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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4, Jul 2014

2014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

Taehwa River
Eco Art Festival 2014

6월, 울산에서 ‘2014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가 열렸다. 경상일보사를 주축으로 시작된 축제는 올해로 벌써 8회째 접어들며 어엿한 현대미술제로 발전했다. 태화강 둔치에 두런두런 서 있는 ‘그 무엇’은 사실, 들으면 바로 알만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이다. GDP가 국내 최고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시설이 다소 부족한 도시인 울산임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태화강이 과거 수질오염의 대명사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미술제의 존재는 한층 더 달라 보인다. 올 행사의 주제는 ‘다리, 연결된 미래(Bridge to the Future)’. 이제는 용도 폐기된 도로인 울산교를 문화적으로 해석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2014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로 인해 공업도시 울산의 젖줄, 태화강의 달라진 면모를 소개한다.
● 기획·진행 안대웅 기자 ● 사진 서지연

모리스 프리만(Maurice Frydman) 'Clump of Light Columns' 2014 PVC 튜브, 플라스틱 필름, 혼합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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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웅 기자, 김병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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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Art Ⅰ
도시의 꿈_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
● 안대웅 기자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Taehwa River Eco Art Festival; 이하 TEAF)는 울산시에서 시행하는 거의 유일한 대규모 현대미술제다. 미술 관련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광역시 중 유일하게 시립미술관이 없다) 울산이기에, 현대미술을 사랑하는 시민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행사다. 특히 올해 행사는, ‘다리, 연결된 미래’라는 주제가 대변하듯, 울산의 지역적 특수성을 담아내고 비전을 제시하는 쪽으로 중지가 모아졌다. 지금은 용도 폐기돼 보행용으로만 사용되는 ‘울산교’에 주목한 것도 이런 주제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교각을 중심으로 태화강 둔치에 설치된 다양한 현대미술작품이 자연과 한껏 어우러졌다. 일련의 난해한 현대미술은 일상의 풍광으로서 삶 속으로 자연스레 녹아든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TEAF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인가? 아니다. TEAF의 ‘진가’는 작품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경험하는 차원을 넘어 선다. 이 중요성을 읽어내기 위해서 앞으로 몇 가지 우회를 시도해 볼 것이다. 그것은 TEAF와 긴밀히 연관을 맺고 있다고 생각되는 울산의 요소를 몇 가지 살펴보는 일이다.



정현 <무제> 2013 청동  




# 장면 1: 태화강

TEAF는 그 타이틀이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태화강’을 의제로 삼고 있다. 울산시 정중앙을 관통해 동해로 흐르는 태화강은 2006년 기준 423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강이다. 국화꽃을 비롯해, 십리대밭, 목화밭, 억새와 갈대, 강변의 징검다리, 그곳을 찾는 백로와 까마귀가 함께 어우러져 낭만을 이룬다. 십리대 발길을 따라 걷다보면 ‘에코폴리스 울산 선언’이라는 비석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화강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1962년에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된 이래로, 울산은 대한민국 최대의 중공업도시로 성장하였다. 남구 지역에는 울산석유화학공단이, 울주군 지역에는 온산석유화학공단이 위치하며 북구에는 자동차산업단지가, 동구 지역에는 조선소 등이 위치하고 있다. 이 모든 공단은 태화강을 공업용수원으로 사용해 현재 울산의 부를 일궈냈다. ‘한강의 기적’을 따라서 ‘태화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써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태화강의 기적은 부작용도 낳았다. 예컨대 공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상류에 건설한 댐 때문에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이 영향을 받았고 일부 마을이 수몰되었다. 또 공해가 심각해져, 비가 온 뒤에는 과거엔 공업단지가 아닌 곳에서도 악취가 났으며, 중금속 오염으로 발생하는 온산병이 발생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 태화강의 수질은 대한민국의 하천 중에서 최하위권으로 떨어졌고 폐사한 등굽은 물고기가 속출했다. “문명의 앞에는 숲이 있고 뒤에는 사막이 있다”는 프랑스 사상가 샤토브리앙의 말처럼 울산의 근대화는 많은 것을 잃은 다음 얻은 것이었다. (태화강이 점차 제 모습을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 울산시가 하수관리시설을 집중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요즘엔 잉어가 산다고 하는 태화강의 어두운 과거를 굳이 꺼낸 이유는, 울산에서 태화강이 가진 역사적·지정학적 특이성과 중요성 때문이다.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든 현대 도시는 가볍고 세련되길 원한다. 경제적인 것을 넘어 문화적인 것을 원한다. 여전히 중공업도시 이미지가 강한 울산은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새로운 도시 브랜드 마케팅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했다. 울산광역시가 ‘선언’의 형태로 추진하고 있는 ‘에코폴리스’ 조성은 바로 그런 흐름에 부합한다.



