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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37, Feb 2018

논문, 다시 담론으로Ⅱ ②

Back to the discourseⅡ

* 논문, 다시 담론으로Ⅱ ①에서 이전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바바라 블룸(Barbara Bloom) 'Semblance of a House Drawers, Library, Sofa, Gaming Table' 2013-2015 Leihgabe der Kunstlerin, Courtesy Galerie Gisela Capitain, Koln ⓒ Nationalgalerie im Hamburger Bahnhof, SMB / Jan Windsz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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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시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조교수,이미경,손윤지,임재형,이도훈,이승현,추성희,이예린,이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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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Ⅱ

9개의 논문

 

5. 세계화를 통해 다시 보는 단색화의 한국성과 미술사적 위상서구 모노크롬 회화와 김환기 전면점화와의 비교를 통해서_이승현

6. 아나 멘디에타의 작품에 나타나는 제의(祭儀)적 요소와 그 의미에 대한 연구_추성희

7. 반영 이미지의 환상성: 레안드로 에를리치를 통해 바라본 거울과 창문 환상_이예린

8. 낯선 정보가 불러온 상상과 비-재현적 형태에 대한 연구_이동근

9. 선언의 관점에서 본 예술가의 사회적 발화: ‘제4집단’과 ‘현실과 발언’을 중심으로_김진주


 



Special feature Ⅱ-5

세계화를 통해 다시 보는 단색화의 한국성과 미술사적 위상

서구 모노크롬 회화와 김환기 전면점화와의 비교를 통해서

● 이승현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수료

● 이메일 shl219@naver.com

● 추천인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사학과 전영백 교수

 


최근 한국의 단색화 열풍과 함께 서구에서는 모노크롬 작가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서구 모노크롬의 주요작가들인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의 재평가를 검토하고 이들이 활동하던 60년대에서 70년대 초반 미국 뉴욕에 체류하며 전면점화를 완성한 김환기의 작업을 살펴보면, 서구 작가들과 김환기의 비교, 그리고 이들과 단색화 작가들의 비교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비교분석을 통해서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불리는 단색화의 한국성과 그 모더니즘의 성격을 정확히 규명하고, 단색화의 계보를 재검토하고 세계미술사에서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스즈키(Edward Suzuki)의 선철학과 동양 미술에 심취했던 라인하르트는 말년 1960년부터 1967년 사망할 때까지 ‘최후의 회화’라고 불렀던 ‘흑색회화’만을 고집했다. 그의 ‘흑색회화’는 정사각형 캔버스에 십자 형태로 전체 화면을 9등분 하도록 그려진 단색화로 그의 흑색은 여러 색을 배합해서 만든 혼합색이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색조의 차이로 화면상에 십자가 드러난다. 네오다다 이후 당대 흐름과는 달리 그는 순수미술이 대중문화가 범람하는 현실과 분리될 것을 고집했으나, 이 흑색 모노크롬의 단순성과 규칙성, 반복성은 미니멀리즘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마틴도 추상의 ‘순수성’의 수호자였으나 최후의 회화보다는 ’완전성‘을 표상하는 그리드를 선택했다. 그의 60년대 작품은 정사각형 캔버스에 아크릴 제소를 칠한 후에 연필 또는 색연필을 이용해서 격자무늬의 선을 한 겹 또는 여러 겹으로 긋는 작업이다. 


이때 선은 자를 대지 않고 테이프나 줄과 같은 느슨한 가이드에 따라 그어서 다소 흔들리고 바르지 않게 보인다. 그 역시 동양철학의 영향을 받아 예술에서 정신의 고양(高揚)과 마음의 개안(開眼)을 중시했으나 작품의 전면성, 반복성, 그리드 등은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작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들과 세대 차이가 있는 라이먼은 당시 다양한 지지체 위에 붓질하여 페인트와 붓이 작동하는 방식을 알아보고자 했다. 안료와 지지체, 그리고 붓의 크기 등을 달리하는 반복적 붓질을 통해서 그의 회화는 물성의 자기확인, 자기정의 작업으로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자기지시적인 모더니즘 회화의 성격을 지니지만, 물성의 탐구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미니멀리즘적이다. 


이와 같이 동일하게 모노크롬으로 분류되지만, 추상표현주의 또는 모더니즘에 속하는 라인하르트와 마틴은 미니멀리즘의 물성의 실험과 그 실험에 따른 다양한 회화의 양태에 관심을 가진 라이먼과 크게 구분된다.한편 김환기는 당시에 젯소 칠을 하지 않은 면 캔버스에 물감이 스며들며 퍼지도록 작업을 하던 뉴욕의 추상 작가들을 보면서 캔버스에 아교 칠을 해서 작업하는 독자적인 기법을 개발했다. 아교를 도포한 면 캔버스는 묽은 물감을 아래로 빨아들이지 않아서 붓이 캔버스에 닿으면서 물감이 아교의 결정들 사이로 캔버스의 올과 섬유 사이로 서서히 퍼져 나간다. 색이 진하거나 연한 정도가 이런 번짐과 중첩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되므로 전체 화면은 하나의 색이라 해도 부분적으로는 색조를 달리하며, 화면상에서 점들은 균질적이지 않고 다소간 흔들리는 느낌을 주게 된다. 그는 점 하나를 찍고 그 둘레를 다시 유사한 색으로 한 번 내지 세 번까지 몇 차례 돌려서 그렸고, 그런 같은 작업을 무수히 반복해서 전체 화면을 채우기 때문에 그 작업은 대단한 수작업의 결과였다. 그는 라인하르트나 마틴처럼 동양 미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으나 조선 자기와 목기에 대해 애정이 남달랐고, 조선 문인화에서 나타나는 여백이 많고 붓질이 소략한’ ‘맑고 시원함’이라는 미적 가치를 동시대의 색면회화와 모노크롬 회화의 형식 속에서 구현했다. 


