발솜은 일련의 다큐멘터리가 다큐멘터리적 재현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유희에 몰두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발솜의 글은 진실의 지위 자체를 문제 삼는 포스트 진실 시대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응대를 촉구하는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이나라는 이미지 문화 연구자이며 동의대 영화·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이다. 파리 팡테옹 소르본 대학교(Université Panthéon-Sorbonne)에서 영상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시대 영상미학 이론을 연구하고, 영화사, 인류학적 이미지 및 동시대 이미지 작업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레드 데드 리뎀션(Red Dead Redemption)’ 스크린샷





Special feature No. 2

리얼리즘, 재현 그리고 이미지의 진실

● 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1. ‘시네마틱(cinematic)’한 몰입의 경험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컴퓨터 게임이나 코로나 사태 이후 일상사가 된 ‘비대면’ 접촉의 플랫폼을 떠올리자면, 저간 예언적인 미래의 비전인 듯 너스레를 떨던 메타버스(metaverse)니 평행우주니 하는 말들은 무색하게 들린다. 게임이든 온라인 콘서트든 그 모두가 또 하나의 부가된 현실처럼 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러 겹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듯 보인다. 물론 메타버스가 가능한 조건은 가상현실을 현실처럼 모조할 수 있는 생생한 이미지의 효험에 달려있다. 그리고 우리는 은연중 이미지를 둘러싼 과거의 가정으로부터 뒷걸음질 치게 된다. 어쩌면 이를 부인하는 이들이라면 우리가 한 보 전진했다고 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겹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말은 곧 현실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이미지에 달려있다는 암묵적 전제에서 비롯한다. 하나의 현실을 추가하고 싶다면 그만큼 현실의 함량을 담은 이미지를 동원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한 추론 속에서 이미지는 시뮬레이션 능력과 등치되고, 그로 인해 재현이나 미메시스, 리얼리즘 등의 쟁점은 시효 말소된다. 더불어 이미지는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신종 현실을 경험한다는 듯한 확신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면 이미지로서의 자격시험을 통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때 이미지가 갖춰야 할 자격 조건은 바로 이미지를 현실처럼 지각할 수 있게 하는 경험으로 환원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미지의 진실이라는 문제는 제거된다. 이미지는 지각의 경험으로 환원되고, 리얼하다는 것은 그것이 리얼하게 느껴진다는 지각의 리얼리즘 혹은 리얼한 것처럼 나를 흥분시키고 몰입하게 한다는 신경학적인 리얼리즘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이미지에 들뜬 시선을 쏟아붓는 와중에 슬금슬금 이미지를 둘러싼 과거의 준거점들을 이동시켜 왔다.


한편 이미지가 생생한 지각을 충족시키고 흥분된 몰입을 생산할 수 있다면 이미지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는 듯한 암묵적인 합의는 모든 곳으로 확산된다. 그리고 이는 시각예술에서도 다르지 않다. 스멀스멀 미술관을 잠식하고 있는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을 활용한 작업들은 최신의 이미지 형식이기도 하지만 기존의 이미지 체제로부터 등을 돌리는 몸짓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미지를 둘러싼 논의가 어떻게 재현이라는 쟁점 주위를 순환했는지 잊지 않고 있다. 그것은 소박하고 교조적인 리얼리즘에 맞선 포스트모던한 사회구성론적 입장으로부터의 공격이었다. 


현실이라는 안정적인 이미지 외부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이미지란 그것의 기록이자 모사라고 간주하는 입장이 리얼리즘이라면, 사회구성론은 현실이 이미지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 생산된 효과 -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고전적인 표현을 빌자면 ‘현실-효과(reality effect)’ - 임을 역설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를 조망하고 점검하는 틀 역시 바뀌었다. 리얼리즘을 재현이라는 쟁점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사회구성론은 이미지가 현실을 생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재현이라는 낱말에 유의하면서 현존(presence)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재-현(re-presentation)을 통해서만 세계는 인식 가능하고 경험 가능한 것으로 구성된다고 역설하였다. 그것은 리얼리즘이란 쟁점에서 제기된 이미지의 진실이란 문제를 물리치고 재현이란 쟁점을 통해 이미지와 권력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누가 어떤 재현의 질서를 원하는가의 문제는 모방, 반영, 기록 등의 쟁점을 밀어내는 듯이 보였다.





