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Ⅰ
예술, 어떤 시간에 담아낼 것인가?_이대형
SPECIAL FEATURE Ⅱ-Ⅰ
메세나의 미덕 혹은 진실_정지윤
SPECIAL FEATURE Ⅱ-Ⅱ
경제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의 기로에선 예술 후원_박은지
SPECIAL FEATURE Ⅱ-Ⅲ
미래를 보는 후원자의 안목_김남은
SPECIAL FEATURE Ⅱ-Ⅳ
예술 지원을 자처하는 도시, 뉴욕_정재연
Jake Naughton
<Dual Shadows East Africa's LGBT Refugees>
series ‘Project Grant’ of ‘Flash Forward 17’
Special feature Ⅰ
예술, 어떤 시간에 담아낼 것인가?
● 이대형 Hzone 대표
예술은 시대라는 그릇에 담긴 물처럼 그 형태가 유동적이다. 황금 성배에 담았을 때, 투명한 유리컵에 담았을 때, 항아리에 담았을 때 물은 그 형태와 의미를 달리한다. 역으로 예술이라는 액체의 속성에 맞게 시대의 그릇을 바꿀 수 있다고 노력해 보지만 그 성공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인간의 상상과 행동이 사회적 약속 즉 제도에 의해서 통제되듯이, 예술이란 콘텐츠는 그것을 담아내는 맥락(context)에 의해서 의미와 형태가 결정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우리가 예술 후원을 실천할 때는 예술이란 콘텐츠가 아닌 그릇에 해당하는 문맥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즉 제도와 정책 차원에서 얼마나 유연하고, 투명하고, 포용적인 그릇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현명하다.
예술을 후원한다며 ‘물’을 건드리면 잠깐 찰랑일 수 있으나, 곧 탁해지고, 오염돼 본래의 가치마저 잃어버리는 예는 차고 넘친다. 결과적으로 어떤 그릇, 어떤 제도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그 안에 담길 물의 속성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그 물이 그릇을 깨고 새로운 의미와 형식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역사는 그것을 담아내는 제도, 그릇, 문맥의 전복과 극복의 연속이었다. 주술과 종교, 왕과 귀족, 성직자로부터 자유를 얻은 예술은 근대화와 함께 대중과 시장 속에서, 개인주의와 다원주의의 물결 속에서 더 복잡한 형식과 내용으로 진화해 왔다.
그러나 경계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측면에서 예술의 본질적 가치는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모나리자>,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Shigeru Ban)의 페이퍼 건축물, 가나 엘 아나추이(El Anatsui)의 작품을 보며 느끼는 감동이 말해주듯, 예술은 시간, 공간, 장르, 국적을 넘어 유의미한 가치를 담아내고, 전달하는 인류 공통의 자산임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로 국가는 박물관, 미술관을 통해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연구 기록하고, 도시는 비엔날레, 아트페어를 통해 지속가능한 문화관광자원을 확보한다. 반면 기업은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자사의 브랜드 가치를 연결하며, 유연하고 창의적인 기업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같이 각자 여러 가지 이유로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지만, 그 결과가 꼭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Installation view
<Diana Thater: The Sympathetic Imagination>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November 22,
2015-February 21, 2016 © Diana Thater Photo © Fredik Nilsen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시간이다. 회계연도 내에서 예산을 집행해야 하는 행정 편의주의는 긴 호흡으로 상상하는 예술가들의 창작과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시간 맞추기용 짜깁기 결과물을 양산하는데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아트시(Artsy)’ 의 2016년 가장 영향력 있는 큐레이터로 선정된 LA 카운티미술관(이하 LACMA)의 브릿 살베슨(Britt Salvesen) 큐레이터는 “좋은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서는 평균 5년이 필요하다”는 말로 자신이 기획한 전시의 성공 요인으로 꼽는다.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의 전시 디렉터 아킴 보르하르트-흄(Achim Borchardt-Hume)은 “시간의 길이만큼 큐레이터와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결정된다”라는 설명과 함께 중장기적인 파트너십과 후원문화가 없이는 좋은 전시 프로그램과 좋은 작품을 창조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결국 예술 후원의 본질은 ‘자본’에 있으나, 그것의 성공을 결정하는 변수는 ‘시간’이다. ‘시간’을 해석하는 관점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같은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결과는 달라진다.
자본의 규모는 한눈에 보이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쉽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는 행정 편의주의는 예술 창작 과정에 대한 몰이해와 결합하여 시간에 쫓긴 동어반복을 양산하는 예견된 실패를 낳는다. ‘2019 베니스 비엔날레(2019 Venice Biennale)’의 리투아니아관(Lithuanian Pavilion)은 18만 유로라는 적은 예산으로 ‘황금사자상(Golden Lion)’을 수상하였다. 한국관, 독일관, 일본관처럼 자체 국가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별도의 전시장을 얻기 위해 임대료까지 지급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매우 놀랍다. “좋은 전시를 위해 최소 1년 전에는 전시 큐레이터를 선정한다. 적어도 시간이라도 충분히 주기 위한 행정적인 배려다.” 리투아니아관 큐레이터 주스테 요누팃(Juste Jonutyte)의 설명이다. 참고로 한국관의 경우 평균 11개월 전, 중국관의 경우 평균 3.5개월 전에 큐레이터 선정이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 총감독 선정은 전시 오픈 18개월 전,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ementa)’의 경우는 4년 2개월 전부터 큐레이팅이 시작된다.
Maja Smrekar je lani s projektom <K-9_topologija>
v kategoriji hibridne umetnosti na Ars Electronici osvojila
zlato niko Letos so umetnico povabili k sodelovanju na
spektakularnem glasbenem dogodku Big Concert Night Foto:
Maja Smrekar / Galerija Kapelica
예술 창작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을 바라보는 정부, 행정 관료들의 관점이 그 어떤 후원 금액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미술관 관장의 평균 임기를 살펴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테이트 미술관(Tate)을 세계적인 기관으로 성장시킨 니콜라스 세로타(Nicholas Serota) 관장의 28년간의 리더십을 통해 테이트 모던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시켰고, 1995년부터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이끄는 글렌 로리(Glenn D. Lowry) 관장, 2008년부터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을 맡은 리처드 암스트롱(Richard Armstrong) 관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이 특별히 더 똑똑하고 전문적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사실은 이 세계적인 미술관들의 관장들은 최소 10년, 평균 20여 년 동안 관장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전시를 기획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3-5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한국의 전시를 해외로 보내고 국제 교류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최소 5년의 세월이 필요함을 고려하면, 한국의 미술관장 임기의 경우 2년 연임, 혹은 3년 연임 등 전혀 국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같이 한국의 국·공립 미술관 관장의 짧은 임기로 인한 잦은 교체와 학예 인력의 순환보직으로 인해 해외 미술계에서 한국 국공립 미술관과 긴 호흡의 혁신적인 전시 프로그램을 논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결국 좋은 예술 후원은 자본의 문제를 넘어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로 이어진다. 예술의 외연을 넓히고 미래와 소통하기 위한 태도와 관점은 중장기적인 후원 정책 없이는 불가능하다. ‘현대자동차의 글로벌 아트 파트너십’ 프로그램들은 ‘물리적인 관점의 시간’과 ‘철학적 관점의 시간’ 차원에서 좋은 예술후원 사례이다.