라인하르트와 마틴, 라이먼의 작업은 단색, 전면성, 반복성 등에 있어서 김환기와 그리고 이후의 단색화와 동일하다. 김환기의 독특한 번지는 기법이나 겹칠을 통해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효과를 띠는 것은 캔버스의 직조구조의 요철을 이용하는 마틴과 유사하며, 윤형근이나 정창섭, 정상화의 물성의 효과를 이용하는 작가들과도 유사하다. 게다가 그가 추구한 한국적인 미적 가치는 한국적 모더니즘을 추구했던 대다수 단색화가가 지향한 바였다. 라인하르트나 마틴이 추구했던 정신적 고양은 이우환이나 박서보가 말하는 반복을 통한 동양적 깨달음과 거의 같고 윤형근이 덧칠을 통해 검게 지워나가는 작업은 라인하르트의 작업방식과 유사하다. 그러나, 하종현이나 권영우에서 보이는 물성의 탐구와 실험은 오히려 라이먼의 물성실험과 닮았다.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작가들이 크게 구분되었듯이 단색화 작가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드러난다. 이들과의 비교는 이처럼 서구 모노크롬과의 연결을 설명할 수 있는, 뉴욕 현지에서 이들을 먼저 접했던 김환기의 전면점화와 단색화가 연결되는 새로운 계보를 고려할 필요성을 제기하며, 또한 그간 단색화의 특성이나 한국성이라고 주장했던 내용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간 단색화의 논의에서는 단색화의 주요한 특성으로 단색 내지는 백색, 물성 또는 비 물질성, 반복, 그리고 깨달음의 미학 등이 거론되었다. 이들 중 백색은 단색화를 태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동경화랑의 전시에서 제기된 백색 미학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향수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조선의 미감이 전반적으로 절제된 미학이라고 할 때 화려한 색상이 절제된 백색은 사실상 우리의 미감을 일정 부분 설명한다. 동경화랑 전시 당시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다양한 종류의 백색 화면을 모두 한국적이라고 정의한 백색 담론은 다분히 일본의 제국 향수에 호소하는 무리한 일반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색화 작품 중 특정 백색에서 연상되는 우리 미감 또는 한국성마저 식민주의적 발상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동일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단색화의 물성 또는 그와 정반대되는 정신성에 대한 관심은 서구 미니멀리즘을 일본의 모노하를 통해서 수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왜곡이었다. 서구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미니멀리즘의 물성에 대한 관심은 이우환의 모노하 이론을 통해 서구미니멀리즘 비판과 서구 근대 비판을 동일시하면서 주객이 합일되는 세계와의 진정한 만남, 즉 정신적 각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권영우나 하종현의 작업은 물성이 작업의 주요한 주제이며, 이우환의 석채물감 사용과 박서보의 분채도장 같은 화면의 표면, 그리고 김환기, 윤형근, 정창섭 등의 물감의 스며들거나 번지는 효과를 이용한 것 등은 모두 물성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단색화의 기존 담론은 이처럼 명백하게 드러나는 물성에 대한 당대적 관심을 새롭게 평가하기보다는 그와 상반되는 정신성이라는 이상으로 서구를 넘어서는 한국성을 부각하는 데에 더욱 주력했다. 서구에서 반복이라는 패턴이 주로 60년대 소비사회의 수열적 생산에 따른 대량생산품에서 유래했다면, 우리 단색화 작가들의 경우 반복적 행위를 통한 깨달음의 상태라는 이우환의 담론에 기초해서 단색화의 반복성을 수양의 과정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사실상 무념무상의 단순 반복적 행위는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70년대의 산업적인 작업환경에서 단순 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행위가 그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급속한 산업화는 서구 모더니즘을 뒤늦게나마 이해하는 동력이었는데 이들의 반복을 탈속을 위한 수행이라는 전근대적이고 퇴행적인 것으로 읽는 것은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동양적 깨달음이나 탈속의 미학적 이상은 단색화를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정의하는 주된 특성이었다. 그러나 깨달음의 수사는 사실상 일본의 선철학에 기반을 둔 이우환의 담론 변주였으므로 한국적일 뿐 아니라 일본적인 것이었고, 스즈키에게 배운 라인하르트나 마틴도 사용했던 범세계적인 수사이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 고유의 것도, 한국만의 특성도 될 수 없었다서구의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을 극복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길을 열었고 최소주의를, 미니멀리즘을 비판적으로 해석했던 모노하도 서구의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행이 가능했다. 그러나 1960, 70년대의 서구나 일본과는 달리 이제 막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던 당시의 한국은 비로소 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모노하 담론을 빌어 서구 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이를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바꿀 수는 있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행은 바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마도 미니멀리즘이라는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이 우리에게는 모더니즘의 성취가 되는 단색화의 어긋난 위상이야말로 단색화의 한국성을 설명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단색화를 포함해서 우리 미술이 세계화되는 일은 우리 미술을 세계를 향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작업을 수반한다. 만약 단색화가 세계미술사에 당당히 뿌리를 내린다면, 앞으로 우리의 미술사 기술은 세계미술의 보편사 속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색화를 세계미술사에 올바로 접목하는 일은 그 시작이 될 것이다.  