‘레드 데드 리뎀션(Red Dead Redemption)’ 스크린샷





2. 그러나 이미지를 둘러싼 반성의 노선이 리얼리즘에서 재현으로 이동한 것은 이미지의 진실 문제에서 권력 문제로 옮겨가는 것이란 비평적인 회고조차 이제는 무력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이미지란 객관적인 기록인가 주관적인 구성인가라는 쟁점은 언제나 이미지를 둘러싼 주체, 즉 관람자로서의 인간을 전제한다. 하지만 많은 동시대 미술 작가들의 작업이 말해주듯 이제 수많은 이미지들은 더 이상 관람자를 신경 쓰지 않는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나 트레버 페글렌(Trevor Paglen) 같은 이들의 작업이 고발하듯 인간-인간 혹은 인간-기계 시각 세계는 점차 기계-기계 시각 세계로 이동하여 왔다.1)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번호판을 촬영한 이미지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보고, 매일 페이스북에 업로드된 수십억 개의 사진은 알고리즘적인 메타 태그(meta tag)를 통하여 컴퓨터가 보는 식이다. 그렇게 컴퓨터가 읽어들인 이미지 정보들은 더 이상 이미지화되는 통일적인 객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공지능 관람 기계가 이미지로부터 원하는 것은 이미지 속 인물의 인종, 계층, 주거 장소, 소비상품, 습관, 관심사, 친교 관계, ‘좋아요’를 누른 대상 등 분화되고 또 개별화된 정보의 종류들일 뿐이다. 이미지에서 현실은 증발되고 공동체적인 주체 역시 삭제된다. 그 이미지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사법적, 기업적, 금융적인 이해에 따라 선별된 개인들의 파편화된 정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지에서 리얼리즘이나 재현을 묻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일로 전락한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과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매일 TV 뉴스와 소셜미디어 플랫폼 피드에서 우리의 시선을 휘어잡는 이미지들에 융단폭격을 당하고 있고, 그 이미지들은 당연히 인간들의 시선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미지들을 두고 전처럼 리얼리즘인가 재현인가의 문제를 따지는 일이 계속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Exhibition View of <Parallel I-IV> by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in Galerie Thaddaeus Ropac

 Paris <PARALLELE> January 15-February 15, 2014 Photo: Harun Farocki <Parallel I-IV>

 in Galerie Thaddaeus Ropac Paris © Philippe Servent 2014 and Harun Farocki GbR





포스트-진실 혹은 가짜 뉴스의 세계에서 이미지는 더 이상 현실에 대한 재현이 되고자 한다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경험 자체가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TV 뉴스나 소셜미디어 피드에 올라온 헐벗은 채 거리를 누비는 아이를 보여주는 CCTV 이미지는 분노와 규탄을 위한 이미지이지 빈곤한 노동계급 여성이 처한 육아의 현실을 반성하도록 하는 이미지는 아니다. 그것은 징벌받아 마땅한 어떤 공적(公敵)을 겨냥한 흥분된 비난과 성토를 분출하는 즉각적이고 강렬한 경험, 도덕적 열정에 침윤된 흥분된 주체와의 동일시를 생산하는 데 봉사한다. 즉 우리가 24시간 접하는 모든 이미지는 이미지에 정동(affect)의 경제만을 남겨둘 뿐 그것에서 현실의 진실을 탐색하는 인식의 능력을 박탈한다. 


