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1. Features
  2. Special Feature
현재 위치
  1. Features
  2. Special Feature
현재 위치
  1. Features
  2. Special Feature
현재 위치
  1. Features
  2. Special Feature
Issue 91, Apr 2014

현대미술과 철학의 대화

Conversation between
Art and Philosophy

현대 미술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또 다른 난해함을 추가시킬 위험이 있다. 한 철학적(또는 예술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그에 뒤따르는 또 다른 개념의 묶음을 이해해야 하는 끝없는 과정은 철학이나 예술에 대한 이해보다는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미술과 철학은 이성과 감성처럼 서로를 필요하지만, 효과적으로 만날 방법이 부족했다. 여기에 짧게 소개된 현대 철학자가 쓴 현대 미술 작가론은 미술과 철학의 내재적인 만남을 꾀한다. 그들의 미술론은 작품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줄 뿐 아니라, 추상적으로만 다가오는 그들의 철학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들 철학자의 담론의 핵심에 예술적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대의 이성 중심을 극복하겠다고 나선 문화 현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대표적인 현대철학으로 부각된 후기 구조주의 전반에 흐르는 심미주의와도 연관된다. 이들은 예술작품을 하나의 대상으로 환원시키지 않으며, 미지의 사물로 간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미지의 사물을 풀이하는 철학적 언어가 투명하지 않음을 자각한다.
● 기획 · 진행 편집부 ● 글 이선영 미술평론가

프란시스 베이컨 'Three Studies of Lucian Freud' 1969 Oil on canvas 각각 198×147.5cm

Share this

Save this

Written by

이선영 미술평론가

Tags

메를로 퐁티와 세잔


메를로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이라는 자신의 철학 개념을 세잔의 작품에 적용시킨다. 철학의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철학자가, 회화의 근본에 천착하여 새로운 길을 열었던 화가에게 주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잔은 인상파가 그러했듯 생생한 지각변화를 수용하여 대상의 고유색과 원근법에 기반한 전통적 환영에서 벗어나면서도, 인상파와 달리 회화적 구조를 견고하게 유지시킴으로써 현대미술의 시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연과 회화의 리얼리티를 동시에 획득했다. 주체로도 객체로도 환원되지 않은 이 종합적 비전은 현상학과 조응하는데, 메를로 퐁티는 『세잔의 회의』에서 세잔이 감각과 지성 사이에 어떤 단층을 만들지 않고, 단지 지각 대상의 자발적인 질서와 사고 및 학문의 인위적인 질서를 구분했다고 강조한다. 


인위적 질서 대신에 생생한 지각 현상을 껴안으려 했던 메를로 퐁티의 철학과 세잔의 방식은 상통하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세잔이 초기의 알레고리 풍의 회화를 벗어난 것을 인상주의의 영향이라고 보면서, 이러한 영향으로 대상들은 순간적인 지각에 드러나는 대로, 어떤 일정한 윤곽 없이 광선과 대기를 통해 결합된 그대로 묘사된다고 이야기한다. 세잔은 자연 속에서 그 고유색들을 변경시키는 보색 대비에 주목하고, 더 이상 자연과 일대 일의 대응관계를 추구하지 않는다. 캔버스는 각 부분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상에 대한 보편적 진실, 즉 사물을 대할 때 받는 인상을 회복한다. 




폴 세잔 <Mont Sainte-Victoire>

1902-04 Oil on canvas 70×90cm




그러나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따뜻한 색과 검정을 사용함으로써 대상이 반사광에 의해 가려지거나, 대기나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마치 내부에서 은밀하게 빛이 비춰 대상에서부터 발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세잔에게 색채와 형태, 자연과 예술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세잔은 ‘색채가 가장 풍부해질 때 그 형태 역시 충만해지는 것’이라고 했으며, ‘자연과 예술을 통일 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메를로 퐁티는 세잔이 리얼리티에 이르기 위한 수단을 포기한 채 리얼리티를 추구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세잔의 모든 터치 그 하나하나가 공기, 빛, 대상, 구성, 성질, 윤곽 및 스타일을 포함했다고 본다. 부분적으로 본 시선들은 결합되고 흩어진 것들이 재통합되며 세계는 매순간 현실성을 갱신한다. 


