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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5, Aug 2014

가면과 그 이중

Le Masque et Son Double

미술에서 등장하는 가면들은 연극적 장치들과 연결되어 있다. 가면 그 자체가 독립적인 조형물로서 작동하기도 하지만, 회화나 설치에서 가면이 가미될 때 그것은 인물 혹은 동물의 특정 캐릭터를 지칭하며 작업에 서사성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매체에 상관없이 가면이 등장하면 작업이 그물처럼 끌어 올리는 이야기를 비교적 명확하게 묘사해준다. 이렇게 가면과 연극을 쉽게 연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통적 연극에서부터 빈번히 사용되어 온 장치이기 때문이다.
● 기획 · 진행 문선아 기자 ● 글 김해주 독립 큐레이터

Alexandre Singh 'The Humans' 2013 Actors: Gerty Van de Perre, Lucas Schilperoort, Annelinde Bruijs, Robbert Klein, Sam Crane, Sanna Elon Vrij, Amir Vahidi, Jesse Briton, Dook van Dijck Photo: Sanne Pepe Courtesy of Witte de With Center for Contemporar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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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주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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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기원이 제의와 유희에 있는 것처럼, 가면도 신앙 혹은 연희를 위한 소품으로 기원을 읽을 수 있다. 제의의 가면은 특히 관념을 구상화 하는 장치로서 평범한 사람을 초자연적 존재로 만든다. 가면을 쓴 샤먼은 인간의 몸을 가졌으나 신과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제의의 가면이 신성의 환상을 불러온다면, 유희적 가면은 극적 환상을 돕는다. 가면을 쓰면 삼 분 안에 한 사람의 일생을 펼쳐 내거나, 현재에서 과거 또는 미래로 이동(jumping)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면은 또한 개인을 군중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주는 장치로도 사용된다. 이탈리아에서 ‘가면을 쓴 친구들’이라 불렸던 코러스(chorus)는 하나가 된 복수로서 압축된 시민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이렇게 가면을 이용하여 자유로운 존재 전환에 이르는 것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코메디아 델라르테 뿐 아니라 동양의 전통극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요소다. 얼굴 위에 덧씌우는 한국의 탈이나 일본 전통극 노의 가면 외에도 원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하얗게 칠하는 가부키나 중국 경극의 분장까지도 가면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역시 하얀 분장에 입과 눈을 과장되게 칠하는 판토마임(pantomime)도 가면을 쓴 얼굴이다.




Paul McCarthy <Tomato Head (Green)> 

1994 Fiberglass, aluminum, urethane rubber, 

cloth, Plexiglas figure, and 62 various objects 

ⓒ Paul McCarthy  




가면은 인물의 표현을 확대하는 역할을 한다. 악귀의 가면이나 전통 탈의 우스꽝스런 표정은 먼 곳에서도 분간이 가능한 하나의 과장된 표현을 각인시킨다. 감정의 진폭을 확대하여 명확한 메시지 전달을 돕는 것이다. 가면을 쓰고 나올 때 연기자는 실제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등장인물을 드러낸다. 일상적 개인으로서의 연기자의 신원을 숨김으로써 행동의 해방을 가져오고 일탈을 허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재현의 환영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써온 현대 미술이 이러한 가면을 사용함으로써 과거의 재현으로 회귀하거나 연극적 전통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 일상과 거리가 먼 신화적 행위에 진입하는 장치로 가면을 사용한다는 전통적 용법은 참조하되, 그것을 아우르는 새로운 장면을 구현하여, 환영적 공간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제 3의 상황을 구축해 나가는 데 가면의 용법이 있다. 가면은 그 자체로 얼굴을 가리는 특수한 조형물이다. 시각 예술에서 공연으로 작업의 매체를 넓혀가는 작가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가면의 조형성을 전시에 활용하면서 동시에 공연의 소품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프랑스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알렉산더 싱(Alexand re Singh)의 <휴먼스(Humans)>는 아리스토파네스식의 코미디를 차용한 연극이자 설치다. 2013년 가을, 로테르담의 현대미술센터(Witte de With)가 공동 제작하여 뉴욕의 퍼포마 페스티벌에서 라이브 음악을 겸한 중극장 규모의 뮤지컬 형태로 초연했고, 공연에 등장하는 가면의 형태는 브론즈 조각으로 같은 시기 메트로 갤러리의 전시에 소개됐다. 