물리적으로 10년의 미술관 파트너십 체결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LACMA 큐레이터들은 10년 앞을 상상하며 10년 시리즈 전시와 출판을 기획할 수 있게 되었고, 철학적으로 작가를 선정하면서 장르, 국적, 젠더 문제를 보다 균형 있게 안배할 수 있는 시간까지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현재 완성된 컬렉션 작품을 구매하는 수동적인 지원이 아닌 커미션 후원을 통해 미래 가능성에 주목하며 기업의 미래지향적 철학을 은유적으로 선언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의 파트너십은 예술에 대한 높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물리적인 시간의 길이가 예술가들의 상상력의 폭과 깊이를 좌우한다는 점을 상기하며, 컬렉션 단계를 넘어 커미션으로부터, 단순 전시를 넘어 근본적인 리서치 단계부터 후원할 수 있는 중장기적인 관점이 중요하다. 2019년 상반기 글로벌 미술계를 놀라게 한 ‘현대 테이트 리서치 센터: 트랜스내셔널’은 글로벌 미술계에 대한 오랜 관찰과 준비를 통해 이루어낸 결과이다.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미술사와 문화 현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후원한다는 발상은 스펙터클한 전시물과 많은 관람객을 기대하는 전통적인 기준에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는 더욱 용기 있고 의미 있는, 미술계의 가치 사슬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긴 호흡으로 짚어낸 파트너십이다.
Katarína Dubovská
<Unknown Plant at the Edge of the Arctic>
Ausstellungsansicht ASPN Galerie, Leipzig 2018
©Sophia Kesting
결국 성공적인 예술후원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시간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이른 시점에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없는 불확실한 먼 미래의 경우 예술후원 자체가 어려운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예술후원의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이 과거에 있거나, 숫자 기반의 데이터에 의존하는 일은 그것을 관리하는 행정의 입장이지 예술의 입장이 아니다. 긴 호흡으로, 조금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을 때, 예술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여기 ‘현실’이라는 거대한 거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거대한 거울에 비친 환영을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 속에서 ‘예술가’란 인간이 나타났다. 어느 날 그는 작은 망치로 거대한 거울 표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표면에 금이 가고 작은 거울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그는 울퉁불퉁 날카롭게 깨진 위험할 수도 있는 거울 파편을 두 손에 들더니 그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거울의 각도를 이리저리 틀어보며, 이전에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풍경을 발견한다. 현실이란 거대한 거울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파편이 보여준 새로운 풍경에 주변 사람들은 열광했고, 이 작지만 낯선 풍경은 곧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또 다른 거대한 미래풍경으로 진화한다. 이렇듯 예술은 현실에서 태어났지만, 또 다른 현실, 또 다른 미래를 낳는 모태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예술의 정의를 미술사, 미술관 등 전통적인 미술계의 맥락이 아닌 보다 광범위한 테두리 안에서 살펴봐야 한다. 나이테의 숫자를 읽으면 나무의 나이를 읽어 낼 수 있다. 그래서 나이테의 중심 부분에 가까울수록 과거를, 외부세계와 맞닿아 있는 껍질 부분에 가까울수록 미래를 상징하게 된다. 같은 논리로 사람들의 인식 경계선 역시 경험이 쌓이고 더 많은 정보를 읽힐수록 사고의 경계선은 더 확장된다.
예술가는 태생적으로 인식의 경계선에 서 있기를 좋아한다. 좋은 예술은 경계선에 계속 서 있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래야 현실과 제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것을 둘러싼 제도는 과거와 전통의 중력 에너지를 이용해 껍데기를 깨고 외부로 나가려는 변화의 운동 에너지에 저항한다. 이것이 살아 있는 예술의 속성이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예술과 자본, 예술과 제도의 관계를 어떤 ‘시간개념’을 가지고 설정하는가에 따라 예술후원의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조금 더 멀리 바라보았을 때, 예술의 현재가 아닌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때, 조금 더 유연하고 확장적인 후원 제도가 가능하고, 그래야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예술을 기대할 수 있다.
글쓴이 이대형은 큐레이터로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을 역임했고, 지난 6년간 현대자동차 아트 디렉터로서 글로벌 아트 파트너십 프로그램을 총괄 기획하였다. 2018년과 2019년 유럽연합 ‘STARTS Prize’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과학, 테크놀로지, 예술, 비지니스의 융•복합 실험 프로젝트를 발굴하며 21세기 예술이 어디에서 어떻게 거주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있다.
<Abraham Cruzvillegas: Empty Lot> Hyundai Commission
2015 © Abraham Cruzvillegas Photo: Andrew Dunkley
©TATE 2015
Special feature Ⅱ-Ⅰ
메세나의 미덕 혹은 진실
● 정지윤 프랑스통신원
화가가 후원자를 만나러 긴 여행길에 올랐다. 도착 시각이 다다를 무렵, 후원자는 하인과 개를 데리고 화가를 마중하러 나간다. 가지런히 잘 정돈된 수염, 말끔한 녹색 수트를 차려입은 후원자는 화가를 보자마자 장갑을 벗고, 양팔을 조심스레 펼치며 그에게 정중히 인사를 청한다. 이에 비해, 화가는 행색이 초라하다. 장시간 여행한 탓인지, 그가 입고 온 옷과 신발에는 지저분한 얼룩들이 가득 묻었다. 그러나 화가는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후원자를 격 없이 맞이한다. 19세기, 사실주의 회화를 꽃피운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는 실제 자신의 후원자였던 알프레드 브뤼야(Alfred Bruyas)와 처음 만나는 순간을 위와 같이 묘사했다.
예술사를 통틀어 쿠르베만큼 자신감 넘치는 화가가 또 있을까. 이름 모를 누군가의 장례식 풍경을 황제의 대관식처럼 웅장하게 묘사하는가 하면, 여성의 음부를 아주 세밀하고 노골적으로 재현해 보는 사람들을 낯뜨겁게 만들기도 했다. 모두가 터부시하는 주제, 자신이 몸소 체험한 현실을 가감 없이 대담하게 화폭에 담아내던 쿠르베였지만, 위의 작품만큼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예술가와 후원자가 한 그림에 등장하는 것이 드물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일리가 있다. 리얼리즘의 거장이 미화한 현실, 그것은 바로 후원자 앞에 당당히 선 예술가의 모습이었다.
Gustave Courbet
<La rencontre, ou “Bonjour Monsieur Courbe”>
1854 Huile sur toile 132×150,5cm Musée Fabre,
Montpellier, France
메세나의 역사
메세나(Mécénat)는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기원은 고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한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마에케나스(Maecenas)는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프로페르티우스(Sextus Propertius),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등 당대 최고의 문예인을 발굴해내며, ‘라틴 문학’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오늘날 예술가 후원 활동을 의미하는 ‘메세나’라는 단어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두 세기 동안 아름다운 시와 노래가 울려 퍼지며 지속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풍경은 후대의 권력자들에게 문화예술 후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귀감이 된다. 이후 메세나의 전통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황금기를 맞이한다. 15세기, 피렌체는 그야말로 ‘예술가의, 예술가에 의한, 예술가를 위한 도시’였다. 안드레아 벨 베르키오(Andrea del Verrocchio), 보티첼로(Sandro Botticelli),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와 같은 인재들이 대거 배출되고, 그들의 작품들이 도시 곳곳을 장식했다. 만약 메디치 가문이 없었더라면, 그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예술가들의 재능은 결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으리라.
이탈리아에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프랑수아 1세(François Ier)가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화폭에 매료된 왕은 황혼길에 접어든 노화가가 자신 곁에서 편안하게 말년을 보내며 작업할 수 있도록 성 한 채를 내어주었고,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퐁텐블로(Fontainebleau)로 데려와 웅장한 왕궁을 짓게 하기도 했다.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예술가 열전』에서 왕이 다 빈치의 임종을 지킨 일화를 언급하는가 하면, 퐁텐블로를 ‘새로운 로마’라고 부르며, 프랑수아 1세의 메세나로서의 면모를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은 그들의 작품만큼 눈부시게 아름답지 못했다. 그들의 능력을 흠모한 자들은 많았으나, 예술가와 후원자들은 여전히 주종 관계에 머물러 있었고, 자유로운 창작활동에는 적지 않은 제약이 뒤따랐다. 수집가, 주문자, 왕, 귀족, 성직자는 메세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갑을관계에서 자유로운 예술가는 없었다. 그 암묵적인 룰을 공개적으로 꼬집은 장본인이 쿠르베였다. 앞서 언급한 그의 <만남,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는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출품작이었다.