물론 서사를 포기한 채 쉼 없이 이어지는 감각적 충격을 제공하는 것도 모자라 이미지의 충격을 배가시키기 위한 다양한 광학적 장치 - IMAX 영화관의 폭발적인 증대를 생각해 보라 - 를 동원하는 영화 이미지의 세계는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폭로, 증언, 고백 이미지들의 범람, 이미지를 둘러싼 비평을 대신한 댓글과 청원의 범람은 어쩌면 에세이 영화의 유행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미술관을 가득 채운 이른바 에세이 영화들은 현실에 대한 기록(documentation)을 대신하여 주관적인 경험의 현상학을 내세우는 것일지 모른다. 크리스 마커(Chris Marker)의 멜랑콜리한 에세이 영화들은 동유럽의 붕괴를 정점으로 한 유토피아적인 비전의 소멸에 대한 서글픈 애가(哀歌)이자 목적론적인 역사 이미지로부터 물러나 주관적인 열정을 통해 유토피아적 충동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에세이 영화는 이제 거의 물화된 장르적 형태처럼 취급된다. 그리고 이미지에서 현실의 기록이나 재현을 둘러싼 물음은 철회되고, 그 자리는 느낌이나 지각이 메우게 된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Parallel II> © Harun Farocki 2014 and Harun Farocki GbR





3. 에세이 영화에 저항하는 듯한 일련의 ‘현실성(actuality)’ 영화들에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근년 큰 호응을 받은 일련의 영상 작업들, 특히 하버드 감각민족지랩(Sensory Ethnography Lab)의 영상들은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존재론, 생기론, 애니미즘이니 하는 새로운 철학적 사변들의 지지를 받으며 크게 유행하였다. 그리고 많은 국내 작가들(김아영, 권하윤, 김실비, 염지혜 등) 역시 그러한 논변에 호응하는 듯이 간주되어 높은 관심을 끌었고, 이러한 추이는 이미지의 사회적 구성론에 염증을 토로하며 언어와 담론을 추켜세우는 포스트 구조주의를 신랄하게 거부하는 듯이 보였다. 또한 그 결과로 언어적, 담론적 매개 이전에 존재하는 현실적인 것(the actual), 즉 언어를 통해 윤색되고 서사화되기 전에 현전하는 무엇이 계시(revelation)되길 기대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가볍게 실재성(the reality)을 현실성으로 대체한다. 현실성이란 말에선 진정성(authenticity)이란 개념의 악취가 풍긴다. 


어쩌면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식의 현상학적 사유로부터 유래했을지 모를 이러한 재현 이전의 현실에 대한 향수는 적잖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재성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는 재현될 수 없는 추가적인 무엇, 즉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추상적인 세계를 묘사한다. 또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상상(想像) 즉 허구적 이미지를 통해 보충되어야만 실재성을 담은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조금 뜬금없겠지만 칼 마르크스(Karl Marx)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작동하기 위해 상품과 화폐라는 ‘필연적 가상’이 필요하다고 갈파한 바 있다. 필연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이라는 대립물을 접합하는 모순어법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가상(Schein)은 현실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이 작동하기 위해 그러한 가상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가상이 무너지면 현실 역시 무너진다. 따라서 그는 그러한 가상(이미지)을 통해서만 모순적이고 적대적인 현실, 즉 계급투쟁이 관통하는 전혀 일관되고 정합적인 재현이 불가능한 세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츠모토 토시오(Toshio Matsumoto) <Atman> 1975 © the artist and Empty Gallery and PJMIA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외적이고 객관적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모사나 반영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재현의 문제도 아니다. 이는 자본가들의 주관적인 의지에 따라 세계를 재현하는 이미지의 코드 혹은 ‘권력에의 의지’(니체-푸코)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이미지 바깥에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 다른 이를 지배하기 위해 거짓된 이미지를 주입하거나 전시한다는 말과 무관하며, 단지 모든 이에게 공통된 진실로서 기능하는 이미지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이미지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적대적 모순이 관통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지닌 이미지, 즉 투명한 객관적인 이미지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진실이란 불가능하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미지의 진실이 외부 세계를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고 이런 생각에 유혹당할 때 우리는 이미지의 명목론과 불가지론에 휩쓸리고 만다. 


