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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0, Mar 2014

공공미술 평론을 위한 서문

overture for
public art criticism

「퍼블릭아트」는 공공미술 평론 연재를 시작한다. 공공미술 담론이 그간 풍성하지 못했던 것은 평론이 충분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공공미술 평론에 대한 목마름이 해소되길 바라며 이 기획을 시작한다. 용단은 내렸지만, 사실 공공미술이라는 어떠한 올바름을 전제로 한 이 미술의 방향성부터 무언가를 제시하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다. 그런 까닭에 이번 호에서는 본격적인 연재에 앞서 기획 의도와 그 실행에서 생긴 고민과 난점을 먼저 소개한다. 더러 시원스레 답을 내지 못하고 질문만 무성할 수 있겠으나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깊을 것이다. 좌충우돌하며 차차 구체화되는 이 기획의 전말에 공모하시기 바란다.
● 기획·글 안대웅 기자

손몽주 '새장의 새' 2011 마을미술프로젝트 ‘행복마을프로젝트-신몽유도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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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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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평론 연재라! 평론 활동이 대개 미술잡지와 전시도록의 삽문, 드물게 단행본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한국의 미술 잡지를 통틀어 공공미술을 다루는 정기간행물이 (본지를 제외하고) 전무하다시피하고, 공공미술 전시도록에 전문 평론도 실리지 않으며, 공공미술 평론집 또한 목격되지 않는 것은, 평론의 부재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공공미술이 한국에서 각광받고 급증하기 시작한 참여정부 시절 이후, 그 기대와 우려가 한 풀 꺾인 이 시점, 공공미술은 무엇을 남겼을까.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자본이 많이 투여됐으며 작품은 많이 생산됐고, 비판의 목소리는 높았다. 분명 본지도 그 비판의 목소리 중 많은 부분을 보탰을 터, 미술전문지와 논문, 신문 기사에서 그 비판을 거칠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자넷 에클먼(Janet Echelman) 

<Her Secret is Patience> 2009 Phoenix Civic 
Space Park, Phoenix, Arizona, United States



하나, 올바르지 않은 공공미술을 향한 비판이다. 대표적으로 “소통과 교감의 공공미술”(퍼블릭아트 2007년 6월호 기사 참고)이라는 공동체 통합주의적 접근이 이러한 비판적 경향을 띈다. 지역 주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모든 미술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데, 다소 모호하지만 여기서 공공성은 공공선과 같은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는 듯하다. 둘, 공동체 통합주의적 공공미술과 복지 차원에서 공공미술을 접근하는 행정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정부 에이전시 미술’를 향한 비판이다. 다소 첫번째 비판과 연계되어 있는 이 비판의 핵심은 정치 공학적 예술 지원에 작가가 부응해 싼 값에 정부 하청업을 해준다는 것. 여기서 타겟은 무책임한 작업을 하는 작가다. 진짜 작업 따로, 공공미술 따로인 작가. 셋, 오늘날의 공공미술 자체를 향한 비판이다. 앞서 언급한 ‘에이전시 미술’과 연계해 이 입장은 한국에서 나타난 공공미술을 신자유주의적 문화전략의 하나로서 이해한다. (김장언의 논문 「상징과 소통 - 지금 한국에서 공공미술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2010)를 참고. 여기서 김장언은 공공미술이 정치공학적인 측면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입장을 견지하는 혹자는 미술의 사회·정치 비판성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며 공공미술이란 용어 대신 사회적 미술을 제안하기도 한다.



최정화 <돌꽃> APAP2010 

폴리에스테르 플라스틱 철




종합하면 공공미술에 대한 비판은 정부 주도 하에 벌어지는 복지성 공공미술/디자인 정책과 연계한 공공미술에 대한 비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적시할 점은 이런 비판이 놀랍게도 항상 천편일률적으로 동어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공공미술 개별 작품에 대한 밀도있는 평론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공공미술 평론이 부재하는 것엔 이유가 없지 않다. 예를 들어 평론가를 섭외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공공미술의 경우 ‘누가 잘 쓸까’보다 더욱 시급한 기술적인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개별 공공미술 작품을 실제로 평론가가 본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화이트큐브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공공미술의 특성상 전국 단위에서 벌어지게 되는 데다가 관계를 다루는 작업의 경우 실제로 프로젝트 진행과정을 평론가가 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어떤 평론가이냐’ 이전에 ‘현장성을 반영하는 기록물이 제대로 있는가’에 근본적으로 초점이 맞춰질 수 밖에 없다. 



Pierre Vivant <Traffic Light Tree> 1998 

Westferry Roundabout, Canary Wharf, 
Tower Hamets, E14



최근 단행본(자료집)으로 나온 흥미로운 공공미술 작업이자 아카이브인 『공공미술 술래』의 편저자 이경복은 프로젝트 기록 자료집에 근거한 평론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많은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기록물들이 때론 작가의 주관적 측면이 강해 보인다는 점과 사진과 글의 속성상 과정이나 결과가 과장되거나 성과의 정도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기록과 현장은 다소 또는 상당한 온도 차이를 보일 수 있어, 평론에 있어 기록은 보조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으며 현장에 대한 정교하고 성실한 추적이 필요하다고 한다. 특히 오늘날의 공공미술은 결과에 근거한 현재의 비평방법론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유무형의 과정을 중시하는 형식을 갖고 있어 공공미술 비평을 위해서는 기록방식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병행돼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은 평론가가 프로젝트에 동행하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수잔 레이시(Suzanne Lacy)는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에서 큐레이터와 평론가가 작가와 협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평가들과 큐레이터들은 미술가들과 공동작업을 하며, 비평가들이 큐레이팅하며, 미술가들은 그들이 주관하는 더 큰 작업의 부분인 다른 사람의 미술작업을 큐레이트한다.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은 가치, 윤리, 사회적 책임을 미술의 견지에서 논의할 수 있는 통합적인 비평 언어를 필요로 한다.”(수잔 레이시,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지형그리기』 참고) 레이시의 주장은 평론가 문제에 실질적인 해법을 제시하지만 여기서도 하나의 난점이 생긴다. 그에 따르면 작가와 기획자와 비평가는 거의 같거나 동일 인물이며, 실제로 한국의 커뮤니티아트 현장의 기획자는 동시에 작가다. 하지만 대부분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지원금으로 운영되며 성과에 따라 그 다음 해를 기약하게 되는데, 스스로의 프로젝트에 거리를 두기는 정말 힘든 일일 테다. 그렇다면 공공미술 평론은 누가 하나요?



 2010 마을미술프로젝트. 

철원의 폐다리를 활용한 조형물  



공공미술 평론은 어렵다. 그러나 명백히 필요하다. 더 이상 환원시킬 수 없는 차원에서 우리는 공공을 “함께 있음을 공식화 하는 것(이섭)”으로 (무)의식 중에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에 따르면 우리는 ‘함께'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하며 이것은 인간 존재론적인 질문일 것이다. 인간의 조건이 공공인 이상 공공의 가치는 필요하다. 공공미술이 그 가치를 추구하며 지금도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공적 자금이 여기에 투여되는 한 공공미술에 평론은 필요하다. 공공미술 평론의 지형을 그리기 위한 고민은 계속 될 것이며 전문가들의 조언을 끊임없이 구할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지닌 독자께서는 기자에게 꼭 의견을 주길 부탁드린다. 

이메일 daewoong.ahn@gmail.com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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