작품은 공개와 동시에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후원자를 대하는 작품 속 쿠르베의 태도는 너무 오만했고, 대중들을 물론 비평가들까지 후원자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예술가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한 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 평가는 달라졌다. 자신감이 넘치는 쿠르베의 모습은 후원자들의 권력과 경제력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독립적인 예술가로서의 의지가 표출된 것이라는 해석이 덧붙는다. 예술사학자, 미쉘 일레르(Michel Hilaire)는 작품 속에 묘사된 두 사람의 관계를 “19세기에 찾아보기 힘든 예술적 유토피아”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화가가 이토록 과장된 표현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준 후원자 덕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쿠르베의 과장은 미화가 아니라 현실을 역 반영한다. 쿠르베의 작품이 발칙했던 이유는 어쩌면 예술가의 오만이 아니라, 그가 들춰낸 불편한 진실 때문일지 모른다. 이처럼 쿠르베가 던지는 화두는 분명하다. 자본 없이 가능한 예술은 없다. 이 불변의 명제를 곱씹어보면, 예술가와 후원자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에 놓여 있고, 메세나의 역사가 곧 예술의 역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쿠르베가 꿈꾼 이상적인 메세나는 무엇이었을까.
<Galerie de vues de la Rome Antique>
© RMN-Grand Palais (Musée du Louvre) Adrien Didierjean
국가 정책으로서 이어진 메세나의 전통
고대 로마제국으로부터 시작된 메세나의 오랜 전통은 유럽 곳곳에 뿌리내렸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피폐해진 유럽 국가들은 1950-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새로운 문화예술정책을 세울 수 있었다. 전후 세대가 당면한 과제는 과거의 재건이었다. 전쟁의 잔해를 씻어내고 지나간 영광의 시대를 복구해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서 메세나의 전통은 부활한다. 이를 완전하게 성공시킨 나라는 프랑스였다. 1959년 신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는 “인류의 예술적 자산이 최대한 많은 프랑스인에게 개방되고, 문화적 유산을 보호하며, 예술의 창작을 장려하는 것이 국가와 문화부의 임무”라고 밝히며,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을 대중에게 개방했고, 문화재 복원과 창작활동 지원사업에 힘을 쏟았다. ‘복원(restauration), 창작(création), 보급(diffusion)’의 적절한 균형 속에서 ‘문화예술의 민주화’를 이룩한 프랑스는 80년대 이르러 또 한 번 진화를 거듭한다.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대통령 시절 재임한 자크 랑(Jack Lang) 문화부 장관은 우열을 가리지 않고 모든 형태의 창작을 포옹하는 ‘문화예술의 다양화, 대중화’ 정책을 펼치며, 예술가들이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는 안전한 제작환경을 마련하는 한편, 탈 장르, 탈 지역, 탈 세대에 기반 한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자와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데 주력한다. 오늘날 프랑스 곳곳에서 펼쳐지는 문화예술축제,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한 맞춤형 사회보장제도는 자크 랑이 남긴 성과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수천 년의 역사가 깃든 문화재와 동시대 예술이 나란히 숨 쉬는 곳, 예술가와 대중이 하나가 되는 곳. 혁명과 전쟁을 거쳐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그리고 문화예술 강국으로 프랑스가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정부의 지원, 즉 국가라는 거대한 메세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Bassin de Latone <Dorure à la feuille>
© Château de Versailles, Thomas Garnier
아이야공 법(Loi Aillagon)
‘국가가 메세나’라는 거창한 수식어 뒤에 프랑스는 개인과 기업 메세나의 사회적 공헌이 가장 낮은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70년대, 프랑스에서 메세나가 발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말이 흘러나왔을 정도다.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지원책 아래, 개인 기부자의 수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였고, 기업 메세나의 필요성과 효과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프랑스와 유럽, 영미권 국가들의 메세나 정책을 비교 분석한 기 드 브레비송(Guy de Brébisson)은 8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예술 메세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높아졌지만, 개인과 기업 차원의 메세나 활동이 다른 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은 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프랑스 문화통신부의 발표에 따르면, 2002년 미국의 경우 메세나 투자 비용이 국내 총생산(GDP)의 2.1%을 차지한 데 비해, 프랑스는 0.09%, 약 2억 원에 그쳤다. 이 수치는 이웃 나라인 덴마크, 독일, 영국, 이탈리아보다 더 낮은 것으로, 프랑스에서 정부 차원 이외의 더 많은 메세나의 활동을 유치해야 한다는 견해가 잇따랐다.
이러한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 것은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의 출범이었다. 1980-1990년대 카르티에 그룹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알랭-도미니크 페렝(Alain-Dominique Perrin) 전 회장과 20세기 중반, 현대조각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며, 누보 레알리즘의 선봉에 섰던 거장, 세자르 발다치니(César Bladaccini)의 만남은 프랑스 메세나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다. 예술가와 수집가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그들의 관계는 서로에게 둘도 없는 벗으로 발전했고, 그들의 우정은 1984년 ‘까르티에 재단 창설’이라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구현하기에 이른다. 페랑 회장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세자르의 조각을 흉내 낸 작품들이 넘쳐났고, 나는 까르티에의 모조품들로 고통받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술가들이 모조품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며,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자유로운 창작과 그것에 대한 평가라고 했다.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정부는 5년이 넘게 걸릴 일이지만, 기업은 5주 안이면 가능하다.” 그가 내놓은 이 솔직하고도 명쾌한 답변은 2003년 발표된 일명, ‘아이야공 법’ 제정으로 이어진다. 개인과 단체, 기업 메세나의 투자와 재단설립을 용이하게 하고, 후원에 대한 세금감면이 법안의 골자를 이룬다. 개인 후원자의 경우 66%, 기업 메세나의 경우 60%, 그 후원의 목적이 문화재 환수와 관련된 경우 90%의 세금감면이라는 파격적인 혜택을 내걸고, 프랑스는 국내외 수많은 예술 후견인들을 불러 모으는 데 성공했고, 이름만 들어도 아는 기업들이 줄줄이 문화예술재단을 출범했다. 프랑스기업메세나협의회(ADMICAL)의 조사에 의하면, 1995년 1억 4,500만 유로였던 후원금이 2008년 25억 유로까지 대폭 증가했다. 늦은 만큼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 프랑스 메세나는 먼저 복원 분야에서 구체적인 결과를 내기 시작한다. 특히 프랑스 왕실의 역사와 전통이 담긴 루브르 미술관과 베르사유 궁전은 새롭게 재편된 메세나의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왕궁과 문화재 대규모 복원사업이 잇따라 추진되었고, 2007년에는 프랑스 건설업체 뱅시(Vinci)가 1,200만 유로를 투자한 ‘거울의 방’ 복원 소식이 알려지면서 화제를 모았다. 또한 루브르 미술관에 보관된 휘황찬란한 왕관들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복원되었다. 문화재 복원 사업뿐만 아니라, 기업 재단 역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여느 국립 미술관 못지않은 방대한 컬렉션과 다채로운 전시 프로그램, 예술가 레지던시와 공모전 등을 통해 창작자와 대중과 활발한 쌍방향 소통을 시도하는 한편, 재단 건물 자체도 하나의 건축물로, 프랑스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Vue de l’exposition <Versailles - Visible / Invisible>
Château de Versailles, 2019 Courtesy de l’artiste Viviane Sassen
© Tadzio
21세기 프랑스 메세나의 경쟁력과 과제
‘아이야공 법’ 제정 15년 후, 프랑스는 ‘메세나의 엘도라도’라 불린다. 더욱이 작년에는 의료, 교육, 스포츠 분야보다 비교적 뒤처졌던 문화예술계 메세나가 25%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꼭 수치적인 결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지원이 확충되는 동안, 메세나의 내용과 구조 역시 발전했다. 주목할 것은 메세나의 분야가 점점 더 세분화, 전문화되고 교육·양성기관의 형태로 구조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프랑스 기업 메세나가 가장 주력하는 부분은 인재 발굴 및 양성이다. 대표적으로 30년간 젊은 감독들을 배출한 간 재단(Gan Foundation), 사진작가들을 발굴해 유명 사진 출판사, 악트 쉬드(Actes sud)와 협업으로 작가개인집을 출간하는 HSBC 재단, 해마다 현대예술작가상을 개최해 신인 작가들의 전시를 지원하는 리카 재단(Fondation Ricard)을 꼽을 수 있다. 예술가들의 데뷔 무대로 통하는 재단의 공모전과 콩쿠르는 곧 재단의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특정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후원하고, 인재 육성 인프라를 구축·개발하는 과정에서 기업 재단은 단순히 재정적 후원자의 역할을 넘어 하나의 전문화된 기관으로서 발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메세나의 역할 확대는 프랑스기업메세나협의회에서 주최하는 ‘오스카상(Prix Oscar)’과 포럼 덕분이다. 훌륭한 메세나를 선별하는 시스템과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메세나 활동이 물질적 차원의 보상과 후원에 머물지 않도록 한 것이다. 1986년 ‘오스카상’을 수상한 까르티에 재단은 지금까지도 기업 메세나의 모범사례로 꼽힌다. 경제적 효과보다 예술적·사회적 가치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기업 메세나의 개념이 명확하지도 않던 때, 아이야공 법안이 있기도 전 설립된 까르티에 재단은 진정한 메세나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킨다. 올해 4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염 속에서 무너졌다. 이를 복구하기 위해 프랑스 대기업 총수들과 오너 일가들은 앞다투어 거액의 기부를 약속했다.
