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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14, Mar 2016

혼용의 예술

Hybrid X Metamorphosis Art

단일매체나 순수성을 찾기 어려운 하이브리드(hybrid),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 예술 시대다. 장르가 결합하는 융복합을 넘어 모든 것이 조합되고 변형되는 예술 상황에서도 여러 장르를 접목하고 변형하는 도전적이고 새로운 예술은 끊임없이 탄생하고 있다. 전통적 예술의 한계를 초월한 상상력으로 강한 몰입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이 변주를 거듭하는 것이다. 「퍼블릭아트」가 하이브리드, 융복합, 메타모포시스 등 혼성과 혼합, 변화의 예술을 뜻하는 개념들을 살피며 이에 해당하는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이어 현대예술에서 복합성·혼성 양상, 왜 혼성화 현상의 흐름을 갖게 되었는지 살피며 다원예술의 장점과 문제점을 훑고, 하이브리드 아트로 대표되는 예술 혼성화의 방향성과 미래를 점쳐본다.
● 기획·진행 백아영 기자

존 매코막(Jon McCormack) 'Fifty Sisters(detail)' ⓒ Jon McCorm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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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영 기자, 김해주 큐레이터, 구나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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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_백아영

예술의 무한한 변주


SPECIAL FEATURE _김해주

동시대 예술의 매체 복합적 경향에 대하여


SPECIAL FEATURE _구나연

3 지형과 하이브리드 아트의 조건





바딤 피슈킨 <A Speedy Clock> 2014

 Electronic clock, projections on a 1 min loop, white 

plinth 1x1x1m Courtesy: artist and Galerija Gregor Podnar, 

Berlin Production: Association DUM/Ljubljana





Special feature 

예술의 무한한 변주

 백아영 기자



예술은 해체와 혼성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하고 있다. 장르  컨버전스(convergence, 융합) 현상 또한 점차 퍼져 다양한시도로 이어지며 다채로운 예술을 생산한다. 여러 예술 분야를  자리에서 한순간에 감상할  있다는 점이 우수성으로 작용하는 이런예술의 변주는 특히 현대예술에서 두드러지며 일찍이 현대 트렌드로 자리 잡은  오래다. 하이브리드, 메타모포시스, 컨버전스, 융복합, 다원예술  혼용의 예술을 나타나내는 장르도, 용어도 다양하다. 원래 하이브리드잡종이나 혼성물을 의미하는 단어다. 그런 개념이 예술에 흘러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한 . 다양한 혼용의 예술을 예로   있지만, 특히 현대미술에서 하이브리드는 예술과 산업의 이종교합 , 과학기술과 아트의 접목을 말한다. 


2013 서울과 제주도에서 예술가, 건축가, 과학자가 모여 , 바람, , 습도  자연 현상을 주제로  융복합예술 프로젝트 자연과미디어 에뉴알레 열렸다. 자연과 미디어를 주제로  공공예술품과 창작 과정을 전시, 출판, 영상, 컨퍼런스 형태의 공공예술실험 프로젝트로, 미디어 아트뿐만 아니라 에너지 독립형 스트리트 퍼니처, 제로 에너지 파빌리온, 제로 에너지 게스트 하우스  에너지 과학기술 영역을 총망라한 융합적 예술로 관심이 쏠렸다. 또한 2010년부터 모스크바에서 렉서스 그룹이 6회째 개최하는 <Lexus Hybrid Art Exhibition>전이 하이브리드 예술을 꾸준히 소개한 대표적 전시다. 그동안 20 개국 60 명의 예술가들이 전시를 거쳐 갔고, 가장최근 전시에서 눈에 띄는 인물로 러시아 작가 바딤 피슈킨(Vadim Fishkin)   있다. 


과학기술과 예술의 교차지점을 오가는 작업을소개하는  야생과 매일의 리얼리티에 관한 이미지를 재창조하기 위해 기술의 발명을 탐구하고 있다. 피슈킨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합성한 과학기술의 발명, 언어, 목소리를 관람객과 소통하는 자신만의 매개체로 활약하게 하며, 디지털 미디어와 오브제가 결합한 혁신적인 융복합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기술과 예술이 결합한 사례들과 맥을 같이 하는 융복합 외에도, 그동안 예술은 복제와 차용, 변형과 혼성, 변조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거치며 비정형 형태를 등장시켰다. 탈바꿈, 변형, 변용, 변태를 뜻하는 메타모포시스개념을 내세워 확장과 혼성이 한데 녹아들게 하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예술을 완성하는 메타모포시스 예술도 빠질  없다. 이처럼 용어는 다르지만 결국 이러한 혼성의 예술이 추구하는 바는 장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이다. 그러한 예술의 종류, 흐름과 맥락은 매체, 시대, 소재 등에서 다양하게 혼용·변주되고 있다. 