 



 

Special feature Ⅱ-6

아나 멘디에타의 작품에 나타나는 제의(祭儀)적 요소와 그 의미에 대한 연구

● 추성희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 이메일 snrnsktlfgus@hanmail.net

● 추천인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김승환 교수

 


20세기 전반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은 많은 사람은 현실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서양 문명의 근간으로 여겨졌던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기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대안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이성에서 본능·감정으로, 문명에서 원시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정신에서 신체로의 가치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공동체, 자연, 민족문화 등에 대한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아울러 사회학·인류학·역사학계에서는 그동안 배제되었던 비서구의 원시 문화를 탐구하고 민간신앙, 축제, 제의 등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1960년대 이후 현대 미술가들은 ‘원시’·‘여성’·‘신체’ 등의 주제를 통해 목소리를 내었으며, 그들 중 몇몇 미술가들은 원시 사회의 제의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제의(祭儀)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여 주기적으로 기원의 행위를 반복하는 종교적인 행위”를 말한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원’하는 행위를 시작했고, 자연·신과 교감하기 위한 ‘정화’의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제의는 공동체의 안정과 치유를 반복적으로 염원했고 이를 통해 해당 공동체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C.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 Strauss)와 뒤르켐(David émile Durkheim)은 제의를 ‘한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고 있는 소통의 상징’으로 보았으며, 사회 통합을 높이는 기능이 있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그랜트(Michael Grant)는 집단 구성원이 제의를 통해 안정성을 얻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본 연구는 이처럼 제의가 사회 구성원의 유대감과 안정성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멘디에타(Ana Mendieta) 작품에 나타나는 제의적 요소가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근원인 쿠바로의 귀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제하에, 그 의미를 논하고자 한다1960년대 이후 기존 사회 문제의 대안을 ‘원시’에서 찾으려던 흐름 속에서 아나 멘디에타는 ‘제의’를 왜 수용하였는가?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제의 요소들은 어떻게 나타나며, 그것은 어디에서 기원(起源)하는가? 멘디에타는 작품의 제의적 요소와 상징적 표현을 통해 무슨 의미를 전하고자 하였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본고는 아나 멘디에타가 제의를 수용한 의도와 제의적 요소, 그리고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고는 제의와 미술의 관계, 1960년대 이후 다원화된 미술계의 배경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의1970년대 ‘대지-신체 작업(Earth-Body Work)’ 연작과 ‘실루에타(Silueta)’ 연작, 1980년대 대지 조각(Earth Sculpture)을 연구의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각 시기의 제의적 미술 작품은 시대적 배경, 사상, 기법 등의 변화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난다. 선사시대의 제의와 미술은 분리 불가의 관계였으며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기원을 제의를 통해 행했으며 이에 따라 미술, 음악, 무용 등 다양한 예술의 형태가 파생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고대와 중세, 근세의 제의와 미술은 사람들 내세의 구원과 신에 대한 찬양 등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후, 제의와 미술은 점차 독자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었고 미술은 더는 종교의 초월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닌 순수한 분야로 발전했다. 근대의 미술가들은 민속·원시 문화 등에서 볼 수 있는 색감, 양감, , 재료 등에서 새로운 표현에 대한 돌파구를 찾고자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미술에서의 해방을 도모했다.

 

1960년대 이후 제의적 퍼포먼스를 행했던 현대 미술가들은 원시 사회의 제의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에서 시작했다. 제의적 퍼포먼스는 동물 도살, 자해 행위, 신과의 소통 및 샤먼의 정신적·육체적 치유 등으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제의적 퍼포먼스를 행했던 현대 미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공통의 정서에 따른 유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들은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면서 일어나는 극한의 정서를 통해 정신적 치유와 정화를 도모했다. 멘디에타 역시 실험적인 작품을 시도하던 다양한 현대 미술가들의 소재, 재료, 방식에서 영향을 받아 제의적인 작품을 시도했다. 하지만 작가는 사회에 대한 불만의 표출과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다루었던 제의적 작품과는 달리, 자신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근원에 다가서고자 했던 갈망에서 비롯된 고유의 제의적 작품을 행했다. 


쿠바 태생의 멘디에타는 쿠바 혁명(1959)을 피해 ‘피터 팬 작전1)’에 동승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의 망명은 그에게 가족·고국과의 이별이라는 트라우마로 남아 ‘쿠바에서 분리된 죽음’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향을 간절히 바랐던 작가는 역사적·문화적 맥락이 유사한 멕시코를 쿠바의 대체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쿠바와 멕시코의 제의에서 천착했다. 멘디에타는 멕시코 여행을 통해 ‘죽음’과 관련된 멕시코의 원시 문화, 장례 및 매장풍습 등의 제의적 양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멕시코 여행은 그에게 자신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했고 이는 초기의 퍼포먼스부터 말기의 조각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멘디에타는 1980 1,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지 23년이 지나서야 쿠바 문화원의 도움으로 고국인 쿠바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심리적 회복에 영향을 끼쳤고 작품 양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쿠바와 미국 간의 예술 교류를 독려하기도 했다.   


