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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75, Apr 2021

박주연
JOO YEON PARK

시적 말의 날개 그 가벼운 무거움

언어는 때로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투명한 잔물결 같기도 하고 또 심연에 가라앉아 절대 흔들림을 용납 않는 육중한 바위 같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을 차갑게 얼어붙은 땅에 내리치는 몽둥이처럼 사용할 수도 있고 나비 날개처럼 섬세하고 가냘픈 감성으로 쓸 수 있다. 오랜만에 신작을 선보이는 박주연은 전시 제목을 ‘언어 깃털(Other Feathers)’이라 잡았다. 언어의 깃털이라니, 그렇다면 과연 그 깃털은 무엇이 무엇을 왜 어떻게 하려고 생겨난 것일까.
“시작할 때는 몸이 약간 뻣뻣해지지만 막상 춤추기 시작하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하나도 안 느껴지고… 그래요. 마치 내가 공중 속으로 사라지는 느낌이에요. 내 몸 안에 불길이 치솟고 난 거기서 날아가요. 마치 새처럼. 마치 감전된 것처럼. 그래요. 감전된 것 같아요.”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의 빌리는 심사위원이 춤을 출 때 어떤 느낌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 그는 결국 백조가 되어 공중으로 도약한다. 박주연이 읊조린 깃털이란 단어는 왜 매튜 본(Matthew Vaughn)의 [백조의 호수(Swan Lake)]와 빌리와 감전된 새, 그들 모두의 윤무를 떠올리게 할까.
● 정일주 편집장 ● 이미지 작가, 아뜰리에 에르메스 제공

'언어 깃털' 전시 전경 (앞) '곡선의 길이' 2021 채색된 메탈 이미지 제공: 에르메스 재단 사진: 김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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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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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청와대 옆 브레인팩토리에 흥미로운 작업이 놓였다.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에 그 작품의 이미지와 얼개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데, 세계지도 위에 다이아몬드 게임(Chinese Checkers)판을 만든 것이었다. 작가 박주연은 판 위의 말(checkers piece)이 상호위계적인 작용 없이 <elsewhere>를 통해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게 했다. 영토와 국경, 국적이라는 강한 경계들을 없애고 마음껏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겨 다니며, 스스로를 새롭게 포지셔닝할 수 있는 자유자재 이동의 상태를 보여준 것이다. 


그는 인간이 인간을 무리 짓고 가둔 제도나 정책, 권력관계의 현실적 틀을 무화시켜버리고 그리하여 전시장을 방문한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고 자율적이며 지극히 가볍고 자유로운 게임의 룰을 제시했다. 그것은 ‘영토’라는, 개인을 위축케 하는 절대 의미를 휘발시키고 그 위에서 굽어보며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채워갈 수 있게 만들었다. 이후 한국과 외국을 넘나들며 우리 시대의 여러 문제를 절제된 시적 표현으로 제시해온 박주연이 오랜만에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새로운 작업을 선보인다. 언어와 숫자의 추상성과 허구성에 관한 생각을 담아 구성한 그의 신작은 언어를 중심에 두고 간간이 숫자를 포함한다. <그녀가 노래에 말할 때(When a Nightingale Speaks of a Song)>의 440Hz 표준음, <열 셋 챕터의 시간(Time in Thirteen Chapters)>의 13개의 챕터로 나뉜 260장의 200자 원고지, <곡선의 길이(Measuring Curves)>의 동일한 길이의 2m 스틸을 이용하여 만든 몇 개의 곡선들처럼 말이다. 





<20 x 1000(Twenty Times a Thousand)> 2020





이 같은 작업은 사회적 약속이랄 수 있는 언어와 숫자의 특정 규칙을 원근에 둔 채 규율 안과 밖을 변주한다. 그것은 특정 의미나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언어의 소리, 리듬, 모양 또는 형태를 확장하거나 세분하면서 고정된 관념을 파헤쳐 그 상상의 뒤란까지 재구성한다. 이는 “언어를 단순한 소리의 상태로 되돌려 언어의 잠재적 폭력성을 미리 해체하고 동시에 새로운 언어 공간을 만들어 예술적 가능성을 상상하는” 작가의 작업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는 전시 제목을 ‘그리스의 마지막 철학자’라 일컬어지는 플루타르코스(Plutarchos)의 책 『모랄리아』에 실린 짧은 일화에서 따왔다. 그중 ‘나이팅게일의 앙상한 몸을 본 사냥꾼이 그저 목소리만 아름다운 새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하나의 알레고리로 차용해 언어의 의미를 깃털에 비유한 것으로 국문 제목을 짓고 ‘타인의 언어 또는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을 덧붙이고 확장해 영문 타이틀을 만들었다. 





