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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89, Feb 2014

공공미술 걸작선 기울어진 호, 그 이후 ②
미학과 공공성 그 사이에서

after, tilted arc
in the between aesthetics
and publicness

지난 호 기사에는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기울어진 호(Tilted Arc)' 철거를 둘러싼 사회적 언급과 그 이후 같은 장소에서 진행됐던 몇 가지 프로젝트가 소개됐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에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공공기관 대 예술가 싸움의 원조, '기울어진 호'는 표현의 자유와 저작권, 공공성 등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 기사는 '기울어진 호'에 얽힌 이야기 후속편으로, 그 작품이 남긴 공공성에 관한 논쟁점을 소개한다. 이 논쟁 안에서 제기되고 한편으로 간과되었던 공공성의 의미, 그리고 당시 미처 진지하게 생각되지 못했던 예술적 가치는 오늘날의 공공미술 현장에서도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 기획·글 안대웅 기자

1993년 런던 동부의 빅토리안 양식으로 지어진 집 내부에 콘크리트를 부어 통째로 캐스트한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House'는 흉물스럽고 음산하다는 지역민들의 불만에 의해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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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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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담론에서 <기울어진 호> 만큼 중요한 작품도 많지 않다. 미국의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공공미술의 가치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졌을 때 당시 공공미술의 근거는 정부가 추진하는 프로그램 속에서만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단순하게 고급 예술(high art)을 대중에게 향수할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 이상을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더니스트의 엘리트주의적 미학을 대중에게 강요하는 꼴에 불과했으며, 대중이 공감하지 못하는 결과가 도출된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정부의 막대한 기금이 공공미술 씬으로 쏠리고 있었던 것은 누가 봐도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기울어진 호>를 통해 곪았던 문제가 한 번 터져 나오자 미술계 안에서도 공공미술에 대한 가치를 진지하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논의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행정 관료의 조각에 대한 비미술적 판단과 (자율성을 주장하며 법정 투쟁을 불사한) 조각가의 모더니스트적(으로 보이는) 어떤 태도였다. 

1985년 총무청은 <기울어진 호>의 존치에 관한 공청회를 주관했고 행정 당국은 여기서 조각의 철거를 결정했다. 이때 이들이 판단의 준거로 삼은 것은 누가 봐도 반모더니스트 미학, 나아가 비예술적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다소 모호하게 정의된 모습의) 공공성이었다. 공청회의 결론을 보면 이렇다. 첫째, 작품이 시민의 광장 사용을 어렵게 한다. 둘째, 우범 지역을 형성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한다. 이 두 가지 철거 사유는 예술적 가치 판단을 전면 배제한 채 연방 빌딩을 이용하는 10,000여명의 공무원(시민)들의 승인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이런 판단 기준은 이후 표현의 자유를 문제 삼아 벌어진 세라와 총무청의 법정 다툼에서도 다시금 확인된다. 이때 법원은, 표현의 자유가 작가 개인이 스스로의 표현을 결정하는 것을 말하며 총무청의 조각의 이전 결정이 작품 내용에 관한 판단이 아니라 시민이 겪는 불편에 대한 판단이라고 판결을 내리며 총무청의 입장을 지지했던 것이다. 