그러나 허위적인 이미지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이미지, 즉 진실한 이미지란 가능하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이 흥미롭게 말하듯, 오늘날의 이미지는 더 많이 보여줄수록 더 적게 보여주는 역설에 처해 있다. 이를 두고 슈타이얼은 이미지 - 정확히는 다큐멘터리즘 - 의 ‘불확실성 원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문제를 해답으로 반전시킨다. 바로 그 때문에 이미지의 진실을 획득할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는, 아마 언젠가는 도래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이미지만이 진실로 다큐멘터리적”이라고 단언한다.2) 이는 사실을 온전히 기록한 이미지가 진실한 이미지인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을 기록하는 이미지가 진실한 이미지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진실한 이미지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현하는 이미지가 아닌, 부재하는 것을 예고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PA


[각주]

1) 파로키와 페글렌이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오늘날의 이미지의 형세를 가리키며 우세종으로 꼽는 ‘가동적 이미지(operative/operational images)’ 혹은 ‘워킹 이미지(working images)’는 이미지가 반영이나 모사라기보다는 이미지를 통해 어떤 효과(탐지, 공격, 파괴, 감시 등)를 획득하기를 겨냥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시뮬레이션 된 가상 환경에서 효과적인 군사적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면 이 이미지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반영이 아니라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적절하게 구성된 이미지-세계인 셈이다. Harun Farocki, “Phantom Images” in Public 29 (2004)Trevor Paglen, “Operational Images” in e-flux 59 (2014), (https://www.e-flux.com/journal/59/61130/operational-images) Volker Pantenburg, “Working Images. Harun Farocki and the Operational Image” in J. Eder, C. Klonk (eds.), Image Operations. Visual Media and Political Conflict,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7

2) Hito Steyerl, Die Farbe der Wahrheit: 안규철 옮김, 『진실의 색』, 워크룸프레스, 2019, p. 28



글쓴이 서동진은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시각예술을 비롯한 자본주의와 문화의 관계를 탐색하는 다수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2020년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의 <타이틀매치>, 부산현대미술관의 <동시대-미술-비즈니스> 전시에 참여하였고,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의 전시 <연대의 홀씨> 기획자로 참여하였다.





이미지 출처: Khing Hnin Wai 페이스북





Special feature No. 3

스트리밍되는 세계와 다큐멘터리

● 권태현 미술비평가

 


