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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75, Apr 2021

헤르난 바스_모험, 나의 선택

2021.2.25 - 2021.5.27 스페이스K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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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규식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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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의 스펙트럼



전시가 열리기 얼마 전 국내에서도 수많은 관객을 동원한 브라이언 싱어(Bryan Singer) 감독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2018)가 설 특선영화로 편성되어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다. 방송사가 여러 문제로 TV 상영 영화들을 임의로 편집하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보헤미안 랩소디>를 방영한 SBS는 이후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 일부 시청자들이 불편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실존 인물의 전기를 다루는 영화에서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동성 간 키스신을 삭제하고 조연 배우들의 동성 키스신을 모자이크 처리한 것이다. (머큐리와 여성 연인의 키스신은 그대로 두었다.) 


이처럼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퀴어적 맥락을 삭제하거나 교묘하게 가려 이성애자로 보이게 만드는 것을 ‘스트레이트워싱(Straightwashing)’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방식의 ‘존재 지우기’가 비단 작품 안에서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국내 미술계에서 해외 아티스트를 소개할 때 스트레이트워싱과 비슷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일례로 대표적 퀴어 아티스트들의 국내 전시회에 대한 보도자료 등에서 작가의 성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전시 외의 이야기를 먼저 하게 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헤르난 바스(Hernan Bas)의 개인전이 작가의 성적 지향을 애써 감추거나 축소하려 하지 않은 점만으로도 반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스의 개인전 <모험, 나의 선택(Choose Your Own Adventure)>은 1980년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동명의 아동용 책 시리즈에서 그 제목을 가져왔다. ‘게임북(Gamebook)’이라고도 지칭하는 이러한 형식의 책은 각 장에 나타나는 분기점에서 독자들이 a, b 혹은 c 등의 선택지를 골라 이야기의 흐름이나 결말까지 직접 결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1980년대 후반생인 필자도 비슷한 책을 접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게임북은 미국을 넘어 다양한 문화권까지 퍼져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스는 이번 개인전에서 2007년부터 2021년 사이에 제작된 2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는데, 전시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저마다 중요한 분기점을 마주한 듯 위태롭고 동적인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다. 


전시는 동선의 마지막에 위치한 2007년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과거부터 근작을 감상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작품에는 공통으로 사춘기가 지났지만 완전한 성인은 아닌, 과도기에 놓인 소년이 등장한다. 초기작에서 근작에 가까워질수록 나타나는 형식적인 차이는, 거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배경에 녹아 있던 인물, 즉 소년이 점점 더 화면 가까이 다가와 전면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작가가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일종의 내적인 성장 이루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소년들이 조금도 나이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저 비슷한 시간대의 다른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마치 바스가 그리는 세계관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스핀오프(spin-off) 속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작가가 만드는 퀴어한 세계 속에서 소년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괴물 사냥꾼(혹은 필사적으로 네시를 찾아서)> 

2020 리넨에 아크릴릭, 잉크 전이, 디스템퍼 

183×152.5cm





조율하는 소년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작품이기도 한 <생각의 흐름 (월든의 오두막집)(The Thought Flow (Cabin at Walden))>(2009)에서 바스는 소년의 불안한 내면을 그려낸다.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칠해진 색면들은 화면을 비정형으로 분할하는 한편, 오직 소년과 오두막만이 이 무질서한 세계에서 부유한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작품은 미국의 수필가이자 시인, 철학자이기도 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문명사회를 떠나 2년 2개월 2일을 생활하며 기록한 『월든(Walden)』(1854)의 오두막을 모티프로 한다. 소로와 같이 스스로 세상에서 떨어져나온 소년은 웅크린 채 자신만의 생각에 골몰한다. 


소년의 신체는 작지만, 그의 생각의 흐름은 세상만큼 거대하다. 쏟아지는 생각들과 그 생각의 흐름은 퀴어한 ‘나’와 이성애 중심적인 세상을 조율하는 과정으로도 보인다. 오두막 위로 솟아오르는 에너지의 파장은 세계와 조율하는 소년의 생각과 조응한다. 스페이스K 서울과 나눈 인터뷰에서 바스는 “그림에 나오는 주인공이나 인물들은 아직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라고 언급했다. 소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모험을 떠난 소년들


전시의 포스터로도 사용된 <소년과 바다(The Young Man & the Sea)>(2020)를 비롯해 물과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서는 모험을 떠난 소년들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1952)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바스는 원작 소설이 끝난 뒤의 이야기를 상상해 제작했다. 선체에 쓰인 글자가 암시하듯 노인 대신 항해를 떠난 소년은 소설에서 노인과 부자지간 이상으로 각별하게 묘사되는 소년 마놀린(Manolin)이다. 그는 노인의 청새치를 빼앗은 상어를 단번에 제압하고 전리품처럼 배에 실은 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상어와의 결전은 끝이 났지만, 바다는 언제라도 소년과 배를 집어삼킬 듯이 요동치고 있다. 물과 바다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에 등장하는 소년들은 누구의 의지로 시작된 모험인지는 모호하지만, 공통으로 긴박한 상황에 부닥쳐있고 전작들에 나왔던 인물보다 훨씬 더 역동적으로 묘사된다. 그들이 대항하거나 혹은 반대로 사로잡힌 것들은 상어, 미지의 괴물과 같이 위험한 존재이거나 비바람이나 바다와 같이 근원을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대자연임에도 불구하고 소년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부딪히고 꺾이면서도 다음 이야기로 나아가는 것이다.




<소년과 바다> 2020 

리넨에 아크릴릭 213.4×182.9cm





정면을 응시하는 소년들


바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들은 종종 위나 아래, 또는 먼 곳을 바라보지만 몇몇 작품들은 화면 너머의 관람객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구루(The Guru)>(2013-2014), <팝콘 목걸이(The Popcorn Necklace)> (2020), <지독한 가뭄 후의 시작(The Start of The End of The Longest Drought)>(2020)에서 소년들은 침묵한 채 정면을 응시한다. 영적인 스승 혹은 지도자를 뜻하는 <구루>에서는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는 모습과 화면의 구도가 종교화를 연상시키는데, 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퀴어 소년이 초연하게 앉아 관람객을 바라본다. 


<팝콘 목걸이>에 등장하는 소년은 제목 그대로 팝콘을 줄에 꿰어 목걸이처럼 걸고서 그를 향해 달려드는 무수히 많은 갈매기 떼에도 동요하지 않고 여유로운 태도로 앞을 보고 있다. <지독한 가뭄 후의 시작>에서 소년은 물 빠진 수영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으면서도 무심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이들은 더는 고뇌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자신의 앞에 선 관람객에게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선택을 종용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바스의 소년들과 우리의 삶은 전시의 타이틀처럼 수많은 선택의 연속일 것이다. 작가는 퀴어의 내적 불안감과 갈등,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자신이 평소 관심 가져온 문화적인 레퍼런스와 미스터리한 요소들을 결합해 일상의 이야기를 특별한 모험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모험에 우리를 초대한다. 


바스가 제안하는 모험은 한 권의 책 안에서 주어진 선택지만을 골라야 하는 게임북과는 달리 소년과 관람객의 선택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림 이후의 장면을 어떻게 그려나갈지는 우리의 손에 달린 것이다. 오두막에서 나온 소년은 이후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상어를 싣고 항해하던 소년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을까. 갈매기 떼를 마주한 소년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그저 픽션에 불과한 상상이지만, 그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소년이 만족하는 선택과 결말이었으면 한다.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완전한 픽션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기 삶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므로. 



* <Sip-in 저항> 2019 리넨에 아크릴릭 213.4×274.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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