파리 로열 궁전(Palais-Royal)에 있는 

다니엘 뷔렌(Daniel Buren)의 <두 개의 무대>는 

1986년 미테랑 대통령 당시 문화부장관 자크 랑의 

특별주문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철거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2년여의 오랜 공방 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미국의 보수주의적 미술 평론가 힐튼 크레이머(1928-2012)는 이 문제를 ‘품위(decency)’라는 조금 더 세련된 용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1989년 7월 『뉴욕타임즈』에 「예술이 품위의 법률들 위에 있는가?(Is Art Above the Laws of Decency?)」라는 글을 기고하며, 정부가 지원하는 예술에는 공공의 품위(public decency)와 정중함(civility) 같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울어진 호>는 공동체에 이바지하기 위해 의뢰되었으나 예의(amenity)를 완전히 상실함으로써 공동체에 매우 불쾌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실제로 장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던 이 조각 작품은 고용되어 있기 때문에 매일 작품을 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정신적 웰빙과 물리적 편의를 오만하게 무시하였다.” 크레이머를 비롯한 이런 일련의 보수파들은 즐거움, 공적인 사용, 품위, 대중, 공동체 같은 용어를 마치 민주적이고 보편적이며 대중을 적절하게 재현하는 것처럼 사용했으며 나아가 공공의 품위에 관한 입법안까지 제출하는 등 이런저런 방법으로 ‘상스러운 표현물’을 규제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철거파들이 주장했던 공공성은 증명될 수 없는 일종의 ‘일반 상식’에 기반한 것들이었으며 따지고 보면 심지어 이중의 잣대마저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문제는 기존의 문화적 ‘규범’이었던 엘리트주의적 모더니즘 미학을 별다르게 문제 삼지 않은 채, 대중 사회적 공감과 같은 민주적 가치가 공공미술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에 있었다. 이로부터 검증된 최고의 예술가의 작업을 두고 대중들이 공감을 하지 못한 것이 대중들이 예술에 무지한 것이거나 예술이 잘못된 것이라는, 바꿔 말해 공공미술에 있어서만은 대중이 쉽게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 그저 그런 예술을 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공공미술의 (미학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윤리적 판단 기준으로 크레이머가 제시한 공공적 품위가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모더니즘 미학 자체에 대해서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서 그가 전제한 성숙한 시민 사회는 결국 품위있고 고상한 문화를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상류 계급을 일반화 해서 말한 것이 되어 버린다. (품위에 관한 일례로 1996년 미국에서 미성년자에게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게시물을 검열할 수 있는 ‘통신 품위법'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으나, 범위가 넓고 모호하며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1997년 대법원에서 위헌 판정을 받았다.) 한편 그 당시 공공미술의 설치가 지역 재개발과 부촌화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크레이머가 언급한 “공동체에 이바지하기”가 의미하는 바가, 적어도 보편성의 의미로 쓰였던 것은 아니었다고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기울어진 호>의 비판자들은 다소 모호하지만 보편적이고 민주적으로 보이는 용어로 마치 미학적 권위주의(혹은 엘리티즘)를 비판하는 듯 보였지만 그 속에 또 다른 권위주의적 태도를 감추고 있었다.



덴버 공항 이구에 있는 루이스 지메네즈의 야생마 동상 

<The Mustang>은 32피트 크기에 붉은 눈과 푸른빛을 
띤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두고
일부 주민들이 흉물스럽다고 철거 캠페인을 벌였다.



이쯤 되면 공공 혹은 공공성이라는 용어 자체의 사용성은 시쳇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보인다. 이때 제기된 공공성에 관한 개념들은 어떠한 공공적 가치도 제대로 표현해주고 있지 못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라로 다시 돌아가보자. 혹시 왜곡된 공공성이라는 말 속에서 세라의 미학적 의도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거나 폄하된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기울어진 호>가 과연 어떠한 보편적 공공의 가치에도 기여를 하지 못했던 것일까 따위의 질문을 할 수 있다. 미술사학자 권미원은 그의 저서 『장소 특정적 미술』(2012, 현실문화)에서 공공미술 속 장소 특정성의 계보를 정리하면서, 세라의 <기울어진 호>가 장소 특정성 개념이 무효화된 어느 시점에서 장소 특정성 개념 자체를 비평적으로 재조명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권미원의 정리에 따르면, 애초에 장소 특정성 개념은 모더니즘 미술과 제도를 비판하기 위해 미술 밖 장소를 모색하면서 거론되었는데, 모더니즘 공공 조각이 대중들의 공감을 사지 못하고 비판의 대상이 되자 그 문제 해결의 방법론으로써 공공미술 담론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때 제기된 장소 특정성의 개념은 관객이 미술 작품 안으로 진입(entry)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바꿔 말해 미술이 관객을 안으로 초대해야 한다는 사고에 기초해있었으며 자연스럽게 미술이 기존의 장소와 어색하지 않게 어울려야만 한다는 사고로 도출됐다. 그 결과 공공미술 안에서 장소 특정성은 건축 혹은 환경 디자인과 같은 통합주의적 접근 방법으로 이해되었고 건축, 디자인, 공공미술가가 협업한 대규모 도시재개발 프로젝트가 정부 차원에서 장려되었다. 공공미술은 이제 미학적 가치보다는 사용가치를 통해 우선적으로 판단되었고 심지어 “‘미술’로서 구별되는 특징을 포기하면 할 수록, 더 진보적인 미술 행위로 환영받게 되었다.” (<기울어진 호> 철거 이후 진행된 장소 통합주의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대해선 지난 달 기사를 참조, 대규모 도시재개발 프로젝트는 「퍼블릭아트」 2013년 6월호 배터리파크 시티 프로젝트 기사를 참조하라.)