형광색 운동복을 입은 사람이 넓은 도로를 등지고 춤추는 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얼핏 보면 소셜 미디어나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매일같이 접하는 종류의 이미지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신나는 음악과 몸짓이 계속되는데, 가만 보니 뒤쪽의 배경이 심상치 않다. 넓은 길이 바리케이드로 막혀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순간, 무장한 검은색 차량이 우르르 지나간다. 앞만 보고 춤을 추는 영상의 주인공은 때마침 극적으로 울려 퍼지는 경쾌한 리듬에 맞추어 더욱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그 뒤론 차들이 바리케이드를 넘어 어딘가로 향한다. 그곳은 미얀마 국회로 향하는 도로였다. 영상에는 최근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가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이동하는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영상 전면에 내세워지는 형상이 아닌, 그 배경에서 다큐멘터리는 솟아오르고 있다. 영상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으레 그렇듯 전통적인 미디어가 그것을 다시 보도하면서 그 어떤 이미지보다 파급력을 가지고 미얀마의 상황을 세계에 알렸다. 주목할 만한 점은 영상을 찍어 올린 사람이 사회운동가도, 다큐멘터리스트도 아니라는 것이다. 카잉 흐닝 웨(Khing Hnin Wai)라는 체육 교사로 알려진 그는 해당 영상 외에도 다양한 노래에 맞춘 에어로빅 영상을 같은 자리에서 찍어 올리곤 했다. (심지어 그가 올린 영상 중에는 한국의 유명 그룹 블랙핑크의 노래도 있다.)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이미지들이 항상 그렇듯 사람들은 논쟁을 펼쳤다. 영상이 조작된 것이라는 이야기부터 그가 춤을 춘 인도네시아 노래 〈아푼 방 자고(Ampun Bang Jago)〉가 권력자들을 조롱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다분히 의도가 담긴 작업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물론 정황상 그것은 조작되거나 의도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진단은 갑자기 비평가의 눈을 하고 영상을 면밀히 뜯어보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댓글 창에 이어지는 링크를 이리저리 타고 넘어 다니며 취합한 정보를 통해 파악한 것이다. 마치 블록체인처럼 암호화되어 분산된 데이터가 서로를 담보하듯이, 진실은 이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이미지 자체는 결코 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러나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이 쓰고 있는 것처럼, 그런 이미지의 불확실성은 다큐멘터리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적인 형식적 특성이 되었다.1) 포스트 진실은 이제 하나의 자연스러운 조건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영상의 진위나 의도보다 더 중요하게 논할 수 있는 것은, 스트리머가 찍은 영상의 천박함과 다큐멘터리스트가 찍은 영상의 고귀함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는 카메라 그리고 카메라를 든 사람의 위상과도 연결된다. 카메라는 이제 말 그대로 어디에나 있다. 곳곳에 설치되고 모두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통해 세계 자체가 스트리밍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드 뉴 데이즈 〈흐름과 막힘〉 2020 라이브 스트리밍, 퍼포먼스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의 존재론은 전통적으로 중요한 논점이었다. 카메라는 삶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삶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관련하여 가장 첨예한 국면은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라고 불리는 실천을 통해 드러난다. 그것은 현장에서 카메라와 카메라를 든 사람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방법으로 객관적인 거리를 둔 진짜 현실을 담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이렉트 시네마는 무엇보다 카메라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는 것이기도 했다. 반면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진실을 위한 도구로 삼는 시네마 베리떼(cinéma vérité) 전통도 있다. 카메라의 존재를 형식에 포함시키고, 현실에 개입하여 사건을 촉발하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구성하는 카메라는 과거 시네마 베리떼나 행동주의 다큐멘터리에서만 발생하는 특정한 문제가 아니다. 그 모든 전통을 성찰한 이후의 동시대 다큐멘터리 역시 당연히 그러한 문제를 품고 있다. 최근에는 특히 다큐멘터리 실천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고, 그것에서 확장되는 사건을 형식화해나가는 작업들이 돋보인다. 비교적 최근 한국의 작업 중에는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를 꼽을 수 있다. 작업의 감독인 박윤진과 그의 게임 아바타 ‘내언니전지현’은 고전 온라인 게임 ‘일랜시아’를 함께 플레이하는 유저들을 인터뷰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것은 유행이 한참 지나 게임 회사에서도 신경 쓰지 않는 옛날 게임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류학이자 자기 성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게임 속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감독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다큐멘터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렇게 몇 번의 작은 승리를 통해 일은 점점 커지고, 결국 다큐멘터리 박윤진이자 ‘내언니전지현’은 ‘일랜시아’를 운영하는 넥슨에 직접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조를 조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다큐멘터리는 사적인 문제와 구조적인 문제가 살짝 교차하는 식으로 일단락된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독특한 주제이지만 평범한 다큐멘터리 작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업이 몇몇 독립영화제에서 이목을 끌면서 흥미로운 지점이 생긴다. 상영 이후 게임 회사가 유저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등 현실적인 변화가 연이어 발생하고, 그것이 작업에 다시 반영되면서 계속 발전해 정식 개봉까지 나아간 것이다. 다큐멘터리적 실천이 현실을 바꾸고 그렇게 변화된 현실이 다시 형식화되어 작업을 업데이트하는 특이한 구조가 발견된다. 그렇게 카메라는 현실을 형식으로 번역하는 기계로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문제에서 나아가 지금의 맥락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처음에 살펴본 영상에서처럼 카메라와 영상 기록의 존재론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희천 <‘다섯명의 저택관리인’ 쓰기(Writing ‘The Five Caretakers’> 싱글채널 비디오 25분 46초





