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1. Features
  2. Special Feature
현재 위치
  1. Features
  2. Special Feature
현재 위치
  1. Features
  2. Special Feature
현재 위치
  1. Features
  2. Special Feature
Issue 98, Nov 2014

심리적 검열과 아트

psychological censorship & art

법이나 규칙으로 가늠되는 시시비비 이외에 또 다른 검열 단계가 존재한다. 바로 ‘심리적 검열’을 말하려는 것인데, 이는 삶과 관련된 모든 장르에 적용된다. 한 가지 예로, 토마토케첩으로 유명한 ‘하인즈(Heinz)’는 한때 초록색케첩을 내놨었다. 보다 신선한 토마토를 상징하며, 보편화된 케첩 시장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야심을 바탕으로 하인즈는 초록색 이외에 보라색과 파란색케첩까지 선보이며 시장을 긴장시켰다. 허나 대중은 이를 철저히 외면했고 야심차게 등장했던 초록색케첩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야했다. 시간과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사회적 기호’를 무시한 하인즈의 처사가 대중들의 심리적 검열에 걸린 것이었다. 이처럼 심리적으로 가동되는 센서십은 특히 예술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해진 룰과 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예술이기에, 심리적 잣대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까닭이다. 삶 속 사건들을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어나더뷰’에서는 20세기 후반부터 최근까지 미국 뉴욕의 사우스 브롱스의 일화를 바탕으로 미술과 심리적 검열의 관계를 살펴본다.
● 기획 · 진행 편집부 ● 글 이나연 미국통신원

존 에이헌(John Ahearn)이 만든 '레이몬드(Raymond)'. 반려견 핏불을 데리고 다니며, 후디를 쓰고 화려한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레이몬드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Share this

Save this

Written by

이나연 미국통신원

Tags

사우스 브롱스 히스토리_남에게 가닿는 일의 어려움



1988년, 조각가 존 에이헌(John Ahearn)은 살벌한 우범지대로 유명했던 사우스 브롱스의 경찰서 앞 교차로에 설치할 조각을 의뢰받는다. 흑인과 히스패닉 거주지역의 실제 주민이자 당시 꽤 성공한 백인작가였던 에이헌은  4년만인 1992년에 작품을 완성했다. 동네에 실제로 사는 인물들의 특징을 잡아 생생히 묘사한 브론즈 조각 석 점이었다. 이 작품들은 곧바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다. 이상화되지 않은 실제의 사람들을 만든 작품이 나쁜 예술인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됐다. 커뮤니티 속 주민들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이나 말콤 X(Malcolm X)의 조각을 원했다. 아니라면 최소한 졸업식 가운을 입은 아이들이나 다운타운의 중요한 직업을 가진 듯 수트를 입은 흑인 남자의 모습을 보길 원했다. 그들이 보고자한 건 범죄의 기운이 넘실대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자신들의 이웃이 아니었다. 백인 사회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다른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보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나는 현실을 굳이 조각으로까지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토마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의 

<그람시 모뉴먼트(Gramsci Monument)>. 

그람시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포레스트 하우스 지역 

주민들에게 즐겁게 어울려 놀던 기억과 함께 그 철학자를 반추하도록 한다.




웃통을 벗고 카세트플레이어에 한 발을 올린 채, 한 팔엔 농구공을 끼고 고개를 까딱하니 들고 언제든지 시비를 걸 준비가 된 듯한 모습의 코리(Corey), 배트맨 티셔츠에 레깅스를 입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팔다리가 길쭉한 달리샤(Daleesha, 그는 스케이트보드를 사준다는 말에 혹해 모델에 응했다), 반려견 핏불을 데리고 다니며, 후디를 쓰고 화려한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레이몬드(Raymond). 이들 세 명의 모습은 너무나 친숙해서 미술작품으로 보기엔 ‘낯선’ 모양이었다. 단지 커뮤니티 주민의 진짜 모습을 그려낸 것을 두고, 그들의 이미지를 정형화했다며 비난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화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이상심리. 그 심리적 검열에 걸려 에이헌은 겨우 5일 만에 조각들을 철거해야만 했다. 작가 역시 공동체에 환영받지 못한 작품은 공공미술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데 동의한 까닭이다. 공공미술이라는 것이 누구를 위한 예술이여야 하는가, 하는 화두를 남긴 의미 있는 해프닝이었다.


20년이 지나 또 다시 사우스 브롱스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뉴욕의 다른 지역에 비해 범죄율이 높고, 가난한 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이다. 토마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의 <그람시 모뉴먼트(Gramsci Monument)>는 사우스 브롱스의 포레스트 하우스에 지어졌다. 이번에도 잘나가는 작가와 가난한 커뮤니티의 만남이다. 게다가 거창한 이탈리아 철학자의 기념비를 내세운다. 이 작품 안에는 실제로 기능하는 도서관과 인터넷 카페, 라디오 스테이션, 신문사, 워크숍, 라운지와 바가 있다. 워크샵 공간에서 아이들을 위한 미술 수업이 실제로 열리고, 문학 워크샵 시간엔 실제 작가들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 그람시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은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이나 시몬 크릿츠리(Simon Critchley)의 세미나도 열린다. 그람시라는 인물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기 보단, 그람시가 자연스럽게 공기 중에 녹아들도록 하면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그들만의 그람시를 품게 하는 참으로 시적인 기념비다. 허쉬혼의 기념비는 기억을 반추하고 죽음을 기리는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기념비의 인물이 남긴 영향력을 삶 자체로 보여준다. 그람시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포레스트 하우스 지역 주민들에게 즐겁게 어울려 놀던 기억과 함께 그 철학자를 반추하도록 한다.




