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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8, Sep 2015

거장, 김종영의 자취

The Master Kim Chong-Yung's Trace

「퍼블릭아트」가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현존 작가 혹은 작고한 대가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그들의 업적을 파헤치는 기획을 마련했다. 그 첫 주인공은 한국 근대조각 선두주자 김종영. 때마침 경남도립미술관, 서울대학교 미술관, 김종영미술관 등에서 전시를 열어 그를 조망하니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때이지 않을까. 향후 이 꼭지를 통해 한국미술에 영향력을 행사한 거장들을 소개할 예정이니 눈여겨봐 주시기 부탁드린다. 그럼,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박춘호의 글로 대가의 면면을 살펴보자.
● 기획·진행 정일주 편집장

'작품 65-4' 1965 나무 40×19×3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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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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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거(閑居), 그리고 통찰(洞察)-시공을 초월한 화두



Ⅰ. 김종영은 1915 6 26일 경남 창원에서 영남 명문사대부 집안인 김해 김씨 23대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7대조가 연산군 4년 발생한 무오사화로 희생된 영남 사림의 기수 탁영 김일손이다. 이런 집안 내력으로 그는 부친에게서 수준 높은 서화와 한학을 배워 선비로서의 교양을 갖추었다. 그가 태어난 1915년은 20세기 한국미술사에서 역사적인 해이다. 조선인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동경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해이며, 동경유학생들이 발간하던 잡지 『학지광』 5월호에 안확이 조선인 최초로 미술에 관해 쓴 글, 「조선의 미술」을 게재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일제강점기하에서 공식적인 미술학교는 없었지만 이제 우리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미술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모상> 1936 석고에 채색 37×22×20cm




그러나 안확의 글은 피식민지인의 감성에 호소하는 글이었다. 식민치하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편 1927년 김주경은 『현대평론』 9월호에 「평론의 평론-예술 감상의 본질을 들어 조미평계(朝美評界)의 평론을 논함」이라는 글에서 문명이 늦은 우리는 축지보조(縮地步調)로 추진치 않으면 아니 된다. 내 것을 가지지 못한 우리는 하루바삐 이 수치를 면하여야 하며 세상에 내보이는 내 것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1932년 윤희순은 「조선미술계의 당면문제」에서 그는 외국미술을 빠르게 발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1957 4월 국립박물관에서 전시 중인<미국현대회화조각 8인전>을 보고 이경성은 그달 17일자 『동아일보』에 게재한 「미국현대미술의 의미」라는 글에 우리가 얻어야 할 점은 미국미술의 특질을 맛보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것을 계기로 미국미술을 연구하여 무슨 방법으로 그들이 미술사적 전 코스를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달리어 현대에 도달하였는가를 알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미술의 연구는 미술사적 현대로 이행하려는 오늘의 한국 화단에 많은 시사와 계시를 주는 것이라 하겠다.”고 썼다.   글들을 통해 서둘러야 함이 지난 세기 한국미술계의 중요 화두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어떻게에 관심을 가졌다. 요즘말로 하면 노하우.


미술은 한자문화권에 없던 단어다. 미술은 일본사람들이 187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 프로그램 안내문에 있는 독일어 ‘Kunstgewerbe’를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낸 한자 조어다. 미술이전에 우리에게는 서화가 있었다. 그렇다면 100년 전 안확이 미술에 관한 글을 쓸 때 무엇보다도 먼저 서화와 미술을 비교 성찰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이점이 한국미술계가 지금도 이론수입국으로 존재하는 방증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한국미술계는 문화접변기의 통과의례 중 번역이 생략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종영을 살펴보면 20세기 한국미술계에서 그의 존재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작품 78-16> 1978  28×5×17cm

 