김구림 <현상에서 흔적으로> 2014 철, 빨간 천  




# 장면 2: 울산교

올해 TEAF 행사가 자리잡고 있는 울산교는 1930년대 중반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의 관리 하에 준공된 태화강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교량이다. 1929년에 개장된 강남쪽 삼산비행장과 기차역이 있는 울산시가지를 차량으로 연결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그 뒤 울산의 남북을 잇는 주요한 도시기반시설로 오랜 기간 활용되어 오다가, 시설 노후로 90년대 중반 차량 통행이 금지된 이후, 보행자 전용 교량으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울산교는 직접적으로 중구의 중앙동과 남구의 신정동을 잇고 있다. 중구는 구도심, 남구는 신도심으로 나뉘는데, 울산은 이렇듯 태화강을 중심으로 양분화되어 있는 것이다. 중구 중앙동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재래시장과 상가가 밀집해 있어 명실상부 울산의 중심 시가지였으나, 남구의 상권이 개발되며 기능을 잃었다. 한편 강 남쪽을 돌아보면, 상황은 역전된다. 

전통적으로 부촌인 신정동은 둘째치더라도, 상업시설, 교육시설, 행정시설 등이 웬만하면 강남 쪽에 몰려 있다. 지대는 천정부지 올라가고 투기의 장이 된지 오래다. 울산 남구의 땅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그들만의 부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울산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고 있는 사회경제적인 격차는 국제금융위기를 거치며 더욱 심원해지고 있다. 근본적인 차원의 심리적 거리감은 더욱 벌어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울산의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핑크빛 전망을 의미했던 울산교는 오늘날 이런 거리감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김병호 <Monumental Grid> 

2014 황동에 불소투명코팅, 철



#장면 3: 문화적 인프라

울산은 광역시 중 가장 문화기반시설을 취약하게 보유하고 있다. 울산을 이야기 할 때 ‘문화 불모지’라는 타이틀이 항상 따라 나오는 이유다. 문체부가 밝힌 ‘2013년 전국 문화기반시설 총람’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 당 문화기반 시설이 가장 적은 곳이 울산(3.1개)으로 분석됐다. 이 자료에 따르면 서울이 공공도서관 116개, 박물관 110개, 미술관 32개, 문예회관 16개를, 가까운 부산이 공공도서관 31개, 박물관 16개, 미술관 5개, 문예회관을 10개 보유하고 있다면, 울산은 공공도서관 12개, 박물관 8개, 미술관 0개, 문예회관 4개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시립미술관은 차치하고서라도 등록미술관을 하나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광역시는 현재 울산 밖에 없다. 

이 때문에 항상 현대미술에 대한 문화적 갈증을 느끼는 울산시민은 대구미술관이나 부산시립미술관 등 다른 도시로 향해야만 했다. 국내 제1의 부자도시 울산의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몇 해 전부터 울산시는 문화기반시설을 확충하기에 나섰다. 2016년 개관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는 울산시립미술관이 대표적인 예다. 중구 중앙동의 폐교된 한 초등학교 부지를 사용해 구도심 중구를 문화 지역구로 활성화시킬 심산이다. 이미 중앙동에는 ‘문화의 거리’ 조성으로 얼마간의 활기를 되찾았다. 중구청은 문화의 거리에 입점하는 업종 중 화랑, 골동품점, 공연장 등에 점포 외부 개·보수비, 간판 설치·교체비, 임차료, 전시 및 공연 행사비의 60〜80%를 지원하며 중점적으로 육성했다. 그 결과 현재 다수의 갤러리가 입점하고, 문화거리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패트리샤 레이튼(Patricia Leighton)과 델 가이스트(Del Geist)