하이패션 브랜드들을 보유한 케링 그룹의 피노(Francois-Henri Pinault) 회장을 비롯해,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그룹의 아르노(Bernard Arnault) 회장, 로레알 그룹과 최대 주주 베탕쿠르 일가(The Bettencourt family)에 이르기까지, 화재가 발생한 지 하루 만에 무려 8억5,000만 유로가 모금되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실제로 걷어진 모금액은 1억5백 유로뿐이다. 이 중 대부분은 일반 대중이 100유로 미만으로 소액 기부한 것이다. 참담한 소식이다. 설상가상으로 기부금의 세액공제를 90%까지 높여야 한다는 아이야공 전 문화부 장관의 발언으로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은 정치적 논쟁으로 번졌다. 지원금을 확충하기 위한 방책일 수 있지만, 기업의 자선 목적이 이미지 쇄신과 조세 회피를 위한 것은 아니냐며 기부자 명단이 조세 회피처 블랙리스트와 같다는 날 선 비판들이 쏟아졌다.
아이야공 전 장관은 주장을 철회했고, 거액 기부를 약속한 기업들은 세액공제의 혜택을 받지 않겠다고 밝히며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눈앞에서 처절하게 불타는 성당을 보고 프랑스 국민들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그리고 불과 5개월 후, 국민의 힘으로 소생될 것이라 믿었던 성당은 존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메세나는 더는 예술가와 후원자, 양자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 정치와 윤리, 사익과 공익의 가치를 대변한다. 시대가 흘러도, 우리는 같은 물음 앞에 서 있다. 과연 진정한 메세나는 무엇인가.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을 둘러싼 사회 각층의 첨예한 갈등은 쿠르베가 그랬듯, 미래의 메세나를 위해 견뎌야 할 진통일 것이다.
글쓴이 정지윤은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현대미술과 뉴미디어학과에서 「기계시대의 해체미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 대학원 이미지예술과 현대미술 연구소에서 뉴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상호관계 분석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View of the exhibition <Trees> presented from July 12
to November 10, 2019at the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Paris Photo © Thibaut Voisin
Special feature Ⅱ-Ⅱ
경제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의 기로에선 예술 후원
● 박은지 독일통신원
얼마 전 국제박물관협의회(ICOM)는 50년간 변함없었던 박물관·미술관 정의에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 세계 평등, 지구적 웰빙(Well-Being)’ 등을 추가했다. 현재는 이를 철회하고 재논의 중인데, 작품 수집과 보존, 연구, 해설, 전시, 교육 등의 이전 정의와 달리 너무 추상적이고 정치적이라는 비난 때문이다. 어떻게 문자화되든지 지난 반세기 동안 박물관·미술관의 역할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만큼은 분명하다. 전시장이 더는 진공 상태인 화이트 큐브가 아닌 동시대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장소로 변모하면서, 미술관은 그 어느 때보다 사회문화적 책임과 공적 기능을 요구받고 있다. 이에 따라 기관 운영에 필요한 예술 후원 방식에도 변화가 불가피했는데, 본 글은 베를린에 위치한 전시기관들을 사례로 20세기 이후 독일의 민간 예술 후원의 역사를 개괄하고, 이와 관련한 이슈들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1)
제임스 시몬 갤러리(James-Simon-Galerie) 입구 전경
© Ute Zscharnt für / for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미술 애호가의 예술에 대한 헌신
민간의 예술후원은 크게 금전적 지원과 비금전적 지원(작품 기증, 장소, 인력 제공 등)으로 이뤄진다. 이는 독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로 왕정과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예술 후원은 18세기 후반 산업화의 영향으로 부를 축적한 기업가와 은행가, 신흥 재력가로 확대되면서 본격화된다.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민간 후원이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장려되기 시작한 때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다. ‘황금의 20년대’라고 불리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예술의 발전은 두 차례 전쟁과 나치 집권 시기 자행된 박해 정책으로 크게 퇴보한다. 특히 나치당은 ‘아리아인이 아닌(Nichtarier)’ 예술가의 활동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큐비즘과 미래주의, 다다이즘의 양식을 따르던 작품들을 ‘퇴폐 미술’로 규정하여 몰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직된 ERR(Einsatzstab Reichsleiter Rosenberg)은 독일군 점령지의 국립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유대인 컬렉터가 소장 중인 주요 유물과 서적, 예술 작품들을 대거 약탈했는데, 1944년 ERR이 자체 추정한 약탈품만 해도 42만 7,000t에 달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등지고 베를린 박물관 섬에 위치한 제임스 시몬 갤러리(James-Simone Gallery)는 제국주의 시대 수집된 작품들이라는 점과 20여 년의 공사 기간, 그에 따른 과도한 예산지출 등 여러 이슈 속에서도 지난 7월 성황리에 개관했다.
Konrad Lueg <Ohne Titel> 1964, 플릭 콜렉션
(Friedrich Christian Flick Collection)의 작품으로 현재 함부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에서 전시('Local Histories')중이다.
© Stefan Altenburger / VG Bild-Kunst, Bonn 2018 / bpk /
Nationalgalerie im Hamburger Bahnhof, Staatliche Museen zu Berlin,
Friedrich Christian Flick Collection
제임스 시몬은 19세기 후반 면직물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20대 중반부터 가업 경영에 참여해 모은 그의 재산은 당시 베를린에서 일곱 번째에 이를 정도로 막대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경제력을 통해 유대교 사회에서의 영향력은 물론 카이저 빌헬름 2세(WilhelmⅡ) 황제를 위한 여러 협의회와 단체에 소속되어 정치적 지위와 사회적 명망도 함께 얻었다. 특히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Kaiser-Friedrich-Museum, 현재 보데 미술관) 관장이었던 빌헬름 보데(Wilhelm von Bode)와의 친분은 그가 예술 후원자의 길을 걷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는 1885년 프란체스코 디 바누치오(Francesco di Vannuccio)의 1380년 작 회화 한 점을 시작으로 1904년에는 15세기 르네상스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의 작품과 기타 회화 작품 450여 점을 기증했으며, 이후 350여 점의 작품을 추가로 박물관에 이관했다.