바딤 피슈킨(Vadim Fishkin) <tour en l'air> 2009 Helium, 

balloons, music, engine connected with transmitters-receivers

 (<tour en lair> is a spacious installation with helium filled 

star-shaped balloons floating simultaneously in the air, driven 

by a waltz of P.I. Tchaikovsky) Courtesy the artist and 

Galerija Gregor Podnar/Berlin Production: Association DUM/ 




 가지 매체의 결합은 물론이고, 여러 미디엄을 융합·복합한  장르적 혼성을 통한 새로운 예술의 탄생이 심상치 않다. 콘텐츠를 자유로이 믹스  매치하고 미술, 연극, 영화, 무용, 음악  서로 다른 장르를 결합한 예술은 각자가 지닌 벽을 허물어 관람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낸다. 특히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을 합쳐, 미술과 공연을  자리에서 선보이는 형태가 최근 가장 대중적으로 나타난다. 지난 1 피리 연주자 김시율이 <피리독신>이라는 융복합 공연을 진행했다. 그는 한국  서양식 건축물로 알려진  서울역사, 문화역서울284 RTO에서 피아노와 드럼과 더불어 구성지게 피리를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공연장을 설치미술 전시장으로 구현해 영상, 조각, 뉴미디어 작품도 함께 전시했는데, 특히 전시장 한편에서 공연 직전까지 상영한 연주자 인터뷰가 인상 깊었다. 공연이 끝난  비디오의 내용이 교묘한 속임수였음을 드러내며 한편의 영상작품으로도 손색없음을 증명한 종합예술의  현장이었다. 


또한,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 주인공으로  뮤지컬 <빈센트  고흐> 고흐의 그림을 영상으로 삽입하고,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소재로  연극 <레드> 무대에 거대 규모 캔버스를 등장시켜 직접 로스코의 격정적인 붓질을 연상케 하는 배우의 손놀림을선보이는  단순히 미술이라는 소재의 활용을 넘어 장르  결합을 성공적으로 끌어내 극적 상황을 연출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공연예술의 극적임과 정통 예술이 주는 무거움에서 탈피, 관객들에게 접근의 문턱을 낮추고 많은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새로운 혼용의 예술에 대한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와 더불어 최근 국제적인 박물관에서 만나볼  있는 명화들에 현대식 뉴미디어를 접목한 전시들에 대한 관람객의 호응도가 높다. 영상 콘텐츠를 활용한 미술체험전시가 연이어 선보이며, 영상과 무대를 넘나들며 관람객을 다양한 상상의세계로 이끈다. 작품, 음악, 영상을 접목한 <반고흐 인사이드>(문화역서울284)에서는 고흐가 그린 카페 속으로 들어가 직접 그를 만날 수도 있다. 3D 체험 안경을 쓰고 카페에 앉아, 문으로 걸어 들어온 고흐를 마주친 순간 눈물이   정도의 감동이 일었다는 어느 관람자의 말처럼, 과학기술과 걸작의 만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현대미술과 문화의 형태를 과거 문화유산 혹은 전통미술과 결합하고 혼용하는 시대적 혼성 사례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들은발생 시기가 완전히 다른 사조를 혼합해 자연스러운 어울림으로 많은 예술품을 창조했다. 2003 터너상(Turner Prize) 수상자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 도자기는 고전적인 모양을 갖췄지만,  표면에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익살스럽게 새겨져 있다. 그는 실제로자신의 작품을 전통과 현대문화의 대화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박물관에서 쉽게   있는 도자기 형태로 작품을 만들지만, 독창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도자기를 모방 뒤에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면,  새로운  된다는 그의 말에 예술의 혼성에대한 해답이 있다고 본다. 서로 다른 예술이 만나 기존 예술이 지닌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거나 혹은 완전히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는. 단일매체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현대예술은 점차 매체 간의 결합이 주는 다양성과 새로움에 목말라하고 있음을드러낸다. 





김가람 <'SOUND PROJECT' Poster Wall> 

2015 가변설치  




페리와 유사한 이종교합을 선보이는 작가로, 유의정은 고급, 상위, 엘리트  하이 컬쳐 이미지로 대표되는 고려청자, 조선백자, ·서양 도기 등에 싸구려 상업 문화나 대중문화  로우 컬쳐 아이콘 간의 결합을 통해 전통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페리처럼 박물관에서  직한 전통 도자 형태에 스타벅스, 코카콜라, 애플, 나이키  현대 상업문화 이미지를 덧씌웠다. 포토그래퍼 코웰(Meg Cowell) 무한한 진공 공간에  있는 여성의 화려한 의상을 소재로 한다. 누군가의 독특하면서도 로맨틱한 성격에 의해선택되는 드레스는 마치 주인과도 같은 캐릭터를 갖는다. 작가가 다소 과도하면서도 풍부한 색상의 의상을 주로 포착해 물속에서 촬영한 피사체는 마치 심연에  있는  같은 이미지로 화면에 등장한다. 마치 실체와 환영, 현실과 가상이 혼재하는 듯한 그의 이미지에서패션 사진과 순수예술의 합치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며 기법과 양식의 자연스러운 혼합을 선보인다. 이러한 매체의 혼용이나 결합과는다른 이미지의 해체와 조합도   있다. 소재의 결합을 가장 두드러지게 살펴볼  있는 작품은 초현실주의 화풍의 그림이다. 