Ⅱ. 김종영과 휘문고보 동기동창이며, 동경유학시절 2년 반 같은 집에서 하숙을 하였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같이 근무했던 박갑성은 유학시절에도 김종영은 빈둥빈둥하는 정신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미술학도로서 조각에 대해서 아무런 야욕도 품은 일이 없었다. 의무적인 것 외에는 한 번도 전시회에 참가한 일이 없었다. 조각으로 출세하고 조각으로 영화를 누릴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고 회상한다. 김종영은 평생에 개인전을 두 번 개최하였다. 생애 첫 개인전을 환갑인 1975년에 회갑기념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동문회가 주최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동창회가 후원한 전시였다. 그리고 1980 432년간 봉직하였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정년퇴임을 4개월 앞두고 한국조각가로는 최초로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개최하였다. 김종영은 이경성이 회갑전 도록에 쓴 서문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도록에도 게재하였다. 이경성의 글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글의 제목은 『양괴(量塊)에서 생명을 찾는 미의 수도자』이다. 이 글에서 그는 김종영을 과작(寡作)인 작가라 하였다. 환갑에 첫 개인전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부인 이효영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김종영은 발표 그런 것 필요 없다고 하면서 내 열심히 하는 거지, 뭐 누구한테 발표하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김종영은 과작이 아니라 발표를 자제하였을 뿐이다.


김종영은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을 개최하며 8 7일자 경향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예술이란 농부와 같아요. 가을의 수확을 위해 이른 봄부터 거름을 주고 김매는 수고를 아끼지 않듯 예술가도 수확을 잘 거둬야 해요라고 했다. 농부는 가을 수확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농작물을 돌봐야만 한다. 요행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돌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음해에 더 많은 소출을 얻기 위해서는 세심한 관찰을 통해 농작물의 성장 과정을 기록 축적하고 분석하여만 한다. 그래서 그저 자연에 순응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예술을 농부에 비유하여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새삼 농업을 뜻하는 영어 ‘agriculture’에서 문화‘culture’가 파생되었다는 것이 떠오른다. 김종영은 정년퇴임을 앞두고 대학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후학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미술대학은 천재적인 소질을 갖춘 화가나 조각가를 키워내는 곳이 아니다. 학생들은 항상 도서관에서 책을 대하고 작업실에서는 자신의 창조물을 대하면서 예술의 의미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며 이론과 실기를 병행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렇다면 김종영의 일상은 어떠했을까? 1980년 정년퇴임 직후에 독서신문과의 인터뷰다. “5시경이면 잠을 깹니다. 작은 마당이지만 거닐기도 하고 매만질 「내 것들」을 매만지면서 계획하지 않은 사색을 합니다. 대개7시경이면 몇 년 전부터 습관화 된 커피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하고는 다시 관찰하고 생각하고 그러다가 간혹은 잡서(雜書)를 읽기도 하고 글씨를 써보기도 하지요. 그러다가 마음 내키면 언제고 습작을 해보기도 합니다. 작가는 제작하는 시간이 바로 휴식시간입니다. 손을 쉬는 시간은 온갖 잡생각과 투쟁하고, 생활을 고민해야하는 괴로운 시간일 겁니다.” 유족들의 기억에 의하면 김종영은 항상 머리맡에 조그마하고 도톰한 노트를 두고 무엇인가 썼다고 한다. 그 글들의 선집이 제자들에 의해 사후 출간된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이다. 그 글은 누구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다. 이 모든 단상을 종합하고 정리해 공개한 글이 1980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개최하며 발간한 『우성 김종영』 작품집 맨 뒤에 실린 「자서(自書)」로 알려진 글이다. 자신의 작업과 20세기 한국미술계의 당면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명문이다.




<자화상> 1964 종이에 먹과 수채 38×35cm




Ⅲ. 김종영은 1953년 제2회 국전에 한국 최초의 추상조각 작품인 『새』를 출품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김종영의 추상조각에 대한 연구는 외국 작가와의 영향관계에 치중하였다. 그가 왜 추상조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김종영의 연구가 서양미술을 전공한 학자들에 의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의 연구는 김종영이 부친에게서 선비가 갖춰야 할 교양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사실 부친의 서화와 한학에 관한 지도는 김종영이 동경에서 조각을 공부할 때도 지속되었다. 이는 당시 부자간의 편지로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갖춰진 김종영의 서화 감식안은 생전에 어느 대기업 회장이 자신의 소장품이 추사선생의 진품인지 그에게 감정해 달라고 부탁한 일화로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그의 예술세계를 살피기 위해서는 서화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이점이 그에 대한 연구에서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이다.