이처럼 20세기 초 독일의 정치, 사회, 예술의 발전을 위해 열성적으로 후원했던 그였지만, 나치당 집권 시기의 인종차별 정책은 피해갈 수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1932년 그가 작고한 뒤 예술 후원자로서의 그의 명예와 작품이 겪은 수모다. 1938년 유대인 후원자가 기증한 작품과 후원 내역에 그들의 이름을 새기지 못하도록 하는 법령이 제정됨에 따라 제임스 시몬이라는 이름은 베를린의 박물관·미술관에서 삭제됐으며, 보데 재임 시기 마련된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의 ‘제임스 시몬 캐비닛’도 철거되었다. 수십여 년 동안 지속해서 작품을 기증한 만큼 베를린 이곳저곳에 세워졌던 그의 흉상과 명패, 후원 관련 문헌들 또한 한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따라서 제임스 시몬 갤러리의 개관은 독일의 문화예술 발전해 헌신했으나 나치당에 의해 그 공로가 은폐되었던 예술 후원자에 대한 베를린시의 뒤늦은 감사함과 존경의 표시로 해석된다.
제임스 시몬 캐비닛 전경, 카이저 프리드리히 뮤지엄
(Kaiser-Friedrich-Museum, 현재 보데 박물관)
1904년 촬영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 Zentralarchiv
제2의 문화예술 부흥기를 위한 노력들
사적이고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예술 후원은 20세기 중반부터 재단과 기업,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이뤄진다. 독일의 문화적 전통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1951년 설립된 독일 경제문화예술 협의회(Kulturkreis der Deutschen Wirtschaft)는 기업가들의 문화예술 지원을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이듬해 독일연방공화국은 독일문화 보존을 위한 민간 공동체의 기금 조성과 예술, 음악, 문학, 건축 분야에서의 새로운 인재발굴을 위한 기초적인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 덧붙여 일시적으로 서독에 대한 연합군의 점령정책이 완화되면서 문화산업에서 민간이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뿐만 아니라 기업의 경영구조 변화는 예술후원의 주체와 목적, 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8-19세기 가업을 승계한 개인이 회사의 이윤을 통해 예술을 후원했던 방식은 점차 기업이 법인회사로 전환됨에 따라 기업의 공식적인 예술후원사업으로 펼쳐진다. 후원 목적 또한 예술에 대한 개인의 애호나 공헌이기보다 기업 이미지 제고와 홍보, 투자 유치가 주를 이뤘으며, 기업의 컬렉션 운영과 전시 후원, 수상제도, 직영 기관 설립 등의 방식으로 추진된다. 이 밖에도 1970년대 본격화된 공공문화 정책과 민간 자금 유치를 위한 정부의 다층적인 금융지원, 동독과 서독의 사회적 통합을 위한 문화 예술의 효용성에 관한 연구 등 내외부적인 여러 요인으로 민간의 예술후원은 고무되었다.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체 방크(Deutsche Bank)의 메세나 활동은 이러한 독일 예술 후원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도이체 방크는 지난해 9월 베를린에 미술과 음악, 문학, 패션 분야 등 광범위한 분야를 아우르는 전시 플랫폼 ‘PalaisPopulaire’를 개관했다.
현재 이 은행은 본사가 위치한 프랑크푸르트 외에도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한 컬렉션을 운영 중이며,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규모 국제전시와 미술 행사를 후원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매해 젊은 작가를 선발하여 지원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후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도이체 방크의 후원 역사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의 컬렉션은 장기적인 계획이나 목표 없이 주로 창업자들의 초상화와 일부 임원진의 취향에 맞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이후 ‘일터에서의 예술(Kunst am Arbeitsplatz)’ 이라는 슬로건 아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업무의 환경을 조성하고자 수집한 작품들을 사무실 곳곳에 전시하기도 했다. 현재와 같은 컬렉션의 모습은 1980년대 이후부터 형성된 것이다. 소위 기업들의 컬렉션 붐이 있었던 당시 도이체 뱅크도 컬렉션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신축하고, 미술 전문 인력을 고용해 현대미술의 동향에 부응하는 작품들을 수집했을 뿐 아니라 컬렉션 공개를 통해 대중에게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미국과 유럽으로 국한되었던 컬렉션을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 작가들의 작품으로까지 확장했는데, 특히 무명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구입함으로써 순수한 작품 수집이 아닌 높은 이윤을 노린 투자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함부르크 반호프 현대미술관과 폭스바겐이 함께 운영 중인
‘VOLKSWAGEN ART4ALL’ 프로그램 진행 전경
2019년 3월 촬영 작품: Marjetica Potrc <Caracas: Growing Houses>
2012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Courtesy Marjetica Potrc und Galerie Nordenhake,
Berlin / Stockholm
예술 후원, 득인가? 독인가?
물론 개인과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은 당사자만이 그 이유와 목적을 알 것이다. 앞서 봤듯, 후원이 후원자의 미술 애호 활동이었을 수도 있고, 국가적 위기 속에서 싹튼 문화예술 보호에 대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또 예술적 가치를 이용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경영 전략일 수도 있겠다. 이유야 어찌 됐든 비영리 목적으로 설립된 문화예술 기관은 설립 취지와 기본 소임에 충실하기 위해 민간 자금 유치에 힘쓰고 있다. 후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독일의 국공립 미술관들도 199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한 정부 지원금과 해마다 상승하는 유지비, 인건비, 작품 보험비, 운송비 등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 중이다.
함부르크 반호프(Hamburger Bahnhof)는 1996년 개관한 베를린 주립 현대미술관으로 경제적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개인과 기업 후원, 컬렉션 유치에 지속해서 노력해왔다. 미술관 개인 후원자(Freunde der Nationalgalerie)들을 위해 별도의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기업 후원을 통해 전시 기획과 수상제도 운용, 지역사회 커뮤니티 프로그램 등을 기획한다. 현재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내셔널갤러리 상(Preis der Nationalgalerie)’은 독일 버전의 ‘올해의 작가상’으로 2년에 한 번씩 만 40세 미만의 예술가 가운데 한 명을 선발하는 수상 제도다. 후보 4인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미술관 후원자들과 BMW의 지원을 통해 이뤄졌다. 미술관에서 매주 첫째 주 목요일 진행되는 ‘VOLKSWAGEN ART 4 ALL’ 프로젝트는 이름처럼 폭스바겐의 후원으로 진행 중이며, 관람객에게 무료로 미술관을 개방하고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Near Life: The Gipsformerei-200 Years of Casting Plaster>
전시 전경 James-Simon-Galerie, 2019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 David von Becker
이처럼 공공재원 외에 자금 유입과 후원 지지층 확대를 도모하기 위한 미술관의 다양한 시도들은 당연히 환영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서든 예술 후원은 미술관의 공공성과 객관성, 그리고 윤리의식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 안타깝게도 민간 재원의 비율이 높아질수록 종종 미술관 운영에 대한 후원사의 간섭이 노골적으로 이뤄지기도 하고, 비윤리적으로 축적된 기업의 자금이 기부금과 작품 기증이란 명목으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유입되기도 한다. 함부르크 반 호프는 20세기 초반 회화부터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소장품을 매번 실험적인 방식으로 선보인 명실상부한 베를린의 대표 현대미술관이지만,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의 후원을 비판 없이 수용함으로써 그 명성에 오점을 남겼다. 2004년부터 미술관은 프릭 컬렉션의 작품들을 대거 기증받아 전시 중이다. 문제는 이 컬렉션이 나치 집권 시기 군수 장비 제작을 위해 유대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고, 살인과 탈세를 일삼던 전범 기업에 의해 형성됐다는 것이다. 미술관이 프릭 컬렉션의 일부를 소장한 그다음 해 한스 하케(Hans Haacke)와 벤자민 부흘로(Benjamin Buchloh) 등이 참석한 간담회에서 이 문제가 국제적으로 공론화됐다. 그러나 미술관 측은 이후 이 컬렉션을 위해 6,000m2 달하는 독자적인 공간(Rieckhallen)을 제공했으며, 컬렉션의 일부는 현재 기획전 <Local Histories>에서 전시 중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여러 미술관을 후원했던 세클러 가문(The Sacklers)이 소유한 제약회사 퍼듀 파마(Purdue Pharma)가 마약 성분이 함유된 진통제 판매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자, 구겐하임 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등이 더는 후원을 받지 않겠다고 밝힌 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은 향후 새클러 가의 후원은 받지 않을 계획이지만, 건물 내 설치된 ‘새클러 계단’의 이름은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더욱이 함부르크 반 호프와 제임스 시몬 갤러리 모두 정부 소유의 프로이센 문화유산 재단(Stiftung Preußischer Kulturbesitz)을 통해 운영된다는 점을 비춰볼 때, 유대인 후원자에 대해 감사함을 기리면서 동시에 나치 전범 기업의 컬렉션을 유치하는 기관의 이중성을 더욱더 이해하기 어렵다. 전 세계적으로 비영리 문화예술 기관들은 기업 메세나의 지원 활동과 후원 지지층의 확대를 통해 재원 조달의 채널을 다각화하고, 이로써 공공 기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러나 이제는 후원의 경제적 가치와 기관의 윤리적 가치가 충돌했을 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한 방안과 규제 마련도 함께 고심해봐야 할 것이다. (비록 재고 중이라고 하지만) 미술관이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 세계 평등, 지구적 웰빙’을 고려하는 기관으로 재 정의되려면 말이다.