이제 세계를 기록하는 것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다큐멘터리스트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를 이미지의 역사 안에서 미리 짚어낸 작업은 단연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와 안드레이 우지카(Andrei Ujica)의 <혁명의 비디오그램> (1992)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은 1989년 루마니아에서 일어난 혁명을 둘러싼 이미지들을 몽타주 하는데, 뉴스 푸티지 등 기존 아카이브 영상들뿐 아니라 당시 확산되었던 개인용 캠코더로 찍은 아마추어 영상들까지 함께 엮여있다. 또한 <혁명의 비디오그램>은 방송국을 점령하여 매스미디어로 혁명을 송출하는 사건을 담아내고 있어 그러한 형식은 더욱 입체적으로 작동한다. 


그럼에도 1989년의 루마니아 상황을 기록한 영상들은 아주 이례적으로 예술가들에 의해 시차를 두고 발굴되어 새로운 이미지로 조직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오늘날 라이브 스트리밍이 만연한 기술적 조건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제는 매스미디어 방송국을 점령하지 않아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라이브 방송을 할 수 있고, 반대로 매스미디어가 오히려 온라인에 떠다니는 영상으로 보도하는 경우도 많다. 스트리밍되는 세계에서 기록이란 나중에 발굴되는 것이 아니라, 웹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에 이미지를 던져 넣는 일이다. 문제는 그것이 바다와 같이 너무도 방대하여 특정한 방식의 매개를 거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점에 있다. 


무엇보다 그 매개가 거대 자본이 운영하는 플랫폼과 연계된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하다. 아카이브의 선택과 배제는 이제 경제적 논리, 그러니까 더 많은 ‘좋아요’, 더 많은 조회 수, 그에 따른 더 많은 광고 수입에 따라 작동하기도 한다. 이미지는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경제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이미지들은 봉기의 촉발제가 되기도 한다. 최근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은 경찰이 행하는 폭력을 기록한 푸티지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상기해볼 수 있다. 온라인 이미지 생태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매체 환경 속에서 짚어낼 수 있는 것은 기록의 편재성이 우리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기술 복제 가능성을 다루는 텍스트가 여전히 강력한 이유는 그것이 기술로 이미지가 복제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의 연장선에서 지금 맥락의 중요한 참조점은 이스라엘의 이론가 아리엘라 아줄레이(Ariella Azoulay)가 제공한다. 그는 사진에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2) 이제 카메라를 통한 기록 가능성이 편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사진이라고 생각하는 사물이자 이미지는 그 실체 없이도 존재하고 또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진은 결과물로 존재하지 않고, 사건으로 존재한다. 결코 끝나지 않는 사건, 단지 잠깐 멈추거나 유예되기만 하는 사건으로 말이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Serious Games 1, Watson is Down>

 © Harun Farocki 2010 and Harun Farocki GbR






실제로 모든 것이 기록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항상 기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다큐멘터리의 존재론과 연결되는 문제이다. 사람들의 스마트폰, 도시의 폐쇄회로 카메라, 심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론까지. 이러한 카메라의 편재성은 주체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가 그 자체로 촬영장처럼 작동한다면, 그곳의 사람들도 배우가 된다. 최근 인터넷에는 혼자 공부하는 모습을 녹화하여 올리거나 라이브로 송출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걸 대체 누가 볼까?’ 하는 질문은 여기에서 적합하지 않다. 스스로 카메라 앞에서 공부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실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는 실제 인물과 이미지 속 캐릭터 복합체로서의 주체 등장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최근 시각예술 작업에서 다뤄지기도 한다. 