<elsewhere> 부분 2004 혼합재료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가시적으로 펼쳐 노출하는 것보다 부분적으로 감추는 형식의 조형 언어를 선호하는 그는 6채널 사운드 인스톨레이션과 드로잉과 글쓰기의 경계에 있는 평면작업, 조각 오브제 등 새로운 작업을 만들었다. 그리기와 쓰기에 이용한 평면 종이 작업들이 자르기, 접기, 찢기 등을 통해 입체적인 작업으로 발전하고 이러한 종이 작업들이 다시 철로 해석된 결과이다. 그가 조각적 오브제들을 만들기 시작한 지는 오래됐는데 이번 전시에 포함된 <눈먼 눈(Blindness)>, <상처(Cuts in Red and White)>, <곡선의 길이(Measuring Curves)>의 경우 종이 작업이 선행된 후 종이처럼 얇은 철로 작업이 옮겨졌다는 점에서 이전 작업과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의미를 도출한다. 작가는 “철과 종이는 다른 물질이지만 서로의 장점과 약점을 보완하는 매력적인 한 쌍”이라 말한다. 


2m의 길이로 재단되어 각기 다른 형태의 곡선으로 변형시킨 <곡선의 길이>의 경우 팬데믹 초기에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던 ‘실외에서 다수의 타인과는 2m 간격을 두고 서 있을 수 있으나 같이 살지 않는 가족의 경우 1명 이상과는 2m 간격을 두고 서 있을 수 없다’라는 상상할 수 없었으나 속수무책 수용할 수밖에 없는 불손한 내용의 거리두기 지침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 지침은 정확한 타인과의 관계와 수치를 제시하는 것 같지만 길이를 알 수 없는 곡선같이 느껴졌고 그 틀에 엮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보다는 의심과 혼란을 가져왔다. 여섯 개의 다른 곡선이 쓰다 만 획들 같이 제스처만 있을 뿐 완결된 문장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당혹과 복잡 미묘한 그 모습의 의역과 다름 아니다.   





<거울 쓰기 사랑(Mirror Writing Love)> 2013 비디오 프로젝션, 채색 철





<열 셋 챕터의 시간>은 잉크와 흑연으로 그리거나 쓴 동그라미들이 언어의 의미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을 가득 채우는 형태의 작업 과정을 통해 쓰기와 그리기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언어의 의미 또는 번역에 저항하는 의도로 시작했던 작업이기는 하지만 언어의 의미에 가려졌던 시간과 쓰기 행위 자체를 들어내어 새로운 읽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는 파란색과 진주황색 등 유통되는 기본 필기용 잉크색으로 평면작업을 만들고 전시 공간에 놓이는 붉은 색 오브제들을 통해 그 색들을 확장시킨다.  


한편 박주연의 작업은 그가 읽은 문학 작품들로 갈래를 나눌 수 있다. 그의 초기 작업부터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Stories and Texts for Nothing』, 작업의 큰 전환점을 맞게 한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변신』의 ‘에코와 나르시스’ 이야기 그리고 이번 전시 <언어 깃털>을 준비하며 팬데믹 기간 동안 읽은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의 『눈먼 자들의 도시』 등은 작업에 큰 변화를 주었고 전혀 다른 공간을 찾아내 구현하게 했다. 그런가하면 신작 <눈먼 눈>처럼 책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문학 작품이 어떻게 작업과 연결되는가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오래 본 책장 몇 개가 겹쳐져있는 것 같은 형태로 전면은 백색이고 후면이 미러이다. 





<그녀가 노래를 말할 때(When a Nightingale Speaks of a Song)> 2021





공간을 반영하는 거울 면보다 반영을 가로막는 백색 페인트칠이 더 큰 면적을 차지하는 작업으로 ‘본다는 것’과 ‘볼 수 없을 때 보는 것’에 대한 단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볼 수 없는 상태’에 대한 나의 관심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통해 시작됐지만 이 작업의 배경에는 전시를 준비하며 읽은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말하는 ‘백색 실명’ 상태가 있다. 책을 보는 경험 자체가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고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는 더 큰 시각적 상상이 요구된다.” 오랜 시간 언어의 문제를 작업 안에서 다루며 그리기/쓰기 또는 사운드 작업을 통해 언어를 음악으로 그리고 침묵으로 상상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즐기는 박주연. 최소한의 법칙과 보다 풍부한 자발성 그리고 우연의 요소들로 이루어진 그의 시각적 소설이 신비로우나 리얼하게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다. PA





박주연





작가 박주연은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교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한 후 런던 로얄 홀러웨이 대학교 영문학과 석사와 골드스미스 대학교 조형예술학과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2년 인사미술공간에서의 <라임>을 시작으로 캐나다 엑세스 아티스트런 센터의 <아카이브>(2003), 갤러리 조선의 <Full Moon Wish>(2006), 두산 갤러리 뉴욕의 <에코의 에코 I>(2013), 그리스 카타포스갤러리의 〈O〉(2015),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언어 깃털>(2021)까지 총 13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 2006년 ‘부산비엔날레’를 비롯 삼성미술관 로댕갤러리, 아트선재센터 등에서의 기획전과 미국, 터키, 영국 유수 기관의 전시에 참여하며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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