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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7, Oct 2014

공공예술의 공공성과 공동체의 공공성

publicity of
public art and that of communities

공공예술은 ‘함께 하는 삶을 공식화 하는 일’에 대한 예술적 사유와 예술행동을 아우르는 말이다. 당연히 공공예술은 기존의 예술을 규정하고 정의하던 개념들과 다른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공예술에 참여하는 예술가 또한 새로운 의미를 통해 비로소 예술가가 된다. 이 같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공공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그 물음의 형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공공예술은 마치 공동체라는 용어가 어떤 공공성을 통해서 그 ‘공동체’가 구성되고 존속되는지를 가늠하는 것과 유사한 양태를 갖는다. 일례로 가족 공동체에서, 가족의 의미를 ‘한 가족’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을 때 비로소 가족 공동체가 마땅해지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공공성을 문제 삼고 질문하게 되는 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과제인 셈이다. 이 물음으로부터 우리는 공공예술의 지향성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어, 다양하고 세분화되는 또 다른 물음들이 생겨남으로써 ‘답’을 대신하는 행동들이 하나씩 선택되고 실행된다.
● 기획·글 이섭 유구마을프로젝트 예술감독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 '악을 근절시키는 장치' 1997 캘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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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섭 유구마을프로젝트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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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은 사전적 의미 안에 갇혀 있는 정형화된 ‘뜻’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 성격은 항상 변화하고(운동하고) 질적인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속성은 늘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근거로 삼아 ‘우리로부터 개인’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실존성을 가진다. 당연히 물음이 유효한 시공간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절대로 공공성에 대한 이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관념적으로 공공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직접 참여하고 있는’ 이 사태로부터 너무 멀찍이 떨어져 공공성을 바라보려는 지독한 이기(selfishness)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가족 공동체’를 예로 들어보자. 가족공동체는 그 구성원이 늘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을 내면화 하지 않는 경우, 외형적으로만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질 뿐이다. 따라서 한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은 저마다 ‘한 가족’에 대한 이해를 공유해야만 한다. 그리고 쉼 없이 스스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나’에 대한 이해를 물음의 형식으로 반성함으로써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있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한 가족’이 된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7천 그루의 떡갈나무> 1982 
퍼포먼스 독일 카셀도쿠멘타  



예술행위는 예술사유에서 파생한다. 그리고 예술행위의 연쇄를 통해 예술사유는 깊어지고 넓어진다. 예술가는 이 상관(correlation)으로부터 성찰이라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 고양되어 간다. 이 부분은 일반인, 특히 공공예술의 실천단위(프로젝트 또는 프로그램의 실행단계에서)에서 만나게 되는 주민들(시민들)에게서 처음엔 찾아 볼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이는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예술가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 지점에 선 예술가들이 아직 준비가 충분하지 않거나, 길을 잃었을 경우, 혹은 공공예술을 사유화한 작업의 단순 확장 영역으로서 몰이해할 경우, 우리는 공공예술에 대한 혼동과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전통적인 예술 영역에서 예술행위와 그 사유는 전적으로 사적 시공간 안에 놓여 있다. 예술의 실존적 의미는 그래서 예술가에게 전적으로 의존적 관계를 가질 뿐이었다. 하지만 공공예술에서 행위와 사유는 공공성을 질문하는 능력으로부터, 반성하는 태도로부터, 그리고 질적 고양의 지향성으로부터 그 타당성을 지닌다. 당연히 예술가들은 이제 자신이 사유화한 시공간으로부터 그 경계를 스스로 넘어서려는 시도를 해야만 한다. 

예술은 예술가에 의한 작품으로부터 규정된다. 예술가는 그 작품의 전 과정으로부터 검증된다. 작품은 예술의 의미로부터 비로소 작품이 된다. 이 순환적 관계는 결코 원운동을 하지 않는다. 대신에 나선형 운동을 지속한다. 따라서 이 운동의 힘으로부터 예술이 다시 예술가와 예술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자신의 원리 안에서 보존하는’ 자발성이다. 하지만 이 자발성이 한 개인으로 수렴되어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개인’이라는 의식 안에서 자명해진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예술작품은 ‘타자의 보존 의지’에 따라 예술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 때 타자의 보존은 감상이라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간섭하면서 나타난다. 그리고 향유라는 적극성을 지향하면서 완성된다. 타자에 의한 보존은 전통적으로 감상행위를 특정 감상자로 제한시키고 있었다. 