페이스 필터와 증강 현실, 실제 장소와 겹쳐진 가상의 문제 등을 다루어온 김희천의 <‘다섯 명의 저택 관리인’ 쓰기>(2020)는 그러한 감각에 주목한다. 작업은 브이로그 형식을 차용하는데,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등장인물은 제목에서 보이듯 소설을 쓰고 있고 여러 차례 자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찍어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픽션을 집필하고 있다는 점이다. 형식 속의 픽션이라는 구조를 통해 다큐멘터리적 혹은 브이로그적 인물과 픽션적 캐릭터가 형식의 안팎에서 복잡하게 뒤얽힌다. 한편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데이터로 추적하여 재구성한 <바벨>(2015) 등 이전 작업들 또한 기록의 편재성이 광학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데이터의 문제를 포괄한다는 것을 포착하면서 복합적으로 매체환경과 인식의 문제를 형식화한다.






라그나르 카르탄슨(Ragnar Kjartansson) <The Visitors> 2012 

Nine-channel video with sound 64min Commissioned by the Migros Museum 

für Gegenwartskunst, Zurich Installation view Vinyl Factory, London, England 2015 Photo: 

Jana Chiellino © Ragnar Kjartansson; Courtesy of the artist, Luhring Augustine, New York and i8 Gallery, Reykjavik





라이브 스트리밍 자체를 수행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배드 뉴 데이즈의 <흐름과 막힘>은 도로를 달리는 트럭의 시야를 그대로 송출한다. 특정한 방식으로 매개된 웹사이트를 통해 보게 되는 무빙 이미지는 시간을 넘기며 볼 수가 없다. 말 그대로 흘러가기만 하는 풍경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트럭 안에서 밖을 비추는 카메라는 노출이 잘못되어 추상적으로 뭉개지기도 하고, 차창 바깥에서 햇살이 쏟아질 때면 순간적으로 유리창은 반쯤 거울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것은 그냥 중계되는 상황 자체를 형식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면에는 “물류를 멈춰서 세상을 바꾸자”와 같은 시위 구호가 겹쳐있고 클릭하면 해당 스트리밍과 연결된 과거의 시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달리고 있는 트럭이 과거 화물연대 선전선 루트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정말로 무의미하기도 하다. 정치적 구호가 시간에서 이탈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을 또 라이브로 송출하는 모순까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재연은 어떻게 다큐멘터리적 실천이 될 수 있을까? 심지어 다른 사람이 수행하면 그것은 그냥 픽션이 아닌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픽션의 어원이 허구가 아니라, ‘만들다’라는 의미에 가까운 라틴어 핀게레(fingere)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3) 사건과 형식을 구축하고 재조직하는 것으로서의 픽션을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기억과 증언, 나아가 과거의 사건 자체를 형식화하는 방식은 그러한 모순 사이에서 세계가 구축되어 있는 방식 자체를 반복하고 드러내며 원래의 세계라는 것을 의문에 붙인다. 스트리밍되는 세계에서 기록의 위상은 기존과 전혀 다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조건은 무엇이든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무책임한 주장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자체가 스트리밍되고 있는 조건은 세계의 구성을, 우리의 인식을, 주체의 형성을, 또한 다큐멘터리의 존재를 바꾸어 놓고 있다. PA


[각주]

1) Hito Steyerl, Die Farbe der Wahrheit: 안규철 옮김, 『진실의 색』, 워크룸프레스, 2019, p. 21 

2) Ariella Azoulay, “Photography: The Ontological Question,” Mafte’akh, No.2 (2011): p. 65-80

3) Jacques Rancière, La Fable Cinematographique: 유재홍 옮김, 『영화 우화』, 인간사랑, 2011, p. 259 



글쓴이 권태현은 미술이론과 문화연구를 공부하며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한다. 미술계에서 활동하지만 미술 안쪽에 있는 미술이 아닌 것들에 더 관심이 많다. 미술과 정치가 서로에게 만들어 내는 틈과 그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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