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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75, Apr 2021

대안공간 20년

20 Years of Alternative Space

1990년대 말 IMF 경제 위기가 불러온 사회 변화의 바람과 포스트모더니즘 유입은 한국 현대미술의 경계를 무화시키며 급격한 다원화를 야기했다. 이에 말미암아 국공립 미술관 등 제도 비판의 목소리도 확산됐는데 이는 권위주의, 상업주의 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공간에 대한 필요로 대두됐다. 이 지점이 바로 ‘대안공간’의 시발이다. 1998년 쌈지스튜디오를 필두로 1999년 대안공간 루프, 대안공간 풀,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2000년 인사미술공간 등이 연이어 등장했고 그 흐름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화예술생태계 활성화를 지향해온 이들의 취지가 무색하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대안공간의 권력화, 무용론이 제기된 게 수년. 이후 또다시 대안공간과 차별화를 내세우며 신생공간들이 등장했으나 그 맥락과 방향성 측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고 경계 또한 불분명하다. 대안공간의 설립 2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정체성은 무엇인가. 대안공간의 미래와 방향성에 대한 고민, 지금 함께해보자.
● 기획 정일주 편집장 ● 진행 김미혜 기자

제프 랑게(Jeppe Lange) '운동의 법칙(Laws of Motion)' 2018 싱글채널 비디오 3분 1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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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아 컨트리뷰터·독립큐레이터, 안소연 미술비평가, 정현 인하대학교 교수·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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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No. 1 

역사는 반복된다: 대안공간의 탄생과 현황_문선아


SPECIAL FEATURE No. 2 

대안공간과 나_안소연  


SPECIAL FEATURE No. 3

우리가 다시 대안공간의 미래를 생각해야 할 이유에 관하여_정현





Special feature No. 1

역사는 반복된다: 대안공간의 탄생과 현황

● 문선아 컨트리뷰터·독립큐레이터



지난 2월 작가 문보람, 정명우, 조익정이 운영하는 퍼포먼스 공간 윈드밀(WINDMILL)이 서울 용산구 청암동에 문을 열었다. 공간 규모를 자랑하며 첫 스크리닝 프로그램을 선보였고, 퍼포먼스 공연과 공연 스크리닝, 워크숍 독서 모임 등을 기획하고 있다. 또한 1월 성북구 길음동에 개관한 사가(SAGA)는 지역 활성화와 젊은 창작자 지원을 위해 성북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마련됐고 에피소드, 레슨, 이벤트를 구획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지난해 11월에는 작가 노두용이 운영하는 실린더(CYLINDER)가, 8월엔 이예승, 이정형, 정기훈이 운영하는 디스이즈낫어처치(THIS IS NOT A CHURCH)가 문을 열었다. 바야흐로 공간의 시절인 게다. 그러나 <굿-즈>와 <서울 바벨> 즈음하여 생성돼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던 공간들 중 언뜻 떠오르는 사라진 곳만 해도 이십여 개. 그렇다면 여기서 이십 년이 넘도록 여전히 살아있는 ‘대안공간’ 선배들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며 전략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안드레이 카사이(Andrey Kasay) <방학(Vacation)> 2018 싱글채널 비디오 2분 25초





대안공간의 단초


대안공간에도 선례적 역할을 했던 전시공간들이 있었다. 한강미술관(1984년 개관), 관훈미술관(1979년 개관), 서울미술관(1981년 개관), 그림마당 민(1986년 개관), 소나무갤러리(1990년 개관), 예술마당 솔(1991년 개관)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그림마당 민은 당시 제도권 공간에서 소개하기 힘든 젊은 민중미술 작가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면서 향후 이십일세기화랑(1994년 개관)에서 대안공간 풀로 이어지는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안공간의 탄생


미국에서 대안공간의 출범은 작가들의 저항적인 행동주의와 격렬한 전위적 미술 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이에 반해 국내의 경우에는 미술계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1990년대 대중문화, 소비문화의 확산, 세계화의 흐름은 국내 미술시장의 규모를 확장시켰지만 역설적으로 국내 미술품의 거래량을 축소시켰다. 이 시기의 미술계는 상업갤러리와 제도권 권력에 의해 주류 예술 양식이 반복적으로 차용되는 형태로 전개됐다. 미술시장은 유명작가들에 의해 더욱 독점화되고 유료 대관을 진행하는 갤러리가 대부분이었으며, 미술관 전시 초대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1997년 말 IMF 경제 위기 이후 예술시장의 불황과 국공립 미술관에 대한 제도 비판이 확산됐다. 


다른 한편에서는 전시 형태가 변화하며 다양한 전시에 대한 요구가 일고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신세대 문화를 바탕으로 탄생한 ‘신세대 소그룹’은 “탈모던적 감성과 키치적 통속성, 대중매체 친화성, 아방가르드적 비판의식을 표방”하며 새로운 예술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새로운 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던 무렵 IMF 경제 위기가 발생했고, 유학을 통해 서구의 미학을 경험한 예술가들이 국내로 대거 유입되면서 이 흐름에 합류했다. 현장에서 새롭게 분출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형식적 태도와 미학적 성과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비판의식이 강화됐고, 대안공간 필요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갔다. 1998년 쌈지스튜디오(2000년 쌈지스페이스로 재개관)를 시작으로 1999년에 대안공간 루프, 대안공간 풀,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2000년 인사미술공간 등의 1세대 대안공간이 자생적으로 생겨났고, 그 후 전국적으로 수십 개의 대안공간이 등장하게 된다.