멘디에타는 대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이용한 다양한 퍼포먼스와 자연물을 이용한 조각을 선보였다. 작가의 작업은 벌거벗은 몸, 그의 윤곽선, 추상적인 형상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대지-신체 작업’, ‘실루에타’, ‘대지-조각’ 연작으로 명명되었다. 작가는 역사적·문화적 의미가 깊은 장소에서 자신의 뿌리 즉, 대지에 다가가고자 했던 기원(冀願), 정화, 소통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특정한 의미가 내재된 장소에서 인간의 기원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제의의 정의에 비추어 보건대, 멘디에타의 작품에는 제의적 요소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멘디에타는 1970년대 수차례 떠났던 멕시코 여행에서 고대 유적과 전통적인 매장·장례에 대해 답사를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죽음은 삶의 연장선’,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멕시코의 가치관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작가는 망명으로 인한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 기원과 정화의 제의 행위를 일시적인 ‘대지 합일’의 모습으로 드러냈다. 멕시코의 원시신앙과 민간신앙에서 기인한 멘디에타의 제의적 퍼포먼스는 <대지-신체 작업>, <실루에타>로 나타났는데, 이 작업은 대지 위에서 ‘부활의 기원’과 ‘정화’라는 제의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멘디에타는 1980년 귀향 후 삶의 안정을 찾았으며, 쿠바의 역사·문화에 대한 탐구를 통해, 고국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한 유대감을 형성하려 했다. 


멘디에타의 1980년대 작품은 쿠바의 원시신앙과 민간신앙의 제의에서 착안하였는, 영구적인 형태의 ‘대지-조각’ 연작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쿠바, 즉 자연과 일체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를 나타냈다. 이처럼 그가 삶의 안정을 찾아갈수록 작품의 형태는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모습에서 영구적인 형태로 변화해 나갔다. 멘디에타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근원과 삶의 안정을 찾기 위해 기원·정화·소통의 제의적 의미가 담긴 작품을 제작했다이처럼 본고는 20세기 중·후반 미국에서 활동했던 비서구 출신 여성 현대 미술가인 아나 멘디에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모습을 재조명하고자 했다. 멘디에타는 작품을 통해 근원에 대한 탐구, 대지 합일에 대한 태도, 삶과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을 일관되게 말했다. 제의적 요소와 의미가 내재한 작가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자연이라는 근원에 다가가고자 한 결과물이다. 더불어 작가는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선보이며, 미지의 원시 문화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현대미술작품으로 나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로써, 그는 제의적 작품을 통해 서구 사회에 제3세계의 문화와 정체성을 드러내고, 개인이 지닌 욕구를 넘어 사회적 소통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각주]

1) 쿠바 혁명 이후 1960년부터 1962년 사이에 마이애미 가톨릭 단체와 미국 정부, 그리고 몇몇 쿠바인들 카스트로의 반 가톨릭 정원으로부터 쿠바의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구하려 했던 ‘피터팬 작전’을 펼쳤다. 유화열 지음, 『예술에서 위안을 받은 그녀들』 2011 미술문화 p. 11

 



 

Special feature Ⅱ-7

반영 이미지의 환상성레안드로 에를리치를 통해 바라본 거울과 창문 환상

● 이예린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예술학과

● 이메일 yeleen@empas.com

● 추천인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예술학과 이현진 교수

 


“보는 것은 환상이다. Seeing is fantasy. 


본 연구는 현대 시각예술에서 반영 이미지가 어떻게 미학적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그 반영성은 예술 작품에서 어떠한 미적 효과를 보이는지 ‘환상성’의 측면에서 검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지금까지 반영 이미지에 관한 연구는 거울의 역사, 거울의 반영 현상, 반영에 대한 미학적 담론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전개되어온 측면이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반영 이미지의 양상이 비단 보이는 현상과 작업에 표현된 소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의 흐름을 특징지을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범위는 플리니우스(Gaius Plinius)가 주장한 미술의 기원을 그 시작점으로 하여 최근 반영 이미지의 다양한 면모를 극대화하는 에를리치(Leandro Erlich) 작품에 이른다. 


이러한 범주의 중간에 사진 매체의 등장이 있고 그 반영성을 특징짓는 잣대가 있다. 그 잣대의 양자인 거울과 창문은 에를리치의 공간 체험과 매체를 벗어나 환상의 공간으로 향하는 반영성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본 연구에는 몇 가지 층위가 공존한다. 1) 미술을 반영의 역사로 바라보고자 한 점, 2)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변화하는 매체에 의한 환상성의 면모에 관한 점, 3) 기술매체의 시발점이었던 사진의 반영적 본성과 이미지의 연관성, 4) 사진 매체를 두고 거울과 창문으로 바라보았던 관점, 5) 매체를 통해 반영 이미지의 다양한 환상성의 특징들을 극대화한 작품들, 6) 이러한 다양한 반영 이미지의 환상성을 아우르는 한 작가-에를리치, 7) 반영의 역사 속에서 앞으로의 흐름과 방향에 대한 관점 등이다. 이러한 층위들은 본 연구에서 반영 이미지의 환상성을 구체화하기 위한 골격이다.

 


반영, 환상성, 그리고 이미지와 매체 


반영은 본래 물리적인 반영과 관념적인 반영의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미지의 역사에서 기록이라는 형태로 남을 수 있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세상의 모습이 매체에 의해 또 한 번 발견되고 담겨 강조되었을 때의 반영 이미지에 대한 환상을 항상 품어왔다. 그 환상은 초보적인 단계부터 적극적인 환상에 이르기까지 기술에 힘입어 진보해왔다. 환상 공간은 바라보는 이에게 물질적인 반영과 사유의 반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한편, 반영에서 나타나는 이중 이미지 현상은 설령 그것이 반영 현상이 아니더라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반영성을 기대하고 이미지 간의 차이점을 찾게 하는데, 이를 ‘반영 이미지 기대효과(Reflected image expectancy effects)’라고 명하였다. 이 효과는 인간이 유사 이미지를 접할 때 느끼는 반영 이미지 환상성의 주요 원인과 결과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매체의 발전은 매 시대 새로운 환상의 창조를 위해 기여해왔다. 그중 가장 명백한 반영 기계이면서 환상성 표현 면에서 다양한 매체의 가능성을 촉발한 매체는 사진기였다. 

