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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3, Jun 2014

유리창의 얼룩을 통해 풍경이 보인다

Landscape through a smudged window
유리창의 얼룩을 통해 풍경이 보인다 1)

“그러고 보면 그 ‘섬들’은 북쪽 지방의 어떤 돈키호테의 이상이나 안개 낀 지방의 어느 부르주아의 가공 천국이 아니라 그저 일상적 감정의 가장 노골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내게 어떤 귀띔같이 여겨졌다. 가장 먼 곳과도 이제는 작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것 속에서 피난처를 찾지 않으면 안 될 모양이었던 것이다.” - 장 그르니에, 『섬』, 민음사, 1997, p.175
● 기획 · 진행 문선아 기자 ● 글 이성휘 미술이론가

문성식 '크리스마스트리를 찾아서(looking for christmas tree' 2007 종이에 연필 38×5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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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휘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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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있기 전부터 그림은 존재했고, 인간이 예술로서 남긴 가장 오래된 흔적에서부터 풍경은 예술 안에 있었다. 자연은 처음부터 인간이 만든 흔적에 여타의 것들과 더불어 묘사되었다. 서양미술사에서는 16-17세기에 이르러 풍경화가 회화의 한 장르로 인식되었으나, 풍경화의 기원이 언제부터였는가 개괄해야 한다면, 이미 고대 이집트 고분에서 나무와 연못이 있는 정원 그림이 발견되었고, 1세기 로마 건물의 벽화에서도 나무와 가축, 인물들이 등장하는 풍경 그림이 발견된 바 있다. 동양미술사에서도 산수(山水)의 묘사는 한대(漢代) 화상전(畵傷塼)에서 이미 발견되었는데, 당시는 궁궐이나 사당을 장식했던 일련의 벽화에서 부수적인 부분으로 등장했다. 


화론에서 산수화에 대한 언급은 4세기 동진(東晉) 사람인 고개지(顧愷之)의 도가적 산수화부터 시작되며, 당·송대에 와서 북종화, 남종화의 두 파로 구분되기 시작하며 발전했다. 동양의 산수화가 자연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 나아가 우주와의 대면했다면 서양 풍경화는 외부의 가시적 대상을 향했다. 이들이 자연 풍경뿐만 아니라 산업화된 도시 풍경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약 140년 전 인상파들이 시원이며, 이때부터 풍경은 사진이론가 리즈 웰스(Liz Wells)의 표현을 빌려 오자면 자연이 아닌 문화적 구성체(cultural construct)가 되었다.2)




이호인 <Untitled> 2007 

Oil on acrylic board 80×100cm




21세기로 넘어온 작금의 작가들에게도 풍경은 문화적 구성체로서의 풍경이며, 정치, 경제, 사회적 의미는 더욱 복잡하게 깔려 있다. 특히 젊은 세대 작가들이 어떻게 풍경을 정의하고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더욱 개별적이고 복잡한 이야기들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을 준다. 레디-메이드를 이용한 작업을 해온 하임 스타인바흐(Haim Steinbach)는 1980년대를 회고하며 당시의 시대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기는 해도 항상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미술사가 진 로버트슨은 스타인바흐의 말이 사실 현대미술 전체에 해당한다고 보았다.3) 따라서 이 글은 지금 젊은 세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이고 있는 개별적인 이야기들 중에서 몇몇의 이야기임을, 그리고 그 방향이 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어릴 적 경험의 공간을 연필이나 세필 붓으로 정교하게 그려내는 문성식에게 풍경은 사실적 재현의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 종합적으로 축적된 풍경이다. 작가는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어떻게 리얼리티를 표현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형식의 필요성을 느꼈고, 원근법적인 것은 리얼리티를 잘 보여주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무심하고 비릿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여러 번 지나다니고 경험하면서 머릿속에 자리 잡힌 인상을 종합하여 풍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한겨울 야산에 올라가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하러 가는 모습을 담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찾아서>(2007)는 어릴 적 나무를 구하러 가면서 축적된 숲에 대한 각각의 인상들이 표현되어 있다. 