<A Balance & Equilibrium: Stone & Tree for Ulsan, South Korea> 
2014 철, 나무, 돌  



소특정적 TEAF

앞서 살펴 본 몇 가지 장면을 이해한다면 이제 TEAF를 말할 수 있다. TEAF는 단순한 지역문화행사가 아니다. 지역공동체의 복잡하고 첨예한 욕구와 요구,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갈등을 바탕으로 필연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생태와 공해, 부와 빈, 문화와 경제라는 반대항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근대화를 심하게 겪은 도시일수록 이런 양면성이 도시의 심급에 자리 잡기 마련이다. 울산은 당분간 해결될 수 없는(되어야만 하는) 이 문제를 안고 가야만 한다. TEAF 2014는 공교롭게도 이런 문제의 한 복판에서 공동체의 갈 길을 묻고 있었다.

태화강으로 돌아가 보자. 아무리 오늘날 개선이 이뤄졌다 하더라도 태화강의 기적은 여전히 근대화의 훈장인 동시에 트라우마로 울산 시민에게 심리적으로 각인되어있다. 양 쪽 다 쉽게 지워질 수 없는 그런 것일 것이다. 태화강은 여기서 생태미술제로서의 TEAF를 만난다. 물론 이것은 공업도시라는 울산의 정체성이 역전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에코폴리스’로 표상되는 울산의 새로운 얼굴이 TEAF의 한 축을 이룬다. 그 이면에 감추고 싶은 ‘공업도시 울산’의 오랜 얼굴이 TEAF의 다른 한 축을 이룬다. 그러니까 TEAF는 근대도시를 극복하고자 하는 도시적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라는 개념이 해체되고 (국제)도시가 부상하고 있는 오늘날, 도시마케팅은 도시의 부와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공업’을 ‘생태’로 전환하고 그 가치를 ‘국제사회’로 발신하고자 하는 TEAF는 그런 점에서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강용면 <Taking a Lesson from the Past-Gate>

2007 아크릴, LED, 황동  



한편 거리감의 상징이 되어 버린 근대화의 폐허, 울산교를 주전시장으로 삼은 의도는 남쪽과 북쪽의 심리적 거리감을 극복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울산교의 문화적으로 사용하는 방안은 그동안 여러 차례 논의가 된 바 있다. 그 중 하나가 201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울산시립미술관을 울산교에 건립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다리 위의 미술관, ‘브릿지 미술관’을 만들어 세계의 랜드마크를 만들자는 셈이다. 2012년에 울산미협을 통해 제기된 이 주장은 해프닝처럼 현재 이렇다 할 논의가 되고 있지는 않지만, 한 가지 어떤 시사점을 준다. 그것은 울산교가 울산 시민에게 활용되어야만 하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리는 무엇을 연결시킨다. 그렇다고 해도 용도 폐기된 다리에 단순한 물리적 이동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는 연결되어야 한다. 바로 심리적 거리감의 연결이다.

울산교 주변에 설치된 다양한 현대미술·디자인 작품은 심드렁한 관객에는 좋게 봐줘도 장식, 나쁘게 보면 통행을 방해하는 설치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일 기간 중구 중앙동 문화의 거리에서 ‘아트페스타2014’가 열리며 문화 인구를 끌어 모으고 있었다면, 지금도 계속해서 그곳에 갤러리가 들어서고 있다면 상황은 조금 다르다. 그리고 거리의 끝에 장차 울산시립미술관이 건립될 부지가 있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시립미술관을 시작점으로 앞으로 쭉 뻗은 길을 따라 다리까지 걸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니까 TEAF 2014는, 어쩌면 문화의 거리가 끝나는 지점인 시립미술관으로부터 남구로 연결되는 가상의 문화 길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연결의 ‘지향’은 거꾸로 과거와 미래, 지역과 지역, 경제와 문화가 차이를 가지고 공존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불협화음의 에너지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모두의 것이 된다. TEAF의 주제 ‘다리, 연결된 미래’는 바로 그런 의미로 해석된다. 물론 아직까지 문화의식도, 인프라도 부족하다. 하지만 상상력이야말로 문화와 예술이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일 것이다. 이번 TEAF는 지역 도시 속 공공미술 축제의 다층적 의미를 드러낸 행사였다. 다음 해 TEAF를 기대하면서 글을 마친다.  