<돌의 실제> 전시 전경 2020-2021 디스이즈낫어처치 이미지 제공: tinc 





1세대 대안공간의 전개


패션잡화업체 (주)쌈지는 암사동 옛 사옥을 개조해 작가들에게 작업장을 지원해오던 ‘쌈지 아트프로젝트’를 발전시켜 2000년 홍익대 부근으로 이전, 갤러리와 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 쌈지스페이스를 개관한다. ‘아방가르드, 언더그라운드 정신과 탈장르 추구, 다음 세대의 비전을 반영하는 대안문화 형성’을 모토로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고 독립성과 실험성을 가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주목했다. 연 6-8회의 기획전은 규모도 컸을 뿐 아니라 안정적으로 구성되어 매회 이슈가 됐고,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다양한 교류를 가능케하면서 향후 국내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모범사례가 됐다.


대안공간 루프는 이름처럼 미술의 순환을 꿈꾸며, ‘젊은 작가 발굴과 프로모션’, ‘창작과 매개 활동 후원’, ‘실험적 작업의 유통’의 구호를 걸고 설립되어 홍대의 지역적 특성을 활용해 활동했다. 2005년 기존의 상수동에서 서교동으로 확장 이전하고 2006년 이후로는 ‘낀 세대 작가 후반 세대 지원’과 아시아의 대안성을 구축을 위한 ‘대안공간 국제교류네트워크 강화’, ‘다른 문화와의 활발한 교류’를 목표로 다각적인 실천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무빙 이미지를 주제로 한 영상, 미디어아트 관련 아카이빙, 전시, 네트워킹, 생산 및 유통 등 전문화된 실천을 통해 첨단 디지털 시대에 변모하는 미술 문화의 형성에 관심을 지속해왔다. 


대안공간 풀은 현실과 유리된 미술 지상주의 제도권 미술에 문제의식을 지닌 20여 명의 예술인이 미술의 대안적 실험과 주체적 미술 문화 형성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공동으로 설립해 관훈동에서 개관했다. 이영욱-김용익-황세준-김희진-이성희-안소현 대표의 체제를 거치며 현재의 구기동으로 이전했고, 전시, 교육, 출판 활동을 통해 작가 지원, 미술 담론 생산, 소통 기능을 수행하는 미술전시공간, 미술교육기관 그리고 미술인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해갔다. 특히 1998년부터 발간해온 비평지 『포럼A』는 작품과 실천에 대한 비평, 토론, 발언과 미술제도에 대한 대담한 비판을 담은 대안미술저널이었다.


인사동에 개관한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은 실험적인 예술을 지원하는 비영리 전시공간으로서, 실험적인 종합 예술을 대상으로 삼았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창의적 사고와 실험정신이 분명한 작가를 공정하게 선정해 지원함으로써 권력적인 화이트 큐브의 전시공간을 탈피하고 새로운 전시형식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인사미술공간은 ‘전시지원을 통해 작가들의 자립 경로와 실험적이고 진취적인 전시개최로 미술계 활성화 모색’을 모토로 정부가 조성한 공익자금에 의해 설립되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해오고 있다. 아카이브, 전시/프로덕션, 워크숍의 활동 중 특히 다양한 전공 분야의 접근이 가능한 미래형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데 힘썼다. 또 계간지 『볼(BOL)』을 출판하면서 미술과 시각 문화에 대한 교차-학제적 접근을 통해 미술 현장과 일반 대중 사이의 소통을 시도했다.





<TOUQUE1 / GEAR SHIFT> 전시 전경 2021 실린더





2세대 대안공간


이후 4-5년이 지나 수도권과 지방의 주요 광역시에서 지역연계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공간들 - 대안공간 눈(수원),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안산), 스톤앤워터(안양), 소나무(안성), 아트포럼리(부천), 스페이스 빔(인천), 공(의정부), 미나리(광주), 반디, 오픈스페이스 배, 숨(부산), space gachang, 싹, 문화공간G(대구), 반지하, 게이트(대전), 마루(창원), 몸(청주), 제주(제주) 등 - 이 등장했고, 2세대 대안공간으로 분류됐다. 1세대 대안공간이 전문적인 경향을 띠면서 작가발굴과 지원의 무게를 키워나갔다면, 2세대 대안공간은 대중 교육프로그램 운영, 공공미술 형식의 전시기획 등을 통해 지역 미술/미술인들과의 내부적 소통, 지역 미술의 한계 극복, 지역성 담론의 확산 등 미술의 외부적 요소들을 극대화함으로써 소통과 참여의 공공적 의미를 확장했다. 



1세대 대안공간의 절정과 위기


초기 대안공간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2002년 무렵 브랜드화되면서 한국의 시대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들의 집합소로 거듭났다. 2004년부터 2006년 사이에는 대안공간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작가들이 내로라하는 국내 사립미술관과 미술상, 국내외 비엔날레에 초대되고 유명 상업갤러리의 전속작가로도 흡수되기 시작했다. 점차 대안공간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제도권의 관심이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로 확대됨에 따라 대안공간이 오히려 제도권으로 포섭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안공간이 주류 예술 공간으로, 운영자들과 참여 작가들이 기성세대로 자리 잡으면서, 대안공간은 더 이상 새로운 예술과 담론을 생산해내는 장이 아닌 신진작가가 제도권으로 들어가기 위한 등용문이 되고 만다. 비영리를 목적으로 했던 초기와는 달리 재정난을 이유로 기업과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다양한 논란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2009년 3월 폐관하며 “미술관, 상업화랑, 대안공간의 구분이 흐려지는 새로운 현상 속에서 기존의 대안공간은 자기 반복적 프로그램으로 명맥을 유지하기보다는 새로운 변화를 위한 방향 전환을 모색해야 될 때”라고 밝힌 쌈지스페이스의 폐관 선언문은 대안공간이 제도권 미술관으로 흡수되고 있음을, 다음 해 모기업이 파산한 사실은 대안공간의 근본적인 문제, 즉 재정 확보의 어려움을 시사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아트스페이스 보안1 전경