정직성 <망원동: 연립주택 3

(Mangwon-dong: Semidetached Houses 3)>

 2006 Oil on canvas 194×260cm




앙상한 참나무들 사이로 저 멀리 소중한 삼각형 나무가 보인다. 참나무들은 소년들의 키를 한참을 능가하고, 소년들과 엇비슷한 키의 삼각형 나무는 저 멀리서 단정하게 서 있다. 이들은 저 나무를 구해 내려올 것이며, 눈이 곧 쌓여 소년들이 나무를 구하기 위해 야산을 헤맨 흔적과 시간을 덮어줄 것이다. 문성식의 작업에서 곧잘 등장하는 숲은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무대이다. 숲은 모든 생물들이 끊임없이 생태적 욕망으로 인해 움직이는 공간이다. 작가에 의하면, 막상 숲에서 생물들의 생태적 행위나 욕망이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이는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의 <사람들>(2012)은 숲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사의 하나인 죽음을 다루고 있다. 나무들이 빼곡한 숲 한가운데서 거행중인 장례의 마지막 의식에서도 인물들은 다양한 모습과 태도를 보인다. 맹금류에 의해 잡아먹힌 생물의 흔적이 아직 희끗희끗 남아 있는 만추의 숲을 그린 <숲의 내부2>(2012)에서는 여기저기 나뭇가지들에 앉아 있는 검은 새들에 의해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조성된다.


이호인의 <무제>(2007)에서는 바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섬 주변으로 물결이 일렁이며, 배가 정박돼 있다. 어느 사진작가가 찍은 하늘에서 본 지구를 연상시키면서도 실제 장소인지 상상의 장소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2000년대 중반 작가는 세상을 거리를 두고 관조하듯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조감 시점으로 일련의 섬 그림을 그렸다. 그는 스스로도 이 세상과 무관한 존재인 것처럼 눈앞의 세상을 관조하게 된다고 하였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인하여 섬들은 현실세계라기보다는 이상향의 장소 같았고, 동시에 포착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숨어 있었다. 근작에서 보이는 시점은 지면으로 내려와 현실의 시점이나 여전히 그의 풍경은 나뭇가지를 걸치거나, 창 밖 너머의 것들이거나, 안개를 사이에 두고 있는 저 너머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그의 도시 풍경 역시 나뭇가지에 걸쳐 있거나 프레임에 의해 잘려 온전한 전체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근작들에서 보이는 제한된 시야는 한편으로는 바깥 세계에 의해서 관람자가 둘러싸여 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언제나 정면의 풍경을 마음껏 볼 수 있으리라 간주하지만, 도시적 일상에서 우리의 시야는 늘 제약 받고 있으며, 눈앞에는 수없이 많은 스크린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박형지 <루모스 막시마!1(Lumos-Maxima!1)> 

2012 리넨에 아크릴 채색, 스프레이 페인트 160×200cm  




정직성은 도시 공간을 모티브로 하여 도시화의 속도 및 이면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전개해왔다. 그의 2000년대 중반 연립주택 연작들은 서울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는 연립주택의 군집된 형태를 원근에 구애 받지 않고 색채를 제한하여 기하학적 패턴에 가깝게 재현했다. 작가는 서울 곳곳에서 발견되는 급속한 개발 현장을 자신이 직접 걸어 다니며 사진으로 포착하는데 이를 다시 회화의 물성과 붓놀림을 통해 캔버스 화면으로 옮긴다. ‘공사장’ 시리즈 등 최근 작업들에서는 도시의 구체적 형상보다는 도시개발의 구성 요소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면에서 느껴지는 속도감은 미래파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미래파가 기계 문명에 의한 도시화를 찬미하였다면, 걷기에서 비롯된 정직성의 회화는 도시 개발의 파편이자 불완전성이다.


박형지의 최근 작업은 인공조명이 가득한 밤 거리, 반짝이는 쇼 윈도우 등 도시의 밤 풍경에서 출발한다. 즉, 인공조명이 가득한 밤의 도시가 그 본래의 조형성이나 인상과 분리되어 낯설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작업의 주제가 된다. 작가는 피터 도이그(Peter Doig)를 인용하여 ‘회화는 선택과 결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생기는 일종의 사건들이 축적된 결과물’이라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하면, 빈 캔버스 위에서 일어나는 붓질, 물감의 색채와 두터움, 질감, 형태의 생성과 같은 회화적 결정이 어떠한 ‘사건’이 될 때, 비로소 다음의 과정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순간들이 가지는 시각적, 감각적 요소들을 해체하여 캔버스에 재구성하거나 추상화시킴으로써, 재현적인 회화라기보다는 회화 고유의 행위와 물질성에 대한 담론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주희 <천강유수천강월 만리무운만리천