아름다운 여인의 상반신과 물고기의 하반신을 이어 만든 인어공주는 동화책, 애니메이션, 뮤지컬에서까지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반대로 인간의다리와 물고기의 몸통을 이어붙인 해괴한 모습의 인어 인간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The wonders of nature>(1953) 그렇다. 다소 기괴하리만치 인위적인 조합이더라도, 마그리트는 인간, 식물, 동물, 사물의 다양한 변주와 조합을 통한초현실 세계를 작품에 선보였고, 블라디미르 쿠쉬(Vladimir Kush) 코끼리의 얼굴 부분에 악기를 붙인 그림도 유명하다. 기존에  알려진 이미지를 중첩해 전혀 새로운 오브제로 재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이질적인 섞임과 변종의 결과물은 그의 작품 면면에서 자세히 드러나고 있다.


기존 개념을 벗어나 확장된 영역으로 나아가는 이러한 혼성 예술은, 이제는 융합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예술 담론을 끌어내는하나의 장르다. 물론 이런 예술의 혼성에 아직 한계가 있을 수는 있다. 단순한 색다름만을 추구하는 흥미 위주의 결합이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장르를 뒤섞는 형태가 아닌, 조형적인 설득력을 수반하며 단일예술을 뛰어넘는 높은 작품성으로 경쟁하는 예술이 필요하다.  장르를 재해석해 효과적으로 결합한 장르가 필요하다. 뛰어난 기술을 예술에 접목하거나, 여러 장르가 결합한 혼성은 예술발전에 있어 필수요소다. 예술의 미래는 융복합에 달렸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예술 융복합 현상에 따른 사회, 경제, 문화적 측면의 정책 개발과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융합화 과정에서 발생할  있는 충돌과 갈등을 해소할  있는 합리적인 연구 또한 수반되어야 한다. 이제는 다양한 예술의 베리에이션을 통해 예술에 있어 복합성과 변주가 지닌 의미를 재고해  시간이다. 그동안 분리된 장르를 녹여낸 새로운 장르와 독특한 이미지가 기대된다. 오늘날 예술 담화의 대상으로 혼성의 개념에 대한 물음을 제시하며 질문을 끌어내며, 이러한 예술이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변태를 거듭할지 두고  일이다.  




박지희 <일방향 구조물

2014 열대과일, 동파이프, 콘크리트, , 

클립, 아연판, 전선, 소리센서, LED전구, 멀티테스터 가변설치  





Special feature 

동시대 예술의 매체 복합적 경향에 대하여

 김해주 큐레이터



우리는 동어 반복의 위험을 무릅쓴 , 마치 매체라는 것이 이미 연결되거나 접속된 것이 전혀 아닌 것처럼 새로이 상호매체성에 대해이야기한다. 상호매체성은 문화사나 예술사 내에서 또는 하나의 작품 내에서 발견될  있는 매체들 사이의 교류를 연구한다. 가령 우리는 1920-30년대 드라마나 소설적 글쓰기에 영화의 몽타주 기법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있다. 또는 더욱 구체적으로, 마임의 한순간을 분석함으로써,  몸짓이 움직임을 형상화하기 위해 회화나 영화  다른 예술로부터 무언가 빌려온 것이 있는지 확인해볼 수도 있다. 1) 연극학자 파트리스 파비스(Patrice Pavis) 말처럼, 우리는 여전히 동어 반복의 위험을 무릅쓴  마치 새로운 것인  상호매체성을 거론하고 있다.  상호매체성은 특히 2000년대 중반부터 다학제, 다원, 융복합 등으로 이름을 바꿔달고 등장했다. 개별 용어에 대한 면밀한 정의 없이 혼용되고 있는  용어들은 결국 다종 예술  매체  결합을 막연하게 의미한다. 세부적으로 구분을 시도하자면interdisciplinary 번역한 말인 다원 미술+무용, 미술+음악처럼 예술 내부의 장르  결합이라면, 융복합은 예술과 예술 이외의것의 결합, 특히 예술과 과학 기술과의 결합으로 어렴풋이 이해된다. 


 어렴풋한 이해가 개별 작업이 뻗어 나갈  있는 다양한 갈래와실험을 독려하는 순기능이  수도 있지만,  명칭 아래 자리 잡은 작업을 지켜줄 힘으로 작동하지는 못했다. 올해 문화예술위원회 지원 공모에서 다원예술 분야가 사라졌다. 그런데  다원예술이 공모분야에서 사라졌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는 목소리는찾아보기 어렵다. 만약 미술이나 연극이 갑자기 지원 공모 분야에서 사라졌다면 논란 없이 넘어가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만큼 다원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거나  존재를 증명하기에는 연약했다고   있다. 정의의 모호함이  필요를 설득할  없음으로이어진 것은 아니냐는 추측을 해보게 된다. 다원은 그것이 어떤 특정 장르로서의 정체성이나 흐름을 뜻하기 이전에 생겨났다. 