세대교체와 새로운 변화


대안공간들은 각자의 20주년을 앞두고 2015년을 전후로 정체성의 변화를 모색했다. 대안공간 풀은 아트 스페이스 풀로 개명하고 5기와 6기 체제에 돌입하면서 2015년 새로운 구성원들로 『포럼A』를 재창간했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역시 2015년부터 ‘심층비평 프로그램’을 도입해 비평과 담론, 아카이브 기능을 강화하고, 작가 대상 교육프로그램 ‘SO.S’를 런칭했다. 2020년에는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로 개명했다. 대안공간 루프는 2019년 양지윤 디렉터의 선임 이후로 문화예술 비영리법인으로 새롭게 출발하여 국제적인 공모를 시작하고 페미니즘 담론을 도입하는 등 구조와 내용을 재정비하면서 대안적 삶의 철학과 미학을 시민들과 함께 구축하는 예술 단체로 거듭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동시에 예술계 전반에도 새로운 변화의 흐름이 일고 있었다. 2011년 9월 뉴욕 맨해튼의 월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가 발생했고 이에 영향을 받아 2012년 5월 ‘미술생산자모임’이 결성됐다. 이들은 작가 사례비, 인턴제도, 저작권 문제 등 예술계 구조 전반을 둘러싼 이슈를 공론화하고자 했다. 이 흐름 안에서 홍태림은 <제4회 공장미술제>에 대해 “기획자가 작가에게 초대사례비를 주지 않았으며, 공모가 아닌 추천으로 작가를 선발했고, 또한 참여 작가 숫자에 집착한 하향 평준화 기획이었다”고 비판했고, 이 비판이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면서 2014년 3월 대안공간 루프에서 공개토론회가 개최됐다. 


토론회에서는 ‘자발적 참여’와 ‘좋은 취지의 기획’이라는 공장미술제의 책임기획자이자 대안공간 루프의 설립자인 서진석의 입장과 ‘기대감소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의 이해 요구’라는 홍태림의 입장이 대립했고, 세대 간의 갈등과 소통의 부재를 드러냈다. 대안공간의 개관과 함께 시작되어 당대 청년들의 공간 부족에 대한 토로와 미술대학 제도 비판을 반영했던 공장미술제가 새로운 청년들의 공격을 받게 된 셈이다. 한편 한국 현대미술계에서는 2016년과 2018년, 두 차례의 성폭력 공개 고발 운동이 전개되는데 여기에 아트 스페이스 풀과 관련이 있는 작가들이 일부 연루된다. 당시 안소현 디렉터는 “2017년 시작한 반성폭력 세미나를 이어나가고 ‘풀’이 낸 균열을 중심으로 아카이브 연구를 진행하여 비평적 큐레이터쉽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으나, 현재 아트 스페이스 풀은 해산을 논의하고 있다. 


대안공간이 스스로의 세대교체에 실패하거나 권력화됐다고 생각된 기점 즈음에 많은 신생공간이 그들과의 차별성을 내세우며 탄생했다. 그러나 신생공간이 말하는 ‘기성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는 흐름은 앞서 살펴보았듯 대안공간의 탄생과도 깊게 연관돼 있다. 따라서 신생공간은 그 사회적 배경이나 콘텐츠에 차이가 존재할 뿐 탄생의 큰 맥락과 방향성에서는 대안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새로운 공간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휘발성이 강한 요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지만 동시에 그들이 다른 세대와 소통하고 스스로의 방식으로 변화를 추구하며 여전히 담론을 형성하려 하는 한, 대안공간과 함께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가능한 예술계를 모색해보면 어떨까.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소중하고 우리는 항상 역사의 돌고 도는 언저리에 있으니 말이다. PA

[참고문헌]

김종길, 『한국 현대미술 연대기 1987-2017』, 디어북스, 2018

고용수, 「그림마당 민 연구: 역사적 의의와 복합적 공간성에 관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과정 예술전문사학위논문, 2016

권한아, 「한국 청년세대의 전술적 발화공간으로서의 신생공간 연구」, 국민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9

김명숙, 「비 주류 미술공간 대안공간 실태 및 발전방안」, 『춘계연구1』, 쿤스트독미술연구소, 2008

반이정, 「1999-2008 한국 1세대 대안공간 연구 - ‘중립적’ 공간에서 ‘숭배적’ 공간까지」, 

쌈지 심포지엄 2008년 10월 11일 발표문 전문 (https://blog.naver.com/dogstylist/40103839264) 

백송민, 「한국 대안공간의 실태와 발전 방향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9

채주희, 「한국 대안공간의 특성과 발전방향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글쓴이 문선아는 다양한 관점에서 현재의 시대성을 관찰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관계성을 형성하는 기획을 진행해왔다. ‘제6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공생도시’의 주제전 <내일 보다 나은>, 세대론과 미디어 이론을 결합한 ‘시대정신’ 시리즈 등을 기획했으며, 최근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관계성 안에서 내일의 시각문화를 모색하기 위해 경기도 동두천시에 새로운 공간을 준비 중이다.