(千江有水千江月 萬里無雲萬里天)> 

2012 캔버스에 분채, 거울 162.2×260.6cm 




‘해리 포터’에서 순간적으로 불빛을 만들었다가 없애는 주문인 <루모스 막시마! 1>(2012)은 인공조명이 화려하게 점화된 도시의 모습이 찰나의 섬광을 불러일으킨 주문에 걸린 것 같음을 드러낸다. 이 불빛의 역할을 캔버스에서는 물감과 붓질, 그리고 스프레이 등 각종 질료와 제스처가 대신한다. 주제가 가진 시각정보들은 관념화되고 재분류되어 도시가 가진 구체적 형상과 디테일이 소거된 채로 캔버스 위에서 새로운 사건이 된다. 소거된 부분은 질료와 회화적 제스처가 연달아 만들어 내는 연속된 사건들, 즉 상상력과 유희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혜승은 기억의 풍경을 그린다. 일상 속에서 그리고 여행 중에 기억된 장소의 이미지는 기억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상당 부분이 생략되거나 간략해진다. 반만 기억된 꿈이라고 일컬어지는 피터 도이그의 회화처럼, 이혜승의 풍경 역시 반만 그려진, 관람자로서는 들여다볼수록 낯선 시공간이다. 어떤 풍경은 화면 안쪽의 세계로 통할 거 같은 소실점으로 시선을 길게 이끈다. 


그러나 디테일이 생략된 묘사는 작가가 기억하는 거대한 바위산을 감싸고 있던 대기, 벌판 위의 바람에 대한 촉감 등 공간에 대한 감각을 환기시킨다. 작가가 어떤 이미지를 선택할 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내적 필연성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는 구체적인 재현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캔버스 위에서의 선택과 제스처 등 오롯이 화면에서 작가가 펼친 결과에 맡겨지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하였다. 한주희는 언어 이전의 이미지를 추구하고자 한다. 캔버스에 분채와 거울로 작업한 <천강유수천강월 만리무운만리천(千江有水千江月 萬里無雲萬里天)(2012)>은 고정적일 수 없는 존재와 시공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혜승 <Untitled> 2010 Oil on canvas 162×227cm  




캔버스 중앙에 방사형으로 부착된 유리 조각은 수면 위의 파동을 바라보는 것처럼 관람자의 시선을 동요시키면서 동시에 파편화된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전 작업에서도 캔버스를 끊임없이 순환할 것만 같은 에너지로 가득 채웠으면서도 어떤 파국을 암시하는 듯 한 작업을 보여준 한주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찰나이자 영겁의 순간을 화면에 담는다. 작품 제목도 자연의 소리를 언어가 불완전하게 담아낸 의성어인데 예컨대 <우우우우웅>(2005), <콸> (2005) 이런 식이다. 이러한 의성어는 모호한 기호이자 우리의 아이러니한 의식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러한 모호성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의식의 풍요로움을 위한 조건이다. 의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은 다시 이 모호함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들이 우선을 두고 몰입하고 있는 가치들이 있으며, 또 그들을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하지 못하게 옭아매는 구조적 문제가 있음은 분명하다. 평론가 정현은 김지원과의 인터뷰에서 이전 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작업환경의 차이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현실과 발언이나 민중미술이 등장한 1980년대가 작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다양한 제도들이 있어서 (작가가) 거기에 편입되는 식이라고 보았다.4) 오늘날 국내외의 많은 기관들이 주도하는 레지던시, 수상제도, 전시지원 프로그램은 젊은 작가들의 작업의 성격과 방향, 그 범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제도들을 자신의 커리어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할수록 영리한 예술가가 된다. 동시에 제도에 함몰되지 않고 문제점을 간과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덕목이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그리는 풍경은 어떤 것인가? 근대 이전의 풍경화는 먼 곳으로의 여행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행은 실제 먼 곳으로의 여행일수도 있지만 장 그르니에의 섬처럼, 상상의 여행, 인생의 순례와도 같다. 그는 궁극적으로 가장 먼 곳과 작별하여 가까운 것 속에서 피난처를 찾는다. 거기에는 어릴 적 누워서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본 하늘에 대한 기억이 있으며, 그르니에의 말처럼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이 내면 깊숙이 감춰져 있던 것이 차례차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4년 5월, 유리창의 얼룩을 통해 풍경이 보인다.


[각주]

1) 김지원, <2014 그림보기>(2014.4.23-5.6, 갤러리 175) 전시 서문에서 발췌 인용

2) Liz Wells, 『Photography: A Critical Introduction』(London: Routledge, 1997), p.236 (진 로버트슨, 크레이그 맥다니엘, 『테마현대미술 노트』(두성북스, 2011), p.237 에서 재인용)

3) Haim Steinbach, 「Haim Steinbach Talks to Tim Griffin」, interview by Tim Griffin,『Artforum』, April 2003, p.230 (위의 책에서 재인용)

4) 강석호, <한국의 그림 매너에 관하여>(2012.3.31-7.21, 하이트컬렉션) 전시 도록, p.116



글쓴이 이성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을 졸업했다. <세탁기 장식장>(서대문구재활용센터, 2012) 공동기획 및 <제2회 아트선재센터 오픈 콜-쭈뼛쭈뼛한 대화>(아트선재센터, 2013)를 기획했다. 현재 하이트문화재단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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