 


거울과 창문 반영 이미지의 환상성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의 전시 <Mirrors and Windows>(1978)에서 사코우스키(John Szarkowski)가 사진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은 현대 매체에 의한 반영성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사코우스키의 거울과 창문은 내부 내지는 외부로 향하는 카메라의 시선이었다. 카메라의 시선은 곧 나중에 관객이 바라보게 되는 시선으로 전도된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거울과 창문을 시선이나 피사체보다는 사진의 메커니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사진은 비단 사진 매체만을 지칭하기보다는 사진 이후의 비디오, 멀티미디어 등과 같은 반영 기술 매체의 초기 형태이자 상징으로서의 사진기를 말한다. 카메라 프로세스의 특징에서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저장하는 행위는 거울 반영이고 그 기록물은 창문 반영이다. 그리고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반영 매체의 프로세스를 배제한 채 반영 이미지가 직접 발생하도록 하는 것을 ‘메타 반영’으로 개념화하였다. 텅 빈 거울과 창문은 예술가에 의해 꽉 찬 이미지의 환상을 선사한다. 에를리치는 거울의 시각 현상적인 물리적 반영 이미지와 창문이라는 건축적 공간이면서 사유적 반영 이미지를 생산하여 꽉 찬 이미지로 완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는 때때로 거울과 창문 반영에서 포화되어 반영 자체를 벗어나기도 한다. 거울과 창문 반영은 작가의 환상을 담는 텅 빈 필드(void field)인 것이다.

 


레안드로 에를리치를 통해 바라본 ‘반영 이미지의 환상성’


본 연구에서는 에를리치 작품 속의 반영성이 현대 시각예술에서 드러나는 반영 이미지의 환상성을 분석하는 구조적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에를리치는 거울과 창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반영 이미지를 다양하게 극대화했다. 관객들은 에를리치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다중으로 나열된 이미지를 보고 ‘반영 이미지 기대효과’로서 거울 반영 이미지를 상기하게 된다. 또한, 그의 작업은 일상 자체를 반영하며 그의 일상성은 역사성과 장소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특성은 일상에서 비롯되어 낯선 무언가를 발현하는 환상성의 개념으로 향하게 하였다. 물리성의 반영과 사유의 반영은 에를리치의 거울과 창문 반영, 그리고 현실 반영에 대한 환상과 상응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거울이나 창문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반영 이미지를 구현하는 메타 반영 작품군에 있다. 메타 반영은 반영 매개체에 의존하지 않고 작가가 반영 이미지에 대하여 최대한의 적극성을 보인 결과물이다. 에를리치는 반영 이미지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본래의 텅 빈 곳 안에 온전히 자신의 창조물을 표현하였다. 


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메타 반영의 의미는 아날로그적인 반영 이미지(reflected image)에서 디지털에 의한 이미지 반영(image reflection)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본 연구자는 메타 반영을 그 양상에 따라 X, Y, Z축으로 구분하였다. 수평적 반영 형상은 X, 수직적 반영 형상은 Y, 수직·수평적 반영 형상이 아닌 제3의 반영 공간은 Z축이라고 하였다. X축 메타 반영 구조에서는 에를리치가 일상적인 동선과 시선의 평이성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Y축 메타 반영에서 에를리치는 주로 복층을 활용하여 기이하고 낯선 환상을 스펙터클한 공간 안에 투여하였다. Z축 메타 반영은 X, Y축의 실상과 허상의 이중 이미지의 반영 문법에서 벗어나 제3의 반영 공간을 보였다. 


다시 말해 X, Y축의 보이지 않는 메타 반영의 경계를 무산시키고 허물어진 그 경계에 이미지가 펼쳐진 것이 Z축 메타 반영의 환상 공간이다. 아울러 로즈메리 잭슨(Rosemary Jackson)이 주장한 점근축, 거울이나 렌즈 뒤 허상의 환상 공간이나 허버트 제틀(Herbert Zettl)이 말한 모니터나 스크린 면에서 자유로운 입체영상의 공간인 Z축과 연결해 언급하였다오늘날의 가상 이미지는 자연 현상이었던 반영 이미지가 고도로 증강된 형태이다. 더불어 인간의 영원성, 소유욕, 그리고 소통에 대한 갈망이 저장 형태의 매체를 발전시켰다. 초기의 저장 형태는 그림자 반영을 통한 최소한의 기록, 곧 드로잉이었다. 그것은 점차 가장 초보적인 조형으로 재현하는 회화, 리얼한 이미지를 담아내는 사진, 선택한 시간 모두를 그대로 담아내는 비디오로 진보하였다.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는 실시간으로 행해지는 인터랙티브(거울)와 최첨단 기록(창문)으로서의 진보이다. 그림자 반영, 미술의 기원 회화에서 보였던 1) 영원성에 대한 소유, 2) 재현에 대한 사유, 3) 욕망에 대한 치유의 환상을 즉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오늘날의 미디어인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가상현실 시대에서는 거울과 창문이라는 프레임을 넘어 메타 반영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가운데 에를리치의 반영 이미지에 대한 환상성을 다룬 본 연구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시대적인 접점에서 현대미술에 구현된 환상성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반영 이미지의 환상성 연구가 이후에도 동시대의 문화 현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거울과 창문, 그리고 메타 반영을 통하여 보는 것이 환상인, 그러한 반영 이미지의 환상성인 것이다.  