윤석남(Yun Suk-nam)

<1,205 With or Without Person> 
2008 나무에 아크릴 설치



Public Art Ⅱ 
설치미술이 공공미술이 되었을 때
: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에 부쳐
● 김병수 미술평론가


도시에서 기반 시설은 그 곳의 성격을 규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정치적인 것, 행정적인 것, 그리고 미학적인 것이 함께 어우러지게 마련이다. 정치와 행정은 하나같지만 그렇지 않다. 정치인과 관료의 관계를 관찰하면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상부상조하는 의존적 형태를 유지한다. 문제는 미학적인 것이다. 전문가로서 누구를 상정해야할까? 미학자, 미술가, 건축가. 이들은 도시의 삶에 대하여 정치적인 그리고 행정적인 판단을 미적 판단과 어떻게 연계시킬 수 있을까. 과연 자신들의 의지를 공동체에 투영하거나 혹은 정치적인 생산으로 전유(專有)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은 도시에서 가변적 설치를 행할 때에도 유사하게 발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변성이야말로 도시의 성격을 더욱 잘 드러내고 숨겨진 시민의 욕망을 자극/충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정한 장소의 성격에 맞춰서 연출되는 작업을 일반적으로 설치미술이란 이름으로 칭한다. 여기서 그 연극성을 간파할 수 있다. 문학적 대본과 실제적 상황의 접속이야말로 연극의 묘미이다.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매력이다. 여기가 시각성의 한계를 드러냈던 현대미술이 다시 찾은 장면이리라. 물론 미니멀리즘이 상실한 대상성을 복원시킨다는 의미와는 다른 맥락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설치미술은 서사를 잊은 도시에게 새로운 사회라는 이미지를 선사할 수도 있다. 동시에 미술이 그 자신을 넘어서는 영역을 보여주는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시각예술로서 미술이 취해온 태도들에 대하여 엄청난 비판이 있어왔다. 창작과 감상이라는 이원론적 수직 구조는 다양한 은유의 장치를 통해서 인간을 강제해왔다. 그러한 ‘예술-신학’은 세속화 속에서 현대미술과 긴장과 거래를 지속하다가 기어코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인간이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인 이상 그 영향력이 완전히 소멸될 수는 없다. 종교적 염원과도 같은 순수에 대한 의지로서 미술이 한 때 취했던 바를 스스로 되돌아보는 지점으로서, 다시 말해서 성찰로서 설치미술을 생각해볼 때 미술 이후(post-art)와 도시의 만남을 설정해볼 수 있게 된다. 