한마디로 세잔은 이 세계가 어떻게 우리와 접촉하는지를 볼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은 메를로 퐁티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소망한 바, ‘나의 철학에서 하고 싶은 것은 표상된 것과는 전혀 다른, 야생적 존재로서의 세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세잔이 이룬 현대회화의 혁명은 메를로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본격적으로 개진한 바 있는 대상(‘과학적 대상의 존재방식과 혼동되지 않는 자연적 세계의 존재를 재발견해야 할 것이다’), 의식(‘의식을 더 이상 구성하는 의식, 혹은 순수 대자 존재로서가 아니라, 지각적 의식으로, 행동의 주체로서, 세계에로 존재 또는 실존으로서 인식해야 한다’), 세계(‘현상학적 세계란 순수 존재가 아니라 나의 경험들의 교차, 그리고 나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 사이의 상호 맞물림을 통한 교차에서 드러나는 의미이다’)에 대한 관점을 공유한다.  




르네 마그리트 <This is not a pipe>

1948 Oil on canvas 63.5×93.98cm  




미셀 푸코와 마그리트


말과 사물이 함께 있는 마그리트의 그림은 『말과 사물』의 저자 미셀 푸코의 철학의 대상이 되었다. 마그리트 또한 푸코의 『말과 사물』을 읽었으며, 둘은 편지교환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미셀 푸코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분석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서두에서, 화가의 존재성을 보여줄 어떤 지표도 전무한 단순한 방식의 그림에 당황했음을 밝힌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식물학 개요에서 따온 한 페이지만큼이나 단순하다는 것이다. 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말의 여러 가능성을 논구하면서, 회화의 게임 속으로 ‘당신이 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라는 분명하지만 진부한 언표가 거부됨을 발견한다. 미셀 푸코는 ‘우리는 말과 대상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세우고, 일상적인 삶에서는 무시되어온 말과 대상의 어떤 성격들을 정확히 부각시킬 수 있다’, ‘화폭에서 말들은 이미지와 마찬가지의 실체들이다. 


화폭에서의 이미지와 말들은 보통 때와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마그리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눈속임 기법(trompe-l'œil)’을 통해 그려진 것을 대상으로 확언하는 우리의 시각적 관습에 도전한다. 그 확언은 ‘당신이 보는 것은 벽의 표면에 있는 선과 색채의 모음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미셀 푸코에 의하면 확언은 근원이 되는 요소를 전제한다. 즉 그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다. 그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됨으로써, 그 근원 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 된다. 그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 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플라톤적 이데아와 무관할 수 없는 재현주의를 말한다. 반면 마그리트가 성취한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나가는 계열 선을 따라 전개되는 무엇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만 속하는 질서(무질서)를 향한다. 


여기에서 그림은 확언이 아니라 차이의 놀이가 벌어지는 공간, 어떤 참조 틀로도 고정시킬 수 없는 사물들이 활강하는 공간이다. 마그리트의 그림과 푸코의 철학적 담론은 말과 사물 사이에 드리워진 신비를 강조한다. 마그리트의 작품에는 분명한 이미지와 말이 있지만, 그 무엇도 확정짓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현대적 에피스테메에 속한다. ‘사물이 어떻게 있는가를 말할 수 있을 뿐 사물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는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처럼, 말과 사물의 간극이 강조된다. 말과 사물 사이의 불확정성은 ‘인간 자신의 모습을 반사해주는 거울에 지나지 않는 사물’(미셀 뷔토르)과 ‘미리 세워진 모든 인간주의적 질서’(알랭 로브그리예)를 거부하고, ‘다른 것으로서의 대상 그 자체로 되돌아 올 것’(프랑시스 퐁주)을 천명한 동시대 문학(누보로망)의 흐름과 함께, 예술 대신 사물의 편에 선 현대미술의 추이와도 연관된다.  