<더 스크랩> 전시 전경 2017 동대문구 왕산로 9길 24





Special feature No. 2

대안공간과 나

● 안소연 미술비평가

 


1. 1999년, 20세기의 대안


홍대 96학번인 나는 1993년부터 홍익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던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거의 1990년대 내내 홍대 안팎을 오가며 보냈다. 문민정부, 세계화, 한총련, 대학수학능력시험, 오렌지족, X세대, 노래방, 편의점, 인디밴드로 불붙은 1990년대 전반부의 새로운 변화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 및 IMF 같은 잇따른 재난과 위기를 함께 겪으면서 배낭여행, 유니텔, PCS, 록카페, 혼성문화, 대안공간 등 1990년대 후반부의 세기말 풍경으로 이어졌다. 오래된 헌책방과 마니아들에게 잘 알려진 레코드점과 청춘 드라마에서 새로운 삶의 일상성을 그려낸 편의점과 미대생들뿐 아니라 젊은 뮤지션들의 자취방을 겸한 작업실과 언더그라운드 공연장과 실험적인 소극장과 마지막 학생운동이 공존하던 1990년대 홍대 앞은 여물지 않은 개별적인 것들의 출현과 그 정서에 대한 당대적 공감대가 특유의 독립적이고 대안적인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사실 홍대 앞에서 1990년대 초부터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신촌 대학가와 맞닿아 있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연결 고리로서 신세대들의 아지트라 할 수 있었던 카페나 클럽을 기반으로 한 인디음악의 비주류 취향이었다. (때 아닌 세기말 복고 열풍 탓이었던가) 항아리 교복 치마를 흰 발목 양말에 닿을 정도로 내려 입었던 고등학생들도 홍대 축제나 밤거리를 무대 삼아 주차장과 놀이터 등에서 공연하던 인디밴드들의 노래를 하굣길에 심심찮게 들으며 적어도 그 후렴은 따라 부를 수 있었던 새로운 취향이었으니까.





<네오서울: 타임아웃> 전시 전경 2019 d/p 





그러다 한 세기의 마지막 4년을 남겨둔 채 96학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홍대생이 된 나는, PC통신과 록카페 같은 유동적인 장소/공간들을 드나들며 (순수) 미적 쾌락에 대한 회의를 대신한 (하위) 문화적 쾌락을 열렬히 소비함으로써 유행처럼 당대의 예술적 적합성을 새롭게 찾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에 대학교 4학년 전공과목 ‘인스톨레이션’, ‘환경조각연구’, ‘미래조형연구’, ‘복합매체연구’ 등의 “실전 대비” 수업을 들으며 졸업을 준비하고 있던 나와 내 친구들에게 홍대 앞 대안공간의 등장과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크고 작은 시스템의 가시적 변화는 그때만 해도 사실 홍대 인디문화의 거의 마지막 진동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대안공간의 네트워크는 더 크고 길게 작동했다. 


홍대 앞 로컬 문화의 지형 바깥에서 또 다른 진원의 파동을 타고 대안공간의 출현이 앞다퉈 일어나, 하위문화와 배경을 같이 하기보단 미술계에 뿌리를 둔 독립적이고 대안적인 시도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유학길에 올랐던 젊은 (예비) 작가들이 IMF 때문에 대거 귀국해 대안공간의 정체성을 특정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지만, 당시에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나보다 한두 살 위의) 함진, 권오상, 조습 등과 같은 1970년대 중반 출생한 작가들이 미술대학을 갓 졸업하여 대안공간을 발판으로 개인전을 열고 미술계의 조명을 받으며 이른 나이에 작가 활동을 시작하던 1999년 이후의 변화였다. 그것을 우리는 스스럼없이 ‘대안’이라 말했고, 2000년대 주류 미술계의 세대교체 이슈에 대한 필요조건으로 보았다.





<유장우_구분할 수 있는, 분간할 수 없는> 전시 전경 2020 탈영역우정국 사진: 정호윤, 김태리





2. 새로운 밀레니엄과 ‘대안’을 통한 동시대성 찾기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던 때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시간의 폭을 굉장히 크게 의식하면서 함께 느꼈던 크고 작은 변화는, 특히 미술계에서 ‘동시대성’이라는 화두로 점철됐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가속화됐던 사회의 정치·경제적 동력으로서의 세계화에 대한 낙관적 태도가 미술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에 물든 새로운 가치로서 ‘유동성/이동성’이나 ‘실험실 패러다임’ 등과 골고루 엮여 동시대 미술의 경향을 진단하도록 했다. 어쩌면 대안공간은 그러한 개방적인 분위기에 등장해 동시대 미술에 대한 발화를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대안공간이 모색했던 신진 작가 발굴로 인한 세대교체와 대안적 시도들에 의한 주류 미술 제도의 변화는 동시대성의 획득을 진단할 때 매우 긴밀한 관계 안에서 논의되어 왔다.