 알려진것처럼 2005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다원예술 분과 만들어 지원을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예술행정의 의사 결정에따라 생겨나서 하향식으로 설정된  용어는 애초에 실험적 예술, 새로운 작업이라는 말처럼 예술의 성격을 설명하는 형용사이지 새로이 구획을 지어야  장르의 이름은 아니었다. 이는 국내 문화예술 지원행정의 상황에서 장르의 변방에 있거나  사이에 있는 예술이지원 심사에서 쉽사리 배제되는 것을 염려하여 생겨난 것이다. 만약 개별 장르가 동시대 예술이 가진 현격한 특징인 다원성을 이해하고자신의 장르 안에서 이를 지원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면 구태여 생겨날 필요가 없었던 이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다원예술은 국내예술 장르 내부의 보수성을 반증하는 이름이다. 그렇다면 다원예술 지원을 없애도  만큼 이제 장르 간의 장벽이 완화되었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르윗(Sam Lewitt) <Paper Citizen 4322> 

2010 Chromogenic print: sheet 161×126 Image 

158.8×124.1 Edition no.1/3 Promised gift of Thea Westreich 

Wagner and Ethan Wagner P.2011.250. Courtesy the artist and

 Miguel Abreu Gallery, New York  





다원예술이 표방하는 매체 복합적 성격은 최근 새롭게 생겨난 것은 아니다. 19세기 이후 근대 예술이 소리(음악), 이미지(미술), 텍스트(문학, 연극) 등이라는 구체적인 재현의 형태로 분리되어 독립적인 장르로 발전하는 경향이 주도적인 흐름이었다면  같은 구분을넘어서거나 또는 의식하지 않는 작업의 형태가 분출했다. 도입부에 언급한 파비스의 예시처럼 다른 장르의 예술에서 형식적 참조를 찾는 방식의 미세한 결합은 물론 수도 없이 많다. 시와 음악, 무대와 춤을 하나로 결합하는 총체 예술의 발상이 바그너(Wagner) 개인에서출발했다면, 1 세계대전 이후 시작해 유럽 전역에 퍼진 다다(Dada) 음악과 , 미술이 결합한 선동적인 이벤트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특히 1960년대와 70년대 개념미술과 플럭서스(Fluxus) 많은 미술가, 음악가, 안무가들이 협업하거나 작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공유하며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다. 60년대 이후 두드러진 장르 간의 해체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탈근대의 징후로 읽히기도 했다. 서현석은 “‘매체 가진 물질적 기반에 대한 성찰을 중시했던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식의 미학,  크라우스(Rosalind Krauss) 환원적 모더니즘(reductivist modernism)이라 칭한, 2 세계대전 직후의 거대한 미학적 혁명은 회화와 조소로부터 사진, 영화로 번졌고, 1960년대에는 이로부터  다른 변혁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모더니즘의 한정된 물질 대한 집중은 (포스트라는 접두사가 함축하듯) 그로부터 파생되었으면서도 그에 대한 이탈이기도  역설적인 파장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매체 하는 이러한 성향은, 더는 매체의 근원이 캔버스나 셀룰로이드 필름과 같은 특정하고 단일한 구성 요소로 환원되지 않고 혼성적이고 복합적인 예술의 메커니즘에 대한 사유로 확장됨에 근거를 둔다. 2) 라고 정리한다. 특히 연극이나 무용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이 크라우스가 말하는 미술사에서의  매체 맥락에서 중요해질  있는 이유는 매체의 물질적 기반으로부터 멀어지는 탈주로의지평에 공연예술이 이미 자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3) 라고 설명한다. 아서 단토(Arthur Danto) 예술의 다원화 경향을 주목하며 기존 예술의 단선적 내러티브가 끝났다는 의미로 예술의 종말 선언하기도 했고, 또한 2000년대에는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무용이미술관의 장치와 관습 안으로 들어와 무용 자신을 질문하고, 반대로 시각예술 작가들이 극장의 장치와 관습을 다루며 시간성의 매체를실험하는 교환이 증가했다.