르네 마그리트 <Decalcomania> 

1966 Oil on canvas 81×100cm




들뢰즈와 베이컨


코드화 될 수 없는 영토를 향해 탈주하라는 들뢰즈의 철학적 메시지는 코드의 반대편에 놓인 돌발흔적을 강조하게 했다. 그는 『감각의 논리』에서 구상도 추상도 아닌 독특한 형상의 화가 베이컨을 분석한다. 베이컨은 추상회화의 시대에 독보적 형상회화를 고수했다. 들뢰즈는 ‘추상은 심연 혹은 혼돈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버리는 길’이라며 주류 미술사에 의해 현대미술의 문법으로 자리 잡은 추상을 비판한다. 이 길은 일종의 금욕주의, 정신적인 구원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감각의 논리』에 따르면 추상회화는 손이 없다. 그것은 ‘손적인’ 것을 억압한다. 추상적인 형태들은 순수하게 시각적인 공간에 속한다. 그러나 베이컨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바의 손적인 촉각적 형태들은 시각적 긴장에 의하여 기하학적이기만 한 형태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추상적인 시각 공간이 손을 시각적 자판기 두드리는 손가락으로 축소시킨다고 본다. 손가락적인 것은 정신적 눈을 위해 촉각적인(손적인) 대상물을 제거한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출몰하는 것은 돌발흔적들인데, 그것은 추상회화에서 발전시킨 상징적 코드화와는 다르다. 돌발흔적을 코드로 대체하는 추상회화는 시각성을 중심에 놓는다. 그러나 시각성이 미술작품에 대한 좋은 기준이 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던져진다. 코드는 손적이 아니라 손가락적인데, 손가락은 주로 셈을 한다. 추상적 코드가 만들어내는 순수 시각적인 공간은 환원과 축소를 행한다. 이러한 코드화는 눈에 대한 손의 종속을 표시한다. 여기에서 손은 손가락으로 축소된다. 다시 말해 손은 순수한 시각적 형태에 상응하는 단위들을 선택하기 위해서만 개입한다. 손이 종속될수록 시각은 이상적인 광학적 공간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형들을 광학적 코드에 맞게 포착하는 경향을 띈다. 광학적 공간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려 한다. 




프란시스 베이컨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 

1962 Oil with sand on canvas, three panels,

 78×57inches each  




그러나 재현주의는 세잔으로부터 출발하는 현대미술부터 거부되었다. 세잔부터는 더 이상 사물의 고유색과 원근법에 기초하는 재현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리얼리티는 보존된다. 메를로 퐁티의 그것과 다르지만, 자연과 예술의 현실성을 모두 붙잡은 세잔에 대한 평가는 비슷하다. 들뢰즈에 의하면 세잔의 그림에서 기하학은 뼈대이고 색채는 감각, 즉 착색감각이다. 그의 작품은 두 가지로, 즉 감각과 뼈대로 만들어진다. 기하학을 구체적으로 혹은 느껴진 것으로 만들고, 동시에 감각에게 지속과 명확함을 준다. 들뢰즈는 ‘나는 인상주의를 가지고 박물관의 예술처럼 단단하고 지속적인 것을 만들기를 원했다’는 세잔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베이컨에게서도 지속과 명증함에 대한 동일한 요구를 발견한다. 세잔과 베이컨의 회화적 체계 안에서 기하학은 감각적이 되고, 감각들은 명확하고 지속적이 된다. 들뢰즈는 색과 형태 모두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마련한 두 화가에게서 ‘감각을 실현’을 발견한다.  



글쓴이 이선영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했으며, 웹진 미술과 담론의 편집위원(1996-2006)과 미술평단의 편집장(2003-2005)을 역임했다.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과 제 1회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상(이론부문)을 수상했다.

온라인 구독 신청 후 전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Subscribe 로그인 Log in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