2014년 6월 12일 울산의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 2014>를 참관했다. 같은 도시의 반구대 암각화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함께 우리 미술의 기원처럼 마음에 새겨지고 있다. ‘한국에서 현대미술을 (재)구성하기’를 고민할 때 다녀왔었다. 또 울주 천전리 각석은 미술의 흐름까지도 보여주어 감동적인 경지를 더욱 상승시키기까지 한다. 울산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행사는 ‘다리, 연결된 미래’라는 테마를 설정하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이 은유는 신화시대부터 이어진 것으로 그 뿌리가 깊다. 신화는 가장 오래된 철학이다. ‘하늘과 순수와 상상’이 모두 담겨 있다. 종교적이며 미학적이고 이 모든 것은 공동체와 함께 하는 염원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도시 시학’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시학은 짓기에 대한 성찰이다. 단순히 문학 장르로서 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지어내는 것을 이름 한다. 마음의 움직임을 심장의 뜀으로 포착할 수도 있고, 부들부들 떠는 손발의 놀림으로 하나의 꺼리를 드러내기도 했다. 자연과는 다른 인간의 모습이다. 거의 본질로서 인간이다. 그래서 미학적 인간(Homo Aestheticus)이 존재한다. 우리의 현대적 삶에서 예술의 복구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도시를 짓는 것은 무엇일까? 도시가 지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건축적인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리스의 옛 지역에 살던 고대의 헬라스인들이 생각한 나라가 ‘폴리스(polis)’였다. 도시국가라고 번역하는 그것이다. 거의 우리 행정편제에서 각각의 도시들이 처한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많다. 이때 도시 시학은 플라톤의 『폴리테이아(국가/정체政體)』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물론 거꾸로 선 플라톤 말이다. 그는 거기서 ‘올바름’을 포함하여, 형이상학·인식론·윤리학·정치사상·영혼론·교육론·예술론 등등을 다룬다. 그리고는 이데아라고 부르는 상정된 진리의 세계에 의한 하이어라키(hierarchy)의 체계가 구동한다.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를 “지상의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본’의 성격을 갖는 나라”로 상정하지 말고 현실 정치에서 구현될 수 있는 예술적 전략을 위한 도구상자로 모색하는 게 더 실용적이다. 진리는 구체적이기 때문에! “예술가와 작품은 각기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상호관련에 있어 어떤 제삼자에 의해서, 즉 거기에서부터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제각기 자기의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되는 바로 그러한 것, 즉 예술에 의해 존재한다.”(마르틴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프리드리히-빌헬름 폰 헤르만,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553쪽) 그렇다면 이런 물음이 가능해진다. 예술이 도시를 짓는 것일까? 그때 미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미술은 어떤 것일까.

이때 ‘현대미술과 도시의 특성을 융합한 국제 설치미술 축제’라는 슬로건을 내건 주최측의 입장이 이해되는 국면이다. 구체성과 은유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세운다는 것은 건축과 설치의 공통점이다. 살고 일하기 위하여 세워지는 공간은 물질적인 성격과 함께 역사적인 관념을 수용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무시되고 미래의 비전이라는 명목하에 터전의 경제를 깔아뭉갤 때 심각한 사태가 일어난다. ‘조국 근대화’라는 집단주의적 계몽기에 행해진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건축은 없고 건설만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세운다는 것은 절대선이어서 방해가 되는 것은 무시되거나 깔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모더니티의 진면목은 아니다. 오히려 발전의 다양한 양태를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서 설치미술의 미덕이 발휘될 수 있다. 조각과의 관계에서 약간은 애매한 입장을 취할 수도 있지만 역시 예술이라는 광범위한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전통적 의미에서 미술은 회화와 조각으로 구성되어졌다고 믿어왔다. 실체 혹은 주체로서 작동하는 방식이 바뀌는 시기에 우리는 살고 있는데, 미술에 대한 관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컨템퍼러리 아트로서 미술은 현실적인 구성에 의해서 변동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도시와 설치미술이 서로를 가로지를 수 있는 유용한 공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삶의 터전으로서 도시에서 시학을 구명(究明)하는 것은 미학적이다. 현대생활은 일상에서 미적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미학 도시는 우리 삶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에이전트는 자연과 디자인 그리고 현대미술이라고 여겨진다. 문화는 도시를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거기가 우리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이 가로질러 가는 곳이고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터인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플라톤의 이데아가 지시하는 철인국가(哲人國家), 산수화의 이상향, 도연명의 무릉도원, 우리 민족의 기층적 사상체계를 이루어 온 수많은 사상들 중의 하나인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까지 이 모든 것은 우리 삶의 조건으로서 근거(지)에 대한 사유이다. 이는 토목공학만으로도, 혹은 건축이나 테크놀로지만을 가지고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이미 미학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즉 일상의 미학화를 수긍할 수 있다면 이제 도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져야 한다. 1)디자인: 일상적 삶의 형상화로서의 디자인은 실재적 삶의 수단과 장소의 연출적 재현이다. 2)자연: 생태계는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감지되는 자연으로서 인간의 정신적인 상황과 직접 결부되고 있다. 3)예술: 이미지, 그림, 형상(形相) 등과 연결되는 것으로 무언가를 진술하거나 묘사하지도 않으며, 무언가를 의미하지도 않은 채 고유한 현실성을 지니면서 존재하는 세계. 이러한 예술세계는 현대미술을 통하여 구체화한다. 