김종영은 중학교 2학년 때 자신의 서예작품을 세상에 발표한 이후 일절 서예작품을 전시하지 않았다. 선비에게 서예는 수양의 방편이지 기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김종영미술관은 1,000여 점의 서예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의 서예작품들은 2009년 『서법묵예』 발간기념으로 개최한 <각도인서(刻道人書)>전을 계기로 세상에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73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손으로는 추상조각작품을 제작하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안진경의 글을 임서하고, 겸재와 추사의 그림을 방작하였다. 다수의 원고도 썼다. 선비가 조각을 하고 있었다. 서화를 공부하는 데 첫 걸음은 임서와 방작이다.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은 이것을 그저 예전 것을 보고 베끼는 것이라고만 하며 서화를 폄훼하였다. 과연 그럴까? 임서는 다음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한다. 





<작품 80-1> 1980 나무에 채색 53×9×31cm

 




처음에는 어떤 특정한 비첩(碑帖) 일의전심(一意專心)’으로 배워야 한다. 이때 일일입미(一一入微)’라 하여 글씨의 모습뿐만이 아니고, 글씨 하나하나의 미세한 구석까지 살펴 필세(筆勢)와 필의(筆意)를 빼지 않고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글자의 모습만이 아닌 글쓴이의 뜻도 간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임서하는 자는 당연히 글쓴이의 생애도 연구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비첩을 넓게 배우는 한편 고래(古來)의 서론(書論)을 크게 섭렵하여 스스로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키우기에 힘써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기 위해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임서는 단순한 모방이 아닌 법고창신을 위한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법고창신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예술가의 지향이다. 여기에 더하여 선비의 공부 방법론인 격물치지가 있다. 주자에 의하면 격물치지라 함은 사물의 이치에 대해 막혀 있던 것이 꾸러미를 꿰듯 환하게 통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런 격물치지는 격물 치지가 합쳐져 격물을 통해 치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격물이라 함은 어떤 것의 ()과 말()을 헤아리는 것이며 치지는 올바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격물치지라 함은 어떤 것의 본말을 헤아려 올바로 아는 것이다. 김종영도 그랬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가 수기로 작성한 「Abstract Art」라는 제목의 노트다. 서양추상미술에 대해 연구 정리하며 소감도 기록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서예와 서양추상미술 사이에서 순수한 조형의식의 구현이라는 공통점을 찾았다. 그러나 김종영은 동서미술의 융합을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호 진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한동안 융합을 위한 수련기가 필요다고 봤다. 그는 어떻게보다는 무엇이 다른지에 대한 상호비교분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이런 생각은 1958 6 9일자 『대학신문』에 「이념상으로 본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금강산 만폭동도

1970년대  종이에 매직 수채 30×49cm





Ⅳ.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의 모든 글은 김종영이 시대와 예술을 성찰한 옥고를 모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를 염두에 두고 그 글들을 읽어볼 때 그 중에 오로지 그이기에 쓸 수 있었던 글이 『완당과 세잔느』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김종영이 사표로 삼은 동·서양의 예술가들이다. 이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가 완당과 세잔느의 예술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중용의 눈으로 지피지기한 결과물이다. 이를 통해 그가 얻은 결론은 진실한 노력과 순수한 정신에서 이루어진 예술은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이론을 의미하는 ‘Theory’의 어원은 그리스어 ‘Theoria’. 관조를 의미한다. 이론화는 먼저 사물이나 현상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조해야 한다. 김종영은 그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교수, 학장, 국전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역임하며 미술계의 핵심에 늘 있었던 그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중심부에서 거리를 두고 한거하며 시대와 예술을 통찰하였다. 그는 진정 자신의 예술에 집중한 예술가였다. 그는 서두름과는 대척점에 있었고 본말에 충실하였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서화에서 미술로의 전환기임을 간파했고, 그 결과 동서미술의 융합을 통해 지역성을 벗어나 인류보편적인 예술이 무엇일지에 대해 사유하며 작업하였다. 그래서 예술가로서 그의 삶은 지금도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 박춘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의 Pratt Institute에서 MFA과정을 마쳤다. 2012년 고려대학교 영상문화학 협동과정에서 논문 「한국근대미술사 담론의 인식론적 계보학-시각체제의 변동과 장개념을 중심으로」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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