대안공간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 대안공간 루프, 대안공간 풀,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은 모두 1999년에 개관하여 저마다 젊고 실험적인 작가 발굴에 공통적인 설립 목적을 두었거나 새로운 미술 환경에서의 긴밀한 네트워크 구축을 강조하기도 했다. 예컨대 (이는 이제 대안공간 서사의 전설이 됐을 법도 한데,)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은 개관전에서 20대 초반의 함진을 공모를 통해 소개했고, 그는 공간의 건축적 구조를 십분 활용해 초소형 찰흙 모형들을 만들어 공간 곳곳에 흩어놓고 설치미술의 맥락에서 조각적 시도를 새롭게 보여줌으로써 미술계의 이목을 끌었다. 연이어 권오상, 정수진, 정서영, 김주현, 정연두와 같은 작가들이 대안공간을 통해 개별적인 창작의 실험들을 거침없이 보여주었으며, 동시대적 미술 지형의 변화와 성취에 대한 당대의 암묵적 공감이 개별적인 대안공간의 다양한 좌표를 성공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이 ‘성공적’이라는 수식어에 담긴 초창기 대안공간에 대한 평가는 사실 다소 모순적이다.





<newcountrykid(노지원)_Choose Your Favorite Character> 

전시 전경 2020 가삼로지을 온라인 게임 및 비디오 설치





1999년 문민정부의 세계화 정책, IMF 경제 위기와 같은 세기말 국내 정세 속에서 대안공간의 출현은 그리 단순한 의의로 평가되거나 서술될 수만 없다. 1990년대 초 홍대 앞 분위기를 이끌었던 (1세대) 인디문화의 자아도취적 열망에서 비롯된 문화 권력 및 상업자본으로부터의 ‘독립’과 ‘대안’을 같이 놓고 견주어볼 때, 1990년대 말 대안공간의 등장 역시 분명 같은 사회적 변화를 한껏 누리고자 했던 시대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긴 하지만,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대안을 호소하면서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엮어낸 동시대 (주류) 미술 체계로의 진입과 안착을 함께 도모했던 또 다른 정황을 살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동안 서구 대안공간의 역사가 보여주었던 ‘대안성’에 대한 여러 문제 제기와 논쟁을 고려해 볼 때, 아무래도 1999년 한국 미술계에 새로움과 변화를 촉구했던 대안공간의 발생은 역사적 시차 안에서 다소 헐겁게 참조되어 그 목표가 ‘대안성’과 ‘동시대성’의 나란한 성공적 성취를 향해 있었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실제로 대안공간의 등장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술계 내부에서는 정책적 시도와 맞물려 대안공간의 정체성을 진단하고 그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구체적인 논의의 장들이 곳곳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그 오래된 질문은 20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유효성을 나타내며 알게 모르게 대안공간에 대한 압박을 지속해왔는데, 최근 초기 대안공간들의 2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나 신생공간들의 낯선 출현을 진단하는 자리에서도 대안공간의 대안을 되묻곤 했다. 이는 초기 대안공간들의 등장이 애초에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회의와 우려 때문에 강박적으로 갖게 된 일종의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초기 대안공간은 과연 제도적 차원에서 국가 권력이나 상업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동시대성에 대한 주류적 성취의 과제를 안고 대안적 실천을 지속할 명분을 과연 어떻게 양립시켜 놓을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다소 회의적이다. 오히려 ‘대안적 태도’가 마치 동시대성의 미덕인 것처럼, 동시대 미술의 익숙한 수사로 편입되어 버릴 가능성이 진단되기도 했다.





오뉴월 이주헌 내부 전경





3. 친제도적 대안공간의 비영리적 실천


나는 1999년 함진의 첫 개인전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에서 봤다. 그때 나는 대학생이었고, 그도 경원대(현 가천대) 조소과에 재학 중이었다고 들었다. 첫 개인전에서 끌어낸 성과는 그를 그다음 해 ‘부산비엔날레’로 데려갔고, 또 그다음은 ‘광주비엔날레’로 이어졌다. 함진은 (기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비하면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의 노출된 콘크리트 벽과 기둥을 거대하게 부각시키면서 개인적 유희에 가까운 비주류의 하위 정서를 표출했으나, 나는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거대한 창고형 전시장의 콘크리트 벽과 합판이 연출해낸 폐허의 무대에서 함진의 자아도취적 소인국이 동시대성의 스펙터클 안에 큰 균열과 갈등 없이 안착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선후 관계를 의식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대안공간과 기성 주류 시스템 간의 위계를 뜻하는 게 아니며, 단지 대안공간의 네트워크가 비주류의 대안을 지지하는 것에 연대하기보다 태생적 배경에서부터 주류 제도의 확장을 성취하고자 하는 ‘탈개인적/탈개별적/탈마이너리티’ 주류 편입을 대부분 암묵적으로 목표하지 않았는가 하는 거다. 


1999년 상징적인 꼭짓점을 구축하며 등장했던 대안공간들은 주류에 대한 대안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려 했다기보다는, 어쩌면 미술에서의 동시대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데서 주류의 ‘부재’를 자각했기 때문에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개별적인 가치와 지향점을 내세운 대안공간의 등장은 연이어 다양한 동시대적 전시 공간의 출현을 도왔으며, 그에 상응하는 제도적 정책과 함께 변화와 지속을 모색해왔다. 한편 1990년대 대안공간의 등장은 이미 세계화 이슈가 산출한 비엔날레와 레지던시 등 동시대 국제 네트워크의 요구에 대한 일련의 반응이라 할 수 있으며, 이때 ‘대안공간의 정체성’을 단순히 비주류적 대안으로 일괄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과정과 결과들이 목격된다는 점에서 모순과 회의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아트 스페이스 풀 내부 전경





그렇다면, 우리에게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국공립 전시 공간과 상업 갤러리 및 다양한 미술계 주류 체계의 확장과 다양성에 동력을 제공하면서 권력 및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었을까, 아니면 주류에 도전하며 새로움과 실험성을 평가받는 탈/마이너리티 정신이었을까? 초창기 대안공간의 등장으로부터 20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안공간이 그들의 역사를 기록해왔는데, 내가 2010년대 이후 미술계에서 함께 겪었던 대안공간들의 대안적 가치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의 ‘친제도적’ 태도와 입장에서 생각해 볼 여지를 갖는다. 대안공간의 운영에 있어서 전적으로 공공기금과 더러는 상업 자본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의 당위와 적합성을 우리는 어떻게 논쟁적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 나는 단순히 대안공간의 경제적 자립을 통한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검열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초기 대안공간의 발생부터 경제적·정치적·제도적 거리두기는 중요해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세계화의 분위기에 묻혀 그것을 적극 활용하거나 그 네트워크로의 진입이 되레 자연스러워 보였다. 