권미원의 관점에 따르면, 세라의 <기울어진 호>에서 나타난 장소특정적 미학은 이런 “장소 특정성에 대한 당시의 지배적인 정의 - 사회적 조화와 통합 모델로 상상된 통일되고 유용한 도시디자인이라는 - 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세라는 “그 자체의 매체에 고유한 언어에 대해서만 비판적으로 기능하는 모더니스트 미술과는 달리, 장소 특정적 미술은 두 개의 분리된 언어 사이의 비교를 강조하면서 한 매체의 언어를 사용해서 다른 매체의 언어를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권미원이 보기에 이때, 조각에 대응하는 다른 매체는 건축이다. 그리고 여기서 건축은 “세라가 폭로하고 전복시키고자 하는 ‘미심쩍은 이데올로기와 정치권력’의 물리적 구현체로서 역할을 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기울어진 호>는 순화되고 매끄럽게 통합되어 보이는 공공공간이 은폐하고 있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조건을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장소에 순응해서 통합적 효과를 낸다기보다는 ‘개입’해서 ‘논쟁’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시민들에게 쾌적함과 사용성을 주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다른 방식의 공공성을 추구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



비토 아콘치의 <웜홀>(2010)은 비토 아콘치가 2003년 
오스트리아 무어 강에 설치한 세계적인 예술작품 
<문화의 다리>의 축소판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시가 설치 과정에서 임의로 설계를 
변경해 비토 아콘치의 반발을 샀다.



하지만 권미원은 다시 세라의 이런 장소특정성의 비평적 원리가 무조건 대립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하며 미학적 고찰로 나아간다. 이 원리는 조각이란 범주를 하나의 고정된 정체라기 보다 “영원히 제안되고, 시험되고, 수정된 후 다시 제안되는 것"으로 만드는데, 권미원은 이 과정 자체가 조각의 내적 필연성에 부응하는 것이며 조각을 조각 안에 남게 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세라의 장소특정성은 “오로지 한 장소의 개별적인 물리적, 사회적, 정치적 속성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미술-특정적(art-specific)’ 탐구 혹은 비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기울어진 호>에서 비롯된 공공성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기울어진 호>는 비록 대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공공장소의 정치, 사회적 조건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서 공공이라는 담론적 장소를 비평했다. 이는 확신에 차 공공이란 어떤 것임을 주장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제안하고 시험되고 다시 제안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물론 세라 스스로는 조각의 부동성을 심각하게 주장했다지만, 어쨌거나 연방광장은 조각의 철거 이후에도 문제적 장소가 되었고 이후의 모든 프로젝트가 그 담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기울어진 호>는 사라졌지만 지금도 계속 담론적 장소 안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한편, <기울어진 호>는 예술 일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미학적 고찰을 놓치지 않고 있는데, 예술과 미학이 어떤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믿음을 가지는 이상, 그리고 그 가치가 철저히 정치적, 사회적 조건을 간과하지 않는 이상 이 조각이 공공적이지 않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여기에 대해 우리가 아직까지 합의를 하는데 주저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것이 합의가 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인지 여기서 답을 내리기 힘들 뿐이다. 



1997년 포스코가 프랭크 스텔라에게 약 21억원의 

제작비를 주고 주문제작한 <아마벨>. 

강남 포스코 본사 사옥 앞에 놓였으나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국립현대미술관 기증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작가의 반발과 반대 여론에 밀려 원래 있던 곳에 서게 됐다.



<기울어진 호>라는 담론적 장소가 시사 하는 미학적, 공공적 가치는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논쟁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공공미술을 성급히 장르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끊임없이 미술과 미술의 공공성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해보는 방법이다. ‘공공미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항상 이미 전제된 공공과 미술을 다시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공공과 미술 둘 다 쉽사리 결론을 낼 수 없는 엄청난 주제임을 상기해볼 때 공공미술이라는 부정교합은 어쩌면 절대로 먼저 말해질 수 없을 것이다. <기울어진 호>는 그런 점에서 조각적 고찰을 통해 공공의 영역으로, 다시 조각의 영역으로 나아간 아주 문제적인 작품임에 분명하다. 덧붙여 이 작품이 1980년대에 논란이 된 것에 비해, 어느 나라 못지않게 공공미술에 대한 지원에 열성적인 한국에서 <기울어진 호> 만큼 미술과 공공미술과 제도에 대해 논쟁적인 질문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이것이 행정, 예술가, 비평계 모두가 반성해야 할 지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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