소 대중문화와 신화에서 발견한 여러 가지 참조 지점들을 묶어 시각적인 형태로 편집해 온 작가는 극적 서사의 창작으로 반경을 넓히면서 직접 희곡을 쓰고, 공연의 연출을 맡았다. 작품의 배경은 아직 지구가 생성되지 않은 신의 세계고, 시간대는 시공간의 여명이다. 무대 가운데 커다란 산이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인 세계를 양분한다. 이 신들의 세계에 살던 트릭스터들이 돌로 만든 조각들에 우연히 숨을 불어 넣게 되고, 여기서 인간이 탄생한다. 열정과 욕망, 질투와 권력을 함께 안고 태어난 인간은 탄생의 순간부터 신의 세계에 도전하면서 혼란과 폭력을 일으킨다. 신의 세계에서 돌로 만든 조각상이었던 인간의 가능태들이 맨 얼굴로 존재했다면 인간으로 변신하면서는 모두 흉측한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가면의 표정은 맨 얼굴의 이면에 잔인한 인간 본성을 압축하고 있다. 토털 아트식의 알렉산더 싱의 무대는 매력적이긴 하다. 고대의 배경 위에 코미디와 디즈니, SF, 폴 매카시 스타일의 하드코어(hard-core)한 형상들이 날아다닌다. 그러나 공연에서 갤러리로, 갤러리에서 공연으로 작업의 공간을 변환하고 확장하는 것, 그리고 공연에 사용된 소품의 요소들이 전시의 작업으로 전환되어 창구의 확장을 꾀하는 것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Andro Wekua <Sneakers 1>

2008 Sculpture, wax figure, aluminum casted

table and palett, akrystal board, ceramic shoes 

150×185×100cm




전통 연희에서 ‘말뚝이’탈이 조선시대 양반을 비롯한 권력층을 비웃는 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특정 탈은 하나의 시대를 대변하는 캐릭터를 드러낸다. 오석근의 사진 연작에 등장하는 철수와 영희는 70-80년 태생들의 유년기를 상징하는 도상이다. 교과서 속 흔한 이름과 얼굴을 재현한 철수와 영희가 마주하는 세상은, 밝고 명랑한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는 누구라도 그에 연관된 자신만의 장소를 떠올릴법한 낯익은 공간들을 구성하고 그 안 어딘가에 안절부절 못하는 철수와 영희를 배치한다. 연탄 냄새가 피어오를 듯한 골목들, 검은 칠기 옷장의 이불 사이에 숨어 있던 기억, 어렴풋이 솟아오르는 성적 충동 등 작가는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기억의 장면을 재현한다. 이처럼 철수와 영희를 통해 다시 마주하게 된 장면들은 새삼스런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유년의 기억을 의식 아래 죄책감으로 묻는 대신, 모두가 공유할 만한 일들로 화해를 시키는 긍정적 역할도 한다. 한편, 어른의 몸에 씌운 철수와 영희의 커다란 탈은 인물과 공간 사이의 낯선 비율을 드러내는데, 몸에 비해 유난히 커다란 얼굴이 각각의 어두운 장면들을 가볍게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면서도 몸과 세상이 화해하지 못하는 유년기의 긴장을 강조한다.


그루지아 내전의 혼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 안드로 베쿠아(Andro Wekua)의 작품은 ‘완전히 구현될 수 없는 기억’이라는 주제를 조형을 통해 드러내고, 이것을 종종 가면과 연결한다. 여기서, 가면은 기억이라는 것이 판타지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알레고리로 사용된다. 작가는 등신대의 왁스 조형을 생산하고, 그 형상이 하나의 배우처럼 작동하기를 기대한다. 이 형상을 통해 작가 스스로는 행할 수도 없고, 실제로는 자신을 불편하게 할 만한 행동을 끌어내기를 원한다. 그것이 지칭하는 것은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한 기억의 상태다. 그의 조형의 표면은 외부 세계를 향해 안전하게 열려 있지만 그 형태가 놓인 상황은 복잡한 심리 상태를 드러낸다. 실제 사람을 본 떠 만든 2008년 작품 <스니커즈1(Sneakers 1)>은 다리가 하나 부러진 불안한 테이블 위에 올라앉은 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소녀의 형체 안에는 사람의 모습과 인형의 힌트가 동시에 들어있다. 하이퍼 리얼리즘식의 마감 대신 인형이라는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고정 나사나 절개 부분이 노출되어 있고 머리 뒤쪽에는 파란 가면이 달려 있다. 인간과 인형의 상태가 접합된 조형은 결국 사람 모습을 한 인형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보다는 어떤 불가능성, 즉 주관적인 경험과 기억은 외부와 소통될 수 없고, 세부적이면서도 동시에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Pierre Huyghe <This Is Not a Time for Dreaming> 

2004 production stills Live puppet play and super 

16mm film transferred to DigiBeta, 24 minutes, color, sound. 