이렇게 해서 삶과 형식, 인식과 행위는 미학적 인간을 이루어낼 것이다. 이 네 개념의 국면들은 삶의 미학, 형식의 미학, 그리고 인식과 행위의 미학으로 이어진다. 현대미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비교미학적 차원에까지 가서 닿는다. 전지구적 시대에 지역적 특성을 견지하는 세계이다. 현대미술의 에토스가 발현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의 범주인 시간과 공간이 풍토성을 장악하는 시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동시대성이 풍토성과 서로를 가로지를 때 현대미술은 그 역할을 지속한다. 시-공간에 바탕을 두는 예술인 이상 대지라는 극장에서 상연되는 장면으로 한시적 공간을 점유할 뿐이다. 설치미술이 이러한 대표적 사례이다. 풍경의 한시성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그 동안 보지 못했던 풍토성의 매너리즘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다. 이렇게 확보되는 감각의 동시성은 창작과 감상 혹은 주관과 객관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새로운 환경의 탄생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객관적 대상이 아니다. 즉 계량화해서 평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삶의 불명료성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또 가변적 자연은 관찰과는 달리 구체적인 체험을 통하여 체득된다. 이것이 설치미술의 미학이다. 

이러한 전복성이 미적 자율성 때문인지 혹은 공동체 구성원 개인의 진보적 성찰 때문인지 의문일 수 있다. 일종의 종교적 기원과도 같은 토착적 설치물들이 전통 사회에 존재했다. 커뮤니티의 집단적 의사소통을 반영하는 바람의 상징들과 설치미술의 매체와 형식은 어떤 상관성을 형성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미술제의 성격으로 “다양한 가치와 예술이 공존하는 ‘문화의 장’이 되어 문화예술 도시로서의 정체성과 색깔”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제시하는 경우 이 문제는 더욱 관심을 끈다. 설치미술의 전복성이 공공미술의 공공성과 어떻게 조우할 수 있을까? 설치는 일종의 간섭이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다. 시간성이라는 인식의 지평에서 활동하는 미술로서 제도 비판은 자연스럽게 수행되기 마련이다. 공공미술이 제도로서 미술에 대한 대안인 것처럼 오해되거나 오도하려는 입장과 설치미술은 여러 모로 어색한 광경을 보이는 것 같다. 외관의 형식적 유사성으로 인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문제는 아니다. 그렇게 간과하는 문제의식들이 현실적인 문제를 낳는 것이다. 

공동체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는 미술은 불편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설치미술이 짊어질 수는 없다. 더구나 순수미술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러한 요구는 더욱 무리라고 여겨진다. 물론 설치미술의 풍경에 대한 간섭이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한 정치적 풍경은 현대미술에서는 비판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미적 주체성을 공동체는 수용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공미술의 수요는 어디에서 발생하는 지 묻게 된다. 공동체의 주민인가, 정치인인가, 문화 사업가들인가? 지속되는 계몽에도 불구하고 항상 성찰은 필수적이다. 전통 사회에서 예술적인 것 혹은 미학적인 것들의 연극화는 공동체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제의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한 존중인 미학적 반성은 설치미술과 공공미술의 전위(傳位) 가능성으로 옮겨가는 것 같다. 


글쓴이 김병수는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철학과에서 형이상학과 존재론에 심취했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1년 서남미술관 큐레이터로 미술계에 입문, 1997년 『미술평단』에 미술평론이 당선됐고 홍익대학교 등에서 미학·미술사학·현대미술론 등을 강의해오고 있으며 『열린 미학의 지평』(공저), 『한국현대미술가 100인』(공저), 「21세기 한국의 작가 21인」(공저),『다문화적 비평을 위하여: 미학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 『메시지가 있는 이미지: 도상 vs. 영상』, 『‘미학도시’에서 ‘일상의 미학’을 위하여』 등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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