 

*학위논문책자 첨부사항: 레안드로 에를리치 인터뷰(2017 6), 이예린의 박사학위청구전

  




Special feature Ⅱ-8

낯선 정보가 불러온 상상과 -재현적 형태에 대한 연구

● 이동근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과

● 이메일 dogdonggle22@naver.com

● 추천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과 김성원 교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매일 매일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와 세상과의 관계’를 파악하고 분석한다. 그 과정의 반복은 더 많은 것을 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얻은 기준으로 선택할 최선과도 결부된다. 이렇게 인지와 생이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 굴레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당연히 나도 이 조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삶의 불안을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극복해온 것 같지만, 그런 이해의 시도가 실패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순간, 내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내용이 돌연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이해가 실패하는 순간에만 집착하다가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 자체를 돌아보고 도전한 것이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는 체험하지 않은 정보를 통해서만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중요한 조건이 있다. 이는 아직 그 특성과 문제점이 온전히 분별 되지 않은 동시대의 거대한 정보망에도 난해한 대상들에게 다가가고 상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나의 판단을 실험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반면 이미 우리 삶의 일부가 된 이 거대한 정보의 덩어리는 우리에게 온전히 세상을 인지할 수 없다는 답답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낯선 대상을 알아갈 가능성 또한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이러한 정보의 바다 안에서 경험하고 이해하며 상상하는 것이 이 시도의 주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첫 대상은 코트디부아르였다. 선택의 이유는 내가 사는 주변 환경과 가장 다르다고 느껴지는 동시대의 어떤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그 이름으로 검색을 하고 여러 정보를 기반으로 가상의 사람을 한 명 묘사했고, 여러 상황 중 글로 표현하기 힘든 것을 그림으로 옮겼다. 당연히 이 당시 작품의 전반적인 과정에서 글의 영향력은 매우 컸고 조형작품은 글을 위한 삽화처럼 느껴졌다. 이에 답답함을 느껴 더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게 되었고 정보를 통한 소설과 조형 작품 간의 관계에 대해 더 질문하고 고민했다.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공간인 ‘그린란드’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선택은 비록 같은 조건으로 공간을 찾았지만, 아프리카에서 찾았던 이전 국가와도 또 다른 공간이길 기대했기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린란드’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 분석하고 그것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쓰고 그림도 그려봤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러 생각 끝에 내가 느낀 이 답답함은 상징적으로 표현된 도상이 낯선 대상을 고착시켜 더 다가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진행 중인 작품에서 재현적 형태나 상징적 형식이 나오면 잠시 제작을 멈추고 더 조사하고 분석하려 노력했다. 결국 이 조사와 분석 끝에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상상들이었다. 여러 정보 사이의 차이를 좁히지 못할 때, 그것을 연결해주는 것은 분석을 통한 언어가 아닌 상상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순간에 발현되는 상상의 성격과 가치는 그때도 몰랐고 현재도 불분명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만큼 나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 


나의 작업에 지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 상상은 어떤 것일까. 그전까지 상상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단순하게 받아들여져 왔지만 이번을 계기로 조금 더 자세히 보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상상은 재생적, 재현적, 창조적 상상 등 세 종류로 구분해 고려해볼 수 있는데, 결국 내가 도달하고 싶은 것은 창조적 상상이다.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은 창조적 상상의 반복이 아닌 재현적 상상의 반복이었다. 더 깊이 있는 재현적 상상의 이야기가 만들어질수록 창조적 상상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재현적 상상의 정밀함이 창조적 상상의 결과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견고한 이야기 구조를 만들기 위해 폭넓은 정보량을 기반으로 개연성 있는 맥락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역사 속 추상미술과 현재까지의 내 작업은 비-재현성이라는 면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일반적 의미로부터의 탈피와 같은 수동적 결정이 아닌 개인의 적극적 의지에서 발현되며 대상이 불완전하거나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넓게 보면 이것을 추상미술만의 특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여기에서 우리는 추상미술의 ‘추상(抽象)’이란 어떤 의미인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추상은 ‘일정한 인식 목표를 추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표상이나 개념에서 특정한 특성이나 속성을 빼냄. 또는, 그 빼낸 것을 사고의 대상으로 하는 정신 작용’(네이버 한자 사전 참조)이란 의미가 있다. 이는 나아가고자 하는 본질적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 조건들을 괄호에 넣어 잠시 배제한 후 남겨진 그것을 사고하고 판단하는 행위인 것이다. 과거의 추상미술의 경우에는 장르라는 형식적 측면과 개인의 감성을 제외한 나머지를 괄호에 넣고 남아 있는 본질을 분석하고 실험하는 것이었다. 이 미술 장르가 마치 장르 특정적 작업이라 느껴지는 것은 그때의 추상화 과정에 장르가 본질적 대상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작업은 본질적 목표를 장기간 실험된 ‘장르’라는 것에 한정시키지 않고 다양한 목표를 설정한다. 그로 인해 ‘추상’이라는 단어는 추상미술과 함께 구시대의 산물로 치부되며 역사 속으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추상’이라는 행위 자체는 우리의 사유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이고 그렇기에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앞서 말한 사유와 밀접한 상상이라는 행위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이 ‘추상’과의 연결에 대해 예를 들자면, 괄호에 들어갈 본질적 대상이 아닌 일상적인 언어들을 명백히 밝힐 때는 재현 적 상상이, 불완전한 본질적 대상이 만들어내는 틈 앞에서는 창조적 상상이 연결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작업을 진행하면서 결과적으로 도출되는 이미지는 대개 추상미술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마무리된다. 