대안공간은 동시대성의 부재를 메우는 일련의 세대교체와 체질 변화를 견인한 셈인데, 대안공간들이 추구했던 대안적 취향과 실천들은 너무 빠르게 동시대성의 주류 문화로 권력화와 상업화되어 갔고 그러한 대안적 동시대성의 수사가 ‘공공성’이라는 안전장치로 보호받기를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 나는 다소 회의적이며 의심스러울 뿐이다. 대안공간의 운영에 있어서 대안성 보다 커져 버린 공공성의 가치가 어쩌면 스스로 자기 검열을 지속하게 만드는 당위로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우리는 수년간 대안공간과 상업 갤러리, 레지던시, 국공립 미술관 등에서 동시에 같은 것을 추구하며 동맹하는 봄날의 아지랑이 풍경을 불편한 내색 없이 내내 봐올 수 있었을 테다. 국가 기금에 의해 운영하든, 상업 자본을 가지고 운영하든, 미술계 내부의 후원을 통해 운영을 지속하든, 대안공간의 대안성은 친제도적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모색함으로써 또 다른 공공기관이 돼버린 권력 주체에 의해 비영리라는 윤리적 검열을 스스로 내세우고 여전히 동시대성을 유효화하는 한, 그것의 옛 향수와 시대착오적 의미로부터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PA



글쓴이 안소연은 미술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미술의 현장에서 언어를 통한 이미지 사유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왔다. 최근에는 비평의 언어와 글쓰기의 행위를 통해 예술적 삶의 가치와 실천의 방법을 찾고 있다. 글쓰기와 함께 다수의 미술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동시대 미술에 대한 탐구를 함께 해오고 있다.





박동균 <베이퍼 앤 마블> 2019 라이트 박스 안에 두 장의 백릿 필름 

각 84×60cm edition of 4+1 AP  <제6회 아마도 애뉴얼날레_목하진행중>

 전시 전경 2019 아마도예술공간





Special feature No. 3

우리가 다시 대안공간의 미래를 생각해야 할 이유에 관하여

● 정현 인하대학교 교수·미술비평가



“초기의 현대미술에서는 사회적 주변부의 인물들이 또 다른 사회적 자아로서(쿠르베), 정치적 변화의 진동계로서(도미에), 양가적인 시선의 대상으로서(마네) 징후적으로 등장했다. 잠재적인 혁명 세력으로서 정치적으로 그려졌든, 또 다른 사회 세계로서 낭만적으로 그려졌든, 이러한 인물들은 흔히 미술에 대한 기존의 담론 회로들의 적절함에 ‘파란을 일으켰다’.”*


대안공간이 등장한 지 20년이 지난 현재, 10여 년 전에 이뤄진 담론을 살펴보니, 어느 순간 대안은 하나의 장르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 자체가 문화적 기호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대안은 문화, 역사, 소비의 대상으로, 그 자체가 또 다른 상품 가치로 사용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문화가 된 대안의 독해 자체가 대안공간의 의미를 더욱 모호하게 만드는 상황이다. 또한 장르가 된다는 것은 그것의 실천과 서사가 어떤 전형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른바 ‘장르로서의 대안’은 주류와 비주류라는 문화생태계의 위상을 생산하고 이는 관람자/소비자의 취향과 태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안공간이란 쟁점은 절대적인 우위 가치나 예술실천의 순수성 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사회비판적 예술로만 가늠할 수는 없을 듯하다. 더구나 현시점에서 대안공간의 위상은 2000년대 초반의 예술실천을 대표하는 전형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대안공간과 그 실천은 제대로 평가받은 적도 연구가 진행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오로지 새로운 세기의 성공적인 역할 모델로 소비되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자문하게 되는 이유다.


한국의 대안공간은 밀레니엄이 열리기 직전, IMF의 터널을 벗어난 직후 출현하였다. 형식보다는 실천을, 관념과 이념보다는 현장과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한 큐레이팅은 작가 개인의 잠재성을 구체화한 전시로 이어지면서 주류미술계를 자극했다. 대안이란 개념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당시 대안은 젊음, 신선함, 도전과 실험을 표상했다. 물론 1990년대 인터넷을 매개로 기성문화의 제작방식과 단계를 따르지 않고 독립적으로 개인의 의식과 사고를 표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대안공간의 실천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문화정치학적 의미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대안공간에서 성장한 작가들이 주류로 편입되면서 이른바 ‘아비투스(habitus)’가 형성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특정 대안공간의 출신 작가라는 수식을 만들어냈다. 