[각주]
본 글에 등장하는 1960년대 이후 독일 정부의 정책과 KDW, 도이체 방크의 메세나 활동에 관한 정보는 아래 논문을 참고했다. Anna Weiland Private Kunst- und Kulturförderung i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2017.
글쓴이 박은지는 성신여자대학교에서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취득 후, 국립현대미술관 인턴을 거쳐 (재)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국제교류를 위한 전시업무를 담당했다.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교(UDK) 미술교육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아티스트 북을 리서치하고 그것에 관한 이론 및 전시기획론을 연구 중이다.
<Faro bar and restaurant, Pharos>
Photo: MONA/ Jesse Hunniford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MONA, Museum of Old and
New Art, Hobart, Tasmania, Australia
Special feature Ⅱ-Ⅲ
미래를 보는 후원자의 안목
● 김남은 호주통신원
유서 깊은 예술적 유산을 지닌 유럽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지닌 호주. 독자적으로 더디게 진화한 호주 미술만큼이나 국가적 혹은 개인적으로 예술에 대한 후원이 시작된 역사 역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요한 유산이나 개인적인 자본의 힘으로 미술관이나 예술 공간이 만들어지고 수준 높은 자선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불과 지난 30여 년 사이의 일이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큰 수치는 아닐지라도 예술에 대한 후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50년대 골드 러쉬(gold rush)는 호주에 갑작스러운 번영을 안겨주었는데 당시 축적된 새로운 부(富)가 예술 분야에도 다양한 변화를 불러일으키며 후원의 길을 열어주었다. 1880년까지 세계에서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른 도시였던 멜버른은 전 세계에서 대거 유입된 이민자들과 세계 각지에서 건너온 사업가들에 의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당시 큰 부를 거머쥐었던 알프레드 펠튼(Alfred Felton)의 사례는 호주 내에서 예술 후원 방식에 대한 본보기가 되었다.
1853년 영국에서 호주로 넘어 온 그는 멜버른에서 약제사로 도매업을 하며 큰 돈을 벌었고 회사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여러 회사와의 합병을 통해 호주 전역에 약국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펠튼은 예술 작품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는데, 미술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아마추어 입장에서 작품을 꾸준히 수집했다. 1904년 펠튼이 사망한 이후 그의 유언대로 문화와 공동체를 지원하기 위한 ‘펠튼 비퀘스트(Felton Bequest)’가 설립되었고 자금의 절반은 자선단체에, 나머지 절반은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Victoria, 이하 NGA)이 미술 작품을 구입하는데 사용되었다. 펠튼의 기부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NGA에 소장된 미술품의 약 80%가 펠튼의 유산으로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술관의 소장품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펠튼의 뒤를 이어 호워드 힌튼(Howard Hinton), 찰스 로이드 존스(Charles Lloyd Jones), 클로드 호킨(Claude Hotchin) 등과 같은 사업가들이 작은 갤러리를 설립하거나 소장하고 있던 미술품을 지역 미술관이나 공공 기관에 기부하며 자선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컬렉션은 20세기 초 호주의 예술적 관행과 기업의 후원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MR-II ferry docking at MONA> Photo: MONA/Stu Gibson
Image Courtesy of MONA, Hobert, Tasmania, Australia
사업가들에 의한 후원의 역사는 호주의 명망 높은 기업인 트랜스필드(Transfield) 그룹의 활동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트랜스필드의 설립자 프랑코 벨지오르노-네티스(Franco Belgiorno-Nettis)는 시대를 앞서간 안목으로 호주의 현대 미술을 후원했고 그 전통은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져 왔다. 그는 호주 예술가들을 장려하기 위해 1961년 ‘트랜스필드 미술상(Transfield Art Prize)’을 시행했고 호주 챔버 오케스트라(Australian Chamber Orchestra), 스컬프쳐 바이 더 시(Sculpture by the Sea), 시드니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Australia, 이하 MCA) 등을 후원하며 시드니의 아트씬을 다양하게 변화시켰다. 한편, 트랜스필드 아트 컬렉션(Transfield Art Collection)은 현대미술에 대한 벨지오르노-네티스(Franco Belgiorno-Nettis)의 여정을 설명해주는 주요한 개인 컬렉션으로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2004년부터 미술품 대여 제도를 도입하여 소장품을 임대 할 수 있게 했다.
작품 대여 프로그램의 수익은 2010년 설립된 트랜스필드 재단(Transfield Foundation)에 기부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트랜스필드 그룹의 가장 큰 후원 활동은 1973년 시작된 ‘시드니 비엔날레(Sydney Biennale)’의 창립 파트너로서 호주 현대미술을 세계에 알리고 동시대 미술을 홍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4년, ‘제19회 시드니 비엔날레(19th Sydney Biennale)’ 당시 트랜스필드 그룹이 파푸아뉴기니에 호주 정부의 역외 난민수용소를 운영하기로 하자 작가들이 이를 문제 삼으며 잇따라 보이콧을 선언하며 논란이 일었다. 이 사건 이후 트랜스필드 그룹은 40년 가까이 굳건히 지켜오던 비엔날레 최대 후원사의 자리를 닐슨 재단(Neilson Foundation)에 넘겨주게 되었다.