<통인시장의 발견 프로젝트:봄맞이 대청소 축제 한마당> 

2011 서울 통인시장



당연히 제한된 감상자는 전문 집단으로 또는 교양 집단으로 확장되기도 했지만 결국 ‘제한’이라는 경계를 통해 구획된 안팎으로서 나뉘어졌다. 그리고 여기서 향유는 문화적 특권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공공성을 문제 삼으면서 ‘지금, 여기’에서 그 물음의 유효성을 근거로 타자에 의한 보존을 이해할 때, 우리는 감상과 향유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으로 묶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그 이유는 ‘지금, 여기’라는 현상적 실존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그 의미를 함께 묻게 됨으로써 지속적인 시간의 영역 안에서 특정(specification)이 해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예술에서 그 행위와 사유는 그래서 타자의 시선(주민 또는 시민 그리고 작가 자신도 이 타자의 시선에 해당된다)이 경계를 만들지 않는 독특함을 지니게 된다. 

예술적 사유(또는 예술사유)는 이 특정의 해체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성립된다. 달리 말해보면, 예술적 사유란 타자의 관점을 이해하고 배려함으로써 ‘지금, 여기’를 문제 삼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사유는 항상 질적 향상의 지향을 향해 나선형 운동을 한다. 그 운동의 방향성에서 늘 새롭게 부각되는 ‘어떻게’와 ‘왜’의 물음이 바로 공공성의 이해를 이끌어낸다. 공공성은 그래서 예술적 사유의 가장 중요한 주제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 예술적 사유는 단지 예술가에게만 국한되어 사용될 수 있는 말인가? 물론 이에 대한 답은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전술한 바와 같이 특정의 해체 그리고 그에 대한 성찰을 하는 모든 사람의 사유를 우리는 그렇게 불러야만 한다. 하나의 사례를 보자. 독일 작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가 1982년 카셀도쿠멘타(Kassel Documenta)에서 보여준 <7천 그루의 떡갈나무> 퍼포먼스가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술적 사유로부터 공공성이 어떻게 물음을 던지고 ‘지금, 여기’를 기반으로 또 다시 물음을 가져오는지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또 다른 하나의 사례를 보자. 기획자 윤현옥씨가 총감독을 맡았던 2011년 <통인 시장의 발견 프로젝트>의 <봄맞이 大청소 축제 한마당>은 예술적 사유를 통한 일반인들의 경계 넘어서기의 성공적인 경우로 기억될 만하다. 이렇듯 예술적 사유란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예술적 사유 없이 공공예술은 없다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공공예술 영역에서 사유화된 사고방식은 더 이상 공공성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지적할 수 있다.



큐-박스(Q-box)를 들고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  




공동체는 공공성의 성격에 맞추어져 자신의 성격을 가진다. 당연히 공공성에 대한 합의가 한 공동체를 공동체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성립할 수 없고, 특정하는 성격의 공동체만이 존립 가능하다. 그렇다면 모든 공동체는 제 각각 자신의 성격으로 드러나는 어떤 합의된 공공성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의 모아듦과 모아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공동체의 성격이 모호하여 생긴 큰 혼란이 ‘세월호 사태’로 인해 분명해 졌다. 우리는 신뢰 사회라는 막역한 이해를 통해 진짜 사회-공동체로 국가와 그 권한을 위임받은 정부와 정치권을 불안한 가운데 믿었다. 하지만 이 관계 이해는 철저하게 깨졌다. 더구나 신뢰할 수 없는 제 각각의 이해관계로 뿔뿔이 흩어져 공동체의 와해를 목도하고 있다. 