이는 대안공간의 다양한 실천보다 대안공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소비되는 현상이 빚어졌다. 대안공간 자체가 주류 미술로 인정받고, 나아가 예술 권력이 형성되는 상황이야말로 역설이었기에 대안공간의 위기는 구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2010년 이후 1세대 대안공간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2세대 대안공간은 줄지어 문을 닫고 말았다. 대부분 설립 멤버 중심으로 이뤄진 구조는 시간과 더불어 퇴화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최근 일어난 아트 스페이스 풀 사태야말로 대안공간과 권력의 상관성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대안공간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의미를 만들어낼 동력이 남아있는 것일까? 더불어 대안공간과 신생공간을 어떤 관계로 보아야 할지도 생각해 볼 부분이다.





임소담 <Tea time drawing> 2019 세라믹 가변 크기 

<SOSHO OPEN WEEK> 전시 전경 2019 소쇼 SOSHO





현재 한국의 미술공간을 다소 거칠게 분류하자면 정형화된 제도 공간인 미술관과 상업갤러리 그리고 대안/신생공간을 들 수 있겠다. 이 중에서 동시대성을 체현하는 대표적인 유형이 바로 ‘신생공간’인데, 신생공간과 대안공간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분 지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현장의 분위기를 보면 신생공간은 대안공간과 구분 짓기를 선호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마도 신생공간의 주체, 작동 방식과 동력의 차이가 이런 견해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무엇보다 1980년대 출생한 젊은 미술 생산 당사자가 직접 기획과 제작을 책임지는 운영방식을 통하여 경제적 자립과 예술인으로서의 생존을 지향한다는 점이 대안공간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여기에 2014년 이후 신생공간에 관한 학술연구와 언론에서의 관심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 지점에서 대안공간과 신생공간은 분명하게 구별되는데 그 이유는 신생공간이 자신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지시하는 ‘선언’을 통하여 성장하기 때문이다. 선언의 주체가 작가, 비평가, 기획자와 같은 현장 당사자인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는 신생공간 특유의 가벼움, 유연함, 짧은 활동 주기 등과 맞물려 지식생산도 비슷한 속도로 전개되며 지식과 예술실천의 동기화를 꾀한다. 이처럼 신생공간은 기존 미술계의 전형에서 탈영토화를 시도한다. 그들의 이러한 미학적 실천은 기존 체제를 재배치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장착했다는 해석을 끌어낼 수도 있다. 한편 2000년대 초반 대안공간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미디어에서의 파장은 적지 않았으나, 학술이나 현장 연구 대상으로써 대안공간은 유사한 서술 방식으로 전형화되어 연구 대상으로서의 동력이 약해진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나아가 대안공간의 활동보다는 제도적 지원을 발판으로 운영되는 대안공간의 구조가 연구의 초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되돌아보면 대안공간은 선형적인 시간의 질서를 따라가면서 한국미술의 미래를 경작하기 위한 땅고르기를 실천했다고 비유해도 무방할 듯하다. 당시 경색된 미술현장에 새로운 기운을 일으키려는 의지가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기보다는 현장에 역동을 일으키려는 시도에 더 가까워 보이는 이유다. 선형적 시간을 따른다는 것은 대안공간의 출현이 예술 생태계 교란이나 전환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는 대부분의 1세대 대안공간이 전시와 비평 그리고 작가와의 대화와 같은 미술 중심의 프로그램에 집중한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대안공간에서의 시도들은 미술실천과 현재라는 시간을 동기화하는 데에 주력했다. 일련의 활동들이 ‘관습의 부정’으로 해석될 여지는 충분하지만, 그들은 기존 미술을 배제하기보다 오히려 미술을 통해 탈구된 근대의 시간을 현재에 이어 붙이려는 시도에 가까웠다는 독해도 가능하다. 





<공간 사일삼 10주년 기획 Latency: 구간반복> 

전시 전경 2019 공간 사일삼 사진: 생동스튜디오





어긋난 시간 사이에서


1990년대 미술은 난처할 정도로 갑작스레 개방된 현실과 관습 사이의 공백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세계는 전진만을 허락했고 미술은 한국과 세계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를 찾기 위해 소란스레 동분서주하였다. 수많은 요구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작가는 전통을 쉽사리 버릴 수도 없었고 미래로 도피할 수도 없었다. 1990년대 한국미술은 쟁점이 없는 시대로 불리기도 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정부 주도로 이뤄진 세계화는 문화기획을 통한 정치화의 다른 버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정부의 기조에 부응하는 전시가 다수 기획되었다. 선진의 문화예술을 답습하려는 기획물들은 오히려 동시대적 관점으로 한국의 정체성을 질문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음을 알려주었다. 외부로부터 많은 역할 모델이 제시되었고, 내부적으로는 한국적 모델을 찾기 위한 노력도 뒤따랐다. 이러한 대표적 실천으로는 초기 문화연구를 들 수 있는데, 무엇보다 도시를 재현해야 할 풍경의 대상에서 분석해야 할 문화연구의 대상으로의 전환을 꼽을 수 있다(<압구정동: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1992).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 이 전시는 미술의 시대에서 인류학적인 시각예술로의 전환을 예고한다. 더 나아가 작가, 큐레이터, 자료와 이미지를 등가로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 관한 비평적 연구를 출판하여 전시의 역할을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제2회 광주비엔날레: 지구의 여백’(1997)은 후기식민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서구편향적인 지도를 넘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도라 할 수 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전시들이 대안공간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큐레토리얼을 통하여 대안적인 예술 실천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를 제시한 전범이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1세대 대안공간의 전시들은 정체성 담론을 기반으로 한 시각예술과 문화정치학의 조응을 시도할 수 있는 꽤 적절한 장소였다. 2000년 이후 한국의 시간성, 장소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인지를 마주 볼 수 있는 차연(différance)을 만들어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차연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대표적인 철학 개념으로 기호와 의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지시한다. 