Photos by Michael Vahrenwald ⓒ Pierre Huyghe, 

courtesy Marian Goodman Gallery Paris/New York




작가 자신이 직접 작품에 등장하는 대신, 자신의 대체물인 인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16밀리 영상 작품 <This is Not a Time for Dreaming(지금은 꿈 꿀 시간이 아니다)>은 창작이라는 작가의 노동과 상황에 대한 코멘트를 위해, 자신의 복제인 마리오네트를 이용한다. 작품을 의뢰 받은 공간에 대한 작가의 리서치를 바탕으로, 영상작업 안에 또 다른 인형극이 중첩되어 액자 구조의 형식을 띠는 이 작품은, 내용적으로도 자신의 이야기에 또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중첩시킨 구조다. 피에르 위그는 미국의 하버드 대학의 카펜터 센터에서의 전시를 의뢰 받으면서, 그 건물을 설계한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일화를 알게 된다. 기관과 제도의 요구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을 조정해야 했던 그의 일화는 역시 새로운 커미션을 부여받은 위그 자신의 상황과도 닮아있었다. 위그는 그 두 중첩된 상황을 다큐멘터리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자신과 르 코르뷔지에를 닮은 인형을 등장시켜 상황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확보했다. 영상은 관찰자인 작가 자신의 실제 상황과 르 코르뷔지에의 상황을 연결하면서 역사와 상상을 혼용한다. 새가 물어다 준 씨앗이 자연스럽게 건물을 푸르게 뒤덮을 것이라 상상했던 모더니스트 건축가의 꿈의 장면은 하버드라는 제도를 대변하는 검은 옷의 형상에서 좌절된다. 마리오네트를 등장시킴으로써 작가의 실제 사건들, 제도와 창작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데 고발자적 입장이 아니라 작업의 형태로 도출하면서, 그 긴장감을 조절해내는데 성공한다. 




Eleanor Antin <Const ructing Helen> 

2007 From the Cla ssical Frieze Show

at Galerie Erna Hecey in Brussels ⓒ the artist




영화에서 감독 자신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들을 표현하는 배우들을 뜻하는 말로 자주 쓰이는 ‘페르소나’라는 말의 어원 역시 가면을 뜻하는 그리스 어이다.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을 쓴 인격으로서 집단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하는 또 하나의 자아다. 현대미술에서 페르소나는 제 3자가 대행하는 대신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사진작업들처럼 종종 작가 자신의 변신을 통해서 드러난다. 1972년에서 1991년 사이 작가 엘레노어 안틴(Eleanor Antin)은 여러 성 정체성과 인종, 직업과 역사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페르소나들을 만들었고, 이들을 ‘모틀리 그룹(Motley group, 혼성그룹)’이라고 불렀다. 연극배우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역할극이 익숙했던 것과 60-70년 미국을 휩쓴 “정체성의 위기”와 관련된 논의들 그리고 작가의 성정치적 입장들이 작용했다. 모틀리 그룹은 작가의 다양한 자신들(sel ves)—옛 시대의 복장으로 거리를 오가는 실각한 왕, 망명한 영화감독 예프게니 안티노브,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 발레 뤼스의 프리마 발레리나였던 엘레아노라 안티노바, 그리고 간호사들—의 변주로 그 일원이 구성됐고, 그들의 흔적은 사진, 영상, 텍스트, 그리고 종이 인형 등의 흔적들로 남았다. 작가는 “성, 나이, 능력, 시간과 공간 등으로 정의되는 자기 정체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선택의 이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갖고자” 여러 페르소나들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가면은 그 자체의 조형성으로, 기억의 빈틈을 증명하는 상징으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제 3자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위한 장치로, 그리고 새로운 정체성의 사례들을 만들기 위한 장치로써 사용되고, 그 이상의 다양한 방법으로 변주된다. 하지만 이런 형상의 창조나 이중의 자아를 통해 행동의 해방을 꾀하거나 인간 내부의 폭력성 혹은 욕망을 표현하는 것은 더 이상 예술가들만이 구사하는 방법들은 아닌 듯하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라는 흔한 말은 현실에 편재하는 인면수심의 사례들을 반증한다. 제도, 국가, 자본과 욕망이 이미 생명을 입은 인간들에게 비인간의 탈을 강요한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도 사회적 역할이라는 명목아래 종종 잔인한 가해자의 역할을 맡는다. 가공할만한 현실 세계의 비극을 예술이 따라 잡을 수 없는데, 더 이상 어떤 의미와 상징을 생산할 수 있을지 허탈해지는 요즘이다. 최근 어설픈 수준으로 사체를 꾸미고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는 정부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보면, 국가라는 제도가 픽션의 코드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을 넘어 그들이 타겟 관객 수준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드러나 망연자실하고 만다. 



글쓴이 김해주는 독립 큐레이터로 전시를 기획하면서 틈틈이 여러 매체에 전시와 퍼포먼스에 대한 리뷰를 기고하고 있다. <Once is not enough>(시청각, 2014), <Memorial Park> (Palais de Tokyo, 2013), <모래극장>(플레이타임, 문화역서울 284, 2012)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국립극단 연구원, 백남준 아트센터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근무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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