그렇다면 국내 다원예술 지원 10년은 무엇을 남겼나?  정책의 가장  수혜자이자 결실은 페스티벌 이라   있다. 2008시작한 페스티벌  국제 다원예술 축제를 표방하며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들을 소개하거나 제작했다. 현재 예술지원은장르로 구조화되어 있다. 다원예술이 그러한 장르 구조에서 유일한 틈이었다. 다원예술 개념이나 다원예술이 지칭하는 분야는 아직 안정화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성급하게 개념을 규정하려고  필요는 없을  같다. 그런 점에서   안정적인 언어를 선택한다면 컨템포러리 아트 페스티벌, 현대예술축제가 정확할  같다. 국내에서는 현대성을 앞세우는 작업도 여전히 장르로 구획되어 있다. 하지만 이미 장르의 경계를 부수고 장르와 장르가 섞이면서 기존의 장르로 귀속되지 않는 작업이 활발하다.  페스티벌을 시작한 예술감독 김성희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페스티벌  지원 정책의 틈새에서 다원예술이라는 명칭을 가져 왔고,  개념 규정이 아직 모호하다는 , 그리고 현대예술이 이를 아우르는 이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명시되지 않은 다원예술이라는 지도를 축제의개별 작업을 통해 귀납적으로 그려나가는 역할을 했다. 





차이 궈창(Cai Guo-Qiang) <Borrowing Your Enemy's Arrows>

 1998 Wood boat, arrows, metal, rope, canvas sail, flag,

 and electric fan overall approx 152.4×720×230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Gift of Patricia 

Phelps de Cisneros in honor of Glenn D. Lowry, 1999 

 2015 Cai Guo Qiang  




다양한 장르들이 시도된 가운데 형식적으로는 비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공연과퍼포먼스가 가장 많았고 다원예술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각각 또는 장르  협업을 통해 퍼포먼스를 시도해보는 창구로 작동했다. 그런데 다원예술을 통해 지원받은 퍼포먼스, 공연, 영상 작업이 지난  년간 지속적으로 배출된 데에 비해  작업을 뒤따라가는 기록과 리뷰는 턱없이 부족했다. 여전히 보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미술 전문지나 공연 전문지들의 레이더에서 벗어난 작업은 페스티벌 대한 일시적인 관심을 제외하면 거의 주목받지 못한  일회적으로 사라져버렸다. 다원예술이라는 지원 아래 제작된 작품의 양적증가에 비해 이를 둘러싼 담론의 생산이나 제작된 작업에 대한 기록에 취약했고, 이것이  그래도 성격이 모호한 다원예술을 표면에 드러내는  실패한 하나의 원인이기도 했다. 개별적으로 제작된 작업이 부표처럼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는 동안 형식적, 내용상으로 기존의 장르와 크게 다를  없는 작업이 단순 협업이나 공연의 형태로 다원예술 아래에서 지원을 받고 제작되었다. 비슷비슷한 시도들이 반복되면서 관람의 피로감이 지속되면서 다원예술이 활력은 다소 침체되기도 했다.


그런데  다원예술이라는 용어가 최근 이삼  사이 새롭게 대두한 융복합 점점 밀려나고 있는  같다. 2014 아르코의 융복합예술창작지원 설명에 따르면 융복합 예술은 다원적 예술보다 넓은 범위의 예술과 비예술 영역(인문사회, 과학기술 ) 적극적인융합적 예술 창작활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예술 내부의 결합이 다원이라면, 예술 외부와의 결합이 융복합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특별히대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지원에 특별히 중점을 두어야  만큼  필요가 증가하고 해당 경향의 작업이 다수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90년대 이후 개인용 컴퓨터의 사용 확대로 인해 일상에서 경험하는 시각문화가 달라지면서 디지털을 매체로 하는 작업이다수 등장한 것이 기술과 예술 결합의 하나의 토대라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원예술이 장르의 보수성에 밀린 다원적 성격의 작업을보호하고 지지하기 위해서 생겨난 ,  여전히 예술 내부의 실험과 확장을 지원하는 태도를 안고 있다면 융복합은 산업과 자본이라는도그마가 예술의 상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우려의 요소를 안고 있다. 다원예술 지원을 시작하면서 문화예술위원회가 2007년부터 2년간 홍대 인근에 다원예술매개공간 만들어 운영했던 것처럼,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2 상암동에 문화창조융합센터를 열어 융복합 예술 지원에 나섰다. 융복합 문화 콘텐츠를 확산하고 산업 생태계 전반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조성했다 설명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은 정부의 국정운영 전략으로 강조하는 창조경제라는 용어 때문이다. 


창조경제 역시 창의성을 기반으로 산업의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결과적으로 문화와 산업을 융합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정책으로 예술 내부의 자생적 요구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같다. 융복합 중점 지원이 예술을 산업의 도구이자 자본 창출의매개로 생각하는  있어 우려는 없는가? 여기에 대해서도 여전히 확장을 하나의 긍정적인 가치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예술이 화학 실험처럼 결합하는 데로 3 물질을 창조 수는 없고,  이종교배의 실험이 행복한 결과만을 낳으리라   없다. 물론 정책적 요구가 거칠다 하더라도  틈새에서 생겨나는 유의미한 돌연변이들이 등장할  있겠지만, 이러한 사건을 지속해서 기대하기는 어려울것이다. 장르로서의 다원예술이나 다원예술가가 성립하기 어려운 것처럼, 융복합 예술이라는 장르나, 융복합 예술가가 등장하거나 융복합 예술사가 쓰일  있을까? 무엇보다 정책적 기조에 따라 생겨난  명칭이 짧으면 5, 길면 10 이내에  효용 가치가 간단히 평가되면서  어떤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대체될 지도 모를 일이다. 