토마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의 

<그람시 모뉴먼트(Gramsci Monument)>. 

사우스 브롱스의 포레스트 하우스에 지어졌다. 




2013년 7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약 70여 일간 세워지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면서 이 기념비 모양을 한 커뮤니티 센터는 철거됐다. 철거 전날인 14일, 토요일, 프랭크 윌더슨(Frank B. Wilderson III)의 그람시 강연이 마지막이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컴퓨터 앞에서, 워크숍 룸에서 미술품을 만들며 마지막까지 흥을 잃지 않고 그람시의 여운을 즐겼다. 지역 주민들과 뉴욕 매체들의 평은 일시적인 기념비로서 나쁘지 않았다는 반응이었다. 허쉬혼은 지었고, 사람들은 찾아왔다. 동네사람들은 그람시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노출됐고, 낯설었던 이탈리안 철학자의 이름을 잊을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허쉬혼의 개념은 통했고, 그가 생각한 기념비로서의 역할은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뉴요커의 원로 평론가 피터 셀달은 이 작품을 두고 그 해의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었다고 추켜세웠다.


사람들 간의 의견 차나 이해관계로 일어난 여러 종류의 다툼을 해결하는 과정이 정치라면, 존 에이헌은 미술로 정치를 하는데 실패했고 토마스 허쉬혼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20년의 시간차는 문제가 아니다. 훌륭한 정치를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직관적, 혹은 합리적으로 따져 물어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상조각과 추상적 설치미술간의 차이도 아니다. 덕테이프로 얼기설기 만든 <그람시 모뉴먼트>야말로 주민들에게 철저히 외면 받을 수도 있는 생소한 설치물이었다. 여기엔 눈높이와 소통의 문제가 있다. 에이헌의 설명적인 구상작품이야말로 지역의 민심을 읽지 못한 불통의 산물이었고, 허쉬혼의 추상적 개념의 커뮤니티 센터는 지역민들과의 소통의 결과였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조건이 외부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다. 




토마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의 

<그람시 모뉴먼트(Gramsci Monument)>. 

사우스 브롱스의 포레스트 하우스에 지어졌다. 




피부색과 인종, 성별과 성 정체성,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 국가와 민족, 강대국과 약소국의 구분은 물론 종교, 교육, 계급, 소득, 언어차이에서 정치적 입장 차이까지 사람들 간의 소통을 막는 장애물은 많다. 이러한 장애가 있기에 훌륭한 조율자, 즉 정치가가 필요한 것이고, 미술은 원활한 정치의 하나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정치든 미술이든 결국 소통이라는 공통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불통이란 단어가 어느 때보다도 많이 돌아다니는 한국 사회 속에서 소통은 굳이 또 한 번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무솔리니 치하의 공산당 지도자로서 활동하다가 정치적 누명을 쓰고 체포되는 순간에 “선장은 배가 난파되었을 때 자신의 배를 떠나는 최후의 사람이어야 하며 배를 탄 모든 사람들이 무사를 확인한 후에야 배를 떠날 수 있다”면서 망명을 거절했던 이가 바로 그람시였다. 결국 가석방된 상태에서 46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그의 저서와 사상은 여전히 살아남아 많은 이들과 쉴 새 없이 소통한다. 그를 감옥에 집어넣던 검사는 “20년간 두뇌활동을 못 하도록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지만, 감옥에서 쓴 옥중서한이야말로 가장 왕성한 지적활동의 산물로 남았다. 




토마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의 

<그람시 모뉴먼트(Gramsci Monument)> 안에는 

실제로 기능하는 도서관과 인터넷 카페, 라디오 스테이션, 

신문사, 워크숍, 라운지와 바가 있다. 워크샵 공간에서 아이들을 위한 

미술 수업이 실제로 열리고, 문학 워크샵 시간엔 실제 작가들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 그람시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은 가야트리 스피박

(Gayatri Spivak)이나 시몬 크릿츠리(Simon Critchley)의 세미나도 열린다.




역사 속 집합적 인간의 의지와 실천을 강조한 그람시의 사상을 구현하는 데 있어 허쉬혼의 설치물은 과연 타당성을 가졌다. 주입식으로 사상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자발적인 참여와 그 과정에서의 자연스런 학습이 가능토록 했다. '그들만의 리그'라 불리는 난해한 현대미술에서 꽤 높은 지위를 차지한 허쉬혼치고 그 소통능력은 꽤나 낮은 곳에 임하고 있었다. 사실 남의 입장을 100% 공감하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공감지수며 EQ를 거론하며 인간관계 능력을 평가하는 지수를 만들려는 시도도 있다. 아무리 훌륭한 정신과의사라 한 들, 나와 너는 다르고 따라서 다른 이의 마음을 완전히 알기란 힘든 것이다. 애당초 불가능한 일로 보이는 소통이란, 그 어려움 덕에 가치가 있다. 그러고 보니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명언을 남긴 이도 그람시였다. 남의 마음에 가닿는 일이 불가능함을 비관하더라도, 오늘도 어느 작가들은 소통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는 낙관의 의지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글쓴이 이나연은 사실 회화과를 졸업했다. 대학원을 수료할 수 있는 기간 정도, 미술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이 후 뉴욕으로 유학을 와 미술 비평 전공으로 석사 학위 까지 땄다.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고도 누구에게도 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술을 사랑한다. 주로 최대의 노력을 쏟아 붓고 최소의 결과를 얻는 분야에 관심이 많다.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쾌감이 좋아서 뉴욕 체류 중이다. 누가 뭐래도 즐겁게 살고 싶다.

온라인 구독 신청 후 전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Subscribe 로그인 Log in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