이는 구체적 대상을 상징적이거나 언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라고 생각된다. 추상미술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작업에서 설명적인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까지 추동하는 행위는 추상미술의 어법과 맥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이 느낀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것들을 시각화하는 것이 추상미술의 일면이라 정의할 수 있다면 나 또한 그 부분에서 동일한 방법론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동시대의 정보망을 이용해 먼 곳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경험을 중요한 방법론으로 선택했다는 면에서 그들과 나의 작업은 생성되는 위치가 다르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각자 작업의 중추에 있는 질문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은 같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추상미술의 이면에 있는 ‘추상’이라는 행위는 나뿐만 아니라 미술 전반에도 여전히 추구해야 할 근원적 의지로 남아있다. 그 의지는 난해한 형상에 대한 단순한 추구가 아닌 현상학적 에포케를 통해 본질적 질문을 생성하고 실천하는 존재의 지울 수 없는 성향이다. 


앞선 전개들을 통해 나의 작업 안 추상적 이미지를 돌아보면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추상적 도상들이 상징적으로 재참조 된 것이 아닌 오히려 상징적인 것 사이에 있는 타자를 통해 창조적 상상체로 추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추상미술의 형태와의 유사성에서 시작된 이 질문은 그 장르의 근저에 깔려있던 미술 자체가 가진 본질에 대한 의지를 다시금 볼 수 있게 도와주었고 그 의지가 현재를 사는 나의 작업과도 상상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지속되고 있음을 인지시켜주었다.  


 

 


Special feature Ⅱ-9

선언의 관점에서 본 예술가의 사회적 발화1) 

‘제4집단’과 ‘현실과 발언’을 중심으로

● 김진주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부 대학원

● 이메일 injooj@gmail.com

● 추천인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부 대학원 예술학 전공 김남시 교수

 


선언(宣言, manifesto)은 인간의 사회/정치적 이상을 집합적이고 공적으로 표명하며 수행하는 가장 강력한 발화이다. 우리는 예술의 역사와 아카이브로 남은 그 텍스트의 증거 속에서 예술가들도 선언했다는 것을 안다. 예술가들은 왜, 선언이라는 명명과 형식으로 자기 생각과 행위를 발산했을까?

 


예술가 선언의 4가지 쟁점 - 수행성, 연극성, 시간관, 매체성


manus(hand) infest/fendere(dangerous)에서 유래한, ‘손에 잡히는 분명한’이라는 뜻을 가진 manifesto/선언은 19세기 이전에도 사용되고 있었다. 이 단어는 왕이 군사적 혹은 통치 목적의 계획을 피지배자에게 알리는 수단이나, 어떤 사실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법적 수사학, 또는 신의 계시나 학문적 권위를 가진 주장을 담은 글, 혹은 드물게 도착지가 분명한 수화물의 송장을 지칭했다. 선언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교회 기존 위계와 권력에 대한 개혁의 요구를 공공적으로 표명한 면죄부에 대한 「95개 테제」(1517)를 거쳐, 마르크스(Karl Marx)와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공산주의 선언」(1848)에 이르러 사회/정치적 변화의 전위에 나서는 언어가 된다. 혁명을 둘러싼 치열한 사회/정치적 공론장의 영향 속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미학적 차원의 규율이나 예술적 정신성을 집약해 프로그램이나 예술가의 선언으로 남겼다. 모레아스(Jean Moréas)의 「상징주의 선언」(1886)은 데카당스와의 예술적 논쟁 속에서 추동되었고, 당시 주도적 언론지였던 『르피가로(Le Figaro)』 지면에 발표되며 예술에서도 공론장의 탄생을 이끌었다. 


권력자의 발화에 복종해야 했던 수신자, 즉 프롤레타리아를 선언의 화자이자 주체(‘배회하는 유령’)로 호명하며 시작하는 새로운 선언의 호명을 통해 메시지에 복종해야 했던 수신자는 수행적 주어의 자리를 획득한다. 발화 주체의 자리바꿈에는 비권력 주체의 선언이 가진 혁명으로서의 정치성이 도사리고 있다. 선언을 역사적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선취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리네티(Filippo Marinetti)의 「미래주의 선언」(1909) 또한 ‘그들/당신’이 아닌, 기성 문화와 예술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그 혁명적 예술 이념을 함께 수행할 주역인 ‘우리’를 호명하며, 수신자의 주체적 수행성을 발현한다‘우리’들을 불러내기 위해 미래주의 선언은 실제 효력 없는 서식 위의 서명이라는 제스처, 그리고 낭독과 같은 퍼포먼스를 동반하는 연극적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연극성은 정치적 선언이나 언어 행위 일반에서의 수행성과 대치되는, 수행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거해야 할 개념이다. 그러나 이들 예술가에게 연극성은 발화를 실제의 국면으로 바꿔놓는 근거가 된다. 이들의 무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예술가 선언의 주체들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는 개념적 장소이며, 동시에 문인 클럽, 카바레, 극장 등은 실제로 대중들이 집합하는, 노출된, 사회적 장소였다는 점에서 현실의 장소이다. 


미래주의와 그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볼 수 있듯이, 선언하는 예술가들은 “언제나 새로운, 최초의” 것이라 주장한다. 선언이 향하는(공격하는) 곳은 과거로부터 탈출해 미래로 향하는 현재의 자리이다. 이러한 시간관은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미래주의 선언은 기성 ‘인간’/예술가와 예술적 전통을 이미 죽은 것이라 비판하며, 이에 대항하는 전쟁을 선포하며, 속도와 충격이라는 ‘기계’의 덕목을 가진 새로운 인류를 호명한다. 한편, 선언이 매체를 통해 공론화되는 과정은 그 형식, 권위, 시각적 요소에 따라 영향을 받으며, 그 재현 양상 이면에는 자본, 정치 등 사회적 요소가 작동한다. 예술가 선언은 그것이 수행되는 무대인 매개체를 조형하고, 그 텍스트를 시각화한 마니페스토 아트라는 예술 장르로까지 발전시켰다. 예술가가 선언을 위해 어떤 말의 매체를 사용하고 고안하는가, 그리고 그 매체는 예술가 선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또한 예술가 선언의 쟁점이다.