장르와 매체의 결합은 완전히 새로운 물질의 탄생이 아니라 경계들이 흐려지는 영역에 대한 지시이다.  경계들의 결합의 결과보다는 경계들이 무너지는 것을 허용하는 태도의 지점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의 장벽으로 존재했던 장르와 매체의 힘을 무너뜨리는 일이 필요한지를 생각하는 사유에 의해서 시작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결합이라는 기능적인 부분이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인 것이고, 다원적 예술이 아닌 타자와 함께하는 다원적 태도의 문제이다. 이는 융복합에서도 마찬가지로, 만약 예술이 예술 이외의 것과 만나야 한다면이것은 결과물의 생산이 아니라  만남이 현재에 대해 어떤 질문을 발생시킬  있는지를 사유하고  필요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발생해야 한다. 생산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적 지원으로서의 융복합이 합의하고 있는 산업 친화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태도를 오히려 질문하는 . 그리고 이러한 세계의 흐름과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고 예술이 무엇을  것인가를 얘기하는 배틀 그라운드. 여기가 다원 또는 융복합이 위치한 장소가 아닐까?   


[각주]

1) Patrice Pavis 21세기 인문학에서의 수행성과 매체성」 최준호  『수행성과 매체성: 21세기 인문학의 쟁점』 푸른사상 2012

2), 3) 서현석 「실재, 혹은 매체의 확장: 미술과 공연예술의 경계에서」 『웹진 아르코』 203(2012)



글쓴이 김해주는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식과 주제의 퍼포먼스, 집단에서 도출되는 공동의 몸의 형태와 반응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며, <안무사회>(2015), <결정적 순간들> (2014), <Once is not enough>(2014), <Memorial Park>(2013)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아르칸젤로 사소리노(Arcangelo Sassolino)

 <Afasia 1> 2008 Photo: Didier Barroso 

Copyright the artist Courtesy Galleria Continua 

and Galerie Rolando Anselmi





Special feature 

3 지형과 하이브리드 아트의 조건

 구나연 미술평론가



바그너(Wagner) <미래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der Zukunft)>에서 종합예술작품(Gesamkustwerk)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1849년의 일이다. 예술의  장르를 종합해 최대 극적 효과를 이끌어내려는 미래상은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르 고유의 가치를 지향하던 모더니즘을 마지막으로, 장르 개개의 범주는 갈수록 희석되었다. 그것은 의도적인 장르의 파괴로 시작되었지만, 필연적인 장르의 무의미로 진화되었다.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식이 변하면 이에 대한 언급의 태도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본격적인 멀티미디어 시대에 들어서고,  특징들을 미술이 수용함에 따라 미디어 아트의 태생적 속성은 시각 예술의 고유성과 순수성을 고전적인 것으로 역사화 시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의 모습을,  오늘 하루 나의 감각이 인지한 정보의 양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삶에 침투한 기술의 일상화를쉽게 감지할  있다. 이렇게 촉각적 세계는 갈수록 단순화되고, 지각의 세계는 한없이 확장되는 가운데 동시대 미술 또한 3 지대로이행 중이다. 그것은 멀티미디어의 특성을 이용한 미디어 아트에서  걸음  나아간 형태로서의 융합이다.  고전적 예술 장르 간의협업, 예컨대 디아길레프(Diaghilev) 사티(Satie), 콕토(Cocteau), 피카소(Picasso) 함께한 발레 <Parade> 같은 고전적 협업이나, 영감의 가뭄을 장르 간의 협동 이벤트로 넘어서려는 가벼움과는 달리, 장르와 분야의 화학적 결합을 통해 완전한 지평의 이동과  보편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들을 살펴보는 것이 하이브리드 아트의 현재와 미래를 판단하는 주요한 기준이 된다.





박지희 <최단거리를 왕복하는 곡선> 2015 철판

 1,200×450×145mm / <미니 원룸 분동

2015  Φ130×110mm



인용과 참조를 넘어


하이브리드 아트의 가능성은 기술 매체를 적극적인 예술적 매체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과학과 미술의 결합이 (르네상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단순한 인용과 혼용으로 미술에서 구현된 예는 많다. 과학적 이미지 또는 이론들을 시각화시킨 일련의 시도들은 기계적 메커니즘의 원리를 작품 속에 적용하거나 과학의 객관성을 작품의 지적 도구로 활용하는 경우 같은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수열, 상상의 기계, 음산한 연구실과 같은 과학적 뉘앙스 작품 속에 혼종하는 크레올라이제이션(Creolization)으로   있으며, 경우 단일 매체와 장르성의 미덕은 그대로 유지된다. 