변카카 <Timelapse #제의> 2020 3D 모델링 펜으로 만든 오브제, 

나무와 강화유리로 만든 진열장, Led 조명 190×100×50cm





이것은 개인, 국가, 문화, 역사, 젠더, 종교 등에 따라 하나의 낱말이 다가오는 시간과 그 의미화의 과정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고유한 시간과 주어진 시간 사이에는 수많은 겹의 차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외부의 힘은 서로 다른 시간을 중첩시키라고 강요한다. 만약 대안공간이 지역의 고유한 시간과 세계화에 의해 주어진 시간 사이의 공백을 바라볼 수 있는 ‘차연’의 생성지였다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당시 미술이 겪은 혼란은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맹목적인 환대와 현학적인 학술적 번안의 과정은 소비중심사회에서 예술과 문화를 사이에 두고 이념 논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소모적인 과정들은 각 진영 간의 온도차에 인해 ‘누수’를 일으키며 문화예술 분야의 불안정한 구조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따라서 대안공간의 등장은 소모적인 논쟁의 고리에서 벗어나 미술을 통한 문화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경색된 미술현장에 (일시적인) 우회로를 열어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컨대 박이소, 정서영, 정연두, 오인환, 임민욱, 고승욱, 박용석, 유영호, 나현, 홍영인 등과 같은 작가들은 삶의 현장인 도시의 안, 밖, 위, 아래를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활동을 통해 모더니즘 미학의 역사주의를 따르지 않으면서 인류학적인 태도로 한국의 현재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를 감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대안공간에서 성장한 일련의 작가들이 보여준 실천은 주제적 측면에서 정체성, 자본, 가치, 성, 계급, 제도, 유용성과 같이 동시대를 구성하는 이념과 존재의 관계를 질문했고, 매체적 측면에서는 탈매체와 다원주의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물론 대안공간의 실천들은 신생공간과 기존 질서 자체를 부정하고 그들만의 영토를 개척 또는 전유하는 치밀함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가장 익숙한 한국의 풍경 속에 가려진 중층의 겹들을 드러냄으로써 ‘지금과 우리’가 재현의 대상이 아닌 담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배움의 장으로 볼 수도 있겠다.





<김문기_Scotch> 전시 전경 2021 얼터사이드





미술 지형도 그리기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미술의 지형도는 그려지지 않았다. 그려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안공간이 기존 미술 현장 사이에 자리를 틀면서 전시 공간의 성격과 활동의 다양성이 나타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주변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대안공간 풀, 인사미술공간 등이 인사동에 문을 열자 낡고 보수적인 곳에 활력이 일어났다. 말 그대로 다른 종의 미술 접붙이기에 의해 새로운 미술 지형의 생태계가 자생하게된 것이다. 하지만 ‘쌈짓길’이 생기면서 인사동은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넘고 말았다. 문화정책은 미술의 고향을 관광지로 개발했다. 어렵사리 형성된 미술 지형도는 관광지도로 바뀌고 말았다. 쌈짓길은 애써 일군 생태계를 파괴했고 이후 대안공간의 시간도 서서히 희미해졌다. 


예술 현장은 늘 고유함과 신선함을 추구하지만, 시간의 속도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상황에서 예술 생태계의 생명주기는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알고리듬과 피드로 소비자/사용자/애호가의 취향을 저격해 끊임없이 등장하는 취향의 세계는 사용자의 기호를 무한정 자극한다. 오늘날 ‘예술작품’이라는 성스럽고 물리적인 존재론은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끝없이 이어져 나타나는 이미지와 사운드, 요약과 해석들은 예술을 비물질적 콘텐츠로 대체한다. 이러한 시뮬라크르(simulacre)로 가득한 비물질의 생태계는 세상의 모든 것을 한데 모아 가장 슬기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이처럼 동시대 미술은 시뮬라크르 세계와 분별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을 담아내는 전시 공간과 방식 그리고 큐레토리얼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여기에서의 맹점은 무엇보다 세상의 모든 게 사용자 본인이 구축한 ‘취향’과 ‘관심’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지형도는 소비자/사용자를 환대하지만, 몰입만을 요구하는 닫힌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 대안공간은 여러 전시장 중 하나의 유형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동시대 미술의 관점에서 전시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담론이자 쟁점이기도 하다. 대안공간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남아있는 대안공간이 서로를 향한 ‘열림’이 있는 환대의 공간이길 기대해본다. 사실 전시 공간은 늘 환대가 일어나는 정거장과 같다. 새로운 작가, 작업, 관람객, 대화와 갈등이 일어나는 장이다. 전술과 이념만으로 현실의 무게를 버틸 수는 없다. 공공연하게 연대를 맺자는 의미가 아닌, 마음을 열고 만나는 관계가 필요한 시대다. PA


[각주]

* Hal Foster, Recodings : art, spectacle, cultural politics: 조주연 옮김, 『미술 스펙터클 문화정치』, 경성대학교 출판부, 2012, p. 84



글쓴이 정현은 예술가와 정체성에 관한 연구로 파리 1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인하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다양한 유형의 비평적 글쓰기를 통하여 배움을 실천하고자 한다. 2018년부터 장애예술단체 ‘잇자잇자사회적협동조합’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최근 전시 <무궁한 꽃이 피었습니다>를 기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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