 


실험과 현실의 예술가 선언·제4집단, 그리고 현실과 발언 외


한국어권 예술가들의 세계를 향한 열린 자기주장은 김복진의 「나형 선언 초안」(조선지광, 1927. 5)에서 시작한다. 그는 계급 인식과 식민지배하의 사회 비판을 반영하는 미학이자 정치적 사회의식을 추구하는 예술운동의 원리를 선언했고, 이는 토월회(1922), 파스큐라(1923), 카프(1925~1927)와 같은 문예운동의 예술론을 구성한다. 이어 1945년 광복 직후의 젊은 예술가들은 전쟁의 참상 이후에도 변화가 없던 보수적 관전 체제의 국전을 거부하고 모더니즘으로서의 새로운 예술을 선언한다1960년대 민주화의 영향 속에 예술가의 선언은 관료적인 예술 행정의 개선과 문화 제도의 민주화 요구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한국어권에서도 선언은 예술작품과 다른 측면에서 예술가로서의 세계관을 구체화하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술가 선언이 단독으로 연구되지 못하고 부수적으로만 평가되는 현 상황은, 선언으로써 밝혀낼 수 있는 예술가들의 사회적 영향력이나 수행성을 축소하고, 사회와 분리된 ‘예술’의 영역에 예술가의 활동을 가둬놓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60년대 이후 한국어권 예술가 선언의 대표적 사례로는 실험예술가들의 「제4집단 선언」(1970), 그리고 「현실동인(現實同人) 선언」(1969)으로부터 시작해 「현실과 발언 창립취지문」(1980)으로, 다시90년대 여러 예술가 소집단이 발표한 말과 글로 분화된, 이른바 현실주의 혹은 민중미술 계열의 선언들이 있다. 4집단의 선언은 당대 한국 사회에 강하게 결부된 정치적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던 단어를 거론하며 청년(우리)을 그저 거리를 떠도는 불평분자가 아닌 비판적 발언자의 위치에 가져다 놓는다. 현실주의 예술 선언은 “현실”에 정치적인 것을 총합하여 기성으로부터의 민중의 소외를 돌파하는 주체로서의 “우리”를 정립한다. 이들 예술가는 선언을 낭독하는 무대를 해프닝 등의 행위예술로 승화하거나, 전시의 서문 격에 선언문을 배치함으로써 작품 활동 자체를 선언을 수행하는 예술적 실천으로, 전시를 그 무대로써 간주하며 연극성의 측면을 드러낸다. 두 선언은 모두 과거의 예술로부터 결별하고 새로운 이념을 꿈꿨으며, 그 지향점을 구체화하고 표현하는 가장 좋은 도구로 선언이라는 언어를 선취했다. 4집단의 선언은 광복과 해방이라는 국가적 선언의 순간을 선언의 일시적 장소로 점거한다는 면에서, 현실주의 선언은 현실 동인 제1선언에서부터 계승해온 식민주의와 결별하는 주체적 역사를 미래의 예술이 향해야 할 곳으로 주장하는 점에서 역사적 인식이 발견된다. 해프닝이라는 행위를 통해 반이성적, 허무주의적 성격을 드러낸 제4집단이 현실로부터 완전히 탈주하는 미래적 실험이었다면, 과거의 억압과 모순을 극복하고 예술적, 역사적 주체성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현실 동인과 현실과 발언은 미래를 현실에 가까이 당겨놓으려는 구축에 가깝다. 


실험과 현실이라는 이 두 선언의 흐름이 가진 지향성은 그것이 수용되는 매체의 장에서 문화의 소비와 정치적 투쟁이라는 서로 다른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했다. 4집단에게 오락성 짙은 주간지를 통해 자신들의 선언 행위를 전파한 사실은 대가성을 선취하는 낭만주의적 아방가르드 예술 혹은 하위문화로서의 선언을 자리매김하게 하면서도 역으로 이들의 저항성을 무효화하고 가십거리로 소비되고 마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현실주의 선언에서도 대중과의 소통과 사회운동은 풀리지 않는 딜레마로 남아있다. 이들의 선언이 주장했던 사회적 소통의 목표였던 대중과 민중의 불확실함과 다중성을 끝내 해소하지 못했으며, 그리고 사회/정치적 이해도의 조건에 상충할수록 정치 이데올로기로 편향되거나, 오히려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예술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발화의 본래 의도와 달리 왜곡된 결과를 발화의 실패로 이해해야 할까? 실패는 현상일 뿐 이 예술가들의 선언에 관한 최종적 의미를 결정짓지 못한다. 선언과 같은 강력한 사회/정치적 발화의 힘이 약해지는 가운데 혐오에만 가득 찬 적대의 어법이 팽배한 지금, 주체적, 미학적, 미래적, 매체성을 발화했던 예술가 선언은 우리에게 더욱 충분한 메시지와 수행성을 추동하고 있다.  

 

[각주]

1) 김진주, 「선언의 관점에서 본 예술가의 사회적 발화: ‘제4집단’과 ‘현실과 발언’을 중심으로」 2016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부 조형예술학전공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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