과학과 미술의 크레올라이제이션은 제도화된 미술의 중추적 인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는 무관심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술의 범주, 보편적 예술 인식 안에 공전하면서 현대 미술의 형식적 프로세스를 유지한다. 따라서 비전문가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기술적 오인과완성도의 저하를 가져오는 일도 있으며, 회화와 사진, 영상과 사운드의 결합을 하이브리드라는 용어로 안일하게 일컫는 일도 있다.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긴 영상과 사운드를 실시간으로 전송한다고 해서 결합 융합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이유는 없다. 매체 자체의 속성이 작품의 융합적 성격을 담보하지는 않으며, 사진과 영상, 사운드와 그래픽  이미 설치미술의 다양한 형식적 실험 속에 편입된 많은 매체를 어떻게 선택하고 결합하는가가 하이브리드 아트의 전제 조건도 아니다.


요컨대 기술 진보의 속도와 이와 결합한 미디어 아트의 후행적 속도 사이에는 평행한 질주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술을 통한 하이브리디제이션(hybridization) 미술이 지닌 형식적 프로세스 자체가 와해되는 특징을 갖는다. 하이브리드를 가능케 하는 기술적 데이터들이 결합하고 예술적 시각화 과정을 거치는 이러한 시스템은 스튜디오에서 (laboratory)으로의 이행을 가져온다. 예술의 기술적 영역이 확장되는 것과 같이 과학의 미학적 영역 또한 확장되어 동일한 크기의 교집합을 만들어내는 지점에 하이브리디제이션의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경우  분야의 전문가들이 의기투합하는 그룹의 형태가 나타난다. 신승백·김용훈은 공학과 미학의 협업으로 기술이 삶에 투영되고작용하는 방식에 대해 고찰한다. <클라우드 페이스>(2012) 얼굴 인식 알고리즘을 이용해 컴퓨터가 사람 얼굴과 닮은 구름 형태를 카메라로 찍은 작업이다. 구름을 얼굴 모양으로 인식하는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변상증) 시각적 패턴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현상이다. 신승백·김용훈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오인을 컴퓨터의 얼굴 인식 프로그래밍 결과 양상으로 변이시킨다. 기술적 시선의 변상증이라는 이들의 역설적 접근방식은 비인간화된 기술의 상황을 인간적인 상태로 이동시킴으로써 우리의 삶과 공생하는 기술의 단층을 보여준다. 




이준 <The Looper> Audio-visual instrument, 

projection mapping, turntable system, 

the Internet connection 3×1.6×0.5m <xLoop: Mutation, 

Grotesque and/or Creative?>, Alternative Space Loop, Seoul 





이들의 <아포시마틱 재킷(Aposematic Jacket)>(2014) 일종의 호신용 카메라로, 재킷 전체에 카메라 렌즈가 달려 시선이 닿지 않는360 사방의 상태를 모두 촬영하고 바로 전송할  있다.  재킷의 렌즈는 주변의 사람들로 하여금 촬영되고 있음을 나타내어 혹시모를 주변의 위험에 대비한다. 렌즈는 가스를 분사하거나 호신술을 쓰지 않아도 주변을 경계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오웰(George Orwell) 1984』로 상징되는 렌즈 이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카메라의 촬영 감시 이동되는 상태를 개인의 형태로환원한다. 특히 직접 입을  있는(wearable) 재킷은 외부 시선에 자신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시각 예술의 성질에서 주위의 상태를 자신의 시각 안으로 빨아들이는 패러독스를 지닌다. 신승백·김용훈의 작업은 공학과 미학 간의 토론과 협업뿐 아니라 기술과 인간이라는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를 담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기술 환경과 예술  소통의 상호작용으로   있다. 


윌리엄 버로우스(William Burroughs) 1964년에  그의 에세이 The Future of the Novel』에서 글쓰기의 미래는 회화나 음악, 영화가 그렇듯이 기술을 이용하게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결과로 존재하는 완성된 텍스트가 아닌 그것을 만드는 에너지 자체를 구현하는 일은 텍스트라는 기호에서 이탈된 것들을 회복하는 기술적 메커니즘을 필요로 한다. 뮤지션 류한길, 작가 김태용, 로위에가 결성한협업 프로젝트 그룹 A. Typist 텍스트와 사운드의 융합으로 이행하는 전혀 다른 영역을 제시한다. 그것은 텍스트와 소리라는 고정된 상징성을 상상계의 언어로 이동하는 신비롭고 우연한 과정이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텍스트를 직조하는 타자기의 울림을 드럼의 진동으로 연결해, 직관과 사고가 텍스트로 이동하는 찰나를 소리로 치환한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지각과 영감의 에너지는 텍스트와 행위의 근본적인 주체이면서도  자체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계를 배태한 텍스트를 해체하고 전혀 다른 소리의 영역으로 치환함으로써, 이들의 퍼포먼스는 장르의 융합이 제언하는 3 지형에 위치한다.