공동체의 공공성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다루지 않더라도 공공예술의 실천단위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규모의 공동체들은 경제적 이해관계 이외 모아짐을 설명할 길이 없다. 공공성을 담보하는 어떤 관계도 현장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그것이 모두가 우리 사회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다. 왜 공동체의 공공성이 제 성격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 아예 그 시작부터 공동체에 어떤 공공성의 성격으로 모아들고 모아지고 있었는지가 왜 모호한가? 우리는 타자에 대한 인식이 ‘나와 나의 밖의 것’으로 단순 이원화된 사고 안에 갇혀 지내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밖은 ‘나’를 위한 대상일 뿐이다. 또한, 나와 관계를 정당한 방식이나 이해관계나 혹은 배려의 관계로 설정하지 못한 채 ‘밖’을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또 다시 우리는 이기라는 독단에 갇힌 ‘우리’를 만나게 된다. 당연히 공동체의 공공성은 그 성격을 가짐으로 이 이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술적 사유로서 이 도전은 성립요건을 갖춘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예술적 사유로부터 이 도전은 가능한 상태로 돌입한다. 



라파엘 로렌조(Rafael Rolenzo)

<Pulse Park> 2009 
뉴욕 매디슨스퀘어파크 ⓒ James Ewing 



예술가는 이 도전의 장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 있는 사람이다. 시민(또는 주민)은 그 앞선 자를 끌어안는 역할을 한다. 이 관계에서 신뢰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완성이라는 사태로부터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드러내는 단계에서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는 기호(taste)의 대상으로 선택될 수 있는 사태를 지시하지 않는다. 이 사태에 대한 이해는 철저하게 ‘우리라는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나(개인)’의 실존적 물음이자 그 의미에 대한 성찰을 끌어안고 있다. 그러므로 공공예술에서나 공동체에서나 ‘공공성’의 물음과 이해의 자리가 바로 이 사태 이해 안에 반듯하게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첨예한 물음과 그렇게 드러나는 문제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공공성은 항상 새로운 물음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온다. 그것을 감당하고자 하는 것이 공공예술이어야 한다. 그리고 예술적 사유와 행위를 허용하고 수용하는 것이 공동체여야 한다. 

함께하는 삶이 문제가 되고 끊임없이 물어지는 연속 안에서 공공성은 제 모습을 간직한다. ‘큐-박스(Q-Box)’*는 단순히 디자인 영역에서 다룰 수 있는 참신한 아이디어 물통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공성을 향해 물음을 던짐으로 인해 공공성이 드러나는 기막힌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왜? 이 기물을 디자인 한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물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공예술이냐고? 큰 예산을 펑펑 쓰고 있는 공공예술 명목의 사업은 그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이것을 공공디자인이라고 칭한다면 그 지적은 옳다. 하지만 단순히 이것을 디자인 자체로만 본다면, ‘지금, 여기’를 우선하기보다 주문자(client)의 요청이 이미 사유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업 단위에서만 그렇게 정리할 수 있다. 그런 물음은 ‘함께 하는 삶’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각주]
* 큐-박스(Q-Box) ‘큐-드럼(Q-Drum)’이라고도 불린다. 총 50리터의 물을 운반할 수 있는 튼튼한 도넛 모양의 플라스틱 컨테이너로, 가운데 홀에 줄을 묶어 땅에 굴려 이동할 수 있도록 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남아프리카 지방에서 식수지로부터 각 공동체를 위해 적당량의 물을 운반해야 하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해 고안됐다.


글쓴이 이섭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했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으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미술의 기존 개념을 넘어서는 미술을 꿈꾸며 삶의 자리와 연결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무화랑, 아트컨설팅서울(ACS), 일주아트 하우스 기획 부문에 종사했으며, 제 3회 광주비엔날레 영상부문, 주안미디어페스티벌 전시부문,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전 <시련과 전진> 예술감독 등을 역임했다. 또한 2007년 <종촌, 가슴에 품다>, 2008년 <마음속에 마음을> 등 농촌지역에 작가들이 개입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현재, 충남 공주시 유구읍에서 진행하는 유구마을프로젝트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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