James Turrell
<MONA's Pharos wing, featuring Unseen Seen>
2017 Photo: MONA/ Jesse Hunniford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MONA, Museum of Old and New Art,
Hobart, Tasmania, Australia
투자 전문가이자 플래티넘 애셋 매니지먼트(Platinum Asset Management)의 공동 창업자 커 닐슨(Kerr Neilson)이 만든 닐슨 재단은 다양한 예술 기관과 자선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 2007년에 설립된 비교적 신생 재단이지만 창립 이래 9,800만 달러 이상을 지원할 정도로 현재 호주 미술 씬의 가장 전방위에서 후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시드니를 중심으로 한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시드니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 ‘칼도어 공공미술 프로젝트(Kaldor Public Art Projects)’, MCA를 후원하면서 시드니의 문화 경관을 풍요롭게 하고 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하고자 하는 재단의 목표를 이어가고 있다. 이외에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미술관(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퀸즐랜드 아트 갤러리(Queensland Art Gallery of Modern Art), NGV 등 호주 주요 미술관의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위와 같이 사업을 통한 거대한 자본으로 이루어진 기업의 후원 활동이 일반적인 행보이지만 호주 미술을 발전시킨 개인 후원자들도 무수히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호주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후원자를 논하자면 단연코 존 리드(John Reed)와 선데이 리드(Sunday Reed)일 것이다. 경제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가문 출신이던 두 사람은 1934년, 멜버른 외곽에 있는 부동산을 구입했고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새집을 하이델베르크의 약칭인 ‘하이드(Heide)’라고 불렀다. 하지만 리드 부부가 이곳의 부지를 사들일 때만 해도 호주 모더니즘의 발상지로 여겨질 유명한 미술관이 될 것이라고는 거의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보적이고 새로운 예술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이들은 재능 있는 예술가를 육성하기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런 이유로 그들의 저택에는 자연스레 예술가들이 빈번히 드나들었다.
시드니 놀란(Sidney Nolan), 알버트 터커(Albert Tucker), 조이 헤스터(Joy Hester), 다닐라 바실리에프(Danila Vasilieff) 등 ‘하이드 서클(Heide circle)’에 속한 화가들과 당대의 지식인들은 이곳에 모여 작업을 하거나 토론을 하며 호주의 모던 아트를 꽃피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식적인 기관의 필요성을 느낀 리드 부부는 1958년 저택을 개조하여 미술관을 설립했고 이것이 하이드 현대미술관(Heide Museum of Modern Art)의 시초가 되었다. 현재 20세기를 대표하는 호주 미술품 3,400여 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는 하이드 현대미술관은 미술관을 후원하는 수많은 개인과 기업, 기관들과 함께 하이드 재단(Heide Foundation)을 통해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리드 부부의 귀중한 유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Siloam MONA's new underground tunnel extension>
Photo: MONA/ Jesse Hunniford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MONA, Hobart, Tasmania, Australia
리드 부부가 호주의 모던 아트를 발전시킨 후원자로 회자된다면 데이비드 월시(David Walsh)는 동시대 예술 후원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있는, 현재 호주에서 가장 주목받는 후원자일 것이다. 전문 도박사이자 아트 컬렉터인 그는 현대미술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태즈매니아에 현대미술관(Museum of Old and New Art, 이하 MONA)을 설립하면서 유명해졌는데 개인 컬렉션으로는 호주 최대 규모를 자랑하기 때문에 MONA가 건립될 당시 월시의 성공 신화는 호주 전역에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태즈매니아 거주자들과 18세 이하 관람객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MONA는 방대한 컬렉션과 미술관을 둘러싼 그림 같은 풍경, 와이너리와 호텔까지 갖추고 있어 태즈매니아의 관광명소로서 지역 경제에도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MONA가 단순히 랜드마크에 그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월시는 매번 심오하면서도 독특한 전시를 선보이며 대중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월시의 사례는 굉장히 파격적인 편에 속하지만, 개인 차원에서 예술을 후원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미술관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지원하는 일이다. MCA의 후원자인 잭슨 부부(Edward and Cynthia Jackson)는 보석 디자이너였던 딸 벨린다 잭슨(Belinda Jackson)이 스물아홉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꿈을 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한 그를 기리기 위해 1993년 벨라 그룹(The Bella Group)을 설립하여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특별한 후원 활동을 시작했다. 35세 이하의 젊은 예술가를 발굴하는 프로그램 ‘프리마베라(Primavera)’를 매년 진행하고 있으며 잭슨 벨라 룸(Jackson Bella Room)이라는 특별한 전시장을 만들어 MCA를 찾은 관람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창의적인 프로그램과 다양한 소장품을 소개하고 있다. 한편 미술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예술가와 협업하여 ‘벨라 프로그램(The Bella Program)’을 수시로 진행하면서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글쓴이 김남은은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에서 장-미셸 오토니엘의 작품연구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9년간 신한갤러리 큐레이터로 일하며 다양한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 캔버라에 거주하면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호주 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Liam Benson Tall Timbers Centre,
Box Hill, 2019 Photo: Jacquie Manning
Special feature Ⅱ-Ⅳ
예술 지원을 자처하는 도시, 뉴욕
● 정재연 미국통신원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휘트니 미술관의 이사회 부회장 워렌 칸덜스(Warren Kanders)의 사임은 소위 ‘나쁜 돈’으로의 기업 후원에서부터 오늘날 진정한 예술 후원이 무엇인지 곱씹는 계기를 제공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예술가와 예술단체, 각종 문화 활동을 꾸준히 지원해 온 기관은 더 돋보이기 마련. 그 중 뉴욕 주 시민들에게 수준 높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뉴욕주예술위원회(New York State Council on the Arts, 이하 NYSCA)가 있다. 미국은 예술 지원에 대한 기업의 후원이 활발하다. 또한 지원 기구를 처음으로 조직하여 활동한 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 기업의 예술 지원은 민간 기부 활동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50년대 이후 미국은 경제와 문화예술의 중심축과 더불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 미국에서 예술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연방차원의 국가예술지원기관을 창설한다. 국가가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예술의 후원자가 됨으로써 문화예술을 꽃피우겠다는 의도를 가진 가장 명확한 목표가 있는 국가일 것이다. 이 도시에는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정책이 집중되고, 이를 통해 민간 기금의 후원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실제로 시민들은 뉴욕을 세계 문화의 중심지, 세계 문화의 수도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당당함이 비롯될까? 이는 바로 예술가들이 전 세계에서 이곳으로 모이고, 도시는 질 높은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함으로써 활발한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Guests at the opening reception
for the Summer 2017 exhibition season
Photo: Will Ragozzino
예술가와 뉴욕 시민을 위한 NYSCA
뉴욕 주 예술기구(State Arts Agencies) 중 하나로 NYSCA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부설기관으로는 뉴욕예술재단(New York State Foundation for the Arts)이 있다. 1960년에 설립된 NYSCA는 정부, 재단, 기업 그리고 개별 후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문화예술에 대한 전체 지원에서 지방정부나 사설 재단의 비중이 증가하면서, 국가와 별도로 사설기금이나 후원자, 기부자의 중요성이 확대되었다. 특히, 공적인 성격을 보이는 고급 공연예술 같은 경우는 상류층이나 기업들의 후원이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경제 불황의 여파로 문화예술에 대한 공적 지원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와중에 문화예술기관단체가 적극적인 모금 캠페인을 벌여 예산의 45% 이상이 기부와 후원으로 메워진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NYSCA에서는 예산 확보를 위해 기부와 후원 활동에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예술이 갖는 특별하고 역동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과 예술 지원을 구축하고 미국 내 예술단체와 예술가들을 위해 다양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이곳의 주된 목적이다. NYSCA의 시각예술 및 예술가 분야 프로그램 책임 디렉터 카렌 헤머슨(Karen Helmerson)의 도움을 받아 이들이 예술가들을 위해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후원하는지 살펴보고, 또 어떻게 뉴욕이 문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는지 살핀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예술의 중심지인 뉴욕 시는 문화예술의 정책적 지원이 끊임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NYSCA는 뉴욕 주의 비영리 문화예술단체 및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뉴욕 주 시민들에게 수준 높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전달하고 돕기 위한 기금지원기관(Funding Agencies)’이라는 설립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NYSCA는 보조금 조성 활동을 통해 2018년에는 15개의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크고 작은 2,400개 기관에 총 5,100만 달러를 후원했다. 이러한 기금은 시각, 문학, 음악, 미디어 및 공연예술 등 예술가들의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며, 나머지 예술 교육과 이로부터 소외된 지역 사회에 사용된다. 블록버스터 급 전시나 공연에 집중되던 기업들의 후원 방식과 비교했을 때, 다소 젊은 예술가와 실험적인 예술가에 대한 지원에도 관심을 확대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더 많은 비영리 예술단체 및 문화조직들과의 계약체결을 통한 예술 활동 관련 프로그램과 비영리 예술단체 및 소외된 예술 장르에 대한 보조금 지원 사업 및 융자 지원 등도 중요한 업무이다.