특히 A. Typist 작업이 주목되는 이유는, 하이브리드 아트에서 과정의 기술적 복잡성이 결국 형식의 진부함으로 회귀되는 위험성에 대한 대안적 측면을 갖기 때문이다. 난해한 공학적 실험들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익숙한 기존의 미술 언어로 구현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접한다. 기술과 장르 사이 융합은 과정만으로 특별해질 수는 없으며, 용해의 조건 또한 융합의 필연성을 담보로 해야 한다. 장르의 협업이 기술적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아방가르드적 변형(metamorphosis) 영역으로의 이동할 , 하이브리드 아트의 가능성은존재할  있다.





 매코막 <Bloom>  Jon McCormack




외곽선 지우기


그렇다면 특정한 장르와 형식들은 어떻게  또렷한 외곽선을 지우고 부드럽게 융합될  있을까? 2014 일본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Japan Media Arts Festival)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 마나베 다이토(眞鍋大度) <센싱 스트림-불가시, 불가청> (2014) 인간이 지각할  없는 전자파를 보고 들을  있는 경험적 차원으로 만든 작업이다. 공원에 설치된 안테나에서 전파를 실시간으로 수집해  데이터를 거대한 발광형 비전과 스피커로 재현한  작업은 계속해서 바뀌는 전자파에 따라 이미지와 사운드도 변화하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운동을 보이고 들리는 것으로 변형시키고 이를 인식하도록 한다. 일상을 변화시키는 기술 사이에서 투명히 존재하는 과학적 현상을 구체적 형태로 치환한 이들의 협업은 정신의 추상적 재현이라는 음악과 미술의전통적 기능을 기술로 진화시킬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기술적 요인들에 대한 미학적 경험을 통해 오늘을 환기하는 하이브리드아트의 방향을 보여준다. 


특히 다이토는 2006 리조마틱스(rhizomatiks) 설립해 무용 그룹 elevenplay 등과 함께 첨단 테크놀로지의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특정 장르에 묶일  없는 다종 분야에 프로그래밍 디렉터이자 디자이너, DJ 등으로 참여하는 그의 활동은 결코 하나로 고정될 없는 하이브리드 아트의 낙관적 태도를 갖는다. 이러한 태도는 일렉트로닉 문화 특유의 스펙터클과 자본의 문제를 지니게 되는데, 단순한 즐김의 엔터테인먼트나 광고 등의 산업적 영역과 하이브리드 아트의 근친적 절충을 드러내기도 한다.  점에서 ex-media 김현주의 작업은 하이브리드 아트의 철학적 가능성과 기술적 고찰의 통섭적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Pieces of Me Project>(2013) 디지털화된 현실 세계의 실존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기술이 제안한 세계 내에서 존재하는우리의 의식적 공황상태를 무용과 사운드를 결합한 퍼포먼스로 재현한다. 


작가노트에서 그는 나의 (유영하는 나의 자아) 작고 작은 비트가 되어 광활한 사이버네틱 공간에 흩뿌려지고, 다른 몸들과 뒤섞이고 연결된다. 그것이 나와 우리의 몸이다. () 우리는 이제집단감성체인가 () 그러나 나는  공허하다(http://ex-media.org/wordpress/pieces-of-me-project)라고 말한다. 텍스트와 이미지로 무의미하게 확장되고 촘촘히 교차하는 디지털 세계에서 무용가의 몸은 표류하는 인간의 현재처럼 불안히 움직인다.   가슴에서반짝거리는 심장은  시대의 생명이 지닌 고독한 현존에 다름 아니며, 어지럽게 혼재된 텍스트 사이에서 몰입을 고조시키는 사운드는지금 우리의 현재를 일컫는 성찰의 진공 상태가 된다.   


미술비평가 사와라기 노이는 그의 근저 『후미술론 (後美術論)』에서 음악과 미술의 결합을 미술이지만 미술이 아닌 , 음악이지만 음악이 아닌 ,  교차점에서 새로운 후미술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융합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요소의 특징을 버리고 전혀 다른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은 하이브리드 아트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하이브리드의 문화적 맥락을 배양 했던 포스트 모던적 조건은 첨단화된세계의 변화에 대한 가능성과 낙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변형함과 동시에 전위적이며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진화해야 한다. 또한 고전적인 예술에서 지향한 미적 체험의 기능과 기술적으로 가능한 공공적 기능을 결합한 형태가  3 지형을 빚어낼   가능성은 보편화   있다. 그러나 하이브리드 아트의 조건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기술의 발전과 예술의 변이 가운데 계속해서 갱신되어야 한다. 기술의 발전 속도만큼이나 예술의 속도 또한 어느 때보다 빠른 변화의 환경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 구나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한국과 일본의 동시대 시각문화를 중심으로 글을  왔으며, 사운드와 그래픽으로 구현하는 비쥬얼라이제이션(visualization) 관심을 가지고 현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매코막 <Fifty Sisters>  Jon McCorm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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