Mitsue Kido (Chile/Japan) and Barbara Barreda
(Chile) 2018 Art Omi: Architecture residents
Photo courtesy of Art Omi
지난 50여 년간 미국의 문화와 예술이 발전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조건적인 후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예술’을 중요한 사회적 자산, 창의적 산업으로 간주하여 ‘문화’로 자연스럽게 편입시킨 것이 주요했다 볼 수 있다. NYSCA는 문화향유인구 증가와 국제문화교류에 발 맞춰 예술 프로젝트 범위, 규모 등 다양한 문화영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NYSCA의 홍보 디렉터(Director of Public Information)인 로니 라이히(Ronni Reich)가 전달해 준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던 중 눈에 띄는 후원 프로그램이 있었다. 바로 회계 후원(Fiscal Sponsor)이다. 이를 통해 모금한 기금은 건축(Architecture)+디자인(Design), 미술 교육(Art Education), 무용(Dance), 전통예술(Folk Arts), 각 분야의 예술가(Individual Artists), 문학(Literature), 음악(Music), 특별 예술 서비스(Special Arts Services), 연극(Theatre)까지 총 9개의 부문에 사용되며, 예술가 개인이나 예술단체 또는 그룹을 대신하여 재원을 조성할 수 있도록 재정 환경을 마련해주고,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한, 많은 예술가에게 편의시설과 공간을 내어 줌으로 보다 안정적인 조건에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작가들을 서포트하는 여러 기관들에게도 아낌없는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트 오미(Art Omi), 야도(Yaddo), ISCP(International Studio & Curatorial Program) 외 총 25곳에서 공신력 있는 레지던시를 지원하고 있다. 그 중 아트 오미의 건축담당 책임자 워렌 제임스(Warren James)는 “NYSCA의 자금 지원은 레지던시 프로젝트에 어떤 도움을 주었으며, 어떤 혜택을 주는가”란 질문에 “NYSCA의 자금 지원은 아트 오미 내에서 중추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에 속한다. 건축프로그램의 설립 비전에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학습에서부터 실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 가능성이 보인다. 또한, 새로운 커뮤니티 구축에 주력하여 독특한 건축과 디자인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직접 건축가와 설계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NYSCA의 장기 지원은 건축과 디자인이 타 장르 예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틀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답했다. 건축과 설계 프로그램들을 통해 새로운 시점을 제시하고 이 레지던시에 있는 건축가들은 뉴욕 시민들에게 건축의 창조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제시할 것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Educators lead a group tour of the Studio Museum
예술작품의 가치를 발굴하고 연구해, 후대에 전할 유산과 지식으로 이를 보존하는 역할은 여전히 미술관인 것이다. 뉴욕의 미술관들은 꾸준히 정부와 함께 민간 후원의 비중을 늘리고 있고, 이들로부터 다양한 후원과 더불어 기업 및 단체 협업이 끊이질 않고 있다. 뉴욕예술위원회는 예술과 문화 그리고 유산 활동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지원함으로써 미술관/박물관의 관련 전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문화예술교육의 공간이 교육 제도를 넘어서 보다 넒은 장에서 실현되고 있는 곳이 미술관/박물관이라고 볼 수 있다. 뉴욕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가 모여 있고 세계의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인종과 민족에 따라 다양하게 자신들의 문화와 예술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뉴욕예술위원회의 미술관 및 특별예술프로그램의 지원 대상 기관 중 하나인 스튜디오 뮤지엄 인 할렘(The Studio Museum in Harlem)을 살펴보자.
스튜디오 뮤지엄 인 할렘은 할렘에 위치한 미술관으로 지역 커뮤니티를 넘어서 국내외를 아우르는 흑인계 작가들을 위한 무대이자 그들의 문화를 반영하는 작품을 선보이는 곳이다. 19세기, 20세기를 대표하는 흑인 작가들을 선두로 올해 순수미술 석사(MFA) 학위를 받는 젊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까지 폭넓게 소장, 전시하고 있으며, 인권과 다양성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자유로운 토론하는 장 역할을 하는 뉴욕의 주요 미술관 중 하나이다. 앤드류 W. 멜론 재단(The Andrew W. Mellon Foundation)과 함께한 리서치 결과를 살펴보면 뮤지엄 인 할렘은 아프리카 미국인들의 문화예술 부문, 특히 큐레이터와 예술가들에게 다양하고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이곳이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지역 사회와의 꾸준한 협업을 함께 기획하고 나아간다는 점에 있다. 2018년 할렘에서는 지역 커뮤니티와의 지속적이고 다양한 협업을 위해 ‘인할렘(InHarlem)’ 프로젝트를 실시하였다. 뉴욕의 공원과 공공도서관을 비롯해 할렘의 여러 공공기관을 빌려 획기적인 전시, 워크숍 등을 진행해 시사성 높은 담론을 형성했다. 이러한 뮤지엄 프로그램은 미술관/박물관이 문화적 생산물을 통해 경제적, 사회정치적으로 중요한 장소로 자리 잡고, 더 나은 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는 명확한 중장기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대중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뉴욕예술위원회에서는 뉴욕 주에 위치한 미술관/박물관들을 선별해 운영, 프로젝트, 후원 및 파트너십 등 다방면으로 후원한다.
Installation view <Radical Reading Room>
On view at Studio Museum 127,
May 3–October 27, 2019 Presented by
The Studio Museum in Harlem Photo: Adam Reich
아무리 뉴욕예술위원회가 체계화, 세분화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축하고, 예술가들을 위한 곳이라고 해도 재원이 없었다면 예술을 창출하고, 대중한테 전달할 수 있었을까? 이곳의 웹사이트를 살펴보면, 정부기관, 기업, 일반인까지 상당히 많은 후원자의 이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재원 구성 및 모금은 기업의 성격과 프로그램 성격에 맞춰 스폰서와 파트너십, 이벤트 스폰서, 재정 후원, 현물 협찬 등으로 다양하게 나뉘어져 있다. 2019년에는 박물관, 미술관, 예술가와 더불어 특별 예술 프로그램에서는 카네기홀(Carnegie Hall), 라커펠러 브라더스 펀드(Rockerfeller brothers fund), 그레이터 허드슨 헤리티지 네트워크(Greater Hudson Heritage Network), 수도권 예술 센터(Arts Center of the Capital Region) 등 여러 재단과 기업에서 후원 및 파트너십을 맺고, 청소년들의 교육과 예술가들의 경력 계발에 앞장서고 있다. 다양한 인종이 밀집되어 사는 뉴욕에서는 최근에 LGBTQ, 여성인권 및 소수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장애인과 노인층, 빈곤 및 노숙자들 죄수들을 위한 예술 참여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보고 왜 뉴욕이 세계적인 문화예술의 수도가 되었는지 그리고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싶어 하는 도시인지 짐작케 한다.
글쓴이 정재연은 실내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언어와 텍스트, 그리고 사회적 맥락과 인간 사이에서의 상호 관계성에 대해 탐구해 전시로 풀어내는 것을 장기 연구과제로 삼고 있다. 2012년 일현미술관에서 퍼포먼스에 대한 교육을 기획 및 진행하였고, 2016-2017년에는 문화역서울 284 <다빈치 코덱스>전의 큐레이터를 맡았다. 현재, 뉴욕 첼시의 작가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전시 리뷰를 비롯해 예술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슈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